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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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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기동은 대한제국 기병대 참교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다가 항일 의병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던 중 무기를 탈취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 양주와 포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연기우, 전성서 등과 연대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체포되어 1911년 서울 용산에서 총살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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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건국훈장 대통령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름강기동
원어 이름姜基周
출생일1884년 3월 5일
출생지대한제국 경기도 장단
사망일1911년 4월 17일
사망지일제강점기 경기도 포천
국적
직업독립운동가(의병)
상훈[[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웹사이트강기동(독립유공자 공훈록)

2. 생애

강기동은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현 서울)으로 이사하였다. 대한제국 기병대 참교(분대장급)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일어에 능통하여 경기도 양주 고안헌병분견소에서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1]

1907년 정미칠조약과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켜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강기동은 고안헌병분견소에 붙잡혀 있던 의병 2명과 함께 총기와 탄약을 탈취해 탈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1]

이후 양주(楊州), 포천을 중심으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연기우 의병부대와 밀착된 전략을 전개하였다. 1910년 2월에는 포천, 3월 6일에는 이용규 등과 영평(永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일제는 강기동에게 현상금 천 냥을 걸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원산에서 체포되어 용산에서 총살되었다.

2. 1. 초기 생애

강기동의 집안은 서울에서 살다가 부모와 가족들이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현 서울)으로 이사하였다. 강기동은 본래 대한제국 기병대 참교(분대장급) 신분이었다.[1]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일어에 능통했던 강기동은 경기도 양주 고안헌병분견소에서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1]

2. 2. 의병 활동 (1907년 ~ 1910년)

1907년 정미칠조약과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많은 지사들이 항일 의병이 되어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강기동은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던 고안헌병분견소에서 붙잡혀 있던 의병 2명과 함께 총기와 탄약을 탈취해 탈출한 후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1]

暴徒ニ關スル編冊|폭도에 관한 편책|일본어 (일본헌병대 기밀문서) 1909년 1월 17일에는 "고안헌병분견소 (헌병)보조원 강기동이 의병 2명과 함께 총 2정, 탄환 300발, 권총 1정, 총검 5정을 휴대하고 탈출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대한민국 국가보훈부의 공적조서에는 강기동이 장단 고량포 헌병보조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경기도 장단 고랑포(長湍 古浪浦) 지역의 헌병 분견소를 공격한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의병대장이 된 강기동은 주로 양주(楊州), 포천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연기우, 전성서, 이한경 등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강기동은 연기우 의병부대와 밀착된 전략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밀정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부대를 소수 정예로 편성하였다. 1908년 6월 남학서, 오수영, 임명달과 함께 격문을 띄우고 병사를 모아 대일 투쟁을 지속할 것을 맹서하였다. 1910년 2월에는 포천에서, 3월 6일에는 이용규 등과 더불어 영평(永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일제는 강기동에게 현상금 천냥을 걸었다. 4월 29일 좌군인 전성서와 함께 양주(楊州)에서, 5월 16일 양주 노원(楊州 盧原)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순사를 넘어뜨리고 피신하였다. 이후 강두필과 함께 1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강원도 일대를 넘나들었다.

2. 3. 체포 및 순국 (1911년)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의병부대 탄압 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자,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이를 피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원산에서 체포되어 서울 용산에서 총살되어 순국하였다.

3.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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