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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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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 토룬에서 태어난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그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지구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묘사하는 혁명적인 태양중심설을 제안하여 천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발표했지만, 당시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반대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과학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현대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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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로마자 표기Nicolaus Copernicus
폴란드어 표기Mikołaj Kopernik
독일어 표기Nikolaus Kopernikus
출생일1473년 2월 19일
출생지토룬, 왕령 프로이센, 폴란드
사망일1543년 5월 24일 (향년 70세)
사망지프롬보르크, 왕령 프로이센, 폴란드
학력
교육야기엘론스키 대학교(1491–1495)
볼로냐 대학교(1496–1500)
파도바 대학교(1501–1503)
페라라 대학교 (교회법 박사, 1503)
전문 분야
분야천문학
교회법
경제학
수학
의학
정치
지도 교수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 다 페라라
업적
주요 업적지동설
화폐수량설
그레셤-코페르니쿠스 법칙
기타 정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
영향 받은 사람아리스타르코스
마르티아누스 미네우스 펠릭스 카펠라
음성 정보

2. 생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룬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96] 아버지는 크라쿠프 출신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부유한 토룬 상인의 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네 자녀 중 막내로, 형제로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정규사제가 된 안드레아스, 베네딕도회 수녀가 된 바르바라, 토룬 시의원과 결혼한 카타리나가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결혼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자녀가 없었지만, 1531년부터 1539년까지 그의 가정부였던 안나 실링과의 관계는 스캔들로 여겨졌다.[7]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인 루카스 바첸로데에게 양육되었다. 루카스는 훗날 바르미아의 주교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크라쿠프 대학교(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공부했으며, 알베르트 브루제프스키 교수를 통해 처음으로 천문학을 접하게 되었다.[112] 이후 볼로냐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파도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1503년 이탈리아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바르미아로 돌아와 40년간 생활하며 지동설 연구를 시작했다. 1510년에는 지동설을 처음으로 공표한 《코멘타리올루스》를 소수의 친구들에게만 공개했다. 1519년-1521년 폴란드-튜턴 전쟁 중에는 올슈틴을 방어하고 평화 협상에서 폴란드 측 대표로 활약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이 행성들의 실제 운동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중심설을 고안했다.[21] 그는 1529년경부터 프톨레마이오스지구중심설 이론을 완전히 수정하고자 자신의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집필을 시작했다.[133]

1542년 말엽, 코페르니쿠스는 뇌졸중과 마비 증세를 보였고, 1543년 5월 24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프롬보르크 대성당에 매장되었으며, 2005년 그의 유해가 발견되어 2010년 5월 22일 재장례를 치렀다.

2. 1. 출생과 가계

코페르니쿠스의 생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크라쿠프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토룬의 유력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크 시니어(Mikołaj the Elder)는 구리 무역을 하는 상인으로, 주로 단치히에서 구리를 판매했다. 그는 1458년경 크라쿠프에서 토룬으로 이주했다. 비스툴라 강에 위치한 토룬은 당시 13년 전쟁에 휘말려 있었는데, 이 전쟁에서 폴란드 왕국과 프러시아 동맹은 튜턴 기사단과 프러시아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다. 니콜라우스의 아버지는 당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폴란드와 도시들을 튜턴 기사단에 맞서 지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 가문은 실레시아의 니사와 프루드니크(Prudnik)(Neustadt) 사이의 마을에서 기원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코페르니크(Kopernik), 코페르니크(Copernik), 코페르니크(Copernic), 코페르니크(Kopernic), 코프리르니크(Coprirnik), 그리고 현대식 표기인 코페르니키(Koperniki)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Barbara Watzenrode)는 부유한 토룬의 귀족이자 시의원이었던 루카스 바첸로데 장로(Lucas Watzenrode the Elder)의 딸이었다. 바첸로데 가문은 코페르니쿠스 가문과 마찬가지로 실레시아 출신이었고, 1360년 이후 토룬에 정착했다. 그들은 곧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네 자녀 중 막내였다. 그의 형 안드레아스는 프롬보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회 정규사제가 되었다. 그의 누이 바르바라는 베네딕트 수녀가 되었고, 말년에는 헬름노의 수녀원장을 지냈다. 그의 누이 카타리나는 사업가이자 토룬 시의원 바르텔 게르트너와 결혼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 바르바라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외삼촌인 루카스 바첸로데가 코페르니쿠스와 형제들을 키웠다. 루카스는 당시 교회의 율수 사제(카논)였으며, 후에 왕령 프로이센의 바르미아 주교가 되었다.

2. 2. 어린 시절과 교육

코페르니쿠스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큰누나는 수녀가 되었고, 작은 누나는 상인과 결혼했다. 당시 서른여섯 살의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는 코페르니쿠스 형제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112] 바첸로데는 코페르니쿠스 형제를 자신이 졸업한 성 요한 학교에 보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를 읽고 쓰는 능력과 기초 산술 등을 배웠다. 그 후, 토룬비스와강 상류에 위치한 학교를 거쳐 크라쿠프 대학교(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준비 단계를 밟았다.

크라쿠프 대학교는 야기엘론 왕조 시대에 설립되어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라고도 불렸다. 야기엘론 왕조는 게르만 기사단의 침입을 막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국을 건설했으며, 16세기에 정치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 특히 크라쿠프 대학교의 천문학 연구는 북유럽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1491-1492년 겨울 학기에 Nicolaus Nicolai de Thuronia라는 이름으로 크라쿠프 대학교에 등록했다. 당시 유럽 대학의 교육 과정은 비슷했는데, 학생들은 신부, 의사, 법률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십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하면 4년 동안 일반적인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고, 그 후 일부 학생들은 신학, 의학, 법률 중 한 분야를 택해 더 공부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예술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교재로 사용했다.

학생들은 수학,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등도 공부했다. 기하학 원론과 사크로보스코의 <천구>가 교재로 사용되었다. 대학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다양한 천문학적 지식을 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 우주 이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심, 주전원의 개념은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고, 이는 후에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우주 체계를 제시하는 바탕이 되었다.

1491년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교에서 7개의 자유 교양 과목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알베르트 브루제프스키 교수를 통해 처음으로 천문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달의 정밀한 궤도 계산을 역사상 최초로 수행한 저명한 천문학자였으며, 천동설에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495년 학위를 받지 않고 크라쿠프 대학교를 졸업한 후, 외삼촌의 주선으로 바르미아의 수도원 사제 직책을 얻었다. 1496년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했고, 저명한 천문학자 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 다 페라라의 제자가 되었다. 1500년 볼로냐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마를 방문한 후 프롬보르크로 돌아갔다. 1501년 파도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점성술도 함께 공부했다. 1503년 페라라 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3. 성직 및 학문 활동

코페르니쿠스가 생활하고 연구했던 프롬보르크의 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1516년부터 1521년까지 거주했던 올슈틴


1503년 이탈리아에서 모든 학업을 마친 코페르니쿠스는 바르미아로 돌아와 40년을 살았다. 그는 1510년까지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 2세의 비서 겸 주치의로 리지바르크 바르민스키 주교 성에 거주하며, 공식적으로는 외삼촌의 정치, 교회, 행정, 경제 업무에 참여하면서 지동설 연구를 시작했다.

1509년에는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그리스어 서간집을 라틴어로 번역 출판했다. 1510년에는 지동설을 처음으로 공표한 《코멘타리올루스》(Commentariolus)를 소수의 친구들에게만 공개했다.

1511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 서기로 선출되어 문서 관리와 금융 거래 기록을 담당했다. 1512년에는 외삼촌 바첸로데 주교가 사망했다. 1516년에는 성당 참사회 재산 관리 담당이 되었고, 1517년에는 화폐의 액면가와 실질 가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저술했다.

1519년-1521년 폴란드-튜턴 전쟁 중 올슈틴이 튜턴 기사단에 포위되자,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왕실군을 지휘하여 올슈틴과 바르미아를 방어하고 이후 평화 협상에서 폴란드 측 대표로 활약했다. 1523년 파비안 루자인스키 주교 사망 후, 모리츠 페르벨 주교가 선출될 때까지 9개월간 바르미아 전체 행정을 담당했다.

2. 4. 천문학적 발견과 태양중심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이 행성들의 실제 운동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인식했다. 특히 행성의 역행 운동, 계절 길이의 불균형 등 천동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중심설을 고안했다.[21] 그는 다양한 분석과 계산을 통해 자신의 태양중심설을 발전시켜 1510년경에는 행성 운동의 새로운 체계를 소책자에 정리했는데, 이 소책자의 사본을 크라쿠프에 있는 친구 수학자들에게 보냈다. 그 사본은 『코멘타리올루스(작은 주석)』라고 불렸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책에서 등속 중심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태양 중심 우주론을 제시하면서 다음 7가지 원리를 서술했다.

# 모든 천구에 공통의 중심은 없다(행성의 운동 중심은 태양이지만, 달의 운동 중심은 지구이다).

#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게의 중심이며 달의 천구의 중심일 뿐이다.

# 모든 천구는 태양 주위를 회전하므로, 우주의 중심은 태양 근처에 있다.

# 항성천구의 높이에 비해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작으므로 눈에 띄지 않는다.

# 항성천구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별들이 흩뿌려진 항성천구,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은 움직이지 않는다.

# 태양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다. 지구는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따라서 지구의 운동은 하나만이 아니다.

# 행성에서 보이는 역행 운동은 지구의 운동 때문이다. 지구의 운동에 의해, 하늘에서 보이는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많은 운동이 설명된다.

『천구의 회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행성의 궤도.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공전하며,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한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태양중심설은 행성 배열 순서, 주기, 역행 운동 등을 더 간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태양 중심 체계에 의해, 불가사의했던 역행 운동을 그 이전의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토성과 목성과 화성에서 역행의 크기가 다른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또 다른 근거는, 행성의 거리와 회전 주기의 순서가 규칙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총 34개의 원을 조합하여 행성 운동 모델을 만들고, 조정하면 높은 정확도로 관측과 일치하는 모델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원의 중심 위치, 반지름, 회전 속도 등 100개가 넘는 매개변수를 명시해야 했다. 그는 실제로 관측하고, 계산하고, 모델을 검토하는 데 20년 이상의 여가를 보냈다. 1529년이 되어서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수정하기 위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쓰기 시작했고, 1543년 그의 죽음 직전에 책이 인쇄 출판되었다.

2. 5.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29년경부터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집필을 시작했다.[133] 그는 자신의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프톨레마이오스지구중심설 이론을 완전히 수정하고자 했다. 1539년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게오르크 요아힘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노트를 읽고 그의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1540년에 출판했으며, 노트를 책으로 출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133] 레티쿠스의 강력한 권유와 그의 저작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코페르니쿠스는 마침내 출판을 결심했다.

1542년부터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의 감독 아래 인쇄 작업이 시작되었다.[133] 그러나 오시안더는 코페르니쿠스의 허락 없이 태양중심설을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로 축소하는 내용의 서문을 추가했다.[133]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코페르니쿠스는 책의 기본 구조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동일하게 구성했다.[133] 두 책 모두 '철학적' 부분으로 시작하여 우주의 구형, 지구의 상대적 크기 등을 설명한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중심설 사상은 모두 1권에 서술되어 있다.[134] 1권에서는 수식을 사용하지 않고 태양중심설의 기본 원리, 우주천체 및 지구의 구형, 지구의 자전공전 등을 설명한다. 2권에서 6권까지는 천문학자들을 위해 복잡한 계산수식들을 사용하여 구면천문학, 세차운동, 지구, ,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수학적 설명을 제시했다.[134]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지구중심설을 반박하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즉각적인 반응은 미약했다.[135] 1616년 로마 가톨릭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1758년 금서에서 해제되었다.[135]

2. 6. 사망과 유해 발견

1542년 말엽, 코페르니쿠스는 뇌졸중과 마비 증세를 보였고, 1543년 5월 24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죽는 날 바로 자신의 저서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의 최종 인쇄본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통해 평생의 업적과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의 책을 보고 평화롭게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롬보르크 대성당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580년 비문이 훼손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그 후 1735년에 교체되었다. 200년이 넘도록 고고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유해를 찾기 위해 대성당을 수색했지만 허사였다. 1802년, 1909년, 1939년의 시도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004년, 푸우워츠크의 고고학인류학 연구소장인 예르지 곰소프스키(Jerzy Gąssowski)가 이끄는 팀이 역사가 예르지 시코르스키(Jerzy Sikorski)의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색을 시작했다.[27] 2005년 8월, 대성당 바닥 아래를 스캔한 후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유해로 여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추가 연구 후인 2008년 11월 3일에 발표되었다. 곰소프스키는 "거의 100% 확신한다"고 말했다. 폴란드 경찰 중앙 법의학 연구소의 다리우스 잡델(Dariusz Zajdel) 경위는 두개골을 이용해 코페르니쿠스의 자화상에 있는 특징(부러진 코와 왼쪽 눈 위의 상처 포함)과 매우 유사한 얼굴을 재구성했다. 전문가는 또한 두개골이 약 70세에 사망한 남성의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사망 당시 나이와 일치한다.

무덤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모든 유골이 발견된 것은 아니었으며, 아래턱 등이 없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뼈의 DNA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코페르니쿠스 소유의 책에서 채취한 모발 샘플과 일치했다.

2010년 5월 22일,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주교 사절이었고 새로이 폴란드의 폴란드의 대주교로 임명된 요제프 코발치크(Józef Kowalczyk)가 집전한 미사에서 재장례를 치렀다. 코페르니쿠스의 유해는 두개골 일부와 다른 뼈가 발견된 프롬보르크 대성당의 같은 장소에 다시 매장되었다. 검은 화강암 묘비에는 그를 지동설의 창시자이자 교회의 사제로 기록하고 있다. 묘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모형(금색 태양이 6개의 행성으로 둘러싸여 있음)이 새겨져 있다.

3. 코페르니쿠스 체계 (태양중심설)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서 학업을 마치고 바르미아로 돌아와 40년 동안 살면서, 짧은 기간 동안 크라쿠프와 프로이센 도시들을 여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바르미아 공국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자체 의회, 화폐, 재무부를 가지고 있었다.

1503년부터 1510년(혹은 삼촌이 사망한 1512년)까지 코페르니쿠스는 삼촌의 비서 겸 의사로 리지바르크 바르민스키 주교 성에 거주하며 지동설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삼촌의 정치, 교회, 행정, 경제 업무에 참여했고, 1504년부터는 삼촌과 함께 토룬, 그단스크, 말보르크, 엘블롱크, 슈툼, 포즈난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왕립 프로이센 국회에 참석, 튜턴 기사단에 대한 적대감과 폴란드 왕관에 대한 충성 사이의 복잡한 외교에 참여했다. 또한 알렉산데르 야기에우워 왕과 지기스문트 1세 왕이 참석한 회의에도 참석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에서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타스의 서간집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를 통해 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논쟁에서 인문주의자 편에 섰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요하네스 댄티스쿠스의 결혼 축가를 위한 그리스어 에피그램을 작곡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을 수정하여 태양 중심 체계를 제시했다. 그는 1510년경 자신의 새로운 천체 배열에 대한 간략한 개요인 『코멘타리올루스』를 작성하여 배포했다.

『코멘타리올루스』에서 제시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핵심 가정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천구[54]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다.

2.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달의 구체 중심일 뿐이다.

3. 모든 구체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므로, 우주의 중심은 태양 근처에 있다.

4.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천구의 높이에 비해 매우 작다.

5. 천구에 나타나는 모든 운동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것이다.

6. 태양의 운동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지구의 공전으로 인한 것이다.

7. 행성의 역행 및 순행 운동은 지구의 운동으로 인한 겉보기 현상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저서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이러한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3. 1.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

고대 그리스의 에우독소스아리스토텔레스지구중심설(천동설)을 주장했다. 에우독소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여러 층의 천구가 겹쳐진 모습의 우주를 상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달을 기준으로 지상계와 천상계를 명명하였다.

태양중심체계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310?~230? B.C.)이다. 그는 저서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에서 태양은 지구에 비해 6~7배 더 넓고 그 크기는 지구의 300배에 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는 태양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에 태양의 연주운동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항성의 일주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는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별의 시차에 의한 효과를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폴로니우스와 기원전 2세기의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단순히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 위에 있는 작은 원 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원을 주전원, 큰 원을 대원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이상의 원운동이 합해져 행성의 진행방향이나 속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행성의 접근에 의한 밝기 변화, 순행과 역행의 속도차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각각의 행성들을 관측해 보면, 이들은 항성들을 배경으로 동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정도 각각 다른 시기에 잠시 정지했다가, 몇 주 동안 서쪽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을 ‘역행 운동’이라 부른다. 서기 1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역행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모델을 제시했다. 그의 모델은 두 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모원’이다. 작은 원은 모원에 의해 운반되는 ‘주전원’이다. 행성은 주전원을 따라 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이 두 원운동을 결합함에 따라 행성이 모원 속으로 들어가 지구에 가장 가까웠을 때,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따르면, 태양은 원궤도를 따라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원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원은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약 3.5 퍼센트 정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이심원이었다. 그는 태양이 이 이심원 궤도를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며, 이심원 궤도 자체가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심원 궤도는 별들에 대하여 고정된 상태로 있으며, 태양의 이심원 궤도, 행성들의 궤도가 지구에 대하여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이다.

13세기 초, 영국의 천문학자 존 오브 할리우드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라틴어식 이름인 요하네스 시크로보스코라는 필명으로 ‘천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기본 교재로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다음 세대인 13세기 중엽이 되자 좀더 발전된 교재인 캄파누스가 쓴 ‘행성의 도구’가 등장했다.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간단한 역학적 방법으로 설명해 놓았다.

14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다마스쿠스에 있던 이븐 알 샤티르(Ibn Al Shatir)는 천동설의 입장에서 동시심을 제거하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체계를 생각했다. 원운동에서 직선왕복운동을 일으키는 방법은 그에 앞서 13세기의 나시르 알 딘 알 투시(Nasir al-din al-Tusi)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의 업적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지적되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없다.

15세기 중엽 비엔나 대학의 게오르그 푸르바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의 도구‘를 새롭게 해석해 새로운 책 ’새로운 행성 이름‘을 썼다. 그는 투명한 수정으로 된 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원과 주전원을 만들어 보려 했다. 즉, 우주의 구성과 운동을 실제 물질을 사용해 주체적으로 표현해 보려 한 것이다.

3. 2. 태양중심설의 내용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관한 주요 저서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틴어: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그가 죽은 해인 1543년에 출판되었지만, 그는 이미 1510년까지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53] 1510년경, 코페르니쿠스는 새로운 천체 배열에 대한 간략한 개요인 『코멘타리올루스』를 작성하여 최소 한 명 이상의 사람에게 보냈고, 그 사람은 이를 추가로 배포하기 위해 복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멘타리올루스』에서 제시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핵심 가정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천구[54]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다.

2.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달의 구체 중심일 뿐이다.

3. 모든 구체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므로, 우주의 중심은 태양 근처에 있다.

4.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천구의 높이에 비해 매우 작다.

5. 천구에 나타나는 모든 운동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것이다.

6. 태양의 운동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지구의 공전으로 인한 것이다.

7. 행성의 역행 및 순행 운동은 지구의 운동으로 인한 겉보기 현상이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총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56]

1. 지동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 요약

2. 구면 천문학의 원리와 별 목록 제시 (후속 내용의 기초)

3. 태양의 겉보기 운동과 관련 현상 설명

4. 달과 그 궤도 운동 설명

5. 지구를 제외한 행성들의 경도 운동 설명

6. 지구를 제외한 행성들의 위도 운동 설명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에 맞게 수정하고자 했다. 그는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알마게스트 요약』을 읽으며 행성 모델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알마게스트에 따른 행성의 궤도. ⊕는 지구의 위치. 각도 θ는 에칸트에 의한 일정 각속도 회전각. Φ는 주전원의 회전각. M은 행성의 평균 위치. 주전원으로 평균 위치로부터의 편차를 나타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의 천체들이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태양의 궤도와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은 매우 불규칙했다. 예를 들어, 화성은 평균 속력보다 훨씬 느리거나 빠르게 움직였고, 약 2년에 한 번씩 역행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을 도입했지만, 이는 천체들의 영원한 운동을 설명하는 고대 개념과 맞지 않았다. 그는 지구와 다른 등속 중심점을 도입하여 이 점을 중심으로 각운동 속력이 일정하도록 했다.

중세 아랍 천문학자들은 등속 중심 개념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원둘레를 움직이는 운동 속력이 원의 실제 중심이 아닌 다른 점에 대해 일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처럼 태양과 달, 각 행성들이 주전원을 그리며 지구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궤도를 따라 돈다고 가정하면 우주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는 1504년에 화성을 관측하고 "화성은 표보다 2도 앞서 있고, 토성은 1도와 2분의 1 뒤쳐져 있다"고 기록했다.[21]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체계를 통해 역행 운동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토성, 목성, 화성에서 역행 크기가 다른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총 34개의 원을 조합하여 행성 운동 모델을 만들었고, 조정하면 관측과 높은 정확도로 일치하는 모델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4. 영향 및 평가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의 궤도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 행성들의 위치를 예측하는 데는 유용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들이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태양의 궤도와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이 불규칙하여 어려움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화성의 역행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 개념을 도입했지만, 이는 고대 개념과 맞지 않았고, 중세 아랍 천문학자들은 이에 거부감을 느꼈다.[24]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게 된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은 우주를 총체적이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었다.
  •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달 궤도의 편차가 지나치게 커서 실제 달의 크기 변화와 맞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튜턴 기사단의 침략과 폴란드 왕관과의 관계 등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시민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행정 및 경제적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태양, 화성, 토성 관측을 통해 지구이심률 변화와 태양 원일점 이동을 발견했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 기간 동안 율리우스력 개혁 문제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발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정확도가 높거나 계산이 간편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실체론적 방법"은 우주의 진정한 구조를 찾는 연구의 시작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모순을 명확히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게 영향을 미쳐 과학 혁명을 이끌었으며,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세계관을 뒤엎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말을 만들어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4. 1. 과학 혁명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이 행성 위치를 비교적 잘 예측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천체가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태양 궤도도 사계절의 길이가 달라 일정하지 않았고,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도 불규칙했다. 예를 들어 화성은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것은 물론, 2년에 한 번씩 역행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 개념을 도입했지만, 이는 고대 개념과 맞지 않았다. 그는 지구와 다른 등속 중심점을 도입하여 모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중세 아랍 천문학자들은 등속 중심 개념에 강한 거부감을 느껴 다른 시도를 했지만, 결국 더 작은 주전원을 추가하는 것에 그쳤다.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게 된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은 태양, 달, 행성들이 주전원을 그리며 지구 중심에서 벗어난 궤도를 따라 돈다고 하여 우주를 총체적이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었다.
  •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달 궤도의 편차가 지나치게 커서 달의 크기가 크게 달라져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1543년을 과학 혁명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사로잡혀 있던 2000년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태양중심설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인간중심주의 파산의 발단이 되었다.[136]

과학사가 토머스 쿤은 코페르니쿠스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라고 평가했다.[136]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를 설정함으로써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직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쏟았으며, 전통적인 우주관을 넘어 지구가 하나의 행성임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받는다.[137]

게오르크 요아힘 레티쿠스와 에라스무스 라인홀트는 코페르니쿠스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지만, 티코 브라헤가 그의 첫 번째 위대한 후계자가 되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프라하에서 티코와 협력했고 티코의 수십 년에 걸친 상세한 관측 데이터의 혜택을 받았다.[57]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처음에는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학자들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지 60년 후에도 유럽 전체에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주장하는 천문학자는 약 15명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아서 코이스트러는 그의 책이 초판 출간 당시 널리 읽히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에드워드 로젠과 오언 진저리치는 이를 반박했다.

당시의 지적 분위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에 상응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의해 지배되었다. 당시에는 행성의 위치를 결정할 때 균점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수학적 단순성을 제외하고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티코 브라헤의 체계("지구는 정지해 있고,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며, 다른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와 직접 경쟁했다.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연구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는 상당한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후의 일이었는데, "갈릴레이가 관성의 원리를 공식화한 시점부터...[이는] 지구가 운동하더라도 모든 것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과 역학 법칙을 그의 1687년 《프린키피아》에서 공식화하고 지상 역학과 천체 역학을 통합한 후에야 비로소 지동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529년경부터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에 관한 논고를 정리하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듭했지만, 출판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친구들을 통해 당시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1536년에는 추기경 중 한 명인 니콜라스 셰ーン베르크(Nicolaus Schönberg)가 코페르니쿠스에게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1539년,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인 게오르크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를 방문하여 지동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아 사사를 청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빠르게 흡수하는 동시에 이 이론의 출판을 강력하게 권했다. 이에 코페르니쿠스도 마침내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542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저가 될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초고가 완성되었지만, 같은 해 11월 코페르니쿠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완성된 교정쇄는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날 그의 손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 시대까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1270년대에 알폰소 10세가 제작한 알폰소 천문표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로마 제국 시대 서기 150년경에 만들어진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천문 체계인 『알마게스트』에 기반한 천문 계산이 이루어졌다. 알폰소 10세는 천문학자들의 일을 보고 "행성의 운동은 너무 복잡하다"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알폰소 표의 전체 체계는 "각 행성에 독립적인 주전원은 하나뿐이다"라는 생각으로 계산되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생각한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코페르니쿠스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508년에서 1510년 사이로 여겨진다. 코페르니쿠스가 『요약』에서 주전원(역행을 설명하기 위한 작은 원)과 이심원(지구를 도는 큰 행성의 원 궤도)이 서로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이러한 바꿔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바로잡아 명확한 설명을 제공한 것은 쿠슈치와 레기오몬타누스의 『요약』이었다.

『알마게스트』에서는 외행성(화성, 목성, 토성)의 주전원(작은 원)의 회전은 모두 태양의 평균적인 운동과 같았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이심원과 주전원을 바꿔 놓으면, 그것들과 태양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지구 주위를 태양이 돌고, 그 태양 주위를 외행성이 도는, 후대의 티코 브라헤의 것과 비슷한 모형을 얻을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 주위를 도는 태양 궤도의 반지름을 25로 놓고, 행성의 원의 크기를 계산하여, 화성의 원의 반지름은 38, 목성은 130, 토성은 231이라고 했다. 이것은 현재 지구-태양 간 거리를 1천문단위로 했을 때의 외행성의 거리와 매우 가까운 값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행성의 궤도의 크기는 자유롭게 변할 수 있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이 도는 원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명확히 할 수 없었던 "화성, 목성, 토성이 역행할 때 왜 항상 행성이 태양의 정반대편에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행성들은 지구에 가장 가까울 때 지구에 추월당한다. 그때 태양은 행성의 반대편에 있다. 1510년경 코페르니쿠스는 행성 운동의 새로운 체계를 소책자에 정리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 소책자의 사본을 크라쿠프에 있는 친구 수학자들에게 보냈다. 그 사본은 『코멘타리올루스(작은 주석)』라고 불렸다. 그 안에서 코페르니쿠스는 7가지 원리를 서술하고 있다.

1. 모든 천구에 공통의 중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행성의 운동 중심은 태양이지만, 달의 운동 중심은 지구이다).

2.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게의 중심이며 달의 천구의 중심일 뿐이다.

3. 모든 천구는 태양 주위를 회전하므로, 우주의 중심은 태양 근처에 있다.

4. 항성천구의 높이에 비해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작으므로 눈에 띄지 않는다.

5. 항성천구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결과이다. 지구는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별들이 흩뿌려진 항성천구,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은 움직이지 않는다.

6. 태양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떠받치는 구형의 껍질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따라서 지구의 운동은 하나만이 아니다.

7. 행성에서 볼 수 있는 역행 운동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지구의 운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지구의 운동에 의해, 하늘에서 보이는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많은 운동이 설명된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체계에 의해, 불가사의했던 역행 운동을 그 이전의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왜 토성과 목성과 화성에서 역행의 크기가 다른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또 다른 근거는, 행성의 거리와 회전 주기의 순서가 규칙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코페르니쿠스는 달의 문제를 개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에서는 달이 보이는 각도를 정확하게 내기 위해, 달과 지구의 거리가 크게 변하게 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훨씬 전에 이븐 샤티르가 행한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달의 궤도를 수정했다.

1515년에 레기오몬타누스에 의해 『알마게스트』 전문의 번역이 인쇄본으로 출판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때까지 연구해 왔던 『요약』과 전문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총 34개의 원을 조합하여 행성 운동 모델을 만들고, 조정하면 높은 정확도로 관측과 일치하는 모델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원의 중심 위치, 반지름, 회전 속도 등 100개가 넘는 매개변수를 명시해야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실제로 관측하고, 계산하고, 모델을 검토하는 데 20년 이상의 여가를 보내게 되었다. 1529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수정하기 위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쓰기 시작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죽음 직전에 마침내 그 책이 인쇄 출판되었다.

작가 아서 케스트러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어떤 시대에도 가장 팔리지 않는 최악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천문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오언 진저리치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품고, 현재 남아있는 초판과 2판 601권을 조사했다. 그 결과 당시 저명한 천문학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소장한 책에 상세한 필기가 있어 전문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의 스승인 미하엘 메스트린이 상세한 필기를 남겼다는 것을 확인했다.

16세기에는 관측 수단의 한계로 고대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관측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천문학을 크게 변혁시키지는 못했다.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관측 기록은 정확도가 낮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지동설도 천동설과 비교하여 정확도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1551년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바탕으로 『프러텐 표』를 작성했지만, 이 역시 기존의 항성 목록의 정확도를 개선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이 크게 바뀐 것은 티코 브라헤가 관측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장기간의 관측 데이터를 얻는 데 성공하고, 그 데이터를 이어받은 요하네스 케플러1619년에 행성이 타원 궤도를 그린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이로 인해 1627년에 케플러가 지동설에 기반하여 『루돌프 표』를 완성하고 예측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에서 케플러의 법칙이 성립하기 위한 만유인력을 발표하여 고대의 역학은 완전히 부정되었고, 행성의 운동과 태양계의 구조를 고정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지동설이 완성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발표 후 수십 년 동안은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실체론적 방법"은 우주의 진정한 구조를 찾는 연구의 시작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모순을 명확히 밝히고, 궁극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세계관 자체를 뒤엎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 말이 나중에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도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한 증거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정확도가 높아진 것도 아니었고, 계산에 필요한 원의 수를 줄인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균일한 원운동을 위해 에칸트를 제거했지만, 계산 정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원이 필요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 제1권 7장에서 지구의 운동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먼저 지구가 장소를 바꾸는 운동은 없다고 한 후,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늘이 정지해 있고 지구가, 또는 하늘과 지구 모두가 거의 24시간 주기로 회전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 가설은 천체 현상의 설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지상과 대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하면 우스꽝스럽다"고 한다.[122] 즉,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면 "24시간에 지구의 원을 돌파하는 운동은 매우 맹렬하다"는 것이므로, 그 영향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고, "지구상에 지탱되지 않는 물체는 항상 지구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설이 천체의 겉보기 운동의 설명을 근거로 한다면,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우스꽝스럽다"고 지적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에도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문제 삼아 (논리적인 엄밀성을 위해) 일단의 검토를 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에 대한 주석에서는 맹렬한 지구의 회전은 지구나 지상의 것을 파괴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123]

코페르니쿠스는 후자의 주장에 대해 "만약 누군가가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운동은 자연적인 것이고, 무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무리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작용을 일으킨다."고 반론했다. 그러나 이 반론도 관성의 법칙에 기반한 현대적인 논의가 아니고, "자연적인 운동과 강제적인 운동의 구별"에 의존하고 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등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학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 또한 자신의 운동론을 실험 등으로 합리화하지 않았다.

과학사가 이타쿠라 마사노부(板倉聖宣)는 코페르니쿠스가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일상 경험에 기반한 상식적인 기계론적 사고방식에 반대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의 실체론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코페르니쿠스의 목적이 우주의 진실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면, 천동설과 지동설 중 어느 것이 결정적으로 옳은지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모든 회전의 중심이 아닌 것은, 행성의 겉보기 불규칙 운동과 지구로부터의 거리 변화에 의해 증명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행성의 밝기가 변한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천동설은 주로 천체의 운행을 자세히 계산하려고 하면서, 별의 방위에만 주목하여 주전원을 겹쳐 쌓았다. 그러나 일단 우주의 구조가 문제가 되면, “천체 간 거리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은 저녁에 떠오를 때, 즉 태양과 에 있어 지구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있을 때, 항상 지구에 가장 가까운 것은 확실하다. 반대로 저녁에 질 때, 즉 행성이 태양 근처에 있을 때, 다시 말해 우리가 태양을 행성과 지구 사이에 볼 때 가장 멀다. 이것은 그들의 회전 중심이 오히려 태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금성과 수성이 태양으로부터 일정 각도 이상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천동설에서도 이러한 관측 사실을 어떻게든 설명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제자인 레티쿠스는 “화성의 밝기 변화는 어떤 주전원을 사용하더라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기록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하학적 작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의 참된 구조를 탐구하려고 지동설을 세워 천동설의 오류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서는 행성 간 거리가 관측 결과에 따라 구체적으로 고찰되고, 관측에 의해 행성 간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되어, 행성 간 거리와 태양으로부터의 순서를 결정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사례는 「과학 이론의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이론 선택의 기준은 그 단순성에 있다」는 마하주의의 해석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미 지동설의 단순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천동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기본 이론의 변화는 이론 외부의 계기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다른 이론의 영향으로 생긴다는 설도 들어맞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에게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은 사실에 맞춰 변한다는 실증주의」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관측 사실의 설명에 있어서 대단히 실증적이었으므로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도 「과학자에 의한 이론의 선택은, 원래 합리적인 설명은 할 수 없는 종교적인 개종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는 데 그치고, 이론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타쿠라 마사노부(板倉聖宣)는 「새로운 이론은 낡은 이론의 내부 모순의 검토를 통해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알마게스트의 이론에 일관성의 결여로 인한 모순이 생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지동설에 도달했다. 그 때문에 새로운 이론의 제창자는 종종 낡은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이나 일양원운동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새로운 이론과 낡은 이론은 종종 「둘 다 똑같다」처럼 보이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이론 내부의 모순에 주목함으로써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4. 2. 후대의 평가

토머스 쿤은 코페르니쿠스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라고 평가했다.[136]

괴테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고의 자유와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136]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어 인간중심주의 파산의 발단이 되었다.[136]

코페르니쿠스는 성직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문학에 열정을 바쳤으며, 지구가 하나의 행성임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된다.[137] 그의 우주 모델은 케플러가 행성 운행에 대한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하는 데 바탕이 되었으며, 갈릴레이와 뉴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137]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발표 후 수십 년 동안은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었지만, 그의 "실체론적 방법"은 우주의 진정한 구조를 찾는 연구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모순을 명확히 밝히고, 궁극적으로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세계관 자체를 뒤엎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는 나중에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과학사가 이타쿠라 마사노부(板倉聖宣)는 코페르니쿠스가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상식적인 기계론적 사고방식에 반대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의 실체론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모든 회전의 중심이 아닌 것은, 행성의 겉보기 불규칙 운동과 지구로부터의 거리 변화에 의해 증명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하학적 작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의 참된 구조를 탐구하려고 지동설을 세워 천동설의 오류를 명확히 밝혔다.

4. 3. 태양중심설의 계보

토머스 딕스는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대중 과학 운동가로, 1576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모델을 영어로 소개한 책을 발표했다. 그는 우주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며,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가 무한히 펼쳐진 모델을 제시했다.

튀코의 우주모델


티코 브라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로, 섬에 우라니보르그 천문대를 운영하며 많은 관측을 수행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절충안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지구는 우주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
  •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
  • 다른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

그는 자신의 모델을 통해 지구의 움직임을 부정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독일의 천문학자로,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일하며 우주를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는 행성 운동에 대한 케플러의 3법칙을 발표했다.

'Mysterium Cosmographicum'(1600)에 등장한 케플러의 우주모델


<케플러 3법칙>

  • 제 1법칙: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따라 돈다.
  • 제 2법칙: 태양과 행성을 연결하는 선은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을 휩쓴다.
  • 제 3법칙: 행성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과의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케플러는 1619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는 책을 발표했다.[138]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망원경을 발명하여 목성의 위성, 금성의 위상 변화 등을 관측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는 증거였으나, 그는 종교 재판을 받기도 했다.

아이작 뉴턴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행성 궤도를 설명했으며, 제임스 브래들리광행차 발견(1727), 프리드리히 베셀의 연주시차 검증 등으로 태양중심설이 확립되었다.

5. 논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현재의 태양계 구조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구조와 비슷하게 우주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놓았지만, 원형 궤도, 주전원, 이심 등 지구 중심적 구조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코페르니쿠스 체계(Copernican system)라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은 행성 배열 순서와 주기, 행성들의 역행 운동 등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의 몇 가지 문제점을 해결했다. 하지만 천구 개념, 등속원운동에 대한 집착 등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1514년 이전,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지동설을 간략하게 설명한 "코멘타리올루스" ("작은 논평")라는 필사본을 친구들에게 공개했다. 이 필사본에는 지동설의 기초가 되는 일곱 가지 가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1543년에 출판되었으며, 지동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 구면 천문학의 원리와 별 목록, 태양의 겉보기 운동, 달의 운동, 비지구적 행성의 경도 및 위도 운동 등을 다루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국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는 폴란드 왕국왕령 프로이센 토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크라쿠프 출신, 어머니는 토룬 출신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가문은 실레시아 지역에서 기원하여 크라쿠프, 토룬 등으로 이주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 독일어, 폴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도 구사했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당시 학계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쓰여졌다.

일부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를 "폴란드 천문학자"로 칭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를 "독일 가정의 자녀이자 폴란드 왕관의 신민"으로 묘사한다. 현대적 의미의 국적 개념을 르네상스 시대 인물에게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을 "프로이센" 사람으로 여겼던 지역 애국자였으며, 국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했다는 견해도 있다. 결론적으로, 코페르니쿠스는 독일 문화적 배경을 가졌지만, 당시 관행에 따라 라틴어를 사용했고, 폴란드어를 알았다는 증거도 있다. 그는 독일계 폴란드인으로 정리되고 있다.

5. 1.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코페르니쿠스는 가톨릭 사제였으며, 생전에는 가톨릭 교회와 직접적인 갈등은 없었다. 그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에게 헌정되었다.[135]

로마 교황청은 1616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렸는데, 이는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여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135] 그러나 이 책은 수정 후 열람이 허용되었다.[135]

갈릴레오 재판 이후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따르는 것, 즉 성경의 참된 의미와 권위에 반하는 것"으로 인해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여생 동안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83][84]

1758년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금서 목록에서 해제되었다.[135]

5. 2. 개신교의 반응

마르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영리해지려면 다른 사람들이 존중하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천문학 전체를 뒤집으려는 '그 녀석'이 하는 일이다. 나는 성경을 믿는다. 여호수아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멈추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요한 아우리파베르의 대화 기록에 따르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그 바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역사가들에게 덜 신뢰받는 자료로 여겨진다.

필립 멜랑히톤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문제를 제기했다. 레티쿠스에게서 『나라티오 프리마』의 첫 페이지를 받은 후, 1541년 10월 16일 미토비우스에게 편지를 써서 이 이론을 비난하고 정부의 힘으로 억압할 것을 촉구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폴란드 천문학자처럼 그렇게 미친 일을 칭찬하는 것이 놀라운 업적이라고 믿는다. 현명한 정부는 마음의 무례함을 억압해야 한다"라고 썼다.[70] 멜랑히톤은 『물리학 교리의 시작』을 출판하여 "감각의 증거, 천 년 동안의 과학자들의 합의, 그리고 성경의 권위"라는 세 가지 근거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거부했다.

장 칼뱅은 『창세기 주석』에서 "우리는 하늘의 순환이 유한하고 지구가 마치 작은 구체처럼 중앙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68] 시편 93:1에 대한 주석에서 "하늘은 매일 회전하고, 그 구조가 얼마나 거대하고 그 회전 속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만, 우리는 충격을 경험하지 않는다... 지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중에 매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위의 하늘이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어떻게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유지될 수 있겠는가? 창조주가 그것을 고정하고 확립하지 않았다면 말이다"라고 말했다.[69]

존 오웬은 안식일에 대한 에세이에서 "세계의 중심에 태양을 고정하는 최근 가설"을 "오류에 찬 현상에 기초하고 성경의 명백한 증언에 반하는 많은 임의의 추정으로 제기되었다"고 비판했다.[72]

5. 3. 국적 논쟁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왕국왕령 프로이센에 속한 도시 토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크라쿠프 출신의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토룬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가문은 실레시아의 니사와 프루드니크(Prudnik) 사이의 마을에서 기원하며, 여러 실레시아 도시들과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1367년), 토룬(1400년)으로 이주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는 단치히에서 구리를 주로 판매하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1458년경 크라쿠프에서 토룬으로 이주했다. 당시 토룬은 13년 전쟁에 휘말려 있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는 폴란드와 도시들을 튜턴 기사단에 맞서 지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외삼촌인 루카스 바첸로데(Lucas Watzenrode the Younger)는 튜턴 기사단의 격렬한 반대자였으며,[11] 튜턴 기사단의 대장은 그를 "화신된 악마"라고 불렀다.[12] 바첸로데는 바르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여겨졌으며, 그의 부와 인맥, 영향력으로 코페르니쿠스의 교육과 경력을 지원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 독일어, 폴란드어를 똑같이 유창하게 구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도 구사했다.[85][86][87] 코페르니쿠스의 기존 저술 대부분은 당시 유럽 학계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쓰여졌다.

코페르니쿠스의 국적에 대한 논쟁은 현대적 의미에서 그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것이 의미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왕국의 반자치적이고 다언어 지역인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나 자랐다.[94][95] 그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부모의 자녀였으며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자랐다.[96][97][98] 그의 첫 번째 ''알마 마테르''는 폴란드의 크라쿠프 대학교였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콜럼비아 간결 백과사전'',[102] ''옥스포드 세계 백과사전'', 및 ''월드 북 백과사전''은 코페르니쿠스를 "폴란드 천문학자"로 언급한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글을 쓴 쉴라 라빈(Sheila Rabin)은 코페르니쿠스를 "독일 가정의 자녀이자 폴란드 왕관의 신민"으로 묘사한다.

역사가 마이클 버리는 국적 논쟁을 전간기 동안 독일과 폴란드 학자들 사이의 "전혀 중요하지 않은 논쟁"으로 묘사한다.

체스와프 미워시는 이 논쟁을 현대적인 국적 이해를 르네상스 사람들에게 투영한 "불합리한" 것으로 묘사하며, 그들은 국가가 아닌 고향 지역과 동일시했다. 마찬가지로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것처럼 코페르니쿠스는 국적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으며 자신을 "프로이센" 사람으로 여겼던 지역 애국자였다고 썼다.

결론적으로 코페르니쿠스는 독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관행에 따라 그의 작업 언어는 라틴어였다. 또한, 그가 폴란드어를 알았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데이비스는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를 독일인이자 폴란드인으로 간주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현대 민족주의자들이 이해하는 의미에서 그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나치가 세력을 휘두르던 시대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인인지 독일인인지가 큰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현재는 “다민족 국가폴란드 왕국의 국민(즉 국적은 폴란드인)이며, 크라쿠프 대학교를 졸업하는 등 폴란드 교육을 받았고, 이 지역의 독일어 방언을 모어로 하는 가계( 민족은 독일인) 출신의 인물”, 즉 “독일계 폴란드인”으로 정리되고 있다.

6. 기념

크라쿠프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기념상


프롬보르크 대성당 앞 코페르니쿠스 동상


코페르니쿠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다양한 것들이 있다.

  • 화학 원소 112번 원소 코페르니슘(Cn)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의 크레이터 코페르니쿠스
  • 소행성 1322 코페르니쿠스
  • 폴란드 1000 즈워티 지폐에 초상 사용
  • 토룬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대학교
  • 바르샤바 코페르니쿠스 과학센터
  • 헨리크 구레츠키교향곡 제2번 '코페르니쿠스 당'
  • 남아메리카와 대앤틸레스 제도가 원산지인 야자수 속인 코페르니시아속(Copernicia)은 1837년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궤도 천문대(Orbiting Astronomical Observatory) 시리즈 세 번째 임무였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1972년 8월 21일 발사 후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 2014년 7월, 국제천문연맹(IAU)은 특정 외계행성과 그 모항성에 고유 이름을 부여하는 NameExoWorlds 프로세스를 시작했다.[105] 2015년 12월, IAU는 55 Cancri A에 대한 당선된 이름이 코페르니쿠스라고 발표했다.[107]
  • 바르샤바에 있는 바르샤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기념비(베르텔 토르발트센(Bertel Thorvaldsen) 설계, 1822년 설계, 1830년 완공)
  • 얀 마테이코가 1873년에 그린 그림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또는 신과의 대화''
  •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산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천문센터
  • 우치의 코페르니쿠스 병원
  • 폴란드 과학 재단(Foundation for Polish Science)과 독일 연구 재단(German Research Foundation)은 폴란드-독일 과학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 상을 공동으로 제정하였다.
  •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을 멈춘 자(Mover of the Earth, Stopper of the Sun) (Svitlana Azarova 작곡), ONDIF 위촉.[108][109]
  • 코페르니쿠스 박사(Doctor Copernicus) (John Banville, 1975년 소설)
  • 궤도: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Orb: On the Movements of the Earth) (2020년 일본 만화 시리즈, 이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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