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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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부흥운동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벌인 일련의 움직임들을 일컫는다. 주요 부흥운동으로는 해서지방, 호남지방, 요동반도에서 일어난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해서지방에서는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의 지원을 받았으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호남지방에서는 안승이 보덕왕으로 봉해졌으나, 신라의 통제에 반발한 대문의 난으로 멸망했다. 요동반도에서는 보장왕이 부흥 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고구려 유민들은 발해를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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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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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 |
장소 | 해서 지방, 호남 지방, 요동반도 등 |
날짜 | 7세기 |
원인 | 고구려 멸망 |
주요 사건 | 보덕국 건국, 소고구려 건국 |
관련 정보 |
2. 해서지방의 부흥운동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장수 검모잠은 황해도 한성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검모잠은 보장왕의 후손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의 지원을 받았으나,[1] 670년 내분으로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부흥운동은 어려움을 겪었다.[3][4]
2. 1.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장수 검모잠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황해도(당시의 행정구역) 한성에서 고구려 부흥을 시도했다. 670년 4월, 검모잠은 궁모성(窮牟城)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키고 보장왕의 후손인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신라 문무왕의 지원을 받았다.[1][2]그러나 안승과 검모잠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고,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3][4] 이후 안승은 문무왕에게 항복하여 "보덕왕"이라는 칭호와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金)"씨를 하사받았다.[3][4] 안승을 따라 신라로 귀순한 고구려인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 보덕국의 구성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5]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이 요동 지역에 남아 있던 검모잠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요동에서의 부흥운동도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 부흥군의 저항은 673년 호로하 전투와 우잠성 전투까지 이어졌다.
3. 호남지방의 부흥운동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과 안승을 전라북도 익산 (금마저)에 정착하게 하고 보덕국을 세우게 하였다. 보덕국은 신라의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고구려의 제도를 유지하고 일본과의 외교에서 고려 국호를 사용하는 등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683년, 신문왕이 안승을 경주로 불러들이자, 보덕국 장수 대문[6]이 반란을 일으켰으나[7] 신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3. 1. 보덕국
문무왕은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전라북도 익산)로 옮겨 살게 하고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에 봉했다. 보덕국은 신라의 번속국(藩屬國)이었지만 고구려의 관직 체계를 사용했고, 일본과 외교할 때 고려(高麗) 국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683년 신라 신문왕이 안승을 수도 경주로 불러 소판(蘇判) 관등과 김씨 성을 부여하고 집과 토지를 주며 수도에 거주하게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보덕국의 장수 대문[6]이 금마저에서 난을 일으켰지만[7] 신라에게 진압되어 멸망하였다.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장수 검모잠은 황해도(당시의 행정구역) 한성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고구려를 부흥시켰다. 검모잠은 보장왕의 후손인 안승을 부흥 고구려의 왕으로 추대했다.[1]
이후 부흥 고구려는 신라 문무왕의 지원을 받았으나[2], 왕국 내 분쟁으로 안승이 검모잠을 암살하며 약화되었다. 안승은 문무왕에게 항복하여 "보덕왕" 칭호와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3][4] 안승을 따라 신라로 귀순한 고구려인 대다수는 보덕국의 구성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5]
4. 요동반도의 부흥운동
677년, 당 고종은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임명하였으나, 보장왕은 말갈족을 규합하여 군사를 일으키려다 681년 당나라 양주에 유배되어 1년 후 사망하였다.[1]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 통치에 계속 반항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본토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만주 지역으로 탈출한 영주(榮州) 일대의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발해를 건국하였다.
4. 1. 보장왕의 부흥운동 시도
677년, 당 고종은 고구려 패망 후 당나라로 압송된 보장왕에게 책임을 면제하고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족을 규합하여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당나라 양주로 유배되었고, 1년 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4. 2. 발해 건국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보장왕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였다.[1] 당 고종은 677년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임명하여 책임을 면제하였다.[1]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족을 규합하여 군사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681년 당나라 양주에 유배되었고, 1년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1]이후에도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 통치에 계속 반항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본토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만주 지역으로 탈출한 영주(榮州) 일대의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발해를 건국하였다.[2]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장군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서쪽 국경에서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동모산으로 이동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3]
참조
[1]
서적
新唐书卷二百三十六·列传第一百四十五
[2]
서적
三国史记卷七·新羅本紀七·文武王十四年
[3]
서적
新唐书·高丽传
[4]
서적
三国史记卷八·新羅本紀八·神文王三年
[5]
서적
三国史记卷七·新羅本紀七·文武王十八年
[6]
웹사이트
대문(大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7]
웹사이트
대문 -한국고전용어사전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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