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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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트프리트 페더는 독일의 공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나치당의 초기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883년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나 공학을 전공한 후 건설 회사를 설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반은행, 반유대주의 사상을 담은 저술을 발표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독일 노동자당(DAP)을 창당했고,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 경제 자문관으로 활동하며 히틀러의 '유대계 제정 자본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나치당 내에서 반자본주의적 견해를 주장했으나, 1934년 당내 좌익 세력 숙청 이후 내각에서 사임했다. 이후 베를린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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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페더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883년 1월 27일 |
출생지 | 뷔르츠부르크,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사망 | 1941년 9월 24일 |
사망지 | 무르나우 암 슈타펠제, 가우 뮌헨-오버바이에른, 나치 독일 |
국적 | 독일 |
학력 | |
모교 | 훔볼트 대학교 베를린 |
경력 | |
직업 | 경제학자, 정치인 |
직책 | 경제부 차관, 입주 문제 국가 판무관 |
재직 기관 | 베를린 공과대학교 |
분야 | 도시 계획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독일 노동자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기타 소속 |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 |
국회의원 | 1924년 ~ 1936년 (8선) |
사상적 배경 | |
영향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빌헬름 마르 루돌프 융 실비오 게젤 |
업적 | |
기여 | 계획 도시 심층 기초 |
2. 생애
1883년 뷔르츠부르크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를린이나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공학을 배우고, 1908년에 건설 회사를 설립했다. 불가리아에서도 활동하여 상당수의 관청 건물을 지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정치 경제를 공부하며, 부유한 은행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종전 후 1919년에는 은행 국유화와 이자 폐지를 요구하는 "이자 노예제의 파괴(Brechung der Zinsknechtschaft)"를 저술했다. 같은 해, 안톤 드렉슬러와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함께 독일 노동자당(DAP, 나치당의 전신) 창당에 참여했다.
1919년 여름에 처음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으며, 히틀러에게 재정과 경제에 관한 문제를 가르쳤다. 히틀러의 "유대 자본"에 대한 적대감은 페더의 가르침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14]. 1920년에는 히틀러, 드렉슬러와 함께 나치당의 25개조 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특히 반자본주의적인 생각을 강령에 반영하였다.
1923년 뮌헨 폭동에 참여했다. 폭동 실패 후 히틀러는 체포되었지만, 그는 금지된 나치당의 위장 정당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NSFP)의 간부로 남았다. 1924년 5월 독일 국회 선거에 NSFP 후보로 켐니츠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36년까지 국회의원 지위를 유지했다. 국회에서 은행 이자율 억제와 유대인 추방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이 시기에도 반자본주의적인 저술을 여러 편 저술했다.
나치당의 재정·경제 문제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31년에는 당 경제 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당이 대기업 등 재계로부터 투자를 받게 되면서, 반자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페더는 걸림돌이 되어 당내 영향력이 감소했다.
1933년 히틀러 집권 후, 경제성 차관으로 임명되었지만, 페더는 더 높은 지위를 원했고, 실망감이 컸다고 한다. 같은 해, "대형 융자에 대한 투쟁(Kampf gegen die Hochfinanz)"과 반유대주의 서적인 "유대인(Die Juden)"을 저술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정부 직책에서 물러났고, 베를린의 단과대학(Hochschule)에서 공학 교사가 되었다. 1939년에는 "새로운 도시(Die Neue Stadt)"를 저술하여 전원도시를 주장했으며, 1941년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3년 1월 27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공무원 한스 페더와 마틸데 페더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스바흐와 뮌헨에 있는 인문주의 학교를 다닌 후 베를린과 취리히에서 공학을 전공하였다. 1908년 졸업 후 건설 회사를 설립하였고, 불가리아에서 여러 공공 건물을 세우며 활동하였다.1917년부터 스스로 재정 정치와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부유한 은행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으며, 1919년 《이자 노예제의 파괴》를 저술하였다. 이후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자를 없애기 위한 일종의 '대책 위원회'를 창립하였다.[2]
2. 2. 정치 활동
1919년 안톤 드렉슬러, 디트리히 에카르트, 카를 하러와 함께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을 창당하였다.[2] 아돌프 히틀러는 1919년 여름에 그를 만났으며, 페더는 그의 재정 경제 자문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유대계 제정 자본주의'에 대한 관념에 영감을 주었다.[3]1920년 2월, 고트프리트 페더는 아돌프 히틀러 및 안톤 드렉슬러와 함께 당의 견해를 요약하고 자신의 반자본주의적 견해를 도입한 "25개조 강령"을 작성했다. 1920년 2월 24일에 이 강령이 발표되었을 때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했다. 더 많은 대중에게 당의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1920년 2월에 DAP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나치당)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페더는 1923년 11월 당의 맥주홀 폭동에 참여했다. 히틀러가 체포된 후, 그는 불법화된 당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남아 나치 전선 단체인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의 깃발 아래 1924년 국회에 선출되었다. 1928년 나치당에 대한 금지가 해제된 후, 그는 최초의 12명의 나치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켐니츠-츠비카우 (1924년-1932년), 라이프치히 (1932년-1933년), 동프로이센 (1933년-1936년) 선거구를 대표하며 1936년까지 재임했다.[4]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금리 동결과 유대인 시민의 재산 몰수를 요구했다. 그는 NSDAP의 반자본주의적 세력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남아 "독일 국가의 국가적, 사회적 기반"(1920년), "''NSDAP의 강령과 그 세계관적 기초''"(1927년), "''아돌프 히틀러는 무엇을 원하는가?''"(1931년)를 포함한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1926년 초, 페더는 국가사회주의 노동 연합이 제기한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히틀러가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연합은 1925년 9월에 조직된 북부 및 서부 독일 가울라이터들의 단명한 단체로, 그레고르 슈트라써가 이끌었으며 "25개조 강령"을 수정하려 했다. 1925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페더는 수정안 초안을 입수하여 히틀러에게 알렸다. 1920년 원본 강령의 공동 저자인 페더는 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강했고, 자신이나 히틀러도 모르게 수정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1926년 1월 24일 하노버에서 열린 노동 연합 회의에 페더는 초대를 받지 않았지만 히틀러의 대표로서 참석했다. 회의는 노동 연합 지도자 중 한 명인 요제프 괴벨스가 페더를 내쫓으라고 요구하며 "우리는 밀고자는 원치 않아!"라고 외치는 등 논쟁으로 번졌다. 그러나 투표가 진행되었고 페더는 참석이 허용되었다. 초안 강령은 격렬하게 논의되었고 페더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 결국 슈트라써의 초안은 승인되지 않았다. 그 직후, 2월 14일, 히틀러는 밤베르크 회의를 소집하여 노동 연합이 옹호하는 입장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원본 강령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트라써는 배포된 초안 강령의 모든 사본을 회수해야 했다. 히틀러는 당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노동 연합으로부터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했으며, 노동 연합은 무의미해져 그해 말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페더는 잠시 동안 나치당의 재정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지배했지만, 1931년 당 경제 평의회 의장이 된 후 그의 반자본주의적 견해는 독일 주요 산업계의 재정적 지원을 크게 감소시켰다. 알베르트 푀글러, 구스타프 크루프, 프리드리히 플릭, 프리츠 티센, 에밀 키르도르프 및 특히 얄마르 샤흐트의 압력에 따라 히틀러는 당의 경제적 견해를 페더의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히틀러가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7월에 페더를 국가 경제부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훨씬 더 높은 직책을 기대했던 페더를 실망시켰다.
2. 3. 나치 집권 이후
1933년 히틀러가 수상이 되자, 페더는 7월에 국가 경제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는 훨씬 더 높은 직책을 기대했던 페더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16]페더는 "고등 금융과의 투쟁"(1933)과 반유대주의적인 "유대인"(1933) 등의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1939년에는 나치 건축을 활용한 전원 도시 건설을 시도한 《새로운 도시》를 저술했다. 여기서 그는 2만 명의 인구를 9개의 자율 단위로 나누고 농업 지역으로 둘러싸인 농업 도시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각 도시는 일상생활과 도시 편의 시설에 대한 자세한 계획과 함께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급자족해야 했다. 다른 전원 도시 이론가들과 달리, 그는 기존의 건축 환경을 자급자족적인 동네로 세분화함으로써 도시 지역을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중형 도시를 형성하는 자급자족적인 동네 클러스터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일본의 니시야마 우조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이후 일본 신도시 건설 시대에 적용되었다.[8]
그러나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와 일관성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산형 공장 개념은 장군들과 융커 모두에게 반대를 받았다.[9] 장군들은 재무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융커들은 국제 시장을 위해 자신들의 토지를 이용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10]
1934년 8월 2일 얄마르 샤흐트가 경제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페더를 국무장관직에서 해고하는 것이었다.[11] 페더는 이후 1934년 12월까지 정착 담당 국가판무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또한 한스 프랑크의 독일 법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했다.[12] 결국 페더는 1936년 12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정착 정책 교수가 되었으며, 1941년 9월 24일 바이에른주무르나우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3. 사상
고트프리트 페더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부유한 은행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1919년 《이자 노예제 철폐 선언》(Brechung der Zinsknechtschaftde)을 저술하고, 모든 은행의 국유화와 이자 폐지를 주장하는 '대책 위원회'를 창립했다.[16] 같은 해 안톤 드렉슬러, 디트리히 에카르트, 카를 하러와 함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전신)을 창당했다.
히틀러는 1919년 여름에 페더를 만났고, 페더는 히틀러의 재정 경제 자문관이 되었다. 페더는 히틀러에게 '유대계 재정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16]
3. 1. 도시 계획
페더는 1939년 《새로운 도시》를 저술했다. 이는 나치 건축을 활용한 전원 도시 건설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2만 명의 인구를 9개의 자율 단위로 나누고 농업 지역으로 둘러싸인 농업 도시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각 도시는 일상생활과 도시 편의 시설에 대한 자세한 계획과 함께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급자족해야 했다.[8] 다른 전원 도시 이론가들과 달리, 그는 기존의 건축 환경을 자급자족적인 동네로 세분화함으로써 도시 지역을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중형 도시를 형성하는 자급자족적인 동네 클러스터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일본의 니시야마 우조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일본 신도시 건설 시대에 적용되었다.[8]그러나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와 일관성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산형 공장 개념은 장군들과 융커 모두에게 성공적으로 반대받았다.[9] 장군들은 재무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융커들은 국제 시장을 위해 자신들의 토지를 이용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10]
4. 저술
- 《이자 노예제의 파괴를 위한 선언》(Das Manifest zur Brechung der Zinsknechtschaft des Geldes) in 《비판적 평론》(Kritische Rundschau) (1919).
- * 확장 신판 《모두에게, 모두에게!》(An Alle, Alle!) 1호 (1919).
- 《국가 파산의 구제》(Der Staatsbankrott die Rettung) in 《모두에게, 모두에게!》 2호 (1919).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강령과 그 세계관적 기본 사상》(Das Programm der N.S.D.A.P. und seine weltanschaulichen Grundgedanken).
- 《주택 부족과 사회 건설 및 경제 은행 - 주거 빈곤, 경제 위기, 생계 위기의 구원자》(Die Wohnungsnot und die soziale Bau- und Wirtschaftsbank als Retterin aus Wohnungselend, Wirtschaftskrise und Erwerbselend).
- 《민족적, 사회적 기초 위에 세워진 독일 국가》(Der Deutsche Staat auf nationaler und sozialer Grundlage) (1923).
- 《아돌프 히틀러는 무엇을 원하는가?》(Was will Adolf Hitler?) (1931).
- 《고위 금융에 맞선 투쟁》(Kampf gegen die Hochfinanz)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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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사회주의 경제 이론의 개요》(Grundriß einer nationalsozialistischen Volkswirtschaftstheorie).
- 페르디난트 베르너, 에른스트 그라프 추 레벤틀로 등과 함께: 《새로운 독일과 유대인 문제. 토론 기고》(Das neue Deutschland und die Judenfrage. Diskussionsbeitrag). 뤼디거(C. E. 크루그), 라이프치히 1933 (원제: 《유대인이 죄인이다》(Der Jud ist schuld)).
- 《유대인》(Die Juden).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중앙 출판사, Frz. 라터 나흐프., 뮌헨 1933.
- 《노동 조합, DAF, 그리고 노동의 가치》(Gewerkschaften, DAF und der Wert des Arbeit), 1934.
- 《새로운 도시. 인구의 사회 구조로부터 새로운 도시 계획 예술의 기초를 세우려는 시도》(Die neue Stadt. Versuch der Begründung einer neuen Stadtplanungskunst aus der sozialen Struktur der Bevölkerung). 율리우스 슈프링거 출판, 베를린 19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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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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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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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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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lict and Development in the NSDAP 1924-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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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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