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시앵 페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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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시앵 페브르는 프랑스의 역사학자로, 1878년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그는 고등사범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지리학자 폴 비달 드 라 블라슈의 영향을 받아 역사학 연구를 시작했다. 페브르는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역사학 잡지 《경제사회사연보》를 창간하고, 이를 통해 아날 학파를 이끌었다. 그는 랑케의 문헌 중심 역사 연구를 비판하며, 통계학, 지리학, 경제학 등을 도입한 사회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의 연구는 총체사, 심성사, 문제사 등의 개념을 통해 한국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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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페브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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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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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시앵 폴 빅토르 페브르 |
로마자 표기 | Lusyaeng Pol Biktor Pebeureu |
출생일 | 1878년 7월 22일 |
출생지 | 낭시, 프랑스 |
사망일 | 1956년 9월 11일 |
사망지 | 생타무르, 프랑스 |
직업 | 역사학자 |
학력 | 고등사범학교 |
알려진 업적 | 아날 학파 설립 |
자녀 | 3명 |
경력 | |
근무지 | 디종 대학교 |
2. 생애
뤼시앵 페브르는 1878년 프랑스 동부 낭시에서 태어나 1899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와 지리학을 공부했다. 1911년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12년 디종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4년간 군 복무를 하며 교단을 떠났다.[7]
1919년 알자스-로렌이 프랑스에 귀속되면서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2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마르크 블로크를 만나 함께 ⟨경제사회연보(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를 창간했다.
1922년 『대지와 인류의 진화 – 역사에 대한 지리학적 서론 –』 ''La Terre et l’Évolution Humaine, Introduction Géographique à l’Histoire''을 발표했다. 이 책은 지리학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는데, 이미 환경결정론에서 환경가능론으로의 전환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9]
1929년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경제사회연보』 ''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이후 여러 차례 제호를 변경했기 때문에, 총칭하여 '''『아날』'''이라고 불린다.
1933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 백과사전≫의 편집자로 참여하여 철학자 앙리 베르와 함께 학문적 ‘종합’을 실천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마르크 블로크는 1944년 총살당했다.
페브르는 1956년 생타무르에서 사망할 때까지 ⟨아날⟩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며 페르낭 브로델 등 후학 양성에 힘썼다. 말년에는 고등연구실습원[10] 제6부(경제 및 사회)[11] 설립에 참여하여 역사학 및 주변 학문 분야의 연구 진흥에 기여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뤼시앵 페브르는 1878년 7월 22일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언어학자로, 페브르에게 고대 텍스트와 언어 연구를 소개해 그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7] 20세에 페브르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역사와 지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당시 주류 역사학의 자료 비판에만 매달리는 실증주의적 경향에 회의를 느껴 문학을 공부하기도 했다.[7]졸업 후에는 지리학자 비달 드 라 블라슈의 영향을 받아 다시 역사학 연구에 관심을 돌렸다.[7] 1911년, 페브르는 스페인의 필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를 주제로 한 논문, 『필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 정치·종교·사회사 연구』를 집필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7] 이 논문은 프랑슈콩테의 역사를 정치, 종교, 사회의 총체적인 측면에서 기술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2. 2. 학문적 발전
1878년 7월 22일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났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재학 시절(1899년~1902년) 처음에는 역사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자료 비판에만 매달리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지리학자 비달 드 라 블라슈의 영향을 받아 다시 역사학 연구에 관심을 돌렸다.[7]1911년 논문 『필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 정치·종교·사회사 연구』를 집필하여 프랑슈콩테의 역사를 정치, 종교, 사회의 총체적인 측면에서 기술하여 높이 평가받아 학위를 취득했다.[7]
1922년 『대지와 인류의 진화 – 역사에 대한 지리학적 서론 –』 ''La Terre et l’Évolution Humaine, Introduction Géographique à l’Histoire''을 발표하여 역사학과 지리학, 사회학 등 주변 학문 분야와의 연관성을 주장했으며, 이 시기에 동료인 마르크 블로크와 '''“살아있는 역사학”'''의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같은 책에서 프리드리히 라첼을 환경결정론자, 비달 드 라 블라슈를 환경가능론자로 지칭하며[7] 환경결정론을 부정하고 환경가능론을 정당화하려 했다.[8]
2. 3. 아날학파 창립
1929년,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학술지 《경제사회연보(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 일반적으로 Annales로 알려짐)》를 창간했다.[7] 이 학술지는 기존의 정치사 중심 역사학에서 벗어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 새로운 역사 연구를 제시했으며,[7] '아날학파'로 불리는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이 학술지는 미래의 경제적, 정치적 재앙을 피하기 위해 구세대 사고방식의 위험성에 대해 세계에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7] 과거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현재를 연구하도록 학계에 영향을 미쳤다.[7]Annales는 매우 호의적인 비평적 평가를 받았고 초기 몇 년 동안 매우 성공적이었다.[7] 수요가 많아 1932년 출판 빈도를 높일 수 있었다.[7] 그러나 1938년에는 학술지가 폐간될 위기에 처했고 출판사는 지원을 중단했다.[7]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페브르의 연구 활동은 중단되었고, 프랑스의 일부 지역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0] 나치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동료 마르크 블로크는 나치 정권에 의해 총살당했다.(1944년)[11]나치 정권은 독일의 인종 정책에 따라 프랑스 편집위원회에서 유대인들을 제거했다. 블로흐는 이에 불복종할 것을 주장했지만, 페브르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Annales'를 존속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는 학술지가 폐간되지 않고 프랑스의 지적 삶이 유지되도록 타협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었다. 블로흐는 어쩔 수 없이 'Annales'의 편집권을 페브르에게 넘겨주었고, 페브르는 학술지의 이름을 'Mélanges d'Histoire Sociale'로 변경했다. 블로흐는 필명인 마르크 푸제르(Marc Fougères)로 글을 써야 했다.
그러나 페브르의 열정은 쇠퇴하지 않았고, 전후에도 『아날』을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하며 페르낭 브로델 등 역사학자들에게 활동의 장을 제공하고 활발하게 토론을 나누었다. 말년에는 고등연구실습원[10] 제6부(경제 및 사회)[11] 설립에 참여하여 역사학 및 주변 학문 분야의 연구 진흥에 기여했다.
3. 역사 연구 방법론
페브르는 레오폴트 폰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며, 문헌 사료뿐만 아니라 시, 회화, 희곡, 고고학적 사료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는 '살아있는 역사학'을 주창했다. 그는 통계학, 지리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고, 농업사, 기술사, 출판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학제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9년, 페브르는 「르뷔 이스토리크(Revue Historique)」에 발표된 〈잘못 제기된 질문(Une question mal posée)〉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다루며, 인간 행동을 관찰하고 정량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대중 종교를 연구했다. 그는 여러 수도원과 예배당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종교에 대한 새로운 사조의 영향과 성직자들이 평신도에게 그들의 견해를 이해하고 전달하는 방식을 연구함으로써 민족학 분야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페브르는 신학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고, 종교와 낡은 사고방식이 현대 사회에서 비실용적이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견해에 이르렀다. 그는 사람들이 낡은 사고방식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1929년, 페브르는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학술지인 《경제사회연보》(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 일반적으로 Annales로 알려짐)를 창간했다. 이 학술지는 미래의 경제적, 정치적 재앙을 피하기 위해 구세대 사고방식의 위험성에 대해 세계에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3. 1. 총체사(histoire totale)
페브르는 개별 사건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지리적, 심리적, 문화적 배경을 함께 고려하는 '총체사'를 추구했다. 그는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에서 프랑슈콩테 지역의 지리, 환경, 주민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프랑슈콩테의 강, 소금 광산, 포도원 등 주변 환경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프랑스 정부가 이 지역의 삶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까지 밝힐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접근 방식은 "총체사(histoire totale)" 또는 "histoire tout court"로 알려져 있으며, 훗날 아날 학파의 모범이 되었다.페브르는 레오폴트 폰 랑케가 확립한 문헌사료주의를 비판하며, 통계학, 지리학, 경제학 등을 도입한 사회학적 방법을 통해 문헌 사료의 의미를 재검토하고, '살아있는 역사학'을 주장했다. 또한 고문서 등의 문헌 사료뿐만 아니라, 시, 회화, 희곡, 고고학적 사료 등도 광의의 사료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농업사, 기술사, 출판사 등의 테마사에서 주변 영역 학문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경제사에서는 정치사뿐만 아니라 화폐가치의 변천을 중시하고 통계학적 방법을 도입했다. 예술학, 심리학, 문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회화와 문학을 사료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학문의 방법을 유연하게 활용하여 대상 시대의 '심성'을 포괄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페브르는 자신의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사료로부터 얻은 가설을 구성하면서 대상 테마를 파고들어 재구성하는 테마사 또는 문제사를 제창했다.
3. 2. 심성사(Histoire des mentalités)
페브르는 인간의 심성과 정신세계를 역사 연구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는 심성사(心性史)를 제창했다. 그는 프랑수아 라블레와 같은 뛰어난 인물도 당대 시대정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주며, 집단적 심성과 신념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 3. 문제사(histoire-problème)
페브르는 자신의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사료로부터 얻은 가설을 구성하면서 대상 테마를 파고들어 재구성하는 테마사 또는 문제사를 제창했다. 이는 19세기 랑케가 독일 통일의 나쇼날리즘 분위기 아래에서 정치사·외교사·전쟁사적 측면이 강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4] 페브르는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 심성의 진화와 역사에서의 묘사에 강한 의문을 품고, 역사를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정의하고 역사가의 역할을 문제 제기하는 것으로 규정했다.[4]4. 주요 저작
- La Terre et l'évolution humaine : introduction géographique à l'histoire|지리학적 관점에서 본 역사프랑스어 (리오넬 바타용(Lionel Bataillon)과 공저, 1922년, 런던 1925)[1]
- Un destin. Martin Luther|마르틴 루터, 한 운명프랑스어 (1928년, 뉴욕 1929)[2]
- Une Question Mal Posée|잘못된 질문프랑스어 (1929)[3]
- Le Rhin: Problèmes d'histoire et d'économie|라인강: 역사와 경제의 문제들프랑스어 (알베르 드망종(Albert Demangeon)과 공저, 1935년)
- Le problème de l'incroyance au 16e siècle : la religion de Rabelais|16세기 불신앙의 문제: 라블레의 종교프랑스어 (1942년, 비아트리스 고틀립(Beatrice Gottlieb) 번역, 하버드대학교 출판부: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 런던, 1982)[4]
- L'apparition du livre|책의 출현: 1450-1800년 인쇄의 영향프랑스어 (앙리-장 마르탱(Henri-Jean Martin)과 공저, 1958년, 런던 1976)[5]
- 새로운 종류의 역사|새로운 종류의 역사프랑스어 (선정된 에세이, 1973)[6]
- 『大地와 인류의 진화: 역사에 대한 지리학적 서론』 (원저 1922년, 이와나미 문고 구판, 1941년)[12], 이와나미 문고 전후(개역판), 1971-1972년
- 『마르틴 루터: 하나의 운명』 (원저 1928년, 기리스트 신문사(キリスト新聞社) 출판사업부, 2001년)
- 『프랑수아 라블레의 종교: 16세기의 불신앙 문제』 (원저 1942년, 호세이 대학 출판국(法政大学出版局) 총서・우니벨시타스(叢書・ウニベルシタス), 2003년)
- 『역사를 위한 투쟁』 (원저 1953년, 창문사(創文社), 1977년, 평범사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1995년)
- 『책의 출현』 (원저 1958년, 치쿠마 쇼보(筑摩書房), 1985년, 치쿠마 가쿠게이 붕고(ちくま学芸文庫), 1998년)
- 알랭 코르뱅(アラン・コルバン)⋅조르주 뒤비(ジョルジュ・デュビー) 공저, 『감성의 역사』 (후지와라 서점(藤原書店), 1997년)
- 『프랑스 르네상스의 문명: 인간과 사회의 네 가지 이미지』 (창문사(創文社), 1981년, 치쿠마 가쿠게이 붕고(ちくま学芸文庫), 1996년)
- 『미슐레와 르네상스: 「역사」의 창시자에 관한 강의록』 (후지와라 서점(藤原書店), 1996년)
- 『“유럽”이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연속 강의에서』 (도수 서방(刀水書房), 2008년)
- 총서 『아날 1929-2010』 역사의 대상과 방법 (후지와라 서점(藤原書店), 2010년 11월-2011년 6월)
5. 한국 역사학계에 미친 영향
뤼시앵 페브르와 아날학파의 역사 연구 방법은 한국 역사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총체사, 심성사, 문제사 등의 개념은 한국 역사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니노미야 히로유키, 후쿠이 켄이치, 이케가미 슌이치 등 일본 역사학자들을 통해 그의 사상이 소개되었으며, 그의 저작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페브르의 역사 연구 방식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학문적 성과를 통해 사회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 Geographical Introduction to History by Lionel Bataillon, Lucien Febvre, 1925
https://web.archive.[...]
[2]
서적
Martin Luther: A Destiny
https://books.google[...]
E.P. Dutton & Company, Incorporated
1929-01-01
[3]
서적
Une question mal posée
https://books.google[...]
F. Alcan
1929-01-01
[4]
서적
The Problem of Unbelief in the Sixteenth Century: The Religion of Rabelai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01-01
[5]
서적
The Coming of the Book: The Impact of Printing 1450–1800
https://books.google[...]
Verso
1976-01-01
[6]
서적
A New Kind of History: From the Writings of Lucien Febvre
Routledge and Kegan Paul
1973-01-01
[7]
간행물
7페이지
1990
[8]
간행물
37 - 38페이지
2005
[9]
간행물
76페이지
1975
[10]
웹사이트 # 추정
[[パリ大学]]의 대학원 부서에 해당
[11]
웹사이트 # 추정
부서 설립은 1947년. 이후 1975년에 독립하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이 됨.
[12]
웹사이트 #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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