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강석봉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강석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1909년 귀국 후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신한국보를 국내에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5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19년 목포 4.8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2년형을 선고받고 피신했다가 1923년 재차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해방 후 무안군 일로읍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56년 사망 - 뤼시앵 페브르
    뤼시앵 페브르는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아날 학파를 창시하여 총체적 역사와 심성사를 개척하고 다양한 사료 활용 및 학문 간 협력을 강조하며 20세기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역사학자이다.
  • 1956년 사망 - 김창룡
    김창룡은 일제강점기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조직 색출에 참여한 군인으로,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서 정보 및 방첩 업무를 담당하며 숙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특무부대장으로서 인권 침해 및 사건 조작 의혹, 김구 암살 사건 연루 의혹 등 각종 논란 속에 암살당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강석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6년(47세)경의 강석봉
1936년(47세)경의 강석봉
이름강석봉
출생일1890년 9월 23일
출생지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사망일1956년 10월 14일
사망지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직업한국의 독립운동가
조선국민회 활동
목포의 4·8 만세운동 주도
종교기독교
배우자오석경
자녀(아들)종천, 종수, 종산 (딸) 복순 소순, 은순,청자, 금랑 (손자) 경수, 정훈 (손녀) 해선 해령, (외손자) 조영진, 조무부, 조영민 (외손녀) 조희숙, 조명숙 (진외증손자-강소순의 손자) 조효성, 조효천 (진외고손자-강소순의 증손자) 조찬양, 조영광, 조아인, 조성민
친척조카 한규철

2. 생애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3]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4]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 즉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5] 활약하였다.[6] 1909년(?) 귀국하여서는,[7]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김형직·백세빈·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8]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9] 김형직[10]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11]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2]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배치문·곽우영·서화일·박여성·박복영·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13]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목포4.8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과 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14]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15] 해방될 때까지 현 신안군인 선도에 연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16] 해방 후는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에서 여생을 마쳤고, 묘지는 청호리에 있다가,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86년에는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높여 추서받았다.

2. 1. 하와이 이주와 초기 항일 운동 (1905년 ~ 1909년)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3]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4]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 즉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5] 활약하다가, 1909년 귀국하여 항일무장기독교단체인 조선국민회와 목포4.8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6] 귀국 후에는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7]

2. 2. 귀국과 국내 항일 운동 (1909년 ~ 1919년)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3]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4]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 즉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5] 활약하였다.[6] 1909년 귀국하여서는,[7]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의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김형직·백세빈·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8]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9] 김형직[10]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11]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2]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배치문·곽우영·서화일·박여성·박복영·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13]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1919년 목포4.8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6]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과 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2. 3. 목포 4.8 만세운동 주도 (1919년)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3]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4]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5] 활약하였다.[6] 1909년(?) 귀국하여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7]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의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 김형직, 백세빈, 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8]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9] 김형직[10] 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11]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2]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 배치문, 곽우영, 서화일, 박여성, 박복영, 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13]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 참여하였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14]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15]

2. 4. 체포와 투옥 (1923년)

강석봉은 1915년 3월 장일환(張日煥), 배민수(裵敏洙)·김형직(金亨稷)·백세빈(白世彬)·이보식(李輔植),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8]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間島)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9]) 김형직[10]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11]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2]

1918년 출옥후 그는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참여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은후 4년간 피신하였다. 1923년 1월 대구(大邱)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14]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15]

2. 5. 해방 이후 (1945년 ~ )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3]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4]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5] 활동하였다.[6] 1909(?)년 귀국하여서는,[7]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김형직·백세빈·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8]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9] 김형직[10]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11]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12]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배치문·곽우영·서화일·박여성·박복영·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13]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목포4.8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과 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14]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15] 해방될 때까지 현 신안군인 선도에 연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16] 해방 후는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에서 여생을 마쳤고, 묘지는 청호리에 있다가,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86년에는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높여 추서받았다.

3. 서훈

참조

[1] 웹사이트 한규철홈페이지 http://prof.ks.ac.kr[...]
[2] 웹사이트 강석봉(姜錫奉) http://encykorea.aks[...]
[3] 웹사이트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수형인명부 http://theme.archive[...]
[4] 간행물 하와이이민과 한국교회 한국교회와 역사16 2002
[4] 간행물 구한말 하와이 이민자의 이민 전 거주지 연구 교육문화연구9 2003
[5] 문서 하와이에서의 활동은 조사미비 내지 자료부족으로 알 수 없으나 귀국후의 활동과 전언으로 미루어 보아 하와이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다(1907년 하와이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하와이 한인협성협회로 결합). 1909년부터는 하와이 한인협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1905.4)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여, 하와이 한인 협성협회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이 되었다. 그가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에서 회장도 하였다는 전언이 있는데, 하와이협성협회의 회장이든 그 이전 어떤 하와이독립운동단체의 회장이 아니었던가 한다. 귀국때까지는 하와이로 와서 활동하기 시작한 박용만, 이승만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 즉 하와이국민회에서도 같은 활동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6] 문서 일제의 불령선인 관련 보고에 의해 그가 전하와이국민회원(元布哇國民會員姜錫)이었다고 하고 메이지 42년(1909) 귀국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하와이협성협회에서의 활동은 거의 확실하고, 하와이국민회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조선국민회 결성과정에서 회장이 된 장일환이 제일 먼저 강석봉을 찾아 조적결성을 모의하였던 것은 박용만계의 하와이국민회가 매개가 되어 활동하였다고 여겨진다.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1918) 참조
[7] 문서 귀국연대에 대해 일제의 불령선인 관련 보고는 메이지 42년(1909) 귀국하였다고 한다.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1918) 참조) 그러나 강석봉의 진술에 의해 작성되었을 이 내용은 장일환 등과의 관련성을 적게 하기 위한 진술일 수도 있어 정확한 귀국연대인지는 불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른 하와이 이주민들과 달리 하와이 생활을 정리하고 부친과 귀국한 사정은 모르나 하와이로 함께 가지 않았던 어머니가 상업활동을 통해 목포에서의 생활도 부유해지고 해서 귀국을 종용하였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귀국하였다고 여겨진다. 어머니는 상업활동을 크게 번성시켜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에 경작지도 많이 구입하고 부유하게 되었고 강석봉의 독립운동과 옥바라지 등을 뒷받침하다가 가문이 쇠락하였다고 한다.
[8] 문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최초였던 기독교 무장항일단체였다.
[9] 간행물 배민수자서전 연세대출판부 1999
[10] 문서 김일성주석의 아버지. 1918년 출옥한 뒤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중강진으로 피신하여 지역 3ㆍ1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 1월 경찰에 체포된 후 중국 지린성 푸송(撫松)현에서 정의부(正義府)계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과 연계ㆍ활동하다 1926년 6월 5일에 공산주의 집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시 대동군에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근교에 안장되었다.
[11] 문서 재판기록은 없고 수형인명부, 집행원부, 형사사건부만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 배민수의 자서전에는 강석봉과 함께 했던 감방생활에서의 에피소드도 기록되어 있다
[12] 서적 現代史資料 みすず書房 1967
[13] 문서 출옥 후 그는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강호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 같다.(정명100년사) 그는 정명여학교 만세운동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는데, 이 때의 한문교사가 곽우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4] 문서 어느 여인과 함께 대구에서 피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15] 문서 출옥 후 그가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 가입되어, 1927년 8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고도 하나(보훈처 공훈록), 이 때의 강석봉은 광주에서 공산당 활동을 한 강석봉이었다고 본다. 1927년 8월 14일 2면
[16] 문서 딸 강복순이 전하기로 자유의사가 아닌 상태에서 선도에 있었다고 하나, 연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섬 생활시에도 눈을 피해 일로면 청호에도 들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