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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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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유는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조조를 섬기며 관직을 시작하여 위나라 건국 후 치서시어사, 정위, 태상, 사공, 사도를 역임했다. 조상이 숙청될 때 가절·행대장군사를 맡아 공을 세웠고, 조모가 즉위했을 때는 태위가 되었다. 90세에 사망했으며, 손자 고혼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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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고유
원어 이름高柔
문혜
출생174년
사망263년 10월 또는 11월
출생지허난성카이펑시치현
사망 당시 나이89세 (동아시아식 나이 계산법)
칭호 및 작위안국후
시호원후
가문
친척고간
아버지고경
자녀고준
고단
고광
관직 경력
상서랑213년–?
영천태수?–220년
치서시어사220년–223년
정위223년–?
태상?–245년 9월 27일
사공245년 9월 27일–248년 5월 또는 6월
사도248년 5월 또는 6월–256년 10월
태위256년 10월–263년 10월 또는 11월
섬긴 군주
후한헌제
조위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기타 정보
소속조위
시대삼국 시대

2. 생애

고유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조조에게 등용되어 능력을 인정받았고, 조위 건국 이후에는 중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사마의의 쿠데타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황초 원년(220년), 문제헌제의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자 고유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1] 황초 4년(223년)에는 정위로 승진하여 23년간 사법을 담당했다. 황초 7년(226년), 포훈 사건 때 법률을 굽히지 않고 판결을 내려 조비의 분노를 사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1]

명제 즉위 후 연수정후(延壽亭侯)에 봉해졌으며, 정시 6년(245년)에는 태상, 10일 후에는 사공에 임명되었고, 정시 9년(248년) 사도로 전임하였다.[1]

가평 원년(249년), 사마의조상을 숙청하는 고평릉의 변이 일어났을 때, 고유는 황태후의 조칙으로 가절(假節)·행대장군사(行大將軍事)에 임명되어 조상의 진영을 점거하는 공적을 세웠다.[1] 이 공으로 만세향후(萬歲鄕侯)에 봉해졌고, 조모 즉위 시에는 안국(安國侯)에 봉해졌으며, 태위에 임명되었다.[1] 원제 즉위 시에는 식읍이 4천 호로 늘어났다.[1]

경원 4년(263년), 고유는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손자 고혼(高渾)이 뒤를 이었다.[1]

2. 1. 초기 생애와 조조의 등용

고유는 원래 진류에서 살았으나, 원소를 섬긴 7촌 족숙 고간의 초청에 응하여 일족을 이끌고 병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고유의 부친인 고정(高靖)은 촉군도위였는데, 부친이 임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고유는 3년에 걸쳐 찾아가 부친의 시신을 모셔왔다.[1]

조조가 원씨(袁氏)의 세력을 흡수한 후, 고유는 관(菅長)에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다. 고간이 조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고유는 고간을 따르지 않고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어떻게든 고유를 추궁하여 죽이고자 자간령사(刺奸令史)에 임명하였으나, 고유가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승상창조속(丞相倉曹屬)에 임명하였다.[1]

그 후 고유는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고, 이후 승상이조속(丞相理曹屬)·영천태수·승상법조연(丞相法曹掾)을 역임하였다.[1]

2. 2. 위나라의 중신

고간의 초청으로 고유는 일족을 이끌고 병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고유의 부친 고정(高靖)은 촉군도위였는데, 부친이 임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쳐 부친의 시신을 모셔왔다.[1]

조조가 원씨(袁氏)의 세력을 흡수한 후, 고유는 관(菅長)에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다. 고간이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고유는 따르지 않고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고유를 추궁하여 죽이고자 자간령사(刺奸令史)에 임명하였으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승상창조속(丞相倉曹屬)에 임명되었다.[1]

이후 고유는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고, 승상이조속(丞相理曹屬)·영천태수·승상법조연(丞相法曹掾)을 역임하였다.[1]

황초 원년(220년), 문제헌제의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였다. 고유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고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황초 4년(223년)에는 정위로 승진하였다.[1]

명제 즉위 시 연수정후(延壽亭侯)에 봉해졌으며, 정시 6년(245년) 태상이 되었고 10일 후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정시 9년(248년) 사도로 전임하였다.[1]

가평 원년(249년), 사마의조상을 숙청했을 때 황태후의 조칙으로 가절(假節)·행대장군사(行大將軍事)에 임명되었고, 조상의 진영을 점거하는 공적을 세워 만세향후(萬歲鄕侯)에 봉해졌다. 조모 즉위 시 안국(安國侯)에 봉해졌으며, 태위에 임명되었다. 원제 즉위 시 식읍이 4천 호로 늘어났다.[1]

경원 4년(263년), 90세로 숨을 거두었고 손자 고혼(高渾)이 뒤를 이었다.[1]

3. 관직

원소를 섬긴 7촌 족숙 고간의 초청으로 병주로 이주한 고유는 부친상 후 조조에게 등용되었다. 관(菅長)으로 치적을 쌓았고, 고간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아 조조의 신임을 얻었다. 자간령사(刺奸令史), 승상창조속(丞相倉曹屬)을 거쳐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상이조속(丞相理曹屬), 영천태수, 승상법조연(丞相法曹掾)을 역임하였다.

문제헌제의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자, 고유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와 관내후에 봉해졌고, 황초 4년(223년)에는 정위로 승진하였다.

명제 즉위 후 연수정후(延壽亭侯)에 봉해졌으며, 정시 6년(245년) 태상, 10일 후 사공에 임명되었고, 정시 9년(248년) 사도로 전임하였다.

가평 원년(249년), 사마의조상을 숙청했을 때 황태후의 조칙으로 가절(假節)·행대장군사(行大將軍事)에 임명되어 조상의 진영을 점거, 만세향후(萬歲鄕侯)에 봉해졌다. 조모 즉위 후 안국(安國侯)와 태위에 임명되었고, 원제 즉위 후 식읍 4천 호를 받았다.

4. 일화

고유는 처음에 고향을 지켰으나, 원소를 섬기던 백부 고간의 초청으로 일족과 함께 그를 의지했다. 부친이 익주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쳐 익주로 가서 부친의 유해를 수습했다.

조조가 원씨 세력을 평정하면서 수현령에 임명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고간이 조조에게 반역했을 때도 따르지 않고 항복했다. 조조는 그를 벌주려 했으나, 직무 능력이 우수하여 승상창조속으로 발탁했다.

조조가 위나라를 건국하자 상서랑 등에 임명되었고, 조비가 즉위하자 치서시어사를 거쳐 관내후에 봉해졌다. 황초 4년(223년)에는 정위로 승진하여 23년간 사법을 담당했다.

조예 즉위 후 연수정후에 봉해졌고, 정시 7년(246년) 태상을 거쳐 10일 후 사공으로 승진, 이후 사도를 역임했다.

가평 원년(249년) 사마의조상 숙청 때 황태후의 명으로 가절·행대장군사에 임명되어 조상의 진영을 점거, 만세향후에 봉해졌다. 조모 즉위 후 안국후에 봉해지고 태위를 맡았다. 조환 즉위 후에는 읍이 4천 호로 늘어났다.

경원 4년(263년) 90세로 사망했고, 손자가 뒤를 이었다.

4. 1. 포훈 사건

황초 7년(226년), 포훈이 부하의 실태를 간과한 죄로 체포되자, 조비는 법을 어기고 포훈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고유는 이에 따르지 않고, 법률에 따라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조비는 분노하여 고유를 잠시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정위에 임명하여 포훈을 처형했다. 포훈이 처형된 후, 고유는 다시 정위로 복직했다.

5. 친족 관계

고유의 친족 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
[2] 서적 Sanguozhi vol. 24
[3] 서적 魏志』高柔伝
[4] 서적 晋諸公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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