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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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성륜은 1898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의열단에서 활동하며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했다. 이후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중국 공산당에 가입, 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36년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를 결성했으나, 1941년 투항하여 만주국 치안부 고문이 되었다. 해방 후 팔로군에게 체포되어 사망했으며, 북한에서는 그의 업적을 김일성의 것으로 왜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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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륜 | |
---|---|
기본 정보 | |
한글 | 오성륜 |
한자 | 呉成崙 |
히라가나 | ご せいろん |
가타카나 | 오 ソンリュン |
로마자 표기 | O Seong-ryun |
2. 생애
오성륜은 1898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1900년 출생설도 있다.[1] 1906년경 아버지를 따라 간도로 이주하여 화룡현 월청향 걸만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8년 훈춘현 대황구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러시아령으로 갔다가 이듬해 왕청현 봉오동에서 교원이 되어 독립군에 참여했다.
1920년 베이징으로 가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했다. 당시 조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허무주의가 유행했고, 의열단 역시 그 경향이 강했지만, 단원이 테러리즘에 매진하는 것을 분명하게 목표로 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의열단이 계획한 테러는 전부 실패했다.[3]
1921년 상하이로 옮겨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기대를 걸었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국제 연맹에 의한 조선의 위임 통치를 미국에 청원한 것에 분개하여 김원봉, 신채호 등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에 서명했다.[3]
1922년 3월 28일, 김익상[3], 이종암[4]과 함께 상하이에 들른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했다. 오성륜은 다나카가 상하이 번드에 착륙한 배에서 내리는 순간을 저격했으나 총알은 빗나가 곁에 있던 미국인 여성 스나이더 부인이 사망했다.[5] 오성륜은 현장에서 도주했지만, 영국인 경찰에게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수감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일본 영사관은 500USD의 현상금을 걸고 수색했지만 붙잡히지 않았다.[6]
상하이에서 일본인 대장 암살에 실패한 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념을 바꾸었다. 1923년 고려공산당 산하 적기단에 가담했고, 1924년에는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7년 광둥코뮌에 가담한 후 광둥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다.
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했는데, 이는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일제를 적으로 규정하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중국인 지주들을 상대로 계급혁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계급혁명은 실패했고, 오성륜은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했다. 또한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 조직인 상점대와 연합했으나, 내부 항의로 조직이 분열되었다. 1932년 11월 만주성위에서는 중국인 양징위를 대표로 파견해 지도기관 개조를 시작했고, 양징위는 오성륜을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시켰다.
1934년 11월 7일 오성륜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코민테른에서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전술로 활동 방향을 바꾸면서, 1936년 6월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결성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겨울 진압전과 집단부락 건설로 인한 민중들의 지원 단절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오성륜 자신도 포위당했다. 결국 1941년 1월 오성륜은 퉁화 지구 토벌대에 투항하여 일본에 협력했다.[15] 그는 야마모토 히데오(山本秀雄)로 이름을 바꾸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보 직을 맡았다고도 한다.
일본 패망 후 오성륜이 팔로군에게 처형되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열하성 청더 시의 한교 동맹 위원장 겸 조선 독립 동맹 책임자를 맡고 있었으나 팔로군이 청더 시에 진주했을 때 체포되었고, 철수를 강요받은 팔로군에 의해 내몽골의 린시 현으로 끌려가 사로잡힌 채 1947년 초에 병사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오성륜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이 김일성의 업적으로 둔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1898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1900년 출생설도 있다[1]。 본적은 함경북도 온성군 영와면 용남동 231이다[2]。 1906년경, 아버지를 따라 간도로 이주하여 화룡현 월청향 걸만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1918년, 훈춘현 대황구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러시아령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이듬해 왕청현 봉오동에서 교원이 되어 독립군에 참여했으며, 산하 도감부에서 교련관이 되었다고 한다.
2. 2. 의열단 활동
1920년 베이징으로 가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했다. 당시 조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에서 강세를 보이던 혁명 사상으로서의 허무주의가 유행했고, 의열단 역시 사상적으로 그 경향이 강했지만, 단원이 테러리즘에 매진하는 것을 분명하게 목표로 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의열단이 계획한 테러는 전부 실패했다.[3]오성륜이 처음 참여한 테러는 압록강 철교 폭파 계획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사전에 감지되어 실패했고 체포는 면했다.[3]
1921년 상하이로 옮겨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기대를 걸었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국제 연맹에 의한 조선의 위임 통치를 미국에 청원한 것에 분개했다. 김원봉, 신채호 등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에 서명했다.[3]
1922년 3월 28일, 김익상[3], 이종암[4]과 함께 상하이에 들른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했다. 오성륜은 다나카가 상하이 번드에 착륙한 배에서 내리는 순간을 저격했다. 총알은 다나카에게 맞지 않고, 다나카 곁에 있던 미국인 여성 스나이더 부인에게 명중하여 결국 부인은 사망했다.[5] 현장에서 도주한 오성륜은 쫓아온 영국인 경찰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함께 수감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영사관 유치소에서 탈출했다. 일본 영사관은 500USD의 현상금을 걸고 수색했지만, 붙잡히지 않았다.[6]
이 암살 미수 사건은 아리랑에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공동 저자이자 주인공인 김산(장지락)은 오성륜의 탈옥을 소재로 『기묘한 무기』라는 단편 소설도 남겼다.[3]
2. 3. 공산주의 활동과 중국 공산당 가입
상하이에서 일본인 대장 암살이 실패한 후, 오성륜은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했는데, 이는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념을 바꿨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23년 고려공산당의 집행부대 성격을 가진 적기단에 가담했고, 이듬해에는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1]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저우 점령 사건인 광둥코뮌에 가담하면서 광둥의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활동 지역을 옮겼다. 이듬해 하이루펑 소비에트가 붕괴되면서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오성륜이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것은 1930년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 만주 내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들을 흡수하라고 지시하여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2. 4.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1923년 고려공산당의 집행부대 성격을 가진 적기단에 가담했으며, 이듬해에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저우 점령 사건인 광둥코뮌에 가담하여 광둥의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활동 지역을 옮겼다.[7] 이듬해 하이루펑 소비에트가 붕괴되면서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주의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다.[7] 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인 오성륜의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은 1930년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은 만주 내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들을 흡수하라고 지시하여,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하였는데, 이는 후에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때 그와 만주성위의 서기 나등현은 일제를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중국 공산당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중국인 지주들을 상대로 계급혁명을 벌였다. 하지만, 지주들의 저항으로 계급혁명은 실패했고, 오성륜은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했다. 또한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인 상점대와 연합했으나, 내부에서 항의가 있어서 조직이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만주성위에서는 중국인인 양징위를 대표로 파견, 지도기관 개조를 시작한다.(1932년 11월). 양징위는 의용군과 상점대의 분리를 항일운동 지속을 위해 거부하는 오성륜을 판스현 당대회에서 비판과 함께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시켰다.
1929년 가을, 중국 공산당의 만주 진입 지령이 내려와 활동을 시작한다. 첫 번째 임무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반석현을 근거지로 한 ML파 계열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협력하여 중국 공산당 가입을 촉진하는 것[7]이었고, 이 때문에 오성륜은 일본 측으로부터 ML파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8]。이 당시 오성륜은, 재만주 조선 민족파·조선혁명군 중, 이종락이 이끄는 좌파에도 협력하고 있었음이 일본 측의 탐색 자료에서 확인되는데, 이 단체에는 아직 10대였던 김성주, 즉 훗날의 김일성이 소속되어 있었다[9]。
1931년, 그동안 오성륜이 속해 있던 중공 만주성위 남만특별행동위원회가 그대로 반석현위가 되었고, 오성륜은 서기의 요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1932년 11월, 통일 전선 결성 실패의 과오 등을 지적받아 해임되었고, 이후 2년여 동안 중공 간부 명단에서 오성륜의 이름은 보이지 않게 된다。마침 이 시기에 동만특위는 민생단 사건이라고 불리는 조선인 공산당원의 숙청이 일어나고 있었고, 오성륜은 동만위가 관할하던 간도에 친가가 있었기에 몸을 숨겼을 수도 있다. 또한, 이때의 오성륜은 전광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34년의 조선총독부 경무국 "국외에 있는 혐의 조선인 명부"에 따르면, 오성륜의 거주지는 "길림성 훈춘현 수선향 송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공산당에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그는 1934년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은 남만주의 공산주의계 무장단체를 통합한 연합무장단체이다.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됨과 동시에, 중공 반석현위는 소수의 인원으로 항일 의용군을 조직했다. 이것이, 다른 항일 군대를 흡수하며 커져 1934년 11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되었다(참조 ''항일 유격대#만주의 항일 유격대'')。이듬해 1935년, 오성륜은 제1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이 되어 간부로 복귀한다. 더 나아가 1936년, 남만의 동북인민혁명군(제1군, 제2군)은 재편성되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되었고, 오성륜은 제1로군 제2군 정치부 주임이 되어 요직을 계속 맡았다. 이때, 제2군 6사 사장은 김일성이었고, 오성륜은 직접적인 상관이었다. 이후에는 제1로군 총무처장, 군수처장이 되어, 항상 김일성의 상관으로 있었다.
1935년 코민테른에서 계급혁명노선에서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전술로 활동방향을 바꾸면서 1936년 6월,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를 설립한다. 이것은, 민생단 사건의 앙금을 끊어내고, 재만주 조선인들의 힘을 결집하려는 목적을 가진 조직으로, 조국의 독립을 내걸어 만주국 국경에 가까운 조선 국내에도 지부를 확장할 수 있었다. 김일성이 지휘한 보천보 전투는, 광복회 갑산 지부(후일 조선로동당 갑산파)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광복회에 대해서는, 선언문, 규약문이 남아 있으며, 발기인에는 오성륜을 포함하여, 세 명의 고참 조선인 공산당원이 이름을 올렸다[10]。이 멤버들 중에서 으뜸은 오성륜이었으며, 많은 지부를 조직한 것도 오성륜을 중심으로 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11]。오성륜 자신도 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며, 장지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국광복회 중앙위원 멤버임을 알리는 동시에, "현지에서의 일은 현재 매우 성공적이며, 나 역시 마침내 큰일을 해냈다"라고 적고 있다[12]。
2. 5. 변절과 최후
상하이에서 일본인 대장 암살에 실패한 후, 오성륜은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념을 바꾸었다. 1923년 고려공산당 산하 적기단에 가담했고, 1924년에는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7년 광둥코뮌에 가담한 후 광둥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다.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했는데, 이는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일제를 적으로 규정하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중국인 지주들을 상대로 계급혁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계급혁명은 실패했고, 오성륜은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했다. 또한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 조직인 상점대와 연합했으나, 내부 항의로 조직이 분열되었다. 1932년 11월 만주성위에서는 중국인 양징위를 대표로 파견해 지도기관 개조를 시작했고, 양징위는 오성륜을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시켰다.
1934년 11월 7일 오성륜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코민테른에서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전술로 활동 방향을 바꾸면서, 1936년 6월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결성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겨울 진압전과 집단부락 건설로 인한 민중들의 지원 단절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오성륜 자신도 포위당했다. 결국 1941년 1월 오성륜은 퉁화 지구 토벌대에 투항하여 일본에 협력했다.[15] 그는 야마모토 히데오(山本秀雄)로 이름을 바꾸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보 직을 맡았다고도 한다.
일본 패망 후 오성륜이 팔로군에게 처형되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열하성 청더 시의 한교 동맹 위원장 겸 조선 독립 동맹 책임자를 맡고 있었으나 팔로군이 청더 시에 진주했을 때 체포되었고, 철수를 강요받은 팔로군에 의해 내몽골의 린시 현으로 끌려가 사로잡힌 채 1947년 초에 병사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오성륜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이 김일성의 업적으로 둔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3. 논란과 평가
북한 사서에서는 조국광복회를 김일성이 발의하고 선언과 강령을 발표했으며 회장을 맡았다고 주장하며 오성륜의 업적을 김일성의 것으로 만들었다.[16] 김일성은 오성륜이 자신의 상관이었고 서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를 계속 묵살했다.[17]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과도한 반발이 줄어들면서 영화 아리랑 제작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주로 의열단 시절의 오성륜이 주목받고 있다. 만주국에 투항하고 귀순한 경력 때문에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만주 시절은 크게 거론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16][17]
3. 1. 김일성과의 관계와 업적 왜곡 논란
오성륜은 상하이에서 일본인 대장 암살에 실패한 후 모스크바의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했다. 1923년 고려공산당의 적기단에 가담했고, 1924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7년 광둥코뮌 가담 후 광둥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다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다. 1930년 코민테른 지시로 만주 내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들이 중국 공산당에 흡수되면서 오성륜도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1931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일제를 적으로 규정하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반대로 중국인 지주 대상 계급혁명을 시도했다. 실패 후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 상점대와 연합했으나 내분으로 조직이 분열되었다. 1932년 11월 양징위가 파견되어 오성륜을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했다.
1934년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 1936년 6월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승진했으나, 일본의 겨울진압전과 집단부락 건설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1941년 1월 결국 항복했다.
1929년 가을, 중국 공산당의 만주 진입 지령으로 활동을 시작,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반석현 ML파 계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협력하여 중국 공산당 가입을 촉진했다.[7] 이 때문에 일본 측으로부터 ML파로 인식되었다.[8] 당시 오성륜은 조선혁명군 중 이종락이 이끄는 좌파에도 협력했는데, 여기에는 훗날 김일성이 되는 김성주가 소속되어 있었다.[9]
1935년 오성륜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복귀,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이때 제2군 6사 사장은 김일성이었고, 오성륜은 그의 직속 상관이었다.
1936년 6월 결성된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는 민생단 사건의 앙금을 끊고 재만 조선인들의 힘을 결집하려는 목적으로, 조선 국내에도 지부를 확장했다. 김일성이 지휘한 보천보 전투는 광복회 갑산군 지부(후일 조선로동당 갑산파)의 도움으로 성공했다. 광복회 발기인 중 으뜸은 오성륜이었고, 많은 지부 조직도 오성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1] 오성륜은 장지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국광복회 중앙위원임을 알리며 "현지에서의 일은 현재 매우 성공적이며, 나 역시 마침내 큰일을 해냈다"라고 적었다.[12]
북한 사서에서는 조국광복회를 김일성이 발의, 선언, 강령 발표, 회장을 맡았다고 하여 오성륜의 업적을 김일성의 것으로 만들었다.[16] 김일성은 오성륜의 존재를 계속 묵살했다.[17]
3. 2.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한국에서는 최근 공산주의에 대한 과도한 반발이 사라지면서, 영화 아리랑 제작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주목받는 것은 의열단 시대의 오성륜이며, 만주국에 투항, 귀순한 경력 때문에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만주 시대는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 듯하다.[16][17]참조
[1]
서적
北朝鮮王朝成立秘史
[2]
논문
呉成崙
[3]
문서
アリランの歌 補注
岩波文庫
[4]
문서
アリランの歌 補注
岩波文庫
1930
[5]
간행물
本邦人の外国訪問関係雑件 別冊 田中大将外遊及鮮人の狙撃事件
外務省
[6]
간행물
外務省情報部情報 情報部主管情報電報雑纂 内地情報 第三巻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外務省外交史料館
[7]
서적
朝鮮戦争前史としての韓国独立運動の研究
[8]
간행물
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外務省外交史料館
1930-09-19
[9]
서적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
[10]
논문
呉成崙
[11]
서적
金日成 思想と政治体制
[12]
문서
アリランの歌 原注33
岩波文庫
[13]
서적
朝鮮戦争前史としての韓国独立運動の研究
[14]
서적
朝鮮戦争前史としての韓国独立運動の研究
[15]
서적
アルバム・謎の金日成
[16]
서적
朝鮮戦争前史としての韓国独立運動の研究
[17]
서적
金日成 思想と政治体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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