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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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익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학교 교직에 종사하다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했다.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시도했다. 1922년에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후 일제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영화 '밀정'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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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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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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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익상 |
원어이름 | 金益相 |
출생일 | 1895년 6월 25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고양군 |
사망일 | 1941년 8월 |
국적 | 조선→대한제국 |
직업 | 독립운동가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주요 활동 | 다나카 암살 시도 |
상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
웹사이트 | 김익상 (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서울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에서 기계감독으로 근무했다. 1920년 펑톈(奉天) 광성연초공사 지점으로 전근되었을 때 비행사가 되기 위해 광동의 비행학교로 갔으나, 중국 내란으로 폐교되어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베이징(北京)으로 가 김원봉의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들어갔다.
2. 1. 독립운동 투신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서울로 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에서 기계감독으로 근무했다. 1920년 6월 펑톈(奉天) 광성연초공사 지점으로 발령받았을 때 비행사가 되기 위해 광동의 비행학교로 갔으나, 중국 내란으로 학교가 문을 닫아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김원봉이 이끄는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들어갔다.2. 2.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김원봉 단장으로부터 일본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이 조국 독립의 지름길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의 심장 경복궁 안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여 시설과 집기가 파손되었다. 총독은 암살하지 못했으나 삼엄한 경비 속에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에 잠입하여 실행한 폭탄 의거는 대단한 성과였다. 의거 후 조선총독부를 빠져나온 김익상은 평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2. 3. 일본 육군대장 암살 시도
1922년 3월 28일 오성륜, 이종암 등과 함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다나카 기이치일본어)를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암살을 시도했다. 오성륜이 먼저 권총으로 사격했으나 다른 사람이 맞아 실패했다. 김익상은 도망치는 다나카에게 사격했으나 빗나갔고, 던진 폭탄은 불발되었다.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바로 터지지 않았고, 영국 군인이 강물에 빠뜨려 암살은 실패했다. 이종암은 피신했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되어 중국 항무국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일본에 인도되었다. 오성륜은 4월 1일 압송되는 과정에서 탈옥했다.2. 4. 재판과 순국
김익상은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김익상은 의열단 동지가 350명 가량이며 한국 국민의 행복과 독립을 위해 일본의 고관, 군인 및 우두머리가 가는 자를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이 일로 받는 형벌은 사양하지 않겠다고 했다.[1]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검사의 항소로 열린 나가사키 공소원의 공소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1]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귀국하였다.[1] 그러나 귀국하고 얼마 후 일본인 고등경찰이 김익상을 연행해 간 이후 종적이 묘연해져 일제에 암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3. 사후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김익상 의사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2]
4. 대중문화
2016년 영화 밀정에서 마지막 장면 중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학생으로 나왔다.
참조
[1]
웹인용
김익상
https://terms.naver.[...]
[2]
웹인용
김익상의사 의거 터
https://www.culturec[...]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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