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하쿠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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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카와가는 가잔 겐지를 본관으로 하는 당상가로, 가잔 천황의 황손인 노부자네 왕이 겐지 성을 하사받아 신적강하한 후 신기관의 장관인 신기백을 세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시라카와 왕가는 신기백 세습과 함께 "왕"을 칭하는 것이 특징이며, 이는 천황과의 혈연관계에 기반한다. 무로마치 시대에 요시다 가문과의 경쟁에서 권위가 쇠퇴했고, 메이지 시대에 왕호를 반납하고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59년 가계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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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하쿠오가 | |
---|---|
가문 정보 | |
가문명 | 시라카와 가 |
단절 연도 | 쇼와 34년 (1959년) |
![]() | |
본성 | 겐지화산 겐지적류 |
가조 | 미나모토노 아키야스 |
종별 | 공가반가 화족자작 |
출신지 | 야마시로국 |
근거지 | 야마시로국 |
지류 | 시나가와 씨무가 |
추가 정보 | |
다른 이름 |
2. 역사
'''시라카와가'''(白川家)는 가잔 겐지를 본적으로 하는 당상가이다. 카잔 천황의 황손인 노부자네 왕이 겐지 성을 내려받아 신적강하한 후 신기관의 장관인 신기백으로 임관되었고, 그 자손이 신기백을 세습했기 때문에 "백가(伯家)"라고도 불렸다. 신기백 취임 후에는 왕씨로 복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시라카와 왕가(白川王家)"라고도 불렸다.
== 시라카와 왕가의 성립 ==
시라카와 왕가의 특징은 신기백 세습과 신기백 취임과 함께 "왕"을 자칭하는 것이다. "왕"의 신분은 천황과의 혈연관계로 결정되며, 본래는 관직에 부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비황족이면서도 왕호 세습을 행한 것은 시라카와 가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
노부자네왕은 만주 2년(1025년)에 겐지를 하사받고 신적강하했으며, 간토쿠 3년(1046년)에 신기백으로 임명됐다. 당시에는 "겐(源)" 또는 "왕"으로 불렸고, 후대에 "시라카와가"나 "시라카와 왕가"로 불리게 된다. 노부자네왕 이후 야스스케왕, 현강왕, 아키히로왕까지 시라카와가의 인물이 신기백에 임명되었으나, 이 시기에는 아직 신기백은 세습이 아니었고, 왕씨, 겐지 및 오나카토미씨가 임명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현강왕은 본래 겐지였으나, 신기백 취임과 함께 왕씨로 복귀하고 퇴임 후 겐지로 돌아가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이후, 현강왕의 왕씨 복귀를 시라카와가의 성립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현강왕의 왕씨 복귀 배경에는 신기관의 장관인 신기백이라는 직무의 중요성과 겐지라는 고귀한 혈통, 나카스케왕의 어머니가 오오나카토미씨인 점, 현강왕이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유자(양자와 비슷)가 되는 등의 사정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현강왕의 아들 나카스케왕이 뒤를 이어 신기백이 되고, 나카스케왕의 퇴임 후, 그 아들인 나리스케왕이 신기백에 임명되었다. 나리스케왕이 급사하자 동생인 스케무네왕이 신기백에 임명되기 위해 겐지에서 왕씨로 복귀했다. 이들은 선례가 되어 이후 시라카와가에 의한 신기백 세습화와 신기백 취임에 의한 왕씨 복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라카와"라는 호칭은 13세기 중기 이후, 자방왕 대에 볼 수 있게 된다. 연신왕은 화산 법황의 아들 세이닌 친왕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 2년(1025년)에 미나모토 성을 하사받아 신적강하했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 레이제이 천황의 의자(擬子)가 되었기 때문에 레이제이 겐지(冷泉源氏)로 불린다. 미나모토노 연신은 간토쿠 3년(1046년)에 신기백에 임명되었다.
연신의 아들 고시는 할아버지 세이닌 친왕의 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화산 천황의 손자 왕으로 취급받게 되어, 레이제이 겐지는 연신 대에서 끝나게 되었다. 고시왕은 고헤이 2년(1059년)에 신기백에 임명되었다. 연신·고시 부자 2대에 걸쳐 신기백을 역임했지만, 그 시점에서는 아직 신기백의 지위를 독점할 수 있는 가계는 아니었다.
고시의 아들 아키야스는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양자가 되어 미나모토노 아키야스를 칭하며 종5위상·정친정에 올랐다.
신기백 세습의 길을 연 것은 아키야스의 아들 아키히로이다. 아키히로왕은 초칸 3년(1165년)에 신기백에 취임하기 이전부터 정친정으로서 아키히로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동생인 덴다이좌주·공현대승정이 고시라카와 법황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등의 배경도 있어 출세를 하여 정4위하까지 승진하였고, 장남·아키츠나왕에게 정친정, 차남·나카스케왕에게 신기백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아키히로왕 이후 그 자손은 신기백의 관직을 세습하게 된다.
== 요시다 가문과의 경쟁과 몰락 ==
무로마치 시대에 우라베씨의 요시다 카네토모가 요시다 신토를 확립하고 신기관 영장상을 칭하면서 요시다 가문이 전국의 신사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시라카와 가문의 권위는 쇠퇴하였다. 에도 시대에 시라카와 가문은 백가신토를 칭하며 요시다 가문에 대항했지만, 사찰 법도 제정 이후 요시다 가문의 우위가 계속되었다.
시라카와 가문의 가격(家格)은 반가였으며, 대대로 당주는 코노에 중장을 거쳐 신기백이 되었다. 에도 시대의 가록은 200석이었고, 그 밖에 신기령, 신사료 100석을 받았다.
== 메이지 유신과 가계 단절 ==
메이지 시대에 왕호를 반납하고, 스케노리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69년 6월 1일, 관제 개혁으로 스케노리 왕은 신기백 지위를 잃었고, 왕호를 칭하는 것도 없어졌다. 같은 해 6월 17일 행정관들에 의해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시라카와 가문도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같은 해 7월 8일 대납언 직임의 예가 없는 구 당상가로서 시라카와 가문의 당주 스케노리는 자작에 서작되었다.
스케노리의 뒤를 이은 스케나가는 친자식이 없어, 백작 우에노 마사오(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서자)의 아들 히사오를 양자로 맞이했지만, 1954년에 이 양자 관계는 해소되었고[2], 1959년 스케나가의 사망으로 시라카와 가문은 단절되었다.
2. 1. 시라카와 왕가의 성립
시라카와 왕가의 특징은 신기백 세습과 신기백 취임과 함께 "왕"을 자칭하는 것이다. "왕"의 신분은 천황과의 혈연관계로 결정되며, 본래는 관직에 부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비황족이면서도 왕호의 세습을 행한 것은 시라카와 가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노부자네왕은 만주 2년(1025년)에 겐지를 하사받고 신적강하했으며, 간토쿠 3년(1046년)에 신기백으로 임명됐다. 당시의 호칭은 "겐(源)" 또는 "왕"으로 불렸고, 후대에 "시라카와가"나 "시라카와 왕가"로 불리게 된다. 노부자네왕 이후 야스스케왕, 현강왕, 아키히로왕과 시라카와가의 인물이 신기백에 보임되었으나, 이 시기는 아직 신기백은 세습이 아니었고, 왕씨, 겐지 및 오오나카토미씨가 보임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현광왕은 본래 겐지였으나, 신기백 취임과 함께 왕씨로 복귀하고 퇴임 후 겐지로 돌아가는 최초의 예가 되었다. 이후, 현광왕의 왕씨 복귀를 시라카와가의 성립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현광왕의 왕씨 복귀 배경에는 신기관의 장관인 신기백이라는 직무의 중요성과 겐지라는 고귀한 혈통, 나카스케왕의 어머니가 오오나카토미씨인 점, 현강왕이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유자(양자와 비슷)가 되는 등의 사정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현광왕의 아들 나카스케왕이 뒤를 이어 신기백이 되고, 나카스케왕의 퇴임 후, 그 아들인 나리스케왕이 신기백에 임명되었다. 나리스케왕이 급사하자 동생인 스케무네왕이 신기백에 임명되기 위해 겐지에서 왕씨로 복귀했다. 이들은 선례가 되어 이후 시라카와가에 의한 신기백 세습화와 신기백 취임에 의한 왕씨 복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라카와"라는 호칭은 13세기 중기 이후, 자방왕 대에 볼 수 있게 된다. 연신왕은 화산 법황의 아들 세이닌 친왕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 2년(1025년)에 미나모토 성을 하사받아 신적강하했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 레이제이 천황의 의자(擬子)가 되었기 때문에 레이제이 겐지(冷泉源氏)로 불린다. 미나모토노 연신은 간토쿠 3년(1046년)에 신기백에 임명되었다.
연신의 아들 고시는 할아버지 세이닌 친왕의 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화산 천황의 손자 왕으로 취급받게 되어, 레이제이 겐지는 연신 대에서 끝나게 되었다. 고시왕은 고헤이 2년(1059년)에 신기백에 임명되었다. 연신·고시 부자 2대에 걸쳐 신기백을 역임했지만, 그 시점에서는 아직 신기백의 지위를 독점할 수 있는 가계는 아니었다.
고시의 아들 아키야스는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양자가 되어 미나모토노 아키야스를 칭하며 종5위상·정친정에 올랐다.
신기백 세습의 길을 연 것은 아키야스의 아들 아키히로이다. 아키히로왕은 초칸 3년(1165년)에 신기백에 취임하기 이전부터 정친정으로서 아키히로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동생인 덴다이좌주·공현대승정이 고시라카와 법황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등의 배경도 있어 출세를 하여 정4위하까지 승진하였고, 장남·아키츠나왕에게 정친정, 차남·나카스케왕에게 신기백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아키히로왕 이후 그 자손은 신기백의 관직을 세습하게 된다.
2. 2. 요시다 가문과의 경쟁과 몰락
무로마치 시대에 우라베씨의 요시다 카네토모가 요시다 신토를 확립하고 신기관 영장상을 칭하면서 요시다 가문이 전국의 신사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시라카와 가문의 권위는 쇠퇴하였다. 에도 시대에 시라카와 가문은 백가신토를 칭하며 요시다 가문에 대항했지만, 사찰 법도 제정 이후 요시다 가문의 우위가 계속되었다.시라카와 가문의 가격(家格)은 반가였으며, 대대로 당주는 코노에 중장을 거쳐 신기백이 되었다. 에도 시대의 가록은 200석이었고, 그 밖에 신기령, 신사료 100석을 받았다.
2. 3. 메이지 유신과 가계 단절
메이지 시대에 왕호를 반납하고, 스케노리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69년 6월 1일, 관제 개혁으로 스케노리 왕은 신기백 지위를 잃었고, 왕호를 칭하는 것도 없어졌다. 같은 해 6월 17일 행정관들에 의해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시라카와 가문도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같은 해 7월 8일 대납언 직임의 예가 없는 구 당상가로서 시라카와 가문의 당주 스케노리는 자작에 서작되었다.스케노리의 뒤를 이은 스케나가는 친자식이 없어, 백작 우에노 마사오(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서자)의 아들 히사오를 양자로 맞이했지만, 1954년에 이 양자 관계는 해소되었고[2], 1959년 스케나가의 사망으로 시라카와 가문은 단절되었다.
3. 역대 당주
3. 1. 가잔 왕씨(花山王氏)
세이닌 친왕(清仁親王)의 아들인 야스스케왕 (? ~ 1090년)이 있었다. 미나모토노 아키후사(源顕房)의 자식이 되어 종오위상, 정친정, 아키권수를 역임한 미나모토노 아키야스(源顕康)(? ~ ?)가 있었다. 그는 후에 왕씨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1095년년에 태어나 1180년년 사망한 현광왕은 정사위하, 신기백을 역임했다. 1157년년에 태어나 1222년년에 사망한 중자왕은 정삼위, 신기백, 병부경을 역임했다.3. 2. 가잔 겐지(花山源氏)
나리스케왕(1184년 ~ 1224년)의 대부터 자광왕( ~ 1266년)을 거쳐, 요시모토 왕의 동생인 시무네 왕(정2위, 좌소장, 신기백)을 포함하여 시모토 왕(종3위, 좌소장, 신기백), 시오 왕(종2위, 좌소장, 신기백), 시미치 왕(종2위, 좌중장, 신기백), 시케이 왕(종2위, 좌소장, 신기백) 등이 신기백을 역임했다. 겐포 왕은 좌중장을 지냈으며, 남조에서 신기백에 임명되었다고도 하지만, 그 시기는 불명확하다. 시카타 왕(정2위, 신기백), 업청왕(종3위, 신기백), 업정왕(종2위, 신기백) 등이 신기백을 역임했다.3. 3. 시라카와하쿠오 가(白川伯王家)
시라카와하쿠오 가(白川伯王家)는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존속한 황족 가문이다. 신기백을 세습하며, 교시 왕을 시조로 한다.교시 왕 (1184년 - 1224년)은 종삼위 신기백을 역임하였다. 이후, 스케미쓰 왕(? - 1266년)은 정사위하, 스케쿠니 왕 (1234년 - 1299년)은 종삼위 좌소장 및 신기백을 역임하였다. 나리아키 왕 (1266년 - 1321년)은 종이위 좌소장 신기백, 스케키요 왕 (1289년 - 1330년)은 종삼위 좌중장 신기백을 역임하였다. 스케히데 왕 (1309년 - 1366년)은 종이위 좌중장, 탄정대필, 시나노노카미, 신기백을, 아키쿠니 왕 (1339년 - 1394년)은 종이위 좌중장 신기백을 역임하였다.
스케타다 왕 (1372년 - 1440년)은 종이위 좌소장 신기백, 마사카네 왕(? - ?)은 종이위 신기백, 스케마스 왕 (1417년 - 1484년)은 정이위 신기백, 스케우지 왕 (1456년 - 1504년)은 종삼위 신기백을 역임하였다. 타다토미 왕 (1428년 - 1510년)은 마사카네 왕의 아들로, 정이위 신기백을 역임했다. 마사나리 왕 (1488년 - 1560년)은 스케우지 왕의 아들로 신기백을 역임했고, 마사토모 왕 (1555년 - 1631년)은 나카인 미치유키의 아들로 정이위 신기백, 산기를 역임했다.
아키나리 왕 (1584년 - 1621년)은 종사위상 신기백, 마사노부 왕 (1592년 - 1663년)은 다카쿠라 나가타카의 아들로 종이위 신기백을 역임했다. 마사타카 왕 (1621년 - 1688년)은 정이위 신기백, 마사미쓰 왕 (1661년 - 1706년)은 종이위 신기백을 역임하였다. 마사후유 왕 (1679년 - 1734년)은 마사타카 왕의 아들로, 정이위 신기백을 역임했다. 마사토미 왕 (1702년 - 1759년)은 우메가이 미치요의 아들이며, 정실은 마사후유 왕의 딸이고, 종이위 신기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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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시라카와 자작가(白川子爵家)
1871년 스케나가가 태어났으며, 1959년(쇼와 34년) 사망했다. 시라카와 스케노리가 있었다.4. 계보
가산 천황의 후손으로, 세이닌 친왕을 시조로 한다. 엔신 왕이 초대 당주이며, 2대 코시 왕, 3대 아키야스 왕으로 이어진다. 아키야스 왕은 무라카미 겐지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양자가 되었다.
4대 당주는 아키히로 왕이다. 아키히로 왕의 아들인 5대 나카스케 왕과, 나카스케 왕의 아들인 고지 왕으로 이어진다. 고지 왕의 아들 대에서 스케무네 왕과 스케미쓰 왕으로 갈라진다. 스케미쓰 왕의 아들인 스케쿠니 왕은 스케쿠니 왕의 아들 교겐 왕과 교겐 왕의 아들 스케미치 왕으로 이어진다.
스케미치 왕의 아들인 스케히데 왕과 스케히데 왕의 아들인 아키쿠니 왕으로 이어진다. 아키쿠니 왕의 아들 교테이 왕과 교테이 왕의 아들 스케카타 왕으로 이어진다.
스케카타 왕의 아들 스케타다 왕과 스케타다 왕의 아들 마사카네 왕으로 이어진다. 마사카네 왕의 아들 스케마스 왕과, 스케마스 왕의 아들 타다토미 왕으로 이어진다.
타다토미 왕의 아들 스케우지 왕과 스케우지 왕의 아들 마사나리 왕으로 이어진다. 마사나리 왕은 마사토모 왕에게 작위를 물려주었고, 마사토모 왕은 아키나리 왕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 아키나리 왕의 아들인 마사치카 왕과 마사치카 왕의 아들 마사타카 왕으로 이어진다. 마사타카 왕의 아들 시나가와 마사나오는 시나가와 씨의 시조가 되었다.
마사미쓰 왕과 마사미쓰 왕의 아들 마사후유 왕으로 이어진다. 마사후유 왕의 아들 마사토미 왕과 마사토미 왕의 아들 마사타쓰 왕으로 이어진다. 마사타쓰 왕의 아들 스케아키 왕과 스케아키 왕의 아들 스케노부 왕으로 이어진다.
스케히로 왕의 뒤를 이어 스케노리 왕이 당주가 되었다. 스케노리 왕의 아들 시라카와 스케나가와 시라카와 스케나가의 아들 히사오로 이어졌으나, 히사오의 대에서 단절되었다.
5. 신기백가학칙(神祇伯家学則)
신토는 고금을 통해 변하지 않는 근본 원칙이며,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대도이다. 신토와 무도(스모를 포함)는 하나이며,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 또한 『고사기』, 『일본서기』, 『고어습유』 등의 황전을 연마하는 가운데 알 수 있다.
6. 에도 막부 말기의 영지
국립역사민족박물관의 『구고 구령 취조장 데이터베이스(旧高旧領取調帳データベース)』에서 산출된 막부 말기의 히라마츠가의 영지는 아래와 같다.
참조
[1]
서적
国史大辞典第11巻
吉川弘文館
1983-01-01
[2]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上巻
霞会館
1996-01-01
[3]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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