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 긴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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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고야 긴코군은 1936년 나고야 신문을 모기업으로 창단된 일본의 프로 야구팀으로, 나고야성의 '긴샤치'에서 유래한 '긴코'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다. 1941년 선수 부족과 신문 통폐합령으로 인해 쓰바사군과 합병하여 니시테쓰군으로 재창단되었다. 1937년에는 4위를 기록하며 A클래스에 진입하기도 했으며,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나루미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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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 긴코군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팀 이름 | 나고야 긴코 (名古屋金鯱軍) |
| 이전 팀 이름 | 나고야 골든 돌핀스 (1936년) |
| 창단 연도 | 1936년 |
| 해체 연도 | 1940년 |
| 해체 사유 | 쓰바사군과 대등 합병, 다이요군 결성 (1941년) |
| 연고지 | 아이치현 아이치군 나루미정 (현재의 나고야시 미도리구) |
| 홈구장 | 나루미 구장 |
| 홈구장 수용 인원 | 40,000명 |
| 리그 | 일본 야구 연맹 |
| 구단주 | 모리 이치헤이 (해체 당시) |
| 스폰서 | 나고야 신문사 (해체 당시) |
| 팀 성적 | |
| 리그 우승 | 없음 |
| 일본 시리즈 우승 | 없음 |
| 영구 결번 | 없음 |
| 운영진 | |
| 감독 | 이시모토 슈이치 (해체 당시) |
| 감독 (1936-1940) | 오카다 겐자부로 |
2. 구단의 역사
나고야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여 1936년 2월 28일에 설립된 나고야 긴코군은 나고야성의 '긴샤치'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아이치현 아이치군 나루미정(현 나고야시 미도리구)에 있던 나루미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구단은 1936년 2월 9일부터 열린 도쿄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현재 일본 프로 야구 조직에 속한 구단끼리의 첫 경기였다.
창단 당시 총감독은 오카다 겐자부로, 감독은 니데가와 노부아키였으나, 니데가와는 시즌 초반에 심판으로 전향했고, 시마 히데노스케가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1937년 6월 27일 고시엔에서 열린 대 도쿄 세네터스전에서는 9회말 5점 차를 뒤집고 역전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1993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 9회말 이후 최다 점수 차 역전 경기였다.[5]
1941년, 선수 부족과 신문 통폐합령으로 인해 쓰바사군과 대등 합병하여 다이요군을 결성했다.
이후 주니치 드래건스는 나고야군을 뿌리로 두고 있으며, 긴코의 이름은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가 계승하고 있다.
2. 1. 창단 배경 (1936년)
나고야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여 1936년 2월 28일에 설립 등기를 마쳤다. 닉네임인 '''긴코'''는 나고야성의 '긴샤치'에서 따왔다.[1]본거지는 아이치현 아이치군 나루미정(현 나고야시 미도리구)에 있던 나루미 구장이었다.
구단 조직은 2월 28일 이전 단계에서 이미 완성되었으며, 같은 해 2월 9일부터 3일간 열린 "거인군 도미 송별 경기 겸 긴샤치군 결성 기념 경기"에서 도쿄 거인군과의 3연전을 개최하여 제1전에서 승리했다. 이는 현재 일본 프로 야구 조직에 속하는 구단끼리 치른 최초의 경기였다.[2]
2. 2. 초기 활동 및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첫 경기
나고야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여 1936년 2월 28일에 설립되었다. 닉네임인 '''긴코'''는 나고야성의 '긴샤치'에서 따왔다.[1]구단 조직은 2월 28일 이전 단계에서 이미 완성되었으며, 같은 해 2월 9일부터 3일간 열린 "거인군 도미 송별 경기 겸 긴샤치군 결성 기념 경기"에서 도쿄 거인군과의 3연전을 개최하여 제1전에서 승리했다. 이는 현재 일본 프로 야구 조직에 속하는 구단끼리 치른 최초의 경기였다.[2]
2. 3. 감독 교체와 기동력 야구
결성 당시 오카다 겐자부로를 총감독으로, 도쿄 자이언츠의 조감독이었던 니데카와 노부아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즌 시작 전 니데카와가 구단에서 사퇴하고 심판으로 전향하자 당시 팀의 주장이었던 시마 히데노스케가 감독이 되었다(시마도 이후에 니데카와를 따라 심판으로 전향).[4]시마 외에도 구로사와 도시오, 노우닌 와타루, 나이토 고조 등 전후까지 이름을 알린 선수들이 있었지만, 투타 모두 기량이 미미하여 팀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 작은 기량 덕분에 기동력을 중시하는 야구를 펼쳐, 1937년 가을부터 1939년에 걸쳐 시마, 에구치 유키오, 사사키 쓰네스케, 고미 요시오 등 4시즌 연속으로 도루왕을 배출했다.[4]
2. 4. 합병과 해체 (1941년)
1941년, 전쟁으로 인한 선수 소집으로 선수 부족을 겪는 가운데, 신문 통폐합령에 따라 나고야군의 모회사인 신 아이치 신문과 나고야 신문의 합병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이듬해 양 신문사가 대등 합병하여 주부닛폰 신문이 되면서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찬가지로 선수 부족을 겪던 쓰바사군과 대등 합병하여 '''다이요군'''(大洋軍, 이후의 다이요 웨일스와는 무관)을 결성했다.[3]2. 5.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관계
나고야에 본사를 두고 있었지만 이후의 주니치 드래건스는 나고야군을 뿌리로 두고 있다.[3] 나고야 신문사가 신아이치 신문사와 대등 합병한 경위가 있어, 주니치 드래건스의 구단주 직을 나고야 신문사 계열과 신아이치 신문사 계열이 교대로 맡는 시스템이 채택되었기 때문에, 나고야 신문사 계열 구단주 시대에는 긴코군의 팀 컬러인 짙은 감색이나 금색이 유니폼에 채용된 사례가 있었다.[3]긴코군 구단주 겸 사장인 모리(森)는 의붓동생(여동생의 남편)이자 나고야 신문 창업자인 고야마 쇼주와 함께 신아이치와의 합병을 계기로 은퇴했다. 고야마의 사위이자 긴코군의 감사역으로 취임했던 고야마 류조는 후에 드래건스의 구단주가 되었다.[3]
3. 팀의 특징
결성될 즈음 오카다 겐자부로를 총감독으로, 도쿄 자이언츠의 조감독이었던 니데카와 노부아키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즌 시작 전 니데카와가 구단에서 사퇴하고 심판으로 전향하자 당시 팀의 주장이었던 시마 히데노스케가 감독이 됐다(시마도 이후에 니데카와를 따라 심판으로 전향).[4]
시마 외에도 구로사와 도시오, 노닌 와타루, 나이토 고조와 같이 전후에도 있었던 멤버가 있었지만 투타 모두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기동력을 중시하는 야구를 방침으로 삼아 1937년 추계부터 1939년까지 시마, 에구치 유키오, 사사키 쓰네스케, 고미 요시오 등 4시즌 연속 도루왕을 배출했다.[4]
1937년 6월 27일의 대 도쿄 세네터스전(고시엔)에서는 1대 6의 상황에서 9회말에 6점을 얻어 7대 6으로 역전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는데, 9회말 이후 5점 차에서 역전 끝내기 승리는 1리그 시대에서는 유일한 기록이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1993년에 긴테쓰 버팔로즈가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6점 차에서 역전 승리하기 전까지 9회말 이후 최다 점수 차 역전 경기였다.[5]
4. 유니폼과 구단 깃발
창단 당시에는 가슴에 "NAGOYA" 문자를 넣고, 왼쪽 어깨에 금빛 샤치호코(상상의 동물) 일러스트를 넣었다(샤치호코 마크를 왼쪽 가슴에 넣은 버전도 존재한다).
| 연도 | 내용 |
|---|---|
| 1935년 | 곤색 바탕에 금색 선으로 샤치호코(상상의 물고기)를 그리고 그 옆에 흰색 글자로 "NAGOYA"라고 적었다. |
| 1936년~1940년 | 곤색 바탕에 커다란 흰색 글자로 "N"을 적고 그 위에 금색 샤치호코를 놓았다. |
4. 1. 유니폼 변천
창단 당시에는 가슴에 "NAGOYA" 문자를 넣고, 왼쪽 어깨에 금빛 샤치호코(상상의 동물) 일러스트를 넣었다(샤치호코 마크를 왼쪽 가슴에 넣은 버전도 존재한다).4. 2. 구단 깃발 변천
- 1935년: 곤색 바탕에 금색 선으로 샤치호코(상상의 물고기)를 그리고 그 옆에 흰색 글자로 "NAGOYA"라고 적었다.
- 1936년~1940년: 곤색 바탕에 커다란 흰색 글자로 "N"을 적고 그 위에 금색 샤치호코를 놓았다.
5. 역대 감독
| 재임 기간 | 이름 |
|---|---|
| 1936년 ~ 1939년 | 오카다 겐자부로 |
| 1940년 | 이시모토 슈이치 |
| 1936년 ~ 1937년 (중도) | 오카다 겐자부로 (총감독) |
| 1936년 (중도) | 후타데가와 노부아키 |
| 1936년 (중도) ~ 1937년 | 시마 히데노스케 |
6. 팀 성적 및 기록
나고야 긴코군은 1937년 추계 리그에서 A클래스(4위)를 기록했지만,[4] 1938년 추계 리그에서는 최하위(9위)를 기록했다.[4] 1938년 춘계부터 1940년까지는 4분기 연속 B클래스를 기록했다.[4]
6. 1. 연도별 성적
| 연도 | 감독 | 순위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게임차 | 득점 | 실점 | 홈런 | 도루 | 타율 | 실책 | 방어율 |
|---|---|---|---|---|---|---|---|---|---|---|---|---|---|---|---|
| 1936년 | 오카다 겐자부로 | * | 40 | 15 | 24 | 1 | .385 | * | 169 | 207 | 3 | 74 | .217 | 90 | 3.40 |
| 1937년 춘계 | 오카다 겐자부로 | 5 | 56 | 25 | 30 | 1 | .455 | 16.5 | 217 | 234 | 5 | 97 | .231 | 142 | 3.03 |
| 1937년 추계 | 오카다 겐자부로 | 4 | 49 | 23 | 25 | 1 | .479 | 16 | 216 | 223 | 14 | 81 | .230 | 118 | 3.40 |
| 1938년 춘계 | 오카다 겐자부로 | 6 | 35 | 13 | 22 | 0 | .371 | 16 | 147 | 200 | 4 | 50 | .213 | 82 | 4.28 |
| 1938년 추계 | 오카다 겐자부로 | 9 | 40 | 11 | 29 | 0 | .275 | 19.5 | 119 | 200 | 6 | 62 | .209 | 81 | 3.73 |
| 1939년 | 오카다 겐자부로 | 7 | 96 | 36 | 56 | 4 | .391 | 30 | 265 | 398 | 13 | 125 | .204 | 187 | 2.86 |
| 1940년 | 이시모토 슈이치 | 7 | 104 | 34 | 63 | 7 | .351 | 38.5 | 310 | 425 | 14 | 87 | .200 | 193 | 2.98 |
[9]
나고야 긴코군은 1937년 추계 리그에서 4위를 기록하며 A클래스에 진입했다.[9] 1938년 추계 리그에서는 9위를 기록하며 최하위를 기록했다.[9] 1938년 춘계부터 1940년까지는 4분기 연속 B클래스를 기록했다.[9]
6. 2. 기타 기록
- A클래스: 1회(1937년 추계)[4]
- B클래스: 5회(1937년 춘계, 1938년 춘계~1940년)[4]
- 최하위: 1회(1938년 추계)[4]
- 연속 A클래스 진입 최장 기록: 1분기(1937년 추계)[4]
- 연속 B클래스 최장 기록: 4분기 연속(1938년 춘계~1940년)[4]
- 최다 승리: 36승(1939년)[4]
- 최다 패배: 63패(1940년)[4]
- 최다 무승부: 7무(1940년)[4]
- 최고 승률: .479(1937년 추계)[4]
- 최저 승률: .275(1938년 추계)[4]
- 최소 경기 차이: 16경기(1937년 추계, 1938년 춘계)[4]
- 최대 경기 차이: 38.5경기(1940년)[4]
- 최다 홈런: 14개(1937년 추계, 1940년)[4]
- 최소 홈런: 3개(1936년 추계)[4]
- 최고 타율: .231(1937년 춘계)[4]
- 최저 타율: .200(1940년)[4]
- 최고 평균 자책점: 2.86(1939년)[4]
- 최저 방어율: 4.28(1938년 춘계)[4]
- 1937년 6월 27일 대 도쿄 세네터스전(고시엔)에서 1대 6으로 뒤진 상황에서 9회말에 6점을 얻어 7대 6으로 역전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다. 9회말 이후 5점 차 역전 끝내기 승리는 1리그 시대에서는 유일한 기록이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1993년에 긴테쓰 버팔로즈가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6점 차 역전 승리하기 전까지 9회말 이후 최다 점수 차 역전 경기였다.[5]
7. 역대 홈구장
- 나루미 구장(1936년 ~ 1940년)
8. 구단가
황금 물고기 노래(작사: 오카다 겐자부로, 작곡: 스기야마 하세오)[6]는 총감독 오카다가 직접 작사했다.[7]
참조
[1]
문서
名古屋新聞の競合紙であった新愛知も同時期に球団の設立準備を進めており、仮の名称を名古屋城の雅称から採った「金城軍」としていたが、ライバル紙傘下の「金鯱軍」と紛らわしくなるため結成時には「名古屋軍」として届け出ている。
[2]
문서
日本初の日本プロ野球球団同士の対戦は、1923年6月21日にソウル特別市|京城(現在のソウル特別市|ソウル)で行われた宝塚運動協会|日本運動協会対天勝野球団である。
[3]
문서
後の横浜DeNAベイスターズ|大洋ホエールズ:現横浜DeNAベイスターズとは無関係。
[4]
문서
1938年春の江口と1938年秋の佐々木はともに単独。1937年秋の島は松竹ロビンス|ライオン軍の鬼頭数雄、1939年の五味はオリックス・バファローズ|阪急軍の山田伝と同数。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14年8月25日号97ページ
[6]
웹사이트
金鯱の歌
http://www.ritomo.jp[...]
[7]
간행물
『The Baseball Museum』18巻1号
https://baseball-mus[...]
野球殿堂博物館 (日本)|野球体育博物館
2008-01
[8]
서적
日本プロ野球記録大鑑
講談社
[9]
서적
일본 프로 야구 기록 대감
고단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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