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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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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광은 공자의 14대 손으로, 전한 시대의 관료이다. 경서에 밝아 젊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여 승상, 대사도, 태사 등을 역임했다. 성제, 애제 시기에 중용되었으나, 왕망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견제를 받았다. 말년에는 태부로 임명되었으며, 왕망의 위협 속에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시 5년에 사망하여 간열후의 시호를 받았다.

2. 생애

영시 2년(기원전 15년) 적방진을 대신해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수화 연간, 후사가 없던 성제는 중산효왕과 정도왕 유흔 중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 승상 적방진, 대사마표기장군 왕근, 우장군 염포, 후장군 주박과 공광을 불러 상의했다. 모두 유흔을 지지했으나, 공광만은 중산효왕을 지지했다. 성제는 유흔을 후계자로 선택했고, 공광은 의론이 뜻에 맞지 않아 정위로 좌천되었다.

공광은 정위로서 법령에 밝고 공정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순우장 사건에 연루되어 염포와 주박이 파면되자, 공광이 좌장군이 되었다. 수화 2년(기원전 7년) 적방진이 자결하자, 공광이 후임 승상으로 선택되었다. 취임식 준비가 완료되어 인수를 받기 직전 성제가 급사하여, 그날 밤 성제 시신 앞에서 승상·박산(博山侯) 인수를 받았다.

애제 즉위 후, 검약을 실천하고 직접 정무를 맡았다. 그러나 애제의 할머니 부태후에게 위협받았고, 황태후 칭호를 얻으려는 부태후에게 대사공 사단과 함께 반대했지만, 사단은 파면되고 부태후와 연계하던 주박이 취임했다. 공광은 참언으로 열후 작위를 빼앗기고 파면되어,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후임 승상 주박은 죄를 지어 자결했고, 다음 승상 평당은 병사했다. 그다음 승상 왕가는 애제와 대립했다. 모두 공광만 못하다는 평을 들었고, 애제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정월 초하루 일식이 있은 지 열흘쯤 지나 부태후가 사망했다. 애제는 공광을 불러 일식에 대해 질문했고, 공광은 재이를 경계 삼아 정무에 힘써야 한다고 진언했다. 애제는 기뻐하며 공광을 광록대부·급사중으로 삼았다. 한 달 정도 후, 승상 왕가가 옥사하고, 어사대부 가연이 파면되자, 공광은 다시 어사대부가 되었고, 이어서 승상으로 복귀하여 박산후에 봉해졌다.

원수 2년(기원전 1년), 삼공의 관직을 정비하면서 승상을 대사도로 개칭했다. 직후 애제가 훙거하고, 태황태후 왕정군과 왕망에 의해 중산왕이 평제로 옹립되면서 정치는 왕망에게 넘어갔다. 왕망은 태후 왕씨가 공광을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공격하려는 자가 있으면 공광에게 상주하도록 시사했다. 왕망의 권력이 커지자 공광은 사직을 청했지만, 왕망은 태후 왕씨에게 "황제가 어리므로 스승이 필요하다"라고 아뢰었고, 공광은 태부로 임명되어 급사중이 되었고, 금중(禁中)의 숙위(宿衛)와 문호(門戸)를 관할했다. 원시 원년(1년)에는 태사로 승진했고, 왕망은 태부가 되었다. 공광은 병을 핑계로 왕망과 나란히 하려 하지 않았다. 왕망은 공광에게 자신의 덕을 칭송하고 재형(宰衡)으로 삼도록 상주할 것을 시사했고, 공광은 두려워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왕태후는 이를 만류했다.

원시 5년(5년)에 70세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왕봉과 동등하게 하였으며, 열후(簡烈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산후(博山侯)는 아들 공방이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공자의 14대 손이며 공패(孔覇)의 아들이다. 경서에 밝았으며 스무 살도 되지 않아 천거되어 의랑(議郎)이 되었다. 광록훈 광형이 그를 방정(方正)으로 천거하였으며,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가 의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홍(虹長)으로 좌천되었고,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경서를 가르쳤다. 성제가 즉위하고 다시 추천되어 박사가 되었고, 원통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이나 각지의 풍속을 시찰하고 유민에게 베푸는 사자의 역할을 완수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름을 얻었다. 공광이 상서(尙書)가 되어 성제는 그를 특별히 신뢰하였고 상서복야(尙書僕射)·상서령(尙書令)으로 승진하였다. 제리광록대부급사중(諸吏光錄大夫給事中)으로 승진하고 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었다. 후에 영상서사·급사중으로써 광록훈이 되었다.

황제의 질문에 대해서도 말로 영합하지 않고 경서에 근거를 두고 대답하였으며, 따르지 않는 것이 있어도 강하게 간쟁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누군가를 천거할 때도 자신이 했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휴가 때에 가족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도 정치에 대한 것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조정의 일은 어떠한 사소한 일이라 해도 누설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문목(問木)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2. 2. 성제 시기의 활동

공자의 14대 손이자 공패의 아들이다. 경서에 밝았으며, 20세도 되기 전에 천거되어 의랑(議郎)이 되었다. 광록훈 광형이 그를 방정(方正)으로 천거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으나,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홍(虹長)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경서를 가르쳤다. 성제가 즉위하고 다시 추천되어 박사가 되었고, 원통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이나 각지의 풍속을 시찰하고 유민에게 베푸는 사자의 역할을 완수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름을 얻었다. 공광이 상서(尙書)가 되자 성제는 그를 특별히 신뢰하였고 상서복야(尙書僕射)·상서령(尙書令)으로 승진시켰다. 광록대부급사중(諸吏光錄大夫給事中)으로 승진하고 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었다. 후에 영상서사·급사중으로써 광록훈이 되었다.

황제의 질문에 대해서도 말로 영합하지 않고 경서에 근거를 두고 대답하였으며, 따르지 않는 것이 있어도 강하게 간쟁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누군가를 천거할 때도 자신이 했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휴가 때에 가족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도 정치에 대한 것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조정의 일은 어떠한 사소한 일이라 해도 누설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영시 2년(기원전 15년) 적방진을 대신해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수화 연간에 후사가 없던 성제가 자신의 동생인 중산효왕과 조카인 정도왕 유흔 가운데 후계자를 결정하려 할 때, 승상 적방진·대사마표기장군 왕근·우장군 염포·후장군 주박과 공광을 불러 그들과 상담하였다. 모두 유흔을 지지하였으나 공광만은 중산효왕을 지지하였으며, 성제가 유흔을 후계자로 선택하면서 공광은 의론이 그의 뜻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위로 좌천되었다.

공광은 정위로써 법령에 밝았고 공정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순우장 사건에 연좌되어 염포·주박이 파면되고, 그들을 대신해 공광이 좌장군이 되었다. 수화 2년(기원전 7년)에 적방진이 자결하고 공광이 적방진의 후임으로써 신임 승상으로 선택되었다. 취임 의식의 준비가 모두 갖추어지고 인수(印綬)를 받기만 하면 되는 때에 성제가 급서하는 바람에 그날 밤 성제의 시신 앞에서 승상·박산(博山侯)의 인수를 받아야 했다.

2. 3. 애제 시기의 활동

공자의 14대 손이자 공패의 아들인 공광은 경전에 밝아 20세도 되기 전에 천거되어 의랑(議郎)이 되었다. 광록훈 광형이 그를 방정(方正)으로 천거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아 홍(虹長)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성제가 즉위하자 다시 천거되어 박사(博士)가 되었고, 억울한 사건과 각지의 풍속을 시찰하고 유민에게 베푸는 사자(使者)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성제는 공광을 상서(尙書)로 임명하고 특별히 신뢰하여 상서복야(尙書僕射)·상서령(尙書令)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제리광록대부급사중(諸吏光錄大夫給事中)으로 승진하고 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었다. 후에 영상서사·급사중 직책을 유지하며 광록훈이 되었다.

공광은 황제의 질문에 경서에 근거하여 대답하였고, 말로 영합하지 않았으며, 따르지 않는 것이 있어도 강하게 간쟁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를 천거할 때도 자신이 했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휴가 때 가족과 이야기할 때도 정치에 대한 것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조정의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누설하지 않았다.

영시 2년(기원전 15년), 적방진을 대신해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수화 연간, 후사가 없던 성제가 중산효왕과 정도왕 유흔 중 후계자를 결정하려 할 때, 승상 적방진, 대사마표기장군 왕근, 우장군 염포, 후장군 주박과 공광을 불러 상담하였다. 모두 유흔을 지지하였으나 공광만은 중산효왕을 지지하였으며, 성제가 유흔을 후계자로 선택하면서 공광은 의론이 뜻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위로 좌천되었다.

공광은 정위로서 법령에 밝고 공평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순우장 사건에 연좌되어 염포·주박이 파면되자, 그들을 대신해 공광이 좌장군이 되었다. 수화 2년(기원전 7년), 적방진이 자결하자 공광이 후임 승상으로 선택되었다. 취임식 준비가 완료되고 인수(印綬)를 받기만 하면 되는 때에 성제가 급서하여, 그날 밤 성제 시신 앞에서 승상·박산(博山侯) 인수를 받아야 했다.

애제 즉위 후, 검약을 실천하고 직접 정무를 맡았다. 그러나 애제 할머니 부태후에게 위협받았으며, 황태후 칭호를 얻으려는 부태후에게 대사공 사단과 함께 반대하였으나 사단은 파면되고 부태후와 연계하던 주박이 취임하였다. 공광은 참언으로 열후 작위를 빼앗기고 파면되어,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후임 승상 주박이 죄를 얻어 자결하고 다음 승상 평당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다음 왕가는 애제와 대립하였다. 모두 공광만 못하다는 평을 들었고, 애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다.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정월 초하루 일식이 있은 지 열흘쯤 지나 부태후가 사망하였다. 공광이 소환되어 일식에 대해 묻는 애제에게 재이를 교훈 삼아 정무에 힘써야 한다고 진언하자, 애제는 기뻐하며 공광을 광록대부·급사중으로 삼았다. 한 달도 안 되어 승상 왕가가 옥사하고 어사대부 가연도 파면되어, 공광이 다시 어사대부가 되었고 이어 승상으로 복귀, 박산후에 봉해졌다.

이듬해 원수 2년(기원전 1년), 삼공 관직을 정하고 승상을 대사도(大司徒)로 개칭하였다. 직후 애제가 서거하고 왕정군과 왕망에 의해 중산왕이 평제로 추대되어 정치는 왕망에게 넘어갔다. 왕망은 왕태후가 공광을 존경함을 알고 공격하려는 자가 있으면 공광에게 상주하도록 시사하였다. 왕망 권력이 강성해지자 공광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망은 왕태후에게 황제가 어려 스승이 필요하다고 아뢰었고, 공광은 태부로 취임되고 급사중이 되어 금중 숙위와 문호를 관할하였다. 원시 원년(1년) 태사로 승진되고 왕망은 태부가 되었다. 공광은 병을 칭하며 왕망과 한자리에 있지 않았다. 왕망은 공광에게 덕을 기리고 재형(宰衡)으로 삼아줄 것을 상주하도록 시사하였고 공광은 두려워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태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광은 원시 5년(5년)에 70세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왕봉과 동등하게 하였으며, 열후(簡烈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산후(博山侯)는 아들 공방(孔放)이 이었다.

2. 4. 평제 시기와 왕망의 견제

영시 2년(기원전 15년)에 적방진을 대신하여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수화 연간, 후계자가 없는 성제가 동생 중산효왕과 조카 정도왕 유흔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하려 할 때, 승상 적방진, 대사마표기장군 왕근, 우장군 염포, 후장군 주박과 공광을 불러 상의했다. 모두 정도왕 유흔을 지지했지만, 공광만 중산효왕을 지지했다. 성제는 정도왕 유흔을 선택했고, 공광은 논의가 뜻에 맞지 않아 정위로 좌천되었다.

공광은 정위에 있으면서도 법령에 밝고 공정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순우장 사건에 연루되어 염포와 주박이 파면되자, 그들을 대신하여 공광이 좌장군이 되었다. 수화 2년(기원전 7년), 승상 적방진이 자살하자, 공광이 후임으로 선택되었다. 취임 준비가 완료되어 인수(印綬)를 받기만 하면 되는 시점에 성제가 급사했기 때문에, 그날 밤 성제의 시신 앞에서 승상·박산후 인수를 받았다.

황태자로 세워졌던 정도왕 유흔이 애제로 즉위하자, 검약을 몸소 실천하고, 스스로 정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애제의 할머니 부태후에게 자주 위협받았고, 황태후 칭호를 얻으려는 부태후에게 대사공 사단과 함께 반대했지만, 사단은 파면되고 부태후와 은밀히 연결되어 있던 주박이 취임하자, 공광은 참소당하여 열후 작위를 빼앗기고 파면되었다. 공광은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후임 승상 주박은 죄를 지어 자결했고, 다음 승상 평당은 곧 병사했다. 그다음 승상 왕가는 애제와 대립했다. 모두 공광만 못하다는 평을 들었고, 애제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정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고, 열흘 정도 지나 부태후가 사망했다. 이에 공광을 불러 애제가 일식에 대해 질문했다. 공광은 이 재앙을 경계 삼아 정무에 힘써야 한다고 진언했고, 애제는 기뻐하며 공광을 광록대부·급사중으로 삼았다. 한 달 정도 후, 승상 왕가가 옥사하고, 어사대부 가연이 파면되자, 공광이 다시 어사대부가 되었고, 이어서 승상으로 복귀하여 박산후에 봉해졌다.

원수 2년(기원전 1년), 삼공의 관직을 정비하면서 승상을 대사도로 개칭했다. 직후 애제가 훙거하고, 태황태후 왕정군과 왕망에 의해 중산왕이 평제로 옹립되면서 정치는 왕망에게 넘어갔다. 왕망은 태후 왕씨가 공광을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공격하려는 자가 있으면 공광에게 상주하도록 시사했다. 왕망의 권력이 날마다 커지는 것을 보고 공광은 사직을 청했지만, 왕망은 태후 왕씨에게 "황제가 어리므로 스승이 필요하다"라고 아뢰었고, 공광은 태부로 임명되어 급사중이 되었고, 금중(禁中)의 숙위(宿衛)와 문호(門戸)를 관할했다. 원시 원년(1년)에는 태사로 승진했고, 왕망은 태부가 되었다. 공광은 항상 병을 핑계로 왕망과 나란히 하려 하지 않았다. 왕망은 공광에게 자신의 덕을 칭송하고 재형(宰衡)으로 삼도록 상주할 것을 시사했고, 공광은 두려워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왕태후는 이를 만류했다.

3. 평가

공광은 황제의 질문에 말로 영합하지 않고 경서에 근거를 두고 대답했으며, 황제가 따르지 않는 것이 있어도 강하게 간쟁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를 천거할 때도 자신이 했다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휴가 때에 가족과 이야기할 때도 정치에 대한 것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조정의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누설하지 않았다. 이는 문목(問木)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애제는 즉위 후 검약을 몸소 실천하고 직접 정무를 맡았다. 그러나 애제의 할머니 부태후에게 종종 위협을 받았으며, 황태후 칭호를 얻으려는 부태후에게 대사공 사단과 함께 반대하였으나 사단은 파면되고 부태후와 물밑에서 연계하고 있던 주박이 취임하였다. 공광은 참언으로 인해 열후의 작위를 빼앗기고 파면되어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후임 승상 주박이 죄를 얻어 자결하고 다음 승상이 된 평당은 곧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다음 승상인 왕가는 애제와 대립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 모두 공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고, 애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다.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는데, 열흘 정도 지나서 부태후가 사망하였다. 애제는 공광을 소환하여 일식에 대해 물었고, 공광은 이러한 재이를 교훈삼아 더욱 정무에 힘써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애제는 기뻐하며 공광을 광록대부·급사중으로 삼았다. 한 달도 안 되어 승상 왕가가 옥사하고 어사대부 가연도 파면되자, 공광은 다시 어사대부가 되었고 이어 승상으로 복귀하여 박산후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원수 2년(기원전 1년)에 삼공의 관직을 정하면서 승상에서 대사도(大司徒)로 개칭되었다. 그 직후 애제가 서거하고 태황태후(太皇太后) 왕정군과 왕망에 의해 중산왕이 황제(평제)로 추대되면서 정치는 왕망에게 넘어갔다. 왕망은 태후 왕씨가 공광을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공광에게 상주하도록 시사하였다. 왕망의 권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공광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망은 태후 왕씨에게 황제의 나이가 어려 스승이 필요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공광은 태부로 취임되고 급사중이 되어 금중의 숙위나 문호를 관할하였다. 원시 원년(1년)에는 태사로 승진되고 왕망은 태부가 되었다. 공광은 평소 병을 핑계로 왕망과 한 자리에 나란히 있지 않았다. 왕망은 공광에게 자신의 덕을 기리고 재형(宰衡)으로 삼아줄 것을 상주하도록 시사하였고, 공광은 두려워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태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잡아두었다.

공광은 원시 5년(5년)에 일흔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왕봉과 동등하게 하였으며, 열후(簡烈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산후(博山侯)는 그의 아들 공방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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