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국민주당은 1945년 송진우를 중심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이다. 조선인민공화국에 반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며, 김성수가 당수를 이어받았다. 1946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했으나, 미군정과의 관계와 지주 계급과의 연관성으로 대중적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1949년 다른 정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결성했다. 창당 초기에는 좌익 세력에 대항하며 미군정에 협력했으나, 신탁통치 문제와 토지 개혁, 이승만과의 갈등을 겪으며 야당으로 전환되었다. 친일 문제, 지역주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반공 노선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송진우 - 송상현 (1941년)
송상현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서 한국 법학 발전에 기여하고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한 법학자이다. - 송진우 - 송진우 (1890년)
일제강점기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 한국민주당 창당 등의 활동을 했으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신중론을 펼치다 암살당했다. - 조병옥 - 박순천
박순천은 1898년에 태어나 1983년에 사망한 대한민국 여성 정치인으로, 3·1 운동 참여,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신민당 고문을 지내며 여성 권익 신장에 기여했다. - 조병옥 - 조순형
조순형은 삼성물산 과장 출신으로 7선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12·12 쿠데타 이후 정계 입문, 민주화 운동 참여, 킹메이커 역할 수행,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발의 주도, 자유선진당 활동, 조병옥 선생 친일파 논란 관련 법적 대응 등의 활동을 했다.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원내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이승만 계열과 김구 계열이 통합하여 결성된 우익 정당으로, 신탁통치 반대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제1당이 되었으나, 분열과 당세 약화로 1960년 소멸되었다.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원내정당 -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은 1948년 이승만 노선에 따라 5.10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9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단체이다.
한국민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한국민주당 |
한자 이름 | 韓國民主黨 |
로마자 표기 | Hangungminjudang |
약칭 | 한민당, KDP |
설립일 | 1945년 9월 16일 |
해체일 | 1949년 1월 26일 |
창당 | 1945년 9월 16일 (설립) |
해체 | 1949년 1월 26일 (해체) |
중앙 당사 | 서울 |
선행 조직 |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
후계 정당 | 민주국민당 |
정치 이념 및 성향 | |
이념 | 자유주의 보수주의 반공주의 빅텐트 |
정치적 위치 | 우익 |
색상 | 녹색 |
관련 인물 | |
초대 수석총무 | 송진우 |
마지막 수석총무 | 김성수 |
기타 | |
영어 이름 | Korea Democratic Party |
본부 | 서울 |
후신 | 민주국민당 |
각주 | "A: KDP는 민주당계 자유주의 정당 계보에 속하며, 이승만 지지 보수 정당 계보에 속하지 않으나, 당시 실제 정치적 입장은 우익 보수주의였다." |
2. 역사
1945년 여운형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에 반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한국민주당(KDP)이 설립되었다.[7] 같은 해 송진우가 암살당한 후, 김성수가 당수를 계승했다.[7] 민주당은 1946년 10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했지만, 일부 지도부가 배제된 것을 이유로 의회의 존재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8]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을 여러 명 배출했다.[7]
그러나 미국 점령군과의 밀접한 관계와 지주 계급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7] 1948년 5월 선거에서 민주당은 200석 중 29석만을 차지했고, 1948년 7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그의 내각에는 민주당 소속 인물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무시는 민주당이 야당에 합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49년 2월 10일, 민주당은 의회 내 다른 정파들과 합쳐 한국민족당을 결성했다.
2. 1. 창당 배경 (1945)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여운형 중심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박헌영 중심의 공산주의 극좌 세력이 빠르게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22] 반면, 친일파 경력이 있던 한국민주당의 기독교 계열이나 동아일보 계열 인사들은 초기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22]일제강점기 말, 적극적인 항일 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의 전향 압박에 협력하지 않았던 세력들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협력했던 인사들보다 빠르게 움직였다.[22] 이 중 독립운동가 원세훈이 1945년 8월 18일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인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22][23]
1945년 8월 28일, 김병로, 백관수, 조병옥, 함상훈, 김약수, 이인 등은 서울 계동에서 조선민족당을 창당했고, 원세훈도 합류하여 고려민주당 세력을 이끌고 합당했다.[24][25] 9월 2일, 장덕수, 허정, 백남훈, 윤치영, 윤보선 등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24] 9월 4일, 조병옥, 김성수 등은 종로 청년회관에서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회를 조직하였다.[26]
9월 6일, 대한민주당(조선민족당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과 한국국민당이 한국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하기로 선언하고 강령, 정책을 발표했다.[16][27] 초기 한민당은 좌우합작 형태로 탄생했으며,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 세력에 의해 독선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이유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참여했다.[28]
한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과 동시에 중도 좌파 성향의 여운형과 중도 우파 성향의 안재홍이 협력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29][30] 그러나 건준은 박헌영의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이 선포됐다.[31]
그러자 1945년 9월 7일 송진우, 김성수,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설의식 등 동아일보 계열 및 우익 인사들은 건준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조직하였다.[32][33] 창당 멤버인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였다.[34]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의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단호히 배격함"을 선언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난하였다.[35]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38도 이남에 입성하여 미군정을 선포하였다.[37] 9월 10일 한민당계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를 접선, 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었다.[38] 그리고 9월 11일 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G-2)는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듣게되는데, 이들은 건준을 비롯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 협력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38]

2. 2. 한국민주당 창당과 초기 활동 (1945-1946)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과 동시에 여운형과 안재홍이 협력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29][30] 그러나 건준은 박헌영의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으로 이어졌다.[31] 이에 1945년 9월 7일 송진우, 김성수 등 동아일보 계열 및 우익 인사들은 건준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조직하였다.[32][33]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였다.[34]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활동과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쳐 있었고, 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조직을 타도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당면 과제였다는 것이다.[34]1945년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의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단호히 배격함"을 선언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난하였다.[35] |섬네일|왼쪽|130px|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고하 송진우]]
1945년 9월 16일 천도교 강당에서 당원 1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당이 정식 출범하였다.[17] 한민당은 지주, 친일 세력을 일부 포함하고 있어 초기부터 민중의 지지 기반이 약했다. 이승만,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했으나, 이들 중 일부는 해외에 있었고, 일부는 영수직을 거절했다.[39]
1945년 9월 21일, 한민당은 당수제나 최고위원제가 아닌 총무제를 채택하고, 각 도에서 1명씩 총무를 선출했다. 송진우를 수석총무로 선출하고, 중앙감찰위원장 김병로, 당무부장 이인, 외무부장 장덕수가 임명되었다.[40] 허정은 한민당이 총무 중심의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였다고 증언하였다.[41]
조병옥에 의하면 초기 한민당은 미군정에 협력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국 미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하고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수행했다.[34]
1945년 10월 20일 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수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42]
1945년 10월 23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였다.[43]
1945년 10월 25일 한민당은 긴급 간부회에서 신탁관리제 실시 절대반대를 결의하였다.[44]
송진우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으나,[36]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임시정부 측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45년 12월 중순, 국일관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에서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발언하자, 장덕수가 반발했고, 이에 송진우는 신익희에게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냐고 반박하며 임정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47][48]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한민당 내부는 김성수의 반탁론과 송진우의 탁치 불가피론으로 나뉘었다. 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주한 미군 주둔을 주장했다.[46]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송진우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송진우가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하면서, 임시정부 측과 한국민주당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49] |섬네일|200px|오른쪽|송진우 피살 내용을 다룬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지면]]
2. 3. 노선 갈등과 분열 (1946-1947)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 김구 등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46]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에서는 김성수의 반탁론과 송진우의 탁치 불가피론이 대립했다. 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미군 주둔을 주장하며,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경계했다.[46][47][48]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반탁 세력을 배제하려 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조만식에게 밀사를 보냈고,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했다.[63] 한편, 김구는 한국독립당 통합을 추진했으나, 한민당은 중앙위원 수와 인선 배치를 문제 삼아 4월 18일 통합에서 이탈했다.[65][67]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을 주장했다.[68] 6월 5일 이승만은 전라북도 이리(익산)에서, 6월 25일 경기도 개성에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69][70] 한국독립당, 조선인민당, 미군정의 아처 러취,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으나,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을 지지했다.[71][72][73][74][75]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출범 이후, 한민당은 좌우합작위원회와 '좌우합작 7원칙'을 비판했다.[76][77] 특히 토지 개혁 문제에서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하며 '유상몰수 무상분배'에 반대하여, 당원들의 대량 탈당 사태를 겪었다.[78][79][80] 1946년 10월 8일 원세훈 등, 10월 9일 청년부장 박명환 등, 10월 10일 이순탁 등, 10월 11일 김용국 등 17명,10월 21일 김약수, 손영극 외 89명, 11월 28일 최양옥 외 17명, 12월 5일 김상규 외 82명, 12월 17일 박원식 등 58명이 탈당했다.[81][82][83][85][86] 1946년 10월 14일 김성수는 좌우합작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으나,[84] 탈당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당은 왜소화되었지만, 당론 통일과 결속 강화로 민주당(1955) 때까지 극우 노선을 유지하게 되었다.[87][88][89] 1946년 11월 8일 한민당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설립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좌우합작위원회를 견제했다.[90]
한민당은 토지개혁에서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주장하며, 가난한 농민을 위해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장기 분할로 상환하며, 지주는 산업 자본가로 전환하는 방식을 제시했다.[91] 그러나 1949년 농지개혁법 시행 이후 이승만 정부에 반기를 들고, 농지개혁법의 허점을 악용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바닷가 논을 염전으로 바꿔 농지 개혁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행각을 벌였다.[92]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우익 진영은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두고 분열했다. 5월 30일 이승만은 장덕수에게 참가 보류를 주장했고,[96] 6월 4일 반탁 진영 대표자 대회에서는 참가와 불참 여론이 엇갈렸다. 한민당 장덕수 등은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했다.[97]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고 우익 진영에 참가를 종용했으나,[98] 이승만은 이를 비판했다.[99][100] 6월 20일 한민당은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으나,[102] 한국독립당 등 임시정부 측은 참여하지 않았다.[103]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 문제로 분열하여, 신한국민당, 민주한독당이 미소공위에 참가했다.[104]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장덕수는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하고 유엔을 통한 총선거를 주장하며,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에게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청설장(聽雪莊)에서 박광옥, 배희범에게 암살당했다.[108] 1947년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했다.[109] 1948년 1월 16일 장택상은 김석황을 체포했다.[111] 박광옥, 배희범, 김석황 등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1948년 1월 21일 한국민주당은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하며 임시정부 측과 결별했다.[112]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재판에서 김구 연루 의혹이 제기되었고,[114] 3월 12일 김구는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심문받았다.[116] 1948년 3월 15일 배희범은 장덕수 암살 이유로 신탁 찬성, 친일 행위 등을 주장했다.[119] 1948년 4월 1일 김석황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으나,[121] 4월 22일 존 하지는 형량을 감형했다.[122]
2. 4.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야당화 (1948-1949)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은 90명의 입후보자 중 29명을 당선시키며 총 유효 투표의 13%를 획득, 제1당이 되었다.[123] 그러나 이승만과의 갈등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48년 7월 27일 국무총리 지명 과정에서 이승만은 원내 3대 파벌(한민당, 독촉국민회, 한국독립당계 무소속)의 후보 대신 이윤영을 지명했고, 이는 곧바로 부결되었다.[123] 이승만은 이윤영을 무임소 장관에 임명하고, 조선공산당 출신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발탁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농지개혁법 추진을 통해 한민당의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123]1948년 7월 28일, 이승만은 의원들이 진영 논리에 함몰되어 국가 재건을 방해한다고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했다.[125] 이후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내정하자,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내각의 8석을 요구하며 한민당 전원의 인준 동의를 제안했고, 이범석은 이를 수용했다.[124] 그러나 1948년 8월 2일 이승만은 이범석이 건의한 김성수 천거 8명 중 3명만을 기용하고, 한민당계에서는 김도연 한 명만을 입각시켰다.[123] 이로 인해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한민당은 즉각 반발하며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123]
1948년 7월 30일 한민당 내에서는 이승만의 담화를 두고 윤치영, 허정 등 이승만 지지파와 김준연 등의 호남파 간의 내분이 발생했다.[125] 윤치영은 한민당을 탈당하며 당리당략을 일삼는 정상배, 정치 모리배, 양아치들이라고 비난했고, 이는 한민당 계열이 윤치영을 두고두고 미워하는 원인이 되었다.[86]
초대 내각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기용되었으나,[126][127]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이 30자리 이상을 차지했다는 견해도 있다.[128] 김성수는 무임소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절하였다.[129]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논의 과정에서 한민당은 법안의 범위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33] 1948년 8월 19일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한민당은 '동 법안이 필요는 하나 민중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또 동 법안은 너무나 추상적이니 법제위원회로 회부하자'는 의견을 냈다.[133] 김준연은 "일제치하 36년 동안 [...] 그 문제를 너무 심히 추궁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폐를 각출할 염려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134] 곽상훈은 "법안 범위를 더 축소하여 악질자에 한하자"고 주장했다.[135] 김성수는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136][137]
1949년 1월 26일, 한국민주당은 신익희의 대한국민당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145]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이 정식 출범하였다.[21]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는 한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전라도 친일 지주층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92] 한민당은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을 기반으로 30%씩 10년 상환하는 안을 주장했다.[150] 결국 농지개혁법은 30%씩 5년 상환하는 것으로 최종 입법되었다.
3. 평가 및 비판
3. 1. 긍정적 평가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 강력한 반공 노선을 견지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를 외친 정당이었다.[158] 미군정과의 협력을 통해 초기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존재한다.3. 2. 부정적 평가
한국민주당은 창당 초기부터 여러 가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친일 문제: 한국민주당은 그 구성원이 모두 친일파는 아니었으나, 친일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측면이 있었다.[160][161][133][137][136][162][163][164][165] 창립자인 장덕수·김성수부터가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160][161][133][137][136][162][163][164][165] 1945년 11월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민주당을 친일적이고 반동적이며 반역적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하였다.[160] 1947년 미군정이 일본 제국 소유의 재산(적산)을 현금 일시지불 원칙으로 불하한다고 결정했을 때, '일본 제국에 협조해서 부를 확보해두지 않은 이상 누구도 적산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한민당은 현금 일시 지불 불하에 찬성하여 ‘친일파 정당’이라는 여론이 제기되었다.[161]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논의되자, 1948년 8월 23일 당수 김성수는 친일파·민족 반역자 숙청을 강경히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친일파 문제의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했고,[137][136] 8월 26일에는 친일 재벌로부터 법안을 완화 또는 무능화하는 자금을 제공받았다.[137] 1952년 프란체스카는 민국당 지도자들이 대부분 친일적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고 언급했다.[162] 탈당한 윤치영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하였다. 반면, 허정은 일부 친일파 수용을 인정했지만,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164]
지역주의 문제: 한국민주당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태동하였다.[53] 전라도 지역은 광활한 곡창 지대로 대지주들이 많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민당 지부가 결성되었다.[53] 1945년 11월 초 광주에서 한민당 지부가 결성된 이후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53] 외국 유학파와 김성수의 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 경성방직 관련자들과 자본가들이 참여했지만,[161][167] 이승만이나 임정의 지지 없이는 당세를 확장할 명분이 없었다.[53] 결국 당세가 전라도에 고착되어 호남 지주 중심의 정당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68] 1948년 7월 30일 한민당 내 이승만파와 호남파 간의 갈등이 있었고,[125] 이는 윤치영의 탈당으로 이어졌다.[86] 1950년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전라도를 민주국민당의 요새라고 표현하였다.[170] 다만 허정은 한민당을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 친일파 소굴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에 찬 비난이라고 반박하였다.[91] 조병옥은 송진우나 김성수가 인재 본위로 사람을 등용했다며 지역 정당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171]
이승만과의 관계: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는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었지만,[153][154][155][156][157] 정부 수립 후 국회 기득권을 차지한 다음부터는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를 타도하고 내각책임제를 관철하려는 등 이승만의 가장 적대적인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4. 논란
4. 1. 계보 논란
장정일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결실"이라는 주장을 풍자했다. 그에 의하면 '44년 만의 진보 정당의 국회 등원을 '50년 만의 결실'이라고 부정확하게 반올림하는 것만큼이나 진보 정당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을 놓고 '50년 전통의 야당'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수사가 분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172]'이라는 것이다.장정일은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쇠멸하는 진로를 놓고 '50년 역사의 전통 야당'을 지켜 달라고 읍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꽤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50년 전통 운운은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진보 정당 의회 진출이라는 환희에 찬 구호와 달리 사기성이 짙은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새천년민주당의 기원을 1990년 1월 22일에 행해진 김영삼의 3당 합당에서부터 찾지 않고 한민당, 민국당, 신한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고자 한다면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 등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165]
5. 역대 지도부
wikitable
역대 당 대표 | ||
---|---|---|
대수 | 이름 | 임기 |
초대 | 송진우 | 1945년 9월 16일 ~ 1945년 12월 30일 |
2대 | 김병로 | 1946년 2월 14일 ~ 1949년 2월 9일 |
3대 | 신익희 | 1949년 2월 10일 ~ 1949년 5월 12일 |
역대 최고위원 | ||
대수 | 이름 | 임기 |
초대 | 김성수 | 1945년 9월 16일 ~ 1947년 5월 |
2대 | 김성수 | 1947년 5월 ~ 1949년 2월 9일 |
3대 | 조병옥 | 1949년 5월 12일 ~ 1949년 5월 12일 |
6. 역대 선거 결과
한국민주당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00석 중 29석을 획득하여 원내 제2당이 되었다. 득표율은 13.51%(916,322표)였다. 당시 당 대표는 김성수였다.
6. 1. 국회의원 선거
한국민주당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00석 중 29석을 획득하여 2위를 차지했다. 득표율은 13.51% (916,322표)였다. 당시 당 대표는 김성수였다.참조
[1]
서적
North Korea Invades the South: Across the 38th Parallel, June 1950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2018
[2]
서적
East Asian Security in the Post-Cold War Er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
[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9
[4]
서적
Beyond Versailles: The 1919 Moment and a New Order in East Asi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20
[5]
서적
East Asia: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AuthorHouse
2012
[6]
간행물
FRUS, 1945, VI, pp. 1049-53, 1059-1061
[7]
서적
Political parties of Asia and the Pacific
Greenwood Press
1985
[8]
웹사이트
South Korea Under United States Occupation, 1945-48
http://countrystudie[...]
[9]
서적
韓国現代政治
1998
[10]
웹페이지
[11]
웹페이지
[12]
서적
한국에서의 권위주의적 체제의 성립-이승만 정권의 붕괴까지-
미네르바서방
2003
[13]
서적
전거서
[14]
논문
1946년 전반 한국민주당의 재편과 우익정당 통합운동
2016
[15]
웹인용
국사관논총 제58집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Ⅲ.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
http://db.history.go[...]
[16]
웹인용
한국민주당발기회 개최
http://db.history.go[...]
[17]
웹인용
한국민주당 결당식
http://db.history.go[...]
[18]
뉴스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들의 조국은 한국이 아니다, 민주당 586의 망상"
https://news.naver.c[...]
중앙일보
2021-02-10
[19]
웹사이트
<김종인, 가인 김병로를 말하다> “경제민주화는 조부의 토지개혁 구상에서 비롯된 것”
https://www.joongang[...]
[20]
웹페이지
https://newslibrary.[...]
[21]
웹인용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한 민주국민당 결성대회 개최
http://db.history.go[...]
[22]
웹인용
국사관논총 제58집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Ⅲ.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
http://db.history.go[...]
[23]
웹인용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한국민주당
http://db.history.go[...]
[24]
웹인용
국사관논총 제27집 > 자유당의 정당정치(손봉숙) > Ⅱ. 건국초기의 정당난립과 자유당의 창당 > 1. 제1공화국의 수립과 이승만정권의 성립
http://db.history.go[...]
[25]
웹인용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
웹인용
임정 및 연합군환영준비회 조직
http://db.history.go[...]
[27]
웹인용
한국민주당 발기선언 및 강령, 정책
http://db.history.go[...]
[28]
웹인용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한국민주당
http://db.history.go[...]
[29]
웹인용
건준위원장 려운형,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
http://db.history.go[...]
[30]
웹인용
건준 준비위원으로서 안재홍이 한일간 자주호상 할 것을 방송
http://db.history.go[...]
[31]
웹인용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
http://db.history.go[...]
[32]
웹인용
우익진영, 임시정부 지지를 표명하며 국민대회준비회 개최
http://db.history.go[...]
[33]
웹인용
국민대회준비회 취지서
http://db.history.go[...]
[34]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35]
웹인용
한민당,임정외에 정권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
http://db.history.go[...]
[36]
뉴스
https://newslibrary.[...]
1945-12-22
[37]
웹인용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2·3호공포
http://db.history.go[...]
[38]
보고서
G-2 Periodic 1945. 9. 12 보고서
[3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0]
웹인용
한민당 총무위원 9명 선정
http://db.history.go[...]
[41]
서적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42]
웹인용
한국志士영접위원회 결성
http://db.history.go[...]
[43]
웹인용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결의
http://db.history.go[...]
[44]
웹인용
한민당, 긴급간부회에서 신탁관리제 실시 절대반대 결의
http://db.history.go[...]
[45]
웹인용
한민당총무 백관수집에 수류탄투척사건 발생
http://db.history.go[...]
[46]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47]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001
[48]
서적
고하 송진우 선생전, 대한민국사 I
[49]
웹인용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http://db.history.go[...]
[50]
웹인용
한민당, 송진우의 피습 급서에 대해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51]
서적
백범어록
돌베게
2007-11
[52]
웹인용
金性洙, 한민당 수석총무로 피선
http://db.history.go[...]
[53]
웹인용
Ⅰ. 韓國民主黨의 조직구조와 그 특징
http://db.history.go[...]
[54]
웹인용
한민당, 반탁을 일관한다는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55]
웹인용
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
http://db.history.go[...]
[56]
웹인용
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
http://db.history.go[...]
[57]
웹인용
법조 50년 야사 - 해방공간의 요인암살사건
http://www.goha.or.k[...]
2013-04-24
[58]
웹인용
宋鎭禹암살범 韓賢宇의 지도자 全栢의 공판
http://db.history.go[...]
[59]
웹인용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등 4명에 대한 최종언도공판 개정
http://db.history.go[...]
[60]
웹인용
宋鎭禹 암살범 韓賢宇, 朝鮮精版社사건 朴洛鍾 옥중 인터뷰
http://db.history.go[...]
[61]
웹인용
한현우, 안두희의 근황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
http://db.history.go[...]
[62]
웹인용
"朴대통령이 古下암살전과 말소해 줬다"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63]
웹인용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http://weekly1.chosu[...]
주간조선
2020-10-12
[64]
웹인용
한국독립당과 국민당 합동선언 발표
http://db.history.go[...]
[65]
웹인용
한독·국민·한민·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
http://db.history.go[...]
[66]
웹인용
김구·이승만이 회합하고 정당 불참 결의
http://db.history.go[...]
[67]
웹인용
한독·국민·신한민족당 합동,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68]
웹인용
이승만, 정읍환영강연회에서 단정수립 필요성 주장
http://db.history.go[...]
[69]
웹인용
이승만, 이리에서 남한단정수립에 대해 사견 피력
http://db.history.go[...]
[70]
웹인용
정읍 발언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71]
웹인용
남조선단정설에 관해 한독당 반대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72]
웹인용
인민당총무국, 남한단정설 반대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73]
웹인용
러취, 이승만의 단정설 등 당면문제에 대해 기자회견
http://db.history.go[...]
[74]
웹인용
비상국민회의 부의장 최동오, 당면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75]
웹인용
한민당, 좌익계열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설 비난에 대해 반박성명
http://db.history.go[...]
[76]
웹인용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에 대한 입장 발표
http://db.history.go[...]
[77]
웹인용
한민당, 좌우합작원칙의 초지일관 천명
http://db.history.go[...]
[78]
웹인용
좌우합작위원회, 합작7원칙과 입법기관에 대한 건의문 발표
http://db.history.go[...]
[79]
웹인용
좌우합작 7원칙과 입법기관의 설치에 대한 각계 견해
http://db.history.go[...]
[80]
웹인용
최근 국내정계 동향이 알려짐
http://db.history.go[...]
[81]
웹인용
한민당총무 원세훈, 합작7원칙 등에 대한 이념相違로 탈당 성명
http://db.history.go[...]
[82]
웹인용
한민당 청년부장 朴明煥 등 16명 탈당
http://db.history.go[...]
[83]
웹인용
李順鐸, 한민당 탈당
http://db.history.go[...]
[84]
웹인용
좌우합작과 입법의원에 대한 각 정당의 견해
http://db.history.go[...]
[85]
웹인용
김약수, 손영극외 89인 한민당 탈당성명
http://db.history.go[...]
[86]
웹인용
1.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
http://db.history.go[...]
[87]
웹인용
한민당, 당원 탈당을 인정하고 당내 결속 위해 기구개혁 결의
http://db.history.go[...]
[88]
웹인용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9]
웹인용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맺음말
http://db.history.go[...]
[90]
웹인용
한민당,입법의원에 대한 김규식 담화를 반박하는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91]
서적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92]
웹인용
[한도숙칼럼]농지개혁
http://www.sigryang.[...]
식량닷컴
[93]
웹사이트
https://n.news.naver[...]
[94]
웹인용
김구와 허헌, 정치적 포부 피력
http://db.history.go[...]
[9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96]
웹인용
한민당 장덕수 등, 공위문제로 이승만 방문
http://db.history.go[...]
[97]
웹인용
반탁진영 대표자대회,미소공위대책위원회를 구성
http://db.history.go[...]
[98]
웹인용
한민당,공위참가에 대해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99]
간행물
분단과 이승만:1945~1948
역사비평
1996
[100]
웹인용
이승만,공위에 대해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101]
웹인용
한민당 당면문제에 관해 담화
http://db.history.go[...]
[102]
웹인용
한민당선전부,남북총선거에 의한 임정수립 주장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103]
웹인용
임정수립대책협의회, 공위양측대표에게 서한 발송
http://db.history.go[...]
[104]
웹인용
한독당, 공위 참가여부문제로 3당으로 분립
http://db.history.go[...]
[105]
웹인용
우익진영 공위참·불참을 계기로 3파로 분립
http://db.history.go[...]
[106]
웹인용
경무부장 조병옥, 우익요인 암살미수사건의 진상 발표
http://db.history.go[...]
[107]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108]
웹인용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
http://db.history.go[...]
[109]
웹인용
장덕수살해범 朴光玉 일당 체포
http://db.history.go[...]
[110]
웹인용
국민의회, 장덕수피살사건과 관련 애국자의 검거에 대해 유감표시
http://db.history.go[...]
[111]
웹인용
장택상, 장덕수살해 관련혐의로 한독당중앙위원 김석황 체포
http://db.history.go[...]
[112]
웹인용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http://db.history.go[...]
[113]
웹인용
딘, 장덕수사건진상 등 제문제 문답
http://db.history.go[...]
[114]
웹인용
장덕수 암살사건 1회 공개재판 개정
http://db.history.go[...]
[11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16]
웹인용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http://db.history.go[...]
[117]
웹인용
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
http://db.history.go[...]
[118]
웹인용
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
http://db.history.go[...]
[119]
웹인용
장덕수 살해사건 9회 군률재판 개정
http://db.history.go[...]
[120]
웹인용
장덕수살해사건 11회 군률재판 개정
http://db.history.go[...]
[121]
웹인용
장덕수살해사건 피의자 8명에게 사형 언도
http://db.history.go[...]
[122]
웹인용
장덕수살해사건 군률재판에 대한 하지의 특별조치 발표
http://db.history.go[...]
[123]
웹인용
<국회에 나타나는 지방의 프로필>
http://db.history.go[...]
[124]
웹인용
이범석, 한민당위원장 김성수 방문 요담
http://db.history.go[...]
[125]
웹인용
제36차 국회본회의, 이승만 총리승인 발언놓고 격론
http://db.history.go[...]
[126]
웹인용
탈북 청년이 말하는 ‘북한의 친일 청산’
https://news.naver.c[...]
주간조선
[127]
웹인용
북한이 친일파 청산했다는 거짓말
http://www.chogabje.[...]
조갑제닷컴
[128]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129]
웹인용
(4) 제헌국회와 정부수립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020-09-12
[130]
웹인용
법무·농림·사회 등 3부 장관 경질
http://db.history.go[...]
[131]
간행물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132]
뉴스
이승만 담화문으로 돌아본 ‘친일파 청산 좌절의 역사’
https://www.hani.co.[...]
한겨레
2018-01-10
[133]
웹인용
韓國民主黨의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대한 태도 주목
http://db.history.go[...]
[134]
웹인용
韓國民主黨, 반민족행위처벌법과 관련하여 담화를 발표
http://db.history.go[...]
[135]
웹인용
任永信 상공부장관과 일부 국회의원, 제1회 46차 국회본회의에서 친일파 처벌 축소를 주장
http://db.history.go[...]
[136]
웹인용
친일파들,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협박과 돈으로 구명운동
http://db.history.go[...]
[137]
웹인용
일부 친일파 재벌, 韓國民主黨에 자금제공하고 구명운동
http://db.history.go[...]
독립신보
1948-08-26
[138]
웹인용
제1회 50차 국회본회의, 국회의장의 반민족행위자 정부위원 임명 승인에 반발하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 전원 사임
http://db.history.go[...]
[139]
웹인용
제1회 50차 국회 본회의장에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대삐라 살포
http://db.history.go[...]
[140]
웹인용
진보의 실력파들, 그들은 왜 민주당으로 갔나?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2-06-19
[141]
웹인용
"윤 동지"라고 불러준 DJ, 잊을 수 없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9-08-21
[142]
웹인용
DJ 때 중도였던 민주당, 노무현·문재인 들어 좌편향 심화
https://news.naver.c[...]
중앙SUNDAY
[143]
웹인용
김용균, "친북반민족세력이 친일 조사해선 안돼"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04-07-27
[144]
웹인용
韓國民主黨, 여순사건 계기로 정부공격을 강화
http://db.history.go[...]
[145]
웹인용
大韓國民黨과 韓國民主黨, 民主國民黨으로 합당할 것을 결의하고 공동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146]
웹인용
大韓國民黨 소속 국회의원 23명, 韓國民主黨과의 합당을 반대하고 탈당
http://db.history.go[...]
[147]
웹사이트
https://n.news.naver[...]
[148]
웹사이트
https://newslibrary.[...]
[149]
웹사이트
https://newslibrary.[...]
[150]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151]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152]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153]
웹인용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전달
http://db.history.go[...]
1948-04-11
[154]
웹인용
경무부 내부 갈등(Friction Within the Police Department)
http://db.history.go[...]
1948-07-00
[155]
웹인용
李承晩 대통령, 5·30 총선거 결과 등에 대해 기자 문답
http://db.history.go[...]
1950-06-02
[156]
서적
1945~1948년 기간 中道諸派의 정치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1-09-01
[157]
서적
제 1공화국의 정당과 의회정치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996-01-01
[158]
웹인용
정계 현안에 대한 각 정당·사회단체의 설문조사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9-01-01
[159]
웹인용
"대한민국 위해 제주 섬 불태워야" '조병옥 흉상' 건립 논란
http://www.jejusori.[...]
제주의소리
2017-12-19
[160]
웹인용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http://db.history.go[...]
[161]
웹인용
國史館論叢 第58輯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Ⅱ.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정치노선과 활동
http://db.history.go[...]
[162]
웹인용
프란체스카, 올리버에게 장면에 관한 서한 전달
http://db.history.go[...]
[163]
웹인용
민주국민당, 전국대의원 대회 개최
http://db.history.go[...]
[164]
서적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65]
서적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166]
웹인용
이덕일 일침 "친일파 파묘 주장 與, 자기 족보 몰라서 하는 말"
https://news.naver.c[...]
중앙일보
2021-04-08
[167]
웹인용
1. 일제하 기독교 조직, 동아일보 관계자들
http://db.history.go[...]
[168]
서적
韓國의 民主的 支配聯合에 관한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12-01
[169]
웹인용
<5·30 총선거를 어떻게 싸우나:각 당·단체 대표 좌담회>
http://db.history.go[...]
[170]
웹인용
무쵸 주한미국대사, 미 국무부장관에게 5·30 총선거 진행상황을 보고
http://db.history.go[...]
[171]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72]
서적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