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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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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1187년 10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본명은 알베르토 디 모라로, 1105년경 이탈리아 베네벤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추기경으로서 교황 특사 및 교황청 상서원장으로 활동하며, 잉글랜드의 토마스 베켓 대주교 살해 사건 조사, 프리드리히 1세와의 화해, 교황 문서 작성 체계 확립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는 제3차 십자군을 소집하고, 피사와 제노바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8세는 57일 만에 선종했으며, 피사 대성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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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8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그레고리오 8세
본명알베르토 디 모라
출생1100년경
출생지교황령 베네벤토
사망1187년 12월 17일
사망지피사 공화국 피사
재위 시작1187년 10월 21일
재위 종료1187년 12월 17일
선임 교황우르바노 3세
후임 교황클레멘스 3세
교회 경력
소속 교회가톨릭 교회
서품1156년 추기경
추기경 서임하드리아노 4세
주교로마 주교

2. 생애 초기

알베르토 디 모라는 1105년경 이탈리아 베네벤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사르토리우스 디 모라였다.[1] 그는 젊은 시절에 시토회 또는 몬테카시노의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여 수사가 되었다.[1] 알베르토는 나중에 20~30세 즈음에 프레몽트레회에 입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랑의 성 마르티노 수도원의 의전율수사가 되었다가[6]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1]

3. 추기경 시절

1156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알베르토를 산타드리아노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했으며, 1158년 3월 14일에는 산 로렌초 인 루치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7]

3. 1. 교황 특사 활동

1160년경 교황 알렉산데르 3세교황 특사로서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교회법을 가르쳤으며, 포르투갈에 가서 아폰수 2세의 대관식을 집전하였다.[7] 1163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황제와의 화해를 달성했다.[7] 알렉산데르 3세는 토머스 베켓 대주교 살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잉글랜드로 보냈고, 아브랑슈 교회회의에서 대주교를 살해한 죄를 참회한 헨리 2세 왕을 용서해 주었다.[7] 1177년부터 1179년까지 이탈리아에서 교황 사절로 활동하였고, 1178년 2월 교황청 상서원장이 되었다.[7] 상서원장으로서 황제를 상대로 회유책을 주로 구사했다.[7] 트리어 주교 임명을 놓고 교황 측 후보인 카르덴의 폴마르와 황제 측 후보인 비드의 루돌프 모두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트리어 교구의 사제들이 새로 선출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3세로부터 기각당했다.[7]

3. 2. 교황청 상서원장

알베르토는 1178년 2월 교황청 상서원장이 되었다.[7] 상서원장으로서 그는 황제를 상대로 회유책을 주로 구사했다. 트리어의 주교 임명을 놓고 그는 교황 측 후보인 카르덴의 폴마르와 황제 측 후보인 비드의 루돌프 모두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트리어 교구의 사제들이 새로 선출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3세에게 기각당했다.[7] 그가 고안한 문체 양식은 교황 문서 작성 체계에 사용되었다.

4. 교황

1187년 10월 21일 교황 우르바노 3세가 선종한 다음 날, 알베르토 디 모라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앙리 드 마르시가 후보에서 사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기리기 위해 그레고리오 8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10월 25일에 축성되었다.[8][4]

4. 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개선

그레고리오 8세는 과거 프리드리히 1세와 협상한 전력이 있어 교황청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를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려놓았다.[8][4]

4. 2. 제3차 십자군 호소

프리드리히 1세와 협상한 전력이 있어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다시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십자군이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8세는 교황 칙서 《오디타 트레멘디》를 발표하여 제3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8][4] 그레고리오 8세는 피사로 가서 시민들에게 제노바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두 도시가 연합 함대를 구성해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 달라고 설득하였다. 피사로 가던 중 루카에 들러 대립교황 빅토르 4세의 시신이 매장된 성당에게 그의 무덤을 빼라고 지시하였다.

4. 3. 이탈리아 도시 간 분쟁 중재

그레고리오 8세는 피사제노바 사이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려 했다. 이는 두 해상 도시와 해군 함대가 십자군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4] 그는 피사 시민들에게 제노바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두 도시가 연합 함대를 구성해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 달라고 설득하였다.[8]

5. 죽음

그레고리오 8세는 교황으로 즉위한 지 57일 만인 1187년 12월 17일 피사에서 열병으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피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9] 조셉 S. 브러셔는 “그레고리오 8세의 치세는 짧지만 영광스러운 시대였다.”고 평가하였다.[9][5]

그레고리오 8세는 피사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1600년 대성당 화재로 파괴되었다. 교황직은 클레멘스 3세가 계승하였다.

참조

[1] 논문 A Norbertine Pope? https://www.jstor.or[...] 1933
[2] 서적 Geschichte der deutschen Kaiserzeit
[3] 간행물 The Papacy: An Encyclopedia Routledge 2002
[4]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P 1986
[5] 서적 Popes through the Ages
[6] 논문 Gregory, the eighth of that name…they declare from records of St. Martin of Laon to have once been a canon of that church... A Norbertine Pope? http://www.jstor.org[...]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33-07
[7] 서적 Geschichte der deutschen Kaiserzeit
[8]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P 1986
[9] 서적 Popes through th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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