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문왕은 신라의 제48대 왕으로, 혜강왕의 손자이자 김계명의 아들이다. 헌안왕의 딸 문희왕후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반란과 역병, 기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국내적으로는 호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875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경문왕 - 당나귀 귀 설화
당나귀 귀 설화는 권력자의 비밀스러운 약점과 진실을 숨기기 어려운 상황을 다루는 고대 이야기로, 권력의 허약함과 진실의 중요성을 다양한 문화권에서 강조하며 대중문화 콘텐츠로 재해석되고 있다. - 875년 사망 -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는 로타르 1세의 아들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려 노력했으나 동생과의 갈등, 포로로 잡히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서프랑크의 카를 2세가 황제관을 차지했다. - 875년 사망 - 에위스테인 올라프손
에위스테인 올라프손은 9세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활동한 인물로, 875년 알반에게 살해되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를 붉은 토르스테인과 동일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 846년 출생 -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는 샤를 2세의 아들이자 말더듬이로 불린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귀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며 왕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 846년 출생 - 롤로
롤로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활동한 바이킹 지도자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창건자로, 서프랑크 왕국과 생클레르쉬르에프트 조약을 맺어 노르망디 지방을 할양받고 공작으로 서임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 경문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김응렴 또는 김의렴 |
| 칭호 | 국왕 |
| 원어 표기 | 景文王 (경문왕) |
| 로마자 표기 | Gyeongmun Wang |
| 신상 정보 | |
| 출생 | 846년 |
| 사망 | 875년 8월 16일 (29세)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김계명 |
| 어머니 | 광의왕태후 박씨 |
| 배우자 | 문의왕후 김씨, 차비 김씨 |
| 자녀 |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
| 형제자매 | 김위홍, 단의장옹주 |
| 재위 정보 | |
| 즉위 | 861년 3월 14일 |
| 퇴위 | 875년 8월 12일 |
| 전임자 | 헌안왕 |
| 후임자 | 헌강왕 |
| 기타 정보 | |
| 왕조 | 신라 |
| 묘호 | 없음 |
| 시호 | 경문대왕 |
| 능묘 | 구정동 방형분 (추정) |
2. 생애
경문왕은 혜강왕의 손자이자, 집사성의 시중(侍中)이었던 이찬 김계명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신무왕의 딸인 광화부인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18세에 화랑의 국선이 되었다.[1]
경문왕의 치세는 내부 갈등과 반란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866년에는 이찬 윤흥과 그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868년에는 이찬 김예 등이 반란을 꾀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3][4]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문왕은 왕국을 강화하려 노력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86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그의 딸 진성여왕은 나중에 신라의 51대 왕이자 887년에 마지막으로 재위한 여왕이 되었다.
2. 1. 즉위 과정
경문왕은 헌안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은 경문왕(응렴)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으며,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맏딸인 문희왕후와 결혼하였고, 이후 헌안왕의 둘째 딸도 왕비로 맞이하였다.[2]경문왕의 치세는 내부 갈등과 반란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866년에는 이찬 윤흥과 그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868년에는 이찬 김예 등이 반란을 꾀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3][4]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문왕은 왕국을 강화하려 노력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86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2. 1. 1. 헌안왕과의 만남과 혼인
경문왕은 혜강왕의 손자이자, 집사성의 시중(侍中)이었던 이찬 김계명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신무왕의 딸인 광화부인이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문왕은 18세에 화랑의 국선이 되었다.[1] 860년, 경문왕은 15세(《삼국사기》) 또는 20세(《삼국유사》) 때 연회에서 자신의 여행에 대한 보고를 한 후 헌안왕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헌안왕은 젊은 화랑에게 자신의 두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기회를 주었다. 세 가지 상서로운 일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한 한 불교 승려의 조언에 따라 경문왕은 덜 매력적이고 나이 많은 딸인 문희왕후와 결혼했다. 세 가지 상서로운 혜택은 그가 헌안왕과 그의 왕비를 기쁘게 할 것이며, 왕위에 헌안왕의 뒤를 이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더 어린 딸인 정화부인을 첩으로 얻을 것이라는 점이었다.[2]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안왕기에 따르면, 헌안왕 4년(860년) 9월,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과 회합을 할 때, 왕족 응렴(경문왕)은 15세의 나이로 회합에 참석하여 앞쪽에 앉아 있었다. 헌안왕이 응렴의 뜻을 시험하기 위해 "선인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응렴은 "신분이 높은 문벌의 자제임에도 사람을 만날 때에는 말석에 있으려 하는 사람, 부유하면서도 헐한 옷을 입는 사람,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 이 세 사람이 선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헌안왕은 응렴의 뛰어난 자질에 감탄하여, 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려 했다. 20세의 언니와 19세의 여동생 중 누구를 아내로 맞이할지 묻자, 응렴은 정중하게 예를 표할 뿐 언니나 여동생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물러갔다. 응렴이 이 일을 부모님과 상의하자 부모는 "여동생의 용모가 더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으니, 여동생을 아내로 맞는 것이 좋겠다"라고 권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응렴은 흥륜사의 승려에게 상담했는데, 그 승려는 "언니를 아내로 맞이하면 세 가지 이득이 있고,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면 세 가지 손실이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결국 응렴은 자매 중 누구를 선택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헌안왕에게 "왕의 명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왕은 언니(녕화부인)를 하가시켰다.
즉위한 경문왕은 녕화부인의 여동생을 다음 왕비로 맞이했다. 후에 흥륜사의 승려를 만나 "언니를 아내로 맞이한 경우의 세 가지 이득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승려는 "헌안왕의 뜻에 들어 총애를 받게 된 것이 그 하나, 그 결과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둘, 그리고 용모가 뛰어난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셋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경문왕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유사』 기이·경문대왕조에도 전해지는데, 헌안왕과의 대화가 있었던 연회 때, 응렴은 20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 가지 이득을 말한 것은 범교사라는 사람이며, 후일 세 가지 이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경문왕은 범교사에게 대덕의 지위와 금 130냥을 하사했다고 한다.
2. 2. 즉위 초반 (861년 ~ 866년)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의 형제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경문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다.[3] 이들은 김균정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지지했다.865년 4월, 경문왕은 당나라 황제 의종에게서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시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開府儀同三司・検校太尉・侍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上柱国・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왕비, 왕태자, 대재상, 소재상에게도 하사품이 있었다.
2. 3. 호족의 반란과 진압 (866년 ~ 874년)
경문왕 재위 중반부터 호족들의 반란과 왜구의 침입이 잇따랐다. 866년, 868년, 874년에 걸쳐 이찬 윤흥, 김예, 김현, 근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다.[1][3][4] 이는 문성왕 때보다 왕권의 통제력이 কিছুটা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경문왕은 각지에 병력을 보내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호족을 감시하고 왜구를 토벌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2. 3. 1. 윤흥의 난 (866년)
866년 10월, 이찬 윤흥(允興)과 그의 남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반역을 꾀했다.[3] 사전에 발각되어 윤흥 일당은 대산군(경상북도 성주군)으로 도주했지만, 포박되어 참형당하고 그 일족은 몰살되었다.[3] 윤흥과 그의 형제들은 김균정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지지했다.[3]2. 3. 2. 김예, 김현의 난 (868년)
868년 1월 이찬 김예, 김현(金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3][4]2. 3. 3. 근종의 난 (874년)
866년 10월 이찬 윤흥(允興)과 그 남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반역을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윤흥 일당은 경상북도 대산군(岱山郡)으로 도주했지만, 포박되어 참형당하고 그 일족은 몰살되었다.[1] 868년 1월에는 이찬 김예(金鋭), 김현(金鉉)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1] 874년 5월 이찬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까지 쳐들어왔으나 경문왕은 근위병을 파견해 반란군을 격파하고 근종은 거열형으로 처벌했다.[1]2. 4. 치세 후반 (870년 ~ 875년)
870년에는 경주에 지진과 홍수가 발생했고, 그해 겨울에는 역병이 다시 유행하였다. 873년에도 기근과 역병이 발생하여 왕은 백성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며 구제에 힘썼으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역병 등의 재앙과 함께 귀족층의 반란이 잇따르는 상황이 벌어졌다.[10]874년 5월에는 이찬 근종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까지 쳐들어왔으나, 왕이 근위병을 보내 격파하고 도주한 근종 일당을 거열형에 처했다.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통제력이 약화되었던 문성왕 때에 비하면, 경문왕 대에는 왕권이 다소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15년째인 875년 7월 8일에 경문왕이 사망하였다. 매장지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2. 4. 1. 대외 관계
865년 4월, 당나라 의종은 경문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시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開府儀同三司・検校太尉・侍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上柱国・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10] 이때 경문왕뿐만 아니라 왕비, 왕태자, 대재상, 소재상에게도 하사품을 내렸다.[10]869년 7월, 경문왕은 왕자 김윤(金胤)을 당나라에 보내 말 2마리, 사금 100냥, 은 2백 냥 등 다양한 물품을 바쳤다.[10] 이때 이동(李同)을 김윤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학업을 돕고 서적 구입 비용으로 은 3백 냥을 하사하였다.[10] 870년 2월에는 사찬 김인(金因)을 당나라에 숙위시켰고,[10] 874년에는 희종으로부터 선유사를 받는 등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10]
864년 4월에는 일본에서 국사를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본 측 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10]
2. 5. 사망
875년 8월 16일(음력 7월 8일)에 경문왕은 재위 15년 만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경문왕이다.[1]3. 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증조부 | 김헌정(金憲貞) | 후일 익성왕(翌成王)으로 추존 |
| 증조모 | 포도부인(包道夫人) | 후일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존 |
| 조부 | 희강왕 | |
| 조모 | 문목왕후(文穆王后) | |
| 외조부 | 신무왕 | |
| 외조모 | 정계부인(貞繼夫人) | 정종태후(定宗太后)로 추봉 |
| 아버지 | 김계명(金啓明) | |
| 어머니 | 광화부인(光和夫人) | 신무왕의 딸 |
| 왕비 | 문의왕후 김씨(文懿王后 金氏) | 헌안왕의 큰 딸, 841년 ~ 870년 |
| 장남 | 김정(金晸) | 866년 태자 책봉, 875년 제49대 헌강왕 즉위 |
| 며느리 | 의명부인 김씨(懿明夫人 金氏) | |
| 손자 | 김요(金嶢) | 897년 제52대 효공왕 즉위 |
| 차남 | 김황(金晃) | 886년 제50대 정강왕 즉위 |
| 장녀 | 김만(金曼) | 887년 제51대 진성여왕 즉위 |
| 차비 | 차비 김씨(次妃 金氏) | 헌안왕의 둘째 딸, 842년 ~ ? |
| 동생 | 김위홍(金魏弘) | 혜성왕(蕙成王)으로 추봉 |
| 동생 | 단의장옹주 |
헌안왕은 아들이 없어, 사위인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 경문왕은 헌안왕의 두 딸과 결혼하였는데, 첫째 왕비는 문의왕후 김씨이고, 둘째 왕비는 차비 김씨이다.[1] 문의왕후는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을 낳았다.[1]
4. 설화
경문왕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등장인물이자,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특이한 습관을 가진 왕으로 묘사된다.[17] 미다스의 귀와 유사한 이야기도 전해진다.[5]
4. 1. 당나귀 귀 설화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등장인물로도 알려져 있으며, 삼국유사에 따르면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17]《삼국유사》에는 경문왕에 대한 미다스의 귀와 유사한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5] 경문왕의 귀는 당나귀처럼 길고 컸는데, 왕은 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이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가 왕의 귀가 길고 크게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함구한 나머지 너무 답답해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경주 남쪽의 대나무밭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이후 그 대나무밭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에 화가 난 경문왕은 그 대나무밭의 대나무를 모조리 베게 했다. 그 뒤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신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왕은 귀가 긴 것에 신경을 쓰다가 결국 근심으로 몸져눕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경문대왕조에도 미다스 왕의 전설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매우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11] 경문왕이 즉위한 후,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 당나귀 귀가 되었다. 왕비나 궁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왕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이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장인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죽기 직전에 도림사의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나무 숲으로 가서, 대나무를 향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를 내게 되었다. 이를 괴롭게 여긴 왕은 대나무를 베어내고 산수유[12]를 심게 했더니, 바람이 불어도 "임금님 귀는 길다"라고만 들리게 되었다.
4. 2. 뱀과 함께 잠든 왕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며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17] 그의 귀는 당나귀처럼 길고 컸는데, 이를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이발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머리를 깎으며 왕의 귀가 길고 크게 된 것을 알게 된 이발사가 이를 함구한 나머지 너무 답답해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경주 남쪽의 대나무밭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이후 그 대나무밭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에 화가 난 경문왕은 그 대나무밭의 대나무를 모조리 베게 했다. 그 뒤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신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왕은 귀가 긴 것에 신경을 쓰게 된 나머지 근심하다가 결국 몸져눕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경문대왕 조에는 경문왕과 뱀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 경문왕의 침전에는 해 질 녘이 되면 무수한 뱀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징그럽게 여겨 뱀을 쫓아내려 하자, 경문왕은 "나는 뱀이 없으면 편안히 잠들 수 없으니,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말했고, 왕이 잠들 때 뱀들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
5. 평가
경문왕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하게 내리기 어렵다.
6. 경문왕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2]
논문
Blaming the Victim: Reconsidering Queen Chinsŏng and the Decline of Silla
https://www.academia[...]
2020-01-01
[3]
논문
The Allegory of King Kyŏngmun in the Samguk yusa
https://muse.jhu.edu[...]
2020
[4]
웹사이트
김예
https://www.doopedia[...]
2023-12-22
[5]
뉴스
The King Has Donkey Ears!: Even bamboo trees can't keep secrets
https://www.korea.ne[...]
2014-11-06
[6]
문서
『三国史記』新羅本紀・景文王紀の分注には凝廉ともいう。また、新羅本紀・真聖女王即位紀には、崔致遠の『文集』第二巻「謝追贈表」を引用して、景文王の諱を凝廉(ぎょうれん)と記している。
[7]
문서
『三国遺事』王暦では父を啓明角干(1等官)とする。また、『三国史記』新羅本紀では景文王の6年(866年)に、亡父啓明を追封して懿恭大王とした。『三国遺事』王暦では義恭大王(或いは、懿恭大王)とする。
[8]
문서
『三国史記』新羅本紀の分注では光義夫人とも記す。また、866年に王母「朴氏」を光懿王太后に追封したとする。『三国遺事』王暦では、第45代神武王の娘の光和夫人としている。王母の姓が朴氏と記されることについては、唐に対して同姓不婚を憚ったものである。哀荘王の脚注も参照。
[9]
문서
『三国史記』新羅本紀では、866年に文懿王妃とされたとする。『三国遺事』王暦では文資王后と記される。
[10]
문서
井上訳注1980 p.385 注13
[11]
문서
日本では明治38年に帝国大学(現東京大学)教授坪井九馬三により紹介され有名になり、高木敏雄や南方熊楠などが言及する。
[12]
문서
金思燁はこの山茱萸に対して「わかはじかみ」の読みをつけている。→金訳1997 p.155
[13]
문서
민애대왕석탑사리호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
[14]
문서
삼국유사에는 841년생으로 나와있지만 대다수의 학계에서는 즉위 당시 나이를 15세로 보고 846년생으로 본다.
https://pncc.pusan.a[...]
[15]
문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서는 건부(乾符) 3년 876년 봄에 선대왕(경문왕)이 편찮아서 낭혜화상을 부른 것으로 876년까지는 살아있었다고 나와 있다.
https://db.history.g[...]
[16]
간행물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17]
뉴스
대나무 숲에서 정의를 외치다
http://www.nocutnews[...]
노컷뉴스
2012-09-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