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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에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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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1868년 바이에른 왕국에서 태어난 극작가, 언론인, 정치 운동가이다. 그는 초기에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으나, 툴레 협회의 지원을 받아 반유대주의 주간지를 창간하고, 독일 노동자당(DAP)을 창립하는 등 나치당의 형성에 기여했다. 에카르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초기 멘토로서, 히틀러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히틀러는 에카르트를 자신의 스승으로 존경했다. 그는 1923년 뮌헨 폭동에 참여했다가 사망했으며, 나치 독일 시대에 기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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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에카르트
기본 정보
디트리히 에카르트
디트리히 에카르트
이름디트리히 에카르트
원어 이름Dietrich Eckart
출생일1868년 3월 23일
출생지노이마르크트 인 데어 오버팔츠
사망일1923년 12월 26일
사망지베르히테스가덴
국적독일
직업저널리스트
극작가
시인
정치 활동가
배우자로자 마르크스 (1913, 1921)
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활동
활동 기간불명
기타
로마자 표기Diteurih Ekarteu

2. 어린 시절

왼쪽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1868년 3월 23일 바이에른 왕국 노이마르크트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뉘른베르크에서 남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이다. 아버지 크리스티안 에카르트는 왕실 공증인이자 변호사였고, 어머니 안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에카르트는 10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여러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상당한 유산을 남겼지만, 에카르트는 이를 곧 탕진했다.

2. 1. 청년기



에카르트는 1868년 뉘른베르크 근교 Neumarkt in der Oberpfalz|노이마르크트인데어오버팔츠de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비텔스바흐가공증인이자 법률 고문이었다. 에카르트가 10세 때 어머니 안나가 사망하고,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에카르트는 그것을 곧 다 써버렸다.

에카르트는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법률학을 공부하는 한편, 결투와 술에 빠져 지냈지만, 1891년 시인, 극작가, 언론인으로 일하기 위해 중퇴했다. 1899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많은 극본을 집필했지만, 모르핀 중독에 빠져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연극 극본을 많이 집필했고, 프로이센 왕립 극장 예술 감독 게오르크 폰 휠젠헤젤러 백작의 후원을 받았다. 결투 후 파사우의 오버하우스 성에 일시 투옥되었다.[21] 극작가로서는 1912년 헨리크 입센의 『페르귄트』 극본을 제작하고, 민족주의·반유대주의를 짙게 반영한 극본으로 명성을 얻었다.[22] 1907년부터 동생 빌헬름과 동거했지만, 1913년 미망인 로자 마르크스와 결혼하고 뮌헨으로 이주했다.[23][24]

3. 극작가로서의 활동



에카르트는 1891년 뮌헨대학교에서 의학과 법률학 공부를 중퇴하고 시인, 극작가, 언론인으로 일했다. 1899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많은 극본을 집필했지만, 모르핀 중독에 빠져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프로이센 왕립 극장 예술 감독 게오르크 폰 휘르젠-하젤러 백작에게서 배우며 연극 극본을 다수 집필했다.[21]

1912년에는 헨리크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를 각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민족주의반유대주의를 짙게 반영하여 베를린에서 600회 이상 공연되는 등 명성을 얻었다.[22] 그러나 《페르 귄트》 이후에는 이렇다 할 극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에카르트는 자신의 실패를 독일 문화에 대한 유대인의 영향 탓으로 돌렸다.

3. 1. 《페르 귄트》 각색의 특징

에카르트의 5막 구성 헨리크 입센 작품 각색에서, 이 연극은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극화한 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귄트는 암묵적으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트롤"들과 투쟁하는 우월한 게르만 영웅을 대표한다.[35] 입센의 원작에서 페르 귄트는 "세계의 왕"이 되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나지만,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행동으로 인해 그의 육체와 영혼은 파괴되고 결국 수치스럽게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에카르트는 귄트를 트롤 같은, 즉 유대인의 세계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죄는 고귀한 것이며, 귄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기 위해 돌아온다. 이러한 인물 해석은 에카르트의 영웅인 오토 바이닝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는 이를 통해 귄트를 반유대주의적 천재로 보게 되었다. 이 인종적 우화에서 트롤과 도브레구벤("도브레 거인")은 바이닝거의 "유대성" 개념을 대표한다.

에카르트는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 총통이 된 직후 그에게 선물한 이 연극 대본에 이렇게 적었다. "세계의 왕이 되겠다는 [귄트의] 생각을 '권력 의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면에는 결국 그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것이라는 영적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히틀러에게 "독일의 메시아"가 되려는 그의 추구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므로, 폭력이나 다른 사회적 규범의 위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귄트처럼 그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 서문에서 에카르트는 이렇게 썼다. "세계는 독일적 본성에 의해, 즉 더 넓은 의미에서 자기희생의 능력 그 자체에 의해 치유될 것이며, 순수한 신성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오직 '트롤'들의 연합군에 대한 유혈의 섬멸전 이후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구를 감싸고 있는 미드가르드 뱀, 즉 거짓의 파충류적 화신에 대한 섬멸전 이후에 말입니다."

4. 반유대주의와 정치 활동

에카르트는 처음에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1898년에는 유대인 소녀의 미덕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반유대주의로 전향하기 전, 그는 하인리히 하이네오토 바이닝거 등 유대인을 존경했다. 그러나 바이닝거의 영향으로 "자기혐오적 유대인" 개념을 수용하면서 반유대주의로 전향하게 되었다.[35]

1918년 12월, 에카르트는 툴레 협회의 지원을 받아 반유대주의 주간지 《아우프 구트 도이치》(Auf gut Deutsch, "순수 독일어로")를 창간하여 발행 및 편집을 맡았다.[25] 그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고트프리트 페더와 협력하여,[25] 독일 혁명, 바이마르 공화국,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했다.[25] 특히 배후중상설을 지지하며 사회민주주의자유대인을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25] 또한 《시온 장로 의정서》의 영향을 받아 세계 지배를 위한 유대인의 음모론을 믿었다.[35]

1913년, 에카르트는 히틀러와 같은 해에 뮌헨으로 이주했다.[1]

4. 1. 독일 노동자당(DAP) 창립과 나치당 초기 활동

1919년 1월, 에카르트는 고트프리트 페더, 안톤 드렉슬러, 카를 하러와 함께 독일 노동자당(DAP)을 창립했다.[26] 1920년 2월, 더 많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나치당)으로 변경했다.[26]

1920년 12월, 에카르트는 나치당이 《뮌헤너 베오바흐터》를 매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장군이 제공한 독일 육군 자금 6만 마르크를 이용하여 대출을 주선했으며, 자신의 집과 재산을 담보로 제공했다.[4] 아우크스부르크의 화학자이자 공장주인 고트프리트 그란델 박사가 보증을 섰다.[4] 이 신문은 《푈키셔 베오바흐터》로 이름이 바뀌어 나치당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으며, 에카르트는 초대 편집장 겸 발행인을 맡았다.[26] 그는 또한 나치 슬로건인 "독일이여 깨어나라"(Deutschland erwache)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한 당가 "슈투름을리트"의 가사를 썼다.[26]

1921년, 에카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3주 이상 전선에 복무한 유대인 가족을 지목하는 사람에게 1,000 마르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자무엘 프로인트라는 랍비가 이 조건을 충족하는 유대인 가족들을 제시하며 에카르트를 고소했고, 에카르트는 소송에서 패소하여 상금을 지급해야 했다.[4]

5. 아돌프 히틀러와의 관계

에카르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초기 주요 멘토 중 한 명으로서, 훗날 독재자가 되는 히틀러의 페르소나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히틀러 신화"의 최초 전파자 중 한 사람이었다.[37]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넘어, 강한 정서적, 지적 유대감을 가진, 거의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38][39] 에카르트는 히틀러에게 진정한 독일 혁명의 기초로서 "영혼 없는 유대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철학을 전수했는데, 이는 1918년의 거짓 혁명과는 다른 것이었다.[40] 히틀러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워야 했기에 에카르트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그를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41] 나치즘의 정신적 공동 창시자로 인정했다.[42]

두 사람은 1919년 겨울 히틀러가 독일 노동자당(DAP) 회원들 앞에서 연설했을 때 처음 만났는데, 히틀러는 즉시 에카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43] 에카르트가 첫 만남에서 "저 사람이 독일의 다음 위인이다 - 언젠가 전 세계가 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나치의 전설일 가능성이 있다.[44] 에카르트는 툴레 협회 회원이 아니었다.[5]

히틀러보다 21살 많았던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포함한 젊은 민족운동가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는 히틀러에게 책을 빌려주고, 트렌치코트를 선물했으며, 말하기와 글쓰기 스타일을 교정해 주었다.[47] 히틀러는 훗날 "문체적으로 나는 여전히 유아였다"고 회고했다.[48] 에카르트는 지방 출신인 히틀러에게 적절한 예절을 가르쳤으며,[49]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50]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뮌헨 예술계로 이끌었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에카르트와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와 당을 위해 끊임없이 활동했다.

5. 1. 공통점과 차이점

에카르트와 히틀러는 모두 예술과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을 주로 예술가로 여겼으며, 우울증 경향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3] 초기에는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에카르트는 하인리히 하이네오토 바이닝거를 존경했는데, 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었다. 히틀러 역시 젊은 시절 유대인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받았다.[4]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존재했다. 에카르트는 유대인을 별개의 인종으로 보지 않았던 반면, 히틀러는 유대인을 완전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3] 에카르트는 유대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일 여성과 결혼한 유대인은 처벌해야 한다고 믿었다.[4]

에카르트는 인류의 존재가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대립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19년에 "유대 민족이 멸망한다면 모든 시대의 끝"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4] 이러한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적 관점은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5. 2.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

에카르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초기 주요 멘토 중 한 명으로서, 미래의 독재자 히틀러의 페르소나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히틀러 신화"의 최초 전파자 중 한 사람이었다.[37]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강한 정서적, 지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38] 거의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39] 에카르트는 히틀러에게 진정한 독일 혁명의 기초로서 "영혼 없는 유대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철학을 전수했는데, 이는 1918년의 거짓 혁명과는 달랐다.[40] 히틀러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워야 했기에 공개적으로 에카르트에 대한 빚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에카르트를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로,[41] 그리고 나치즘의 정신적 공동 창시자로 인정했다.[42]

두 사람은 1919년 겨울 히틀러가 독일 노동자당(DAP) 회원들 앞에서 연설했을 때 처음 만났다. 히틀러는 즉시 에카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에카르트는 그에 대해 "그의 전체적인 존재 방식에 끌렸고, 곧 그가 우리의 젊은 운동에 정확히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43] 에카르트가 히틀러와의 첫 만남에서 "저 사람이 독일의 다음 위인이다 - 언젠가 전 세계가 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아마도 나치의 전설일 것이다.[44] 에카르트는 툴레 협회의 회원이 아니었다.[5]

히틀러보다 21살 많았던 에카르트는 히틀러와 헤르만 에서를 포함한 젊은 민족운동가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이 충돌할 때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에서에게 히틀러가 DAP의 최고 연설가라고 여겼던 그가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했다.[45] 그는 히틀러의 멘토가 되어 그와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당의 이론과 신념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46] 그는 히틀러에게 책을 빌려주고, 트렌치코트를 선물했으며, 히틀러의 말하기와 글쓰기 스타일을 교정해 주었다.[47] 히틀러는 후에 "문체적으로 나는 여전히 유아였다"고 말했다.[48] 에카르트는 또한 지방 출신인 히틀러에게 적절한 예절을 가르쳤으며,[49] 히틀러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50]

히틀러와 에카르트는 예술과 정치에 대한 관심, 자신을 주로 예술가로 여기는 점,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점 등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둘 다 초기에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는데, 이는 둘 다 언급하기를 꺼리는 사실이었다. 에카르트와 달리 히틀러는 유대인을 별개의 인종으로 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히틀러의 목표는 이미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였고, 에카르트는 모든 유대인을 기차에 태워 홍해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었다.[51] 그는 또한 독일 여성과 결혼한 유대인은 3년간 감옥에 가두어야 하며, 재범 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2] 역설적이게도 에카르트는 인류의 존재가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에 달려 있으며,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1919년 에카르트는 "유대 민족이 멸망한다면 모든 시대의 끝이 될 것"이라고 썼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뮌헨 예술계로 입문시켰다. 그는 히틀러를 화가 막스 체퍼와 그의 반유대주의 예술가 살롱, 사진작가 하인리히 호프만에게 소개했다. 또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히틀러에게 소개한 것도 에카르트였다. 1920년부터 1923년 사이, 에카르트와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와 당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로젠베르크를 통해 히틀러는 로젠베르크의 영감의 원천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저작을 접하게 되었다. 로젠베르크와 에카르트 모두 러시아에 관한 주제에서 히틀러에게 영향력이 있었다. 에카르트는 러시아를 독일의 자연스러운 동맹국으로 보았으며, 1919년에 "독일 정치는 볼셰비키 정권을 제거한 후 새로운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것 말고는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그는 독일이 "현재의 유대인 정권", 즉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러시아 국민의 투쟁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하게 느꼈다. 로젠베르크도 히틀러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했으며, 두 사람은 히틀러에게 동방 정책의 지적 기반을 제공했고, 이는 후에 막스 에르빈 폰 쇼이프너리히터에 의해 실용화되었다.

1920년 3월, 히틀러를 처음 정치에 입문시킨 독일 참모본부 장교 카를 마이어의 요청으로 히틀러와 에카르트는 베를린으로 날아가 볼프강 카프를 만나 카프 폭동에 참여하고,[6] 카프의 세력과 마이어를 연결하고자 했다. 카프와 에카르트는 서로 알고 있었는데, 카프는 에카르트의 주간지를 지원하기 위해 1,000 마르크를 기부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가짜 수염을 쓴 히틀러는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비행 중 멀미를 했는데, 이는 그의 첫 비행기 여행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 폭동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은 베를린 사람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는데, 발데마르 팝스트 대위는 "당신들의 모습과 말투를 보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민족운동과 연관된 부유한 잠재적 후원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에카르트의 인맥을 이용해 뮌헨에서 DAP를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함께 일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에카르트가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과 더 잘 연결되어 있던 베를린에서는 상당한 자금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범독일연맹의 고위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자주 수도로 여행했다. 이 중 한 번의 여행에서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그의 미래 예절 교사가 될 사교계 인사 헬레네 벡스타인에게 소개했고, 이를 통해 히틀러는 베를린 상류층 사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1년 6월, 히틀러와 에카르트가 베를린에서 모금 여행을 하는 동안 뮌헨의 나치당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집행위원회 멤버들은 경쟁 정당인 독일 사회당(DSP)과의 합병을 원했다. 히틀러는 7월 11일 뮌헨으로 돌아와 분노하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그들의 주요 공인이자 연설가의 사임이 당의 종말을 의미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위원회에 히틀러를 잃지 말라고 로비를 했던 에카르트는 당 지도부로부터 히틀러와 대화하여 그가 당에 복귀할 조건을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히틀러는 당 본부가 뮌헨에 남고, 자신이 안톤 드렉슬러를 대신해 당 의장이 되며 당의 독재자, 즉 "총통"이 된다는 조건으로 복귀하겠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에 동의했고, 그는 1921년 7월 26일 당에 복귀했다.

에카르트는 또한 히틀러에게 그와 당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 조언했다. 예를 들어, 준포르노그라피적인 《데어 슈튀르머》(Der Stürmer)의 발행인이자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히틀러는 포르노그라피를 혐오했고 슈트라이허의 성적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슈트라이허가 일으킨 많은 당내 싸움에 대해서도 괴로워했다. 히틀러에 따르면, 에카르트는 여러 차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슈트라이허는 교사이며, 여러 면에서 정신 나간 사람이다. 그는 항상 슈트라이허 같은 사람을 지지하지 않고서는 국가사회주의의 승리를 바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때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그 역할을 맡기 전에는 에카르트가 고트프리트 페더와 함께 나치당의 "철학자"로 여겨졌다.

5. 3. 관계의 소원

히틀러가 자신감을 얻으면서 에카르트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다.[38]

1922년 11월, 에카르트는 당의 해외 주요 모금 책임자인 에밀 간서와 함께 스위스 취리히로 가서 비단 산업의 부유한 기업가인 알프레드 슈바르첸바흐를 만났다. 이 여행은 히틀러의 부관인 루돌프 헤스가 가족 관계를 이용해 주선했다. 이 만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듬해 히틀러도 동행하여 재방문이 이루어졌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이 여행의 실패를 에카르트의 사교성 부족 탓으로 돌렸다.[39]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에 대한 비방시를 발표한 후, 에카르트는 1923년 초 체포 영장을 피해 "호프만 박사"라는 이름으로 베르히테스가덴 인근으로 도피했다. 4월에 히틀러는 오버잘츠베르크의 펜션 모리츠에 있는 그를 방문했고, "헤어 볼프"라는 이름으로 며칠 동안 그와 함께 머물렀다.[40] 이것이 히틀러가 후에 자신의 산장인 베르크호프를 짓게 될 지역을 처음 접한 계기였다.[41]

히틀러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에카르트 대신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발행인으로 교체했지만, "그의 업적은 영원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에카르트를 여전히 높이 평가했다. 히틀러는 에카르트가 큰 사업을 운영할 만한 체질이 아니며, 자신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에카르트 사이에는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여성에 대한 각자의 행동을 둘러싼 개인적인 의견 차이뿐만 아니라, 에카르트가 뮌헨에서 시작된 폭동이 성공적인 전국적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에 대해 히틀러가 짜증을 내기도 했다. 에카르트는 뮌헨은 베를린이 아니며,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43]

1923년 5월,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또 다른 멘토인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에게 히틀러가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다고 불평했다.[44]

히틀러는 에카르트의 비현실성, 무질서, 늘어난 음주로 인해 그를 정치적 부담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른 초기 동료들을 버린 것과는 달리 에카르트를 버리지 않고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계속해서 그를 방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45]

6. 히틀러의 헌정

히틀러는 《나의 투쟁》 제2권을 에카르트에게 헌정했다.[4] 그는 에카르트를 "우리 민족의 각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글과 사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행동을 통해 그렇게 했다"고 칭송했다.[7] 사적으로 그는 에카르트를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로 인정했으며,[4] 1942년에 그에 대해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하며, "문체적으로 나는 여전히 유아였다"고 말했다.[4] 히틀러는 후에 그의 비서 중 한 명에게 에카르트와의 우정이 "1920년대에 경험한 가장 좋은 일 중 하나"였으며, 그 이후로 "생각과 감정의 조화"를 그토록 느꼈던 친구는 다시 없었다고 말했다.[8]

7. 사후 평가 및 기념

나치 시대에 에카르트는 주요 인물로 추앙받았다. 히틀러는 그를 나치즘의 정신적 공동 창시자로 여겼으며,[7] ''나의 투쟁'' 2권을 그에게 헌정했다.[43]

나치는 에카르트를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물을 세웠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근처의 경기장은 "디트리히 에카르트 뷔네"(Dietrich-Eckart-Bühne)로 명명되었다. SS해골부대 제5연대는 "디트리히 에카르트"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으며,[8] 엠멘딩엔의 한 학교는 "디트리히 에카르트 남자 중학교"로 개명되었다. 여러 도로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8]

그의 출생지인 노이마르크트인데어오버팔츠는 "디트리히 에카르트 슈타트"로 공식 개칭되었고,[9] 1934년에는 시립공원에 에카르트 기념비가 세워졌다. 1938년에는 파사우에서 에카르트 탄생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에카르트 재단 설립과 그가 투옥되었던 방이 복원되었으며, 거리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변경되었다.[30][31]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러한 기념물들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이름이 바뀌었다. 노이마르크트의 기념비는 크리스토페르 3세 기념비로 재헌정되었고, 다른 지역의 학교와 도로 이름도 변경되었다.[32]

7. 1. 사상

에카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독일인과 비독일인 간의 성전이 아닌,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성전으로 보았다.[43][44] 그는 유대인이 러시아와 독일 제국의 몰락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42][12][13] 이 종말론적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 에카르트는 라그나로크 전설과 요한계시록에서 광범위한 이미지를 차용했다.[45][13]

1925년, 에카르트의 미완성 에세이 《모세에서 레닌까지의 볼셰비즘: 히틀러와 나의 대화》(''Der Bolschewismus von Moses bis Lenin: Zwiegespräch zwischen Hitler und mir'')가 사후에 출판되었다. 마가레테 플레브니아는 에카르트와 히틀러 사이의 대화가 에카르트 자신의 창작이라고 여겼지만, 에른스트 놀테, 프리드리히 헤어, 클라우스 숄더는 (로젠베르크가 에카르트의 노트를 사용해 완성하고 사후 출판했다고 주장하는) 이 책이 히틀러 자신의 말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46][47][14][15] 따라서 역사학자 리처드 스테이그먼골은 "이 책은 여전히 [에카르트] 자신의 견해를 나타내는 신뢰할 만한 지표로 남아 있다"고 믿었다.

스테이그먼골은 해당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 모든 남성다움의 구현체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찾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끔 발두르(북유럽 신화의 신)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말에는 항상 기쁨과 만족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이교도 조상들이 이미 이 이상적인 인물에게 그리스도의 징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스테이그먼골은 "이교도주의나 반기독교 종교를 옹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에카르트는 독일의 전후 혼란기에 그리스도가 본받아야 할 지도자였다고 생각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에른스트 피퍼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초기 당원들의 그리스도 숭모와 기독교와의 긍정적 관계에 대한 스테이그먼골의 견해를 일축했다.[48][16] 에카르트는 바이에른 인민당과 그 전국적 동맹인 중앙당의 정치적 가톨릭주의에 열렬히 반대했으며, 대신 모호하게 정의된 "긍정적 기독교"를 지지했다.[49][17] 에카르트는 《푈키셔 베오바흐터》지를 통해 바이에른 가톨릭 신자들을 나치의 대의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 시도는 뮌헨 폭동 사건으로 끝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나치는 바이에른 가톨릭 신자들과 대립하게 되었다.[49][17]

조셉 하워드 타이슨은 에카르트의 반구약성서적 견해가 초기 기독교 이단인 마르키온파와 강한 유사성을 보인다고 기술한다.[50][18]

1935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디트리히 에카르트: 유산》(''Dietrich Eckart. Ein Vermächtnis'')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에카르트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 천재가 된다는 것은 영혼을 사용하고, 신성을 추구하며, 비열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완전히 달성될 수 없다 하더라도, 선의 반대되는 것을 위한 여지는 없을 것이다. 이는 천재가 위대한 예술가로서 모든 형태와 색채로 존재의 비참함을 묘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관찰자로서 행하며, 참여하지 않고, 분노도 편견도 없이 행하며, 그의 마음은 순수하게 남는다. ... 이에 대한 이상은, 다른 모든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이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라는 그의 말씀은 감각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신성한 자유를, 예술을 매개체로 하지 않고도 세속적 세계를 극복함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네와 그의 인종이 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 동기, 즉 세계를 정복하는 데 집중되며, 이것이 잘 되지 않을수록 그들의 동기를 만족시키기 위한 작업은 더욱 증오로 가득 차게 되고, 목표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더욱 기만적이고 오류투성이가 된다. 진정한 천재의 흔적은 없으며, 천재의 남성성과는 정반대이다...[51][19]

7. 2. 성격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은 에카르트를 "바다코끼리처럼 생긴, 구식 바이에른인의 전형적인 예"라고 회상했다.[33] 에드거 앤설 모러는 에카르트를 "기이하고 술에 취한 천재"로 묘사했다.[52] 새뮤얼 W. 미첨은 에카르트를 "괴짜 지식인"이자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부르면서도 "세상 물정에 밝고" "와인과 여성,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33]

앨런 벌록은 에카르트를 "격렬한 국수주의적, 반민주주의적, 반교권주의적 의견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묘사하며, 그는 "술에 취했을 때도 말을 잘했고" "뮌헨의 모든 사람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33] 리처드 J. 에반스에 따르면, 에카르트는 "실패한 인종차별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였으며, 자신의 경력 실패를 독일 문화에 대한 유대인의 지배 탓으로 돌렸다.[33]

요아힘 C. 페스트는 에카르트를 "거칠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며, "솔직하고 단순한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그의 혁명적 목표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촉진하고 나라를 "이자 노예 제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33] 토머스 웨버에 따르면, 에카르트는 "쾌활하지만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졌다.[33] 존 톨런드는 그를 "타고난 낭만적 혁명가", "카페 논쟁의 대가", "감상적인 냉소주의자이자 진실한 사기꾼"이라고 묘사했다.[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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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Les Eminences grises du nazisme Ixelles Editions
[3] 서적 The Troll Among Us Ashgate
[4] 서적 Die Ehre des jüdischen Soldaten. Die Judenzählung im Ersten Weltkrieg und ihre Folgen. Campus Verlag
[5] 논문
[6] 서적 Der Sturm auf die Republik: Frühgeschichte der NSDAP Econ Verlag
[7] 서적 The Third Reich: Charisma and Community Routledge
[8] 서적 Straßenchronik der Stadt Gotha Verlag Rockstu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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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World Fascism: A Historic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13-03-13
[11] 서적 Got mit uns? Der Erste Weltkrieg als Religionkrieg Vanderhoeck & Ruprecht
[12] 학술지 The Nazi Old Guard: Identity Formation During Apocalyptic Times 2010-08
[13] 서적 The Paranoid Apocalypse: A Hundred-Year Retrospective on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New York University Press
[14] 학술지 Eine Frühe Quelle Zu Hitlers Antisemitismus 1961-06
[15] 서적 Die Kirchen und das Dritte Reich. Bd. 1: Vorgeschichte und Zeit der Illusionen, 1918 - 1934 1977
[16] 학술지 Steigmann-Gall, The Holy Reich Sage Publications, Ltd. 2007-01
[17] 학술지 How ''Catholic'' Was the Early Nazi Movement? Religion, Race, and Culture in Munich, 1919-1924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8] 서적 Hitler's Mentor: Dietrich Eckart, His Life, Times, & Milieu https://books.google[...] iUniverse
[19] 기타
[20] 서적 Hitler's Mountain: The Führer, Obersalzberg and the American Occupation of Berchtesgaden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3-03-13
[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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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Les Eminences grises du nazisme Ixelles Editions
[2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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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Young Hitler http://www.younghitl[...] Quartet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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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Straßenchronik der Stadt Gotha
[33] 웹인용 "Eckart, Dietrich" in: Neue Deutsche Biographie 4 (1959) https://www.deutsche[...] 2019-08-21
[34] 서적 Les Eminences grises du nazisme Ixelles Editions
[35] 서적 The Troll Among Us Ashgate
[36] 서적 (제목 없음)
[37] 서적 Der Sturm auf die Republik: Frühgeschichte der NSDAP Econ Verlag
[38] 서적 The Third Reich: Charisma and Community Routledge
[39] 서적 Straßenchronik der Stadt Gotha Verlag Rockstuhl
[40] 서적 Hitler and His God: The Background of the Hitler Phenomenon Rupa &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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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저널 The Nazi Old Guard: Identity Formation During Apocalyptic Times 2010-08
[44] 서적 The Paranoid Apocalypse: A Hundred-Year Retrospective on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New York University Press
[45] 서적 The Paranoid Apocalypse: A Hundred-Year Retrospective on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New York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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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저널 Steigmann-Gall, The Holy Reich Sage Publications, Ltd. 2007-01
[49] 저널 How ''Catholic'' Was the Early Nazi Movement? Religion, Race, and Culture in Munich, 1919-1924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0] 서적 Hitler's Mentor: Dietrich Eckart, His Life, Times, & Milieu https://books.google[...] iUniverse
[51] 기타
[52] 서적 Hitler's Mountain: The Führer, Obersalzberg and the American Occupation of Berchtesgaden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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