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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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669년 로마에서 태어나 715년부터 731년까지 재위한 인물이다. 그는 랑고바르드족과의 외교를 통해 교황령의 기반을 다지고, 독일 선교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동로마 제국의 성상 숭배 금지령에 반대하며 황제와 대립했으며, 교황령의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툴루즈 전투에서 기적을 일으킨 인물로도 알려져 있으며, 사후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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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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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그레고리오 2세 |
본명 | 그레고리우스 사벨루스 |
직함 | 로마 주교 |
교회 | 가톨릭교회 |
재임 시작 | 715년 5월 19일 |
재임 종료 | 731년 2월 11일 |
선임자 | 콘스탄티노 |
후임자 | 그레고리오 3세 |
출생일 | 669년 |
출생지 |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 로마 |
사망일 | 731년 2월 11일 (약 62세) |
사망지 |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 로마 |
축일 | 2월 11일 |
숭배 | 가톨릭교회 |
상징물 | 교황 예복 팔리움 |
기타 | 그레고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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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초기
669년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2] 부친의 이름은 마르첼로, 모친의 이름은 호네스타이다.[3] 15세기 기록에 의하면, 그레고리오 2세는 로마의 사벨리 가문의 비직계 조상이라고 전해지지만,[56] 당시 서류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7세기에 재임한 교황 베네딕토 2세가 그의 먼 친척이라고 전해지지만, 역시 두 사람 사이의 혈족 관계를 증명할 길이 없어서 신뢰성이 거의 없다.
로마 출신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부제와 사서를 역임했다. 선대 교황 콘스탄티노의 측근으로 동로마 제국과의 화해 교섭에서 활약했으며, 콘스탄티노가 715년 4월 9일에 사망하자 715년 5월 19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25]
로마 출신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리우트프란트와 교섭하여 로마의 약탈과 침략을 중단시켰다.[26]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3세가 이탈리아 지배지에 중과세를 부과하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며 대립했다.[87]
그는 젊은 시절 교황청에 들어가,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 재위 기간 동안 부제와 사첼라리우스가 되었다. 이후 부제가 되어 바티칸 도서관을 관리하게 되었다.[5] 교황 콘스탄티노 재위 기간 동안 그레고리오는 교황 비서가 되었고, 711년 교황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로마가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교회법을 거부한 문제들을 처리했다.[6] 논쟁의 여지가 있는 조항에 대한 실제 협상은 그레고리오가 처리했으며, 그 결과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교황청이 공의회의 결정 중 원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7]
3. 교황 선출
4. 재임 기간의 주요 활동
레오 3세는 726년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리고 성상 파괴 운동을 시작했으며,[90] 그레고리오 2세에게도 이를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2세는 이탈리아 북부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아 이를 거부하고 계속 대립했다.[91]
그레고리오 2세는 727년 성상 파괴 운동을 비판하는 시노드를 소집했다.[94] 그는 레오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의 교회 문제 간섭과 황제교황주의를 비판하며, 성화상은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지 숭배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의 교리는 황제가 아닌 주교들이 다룰 문제라고 강조했다.[96]
729년에는 수트리에서 리우트프란트와 회담을 갖고, 리우트프란트에게서 수트리와 라티움의 일부 언덕을 기증받았다. 이를 ‘수트리 기증’이라고 부르며,[86] 이는 교황령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4. 1. 전교 활동 활성화
그레고리오 2세는 즉위하자마자 티부르티나 문에서부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보수 공사를 시작했다.[57] 그러나 716년 테베레 강이 범람하여 로마 시내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공사가 연기되었다. 강물은 8일이 지나서야 잦아들었다.[57] 그레고리오 2세는 강물이 캄푸스 마르티우스를 넘어 캄피돌리오 언덕까지 이르자 이를 막기 위해 많은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60]
그레고리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6세로부터 단의설을 지지하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답신을 통해 요한 6세의 주장이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과 다르다고 지적하였다.[61]
716년 그레고리오 2세는 테오도 공작을 만나 바이에른 지역의 기독교 개종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는 테오도와 협력하여 바이에른에 지역 교회를 세우고 교계 제도를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62] 726년에는 코르비니아노에게 프라이징의 주교직을 맡도록 지시하였다.[63]
그레고리오 2세는 독일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718년 앵글로색슨족 출신 선교사 빈프리드가 독일 선교를 자원하자,[64] 그에게 보니파시오라는 새 이름을 주고 719년 5월 설교 권한을 부여하여 독일에 파견하였다.[65] 722년 보니파시오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의 가르침에 대한 해명을 듣고, 서면으로 신앙 고백을 받은 후 주교로 서품하여 다시 독일로 보냈다.[68] 724년 12월에는 보니파시오에게 축하와 격려의 서신을 보냈고, 726년 11월에는 독일 교계 제도 구성에 대한 자문에 답하였다.[69]
그레고리오 2세는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 교회에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726년에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온 이느 왕을 맞이하였다.[70]
4. 2. 지역 교회 활동
그레고리오 2세는 수도원 설립 및 재건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로마에 있는 자기 가문 소유의 대저택을 수부라의 성 아가타 수녀원에 기증하고, 미사 때 사용할 귀한 재료로 만든 제구들을 기증하였다.[71] 또한, 산테우타키오 성당을 건설하여 축성하였다.[72] 718년에는 584년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 파괴된 채 남아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복원했으며, 볼투르노에 있는 성 빈첸시오 수도원의 아빠스 면직 논쟁을 중재하였다.[73]
721년 그레고리오 2세는 불법 혼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로마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723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와 그라도 총대주교 간의 오랜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 그레고리오 2세는 롬바르드족의 왕 리우트프란드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레노를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로 서임하고 팔리움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도 총대주교 도나토에게서 세레노 총대주교가 그라도 총대주교 관할 지역에까지 간섭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74] 그레고리오 2세는 도나토 총대주교를 질책하였다.[75] 725년 도나토 총대주교가 선종하자 폴라의 주교 베드로가 그라도 총대주교 자리에 불법으로 앉았다. 그레고리오 2세는 베드로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법에 따라 새 주교를 선출하라는 칙서를 그라도 총대교구와 폴라 교구에 보냈다. 이에 따라 안토니오를 새 주교로 선출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76]
그레고리오 2세는 교회 내 여러 관습을 제정하였는데, 특히 사순 시기 목요일마다 단식할 것을 지시하였다. 과거 유피테르를 숭배한 이교도들이 목요일에 금식했기 때문에 이전 교황들은 목요일 금식을 좋아하지 않았다.[77] 그레고리오 2세는 일요일까지 지냈었던 사순 시기를 목요일까지로 지내기로 규정하였다.[78]
4. 3. 랑고바르드족과의 관계
그레고리오 2세는 랑고바르드족, 특히 리우트프란트 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716년 4월 리우트프란트가 선왕 아리페르트 2세가 로마 교회에 넘긴 코티엔느 산맥을 도로 가져가려고 하자, 그레고리오 2세가 그를 설득하여 단념하게 했다.[79][26] 그러나 베네벤토 공국을 통치하던 로무알드 2세는 정복주의자였으며, 나폴리로부터 로마를 떼어놓기 위해 717년 큐메를 정복하여 전쟁이 재개되었다.[80][27] 그레고리오 2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징벌이 내릴 것이라는 위협과 더불어 뇌물까지 제공했지만, 로무알드 2세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그레고리오 2세는 요한네스 1세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가 큐메를 탈환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다.[81][28]
같은 해 스폴레토의 파로알드 2세 공작이 라벤나의 항구를 점령했다. 그레고리오 2세는 리우트프란트를 중개인으로 내세워 파로알드가 라벤나의 항구를 라벤나 총독에게 돌려주라고 강권했다.[82][29]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은 점점 거세져갔고 제국의 영토는 매년 빼앗겨가는 정세가 지속되자, 721년경 그레고리오 2세는 프랑크족인 카를 마르텔에게 랑고바르드족을 축출해줄것을 요청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83][30] 723년 리우트프란트가 발행한 법(제33호)은 어머니 또는 아버지 쪽 사촌의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 시의 교황"이 이 법률을 발행하도록 권고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명시했는데,[31] 이는 그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우호적인 의사 소통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이 이어졌고, 725년 나르니의 요새마저 랑고바르드족에게 넘어갔다.
727년경, 라벤나 총독부에 동로마 황제의 성화상 파괴 명령이 하달되면서 큰 혼란이 일어남과 더불어 랑고바르드족이 펜타폴리스를 침략하여 점령한 후, 파괴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84][32] 펜타폴리스는 728년에 재탈환되었지만, 이후로도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족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729년까지 이어졌다. 그레고리오 2세는 리우트페란트와 동로마 총독 에우티키우스 사이에 중재자로 나서서 두 세력 간의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성과를 얻어냈다.[85][33] 그레고리오 2세와 리우트페란트는 729년 고대 도시 수트리에서 회담을 가졌다. 회담 결과, 리우트페란트는 수트리와 라티움(베트랄라)의 일부 언덕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는데, 이를 ‘수트리 기증’이라고 부른다.[86][34] 이로써 기존의 로마 공국으로 제한되었던 교황의 영토가 처음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곧 교황령의 시작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4. 4.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
레온 3세는 동로마 제국-아랍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탈리아 내 교황령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고, 비상시를 대비한 교황의 비축 재산까지 징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2세는 로마 시민들의 곡물 수입 의존을 우려하여 교회 재산을 로마 자체 곡물 생산에 사용하고자 했다.[87] 그레고리오 2세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시민들에게 호소하여 로마에서 동로마 제국 통치를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레온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군대 파견을 지시했지만,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 실행되지 못했다.[88]
7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로마 공국의 지도자 마리노스는 그레고리오 2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바실리우스 공작, 요르다네스, 차부제 루리온 등이 가담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89]
726년, 레온 3세는 성화상 제작 및 소유 금지 칙령을 발표했다.[90] 그레고리오 2세는 즉시 이 칙령을 거부했다.[91] 라벤나 총독부와 펜타폴리스 공국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파울로스 총독을 살해하고 새 황제를 선출하려 했지만,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에 대항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92] 나폴리에서는 엑스힐라라투스와 그의 아들 하드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 편에서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려 했지만, 시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93]
727년, 그레고리오 2세는 성상 파괴 운동을 비판하는 시노드를 소집했다.[94] 성 테오파네 등 그리스 작가들은 그레고리오 2세가 레온 3세를 파문했다고 기록했지만, 《교황 연대표》 등 서방 문헌들은 이를 뒷받침하지 않았다.[95]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의 교회 문제 간섭과 황제교황주의를 비판하며, 성화상은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며, 성화상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어린이들도 황제의 주장을 비웃을 것이라며, 교회의 교리는 황제가 아닌 주교들이 다룰 문제라고 강조했다.[96]
728년, 레온 3세는 새 총독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하여 교황과 로마 귀족들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랑고바르드족 왕과 공작들에게 교황에게 반대할 것을 부추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98] 그레고리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지지했다. 레온 3세의 압력으로 게르마노스 1세가 물러나고 아나스타시오스가 새 총대주교가 되었지만, 그레고리오 2세는 그와 성상 파괴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99]
729년, 에우티키오스는 랑고바르드 왕 리우트페란트와 동맹을 맺고 스폴레토 공작과 베네벤토 공작을 복종시킨 후 로마로 향했다.[100] 그러나 그레고리오 2세는 리우트페란트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위협하여 동맹을 깨뜨렸다. 이후 에우티키오스는 그레고리오 2세와 불편한 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그레고리오 2세는 랑고바르드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일시적인 휴전 관계를 구축하였다.[101] 730년, 티베리우스 페타시우스가 토스카나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레고리오 2세의 지원을 받은 에우티키오스 총독에 의해 진압되었다.[102]
5. 툴루즈 전투에서의 기적
그레고리오 2세와 관련된 기적은 721년 툴루즈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에 대한 승리와 관련이 있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그레고리오 2세는 아키텐 공작 에우도에게 축복을 내리며 빵을 담은 세 광주리를 보냈다. 에우도 공작은 이것들을 보관했다가 툴루즈 밖에서 전투 직전에 군인들에게 작은 조각을 나누어 먹게 했다. 전투 후, 빵 조각을 먹은 사람은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04]
6. 사망과 시성
731년 2월 11일에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사후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2월 1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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