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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엘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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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이다. 1897년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후 철학, 심리학, 의학을 공부했다. 이후 사회학으로 전향하여,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엘리아스는 권력, 행동, 감정, 지식 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피겨레이션 사회학'을 주창했으며, 대표 저서로 《문명화 과정》이 있다. 그는 1969년 《문명화 과정》 재출간 이후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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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원어 이름Norbert Elias
출생일1897년 6월 22일
출생지독일 제국 슐레지엔주 브레슬라우 (현 폴란드 브로츠와프)
사망일1990년 8월 1일
사망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학력
모교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연구 분야 및 업적
분야사회학
주요 업적프로세스 사회학
문명화/비문명화 과정 이론
하비투스
기타 정보
1933년의 엘리아스
1987년의 초상

2. 생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1897년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오늘날의 브로츠와프)에서 헤르만 엘리아스와 소피 엘리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직물업 사업가였고,[18] 어머니는 전형적인 주부였다.[18]

1915년 아비투어 통과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보병으로 복무했다.[18] 처음에는 동부 전선, 나중에는 서부 전선에서 활동하다 1917년 신경 쇠약으로 군 복무 불가 판정을 받고 브레슬라우의 의무병으로 전보되었다.[18]

같은 해,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의학 공부를 시작했고,[18]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철학 공부를 하며 카를 야스퍼스의 세미나에 참여했다.[18] 1919년 의사 예비 시험(Physikum) 통과 후 의학 공부를 중단했다.[18]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8]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줄면서, 1922년 철물 공장 수출부장으로 일하며 학자금을 마련했다.[18]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 지도하에 '이념과 개인'(Idee und Individuum)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18] 이 논문에서 엘리아스는 칸트의 '선험(a priori)'을 반박했다.[18] 신칸트주의에서 사회적 측면을 다루지 않는 데 실망한 엘리아스는 지도 교수와 심하게 다투었고, 결국 사회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18]

1925년까지 브레슬라우에서 독일 시온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 유대인 청년 운동 조직 '청백'(Blau-Weiss)의 주요 지식인으로 활동했다.[18] 이 시기 에리히 프롬, 레오 스트라우스, 레오 뢰벤탈, 거숌 숄렘 등과 교류했다.[18]

브로츠와프에 있는 엘리아스의 기념패


1925년, 엘리아스는 알프레드 베버 밑에서 근대 과학 발달에 관한 교수자격 청구논문을 쓰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겼다. 논문 제목은 '과학의 발전에서 피렌체 사회와 문화의 중요성'(Die Bedeutung der Florentiner Gesellschaft und Kultur für die Entstehung der Wissenschaft)이었다. 1930년 엘리아스는 이 작업을 포기하고 카를 만하임을 따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서 그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1933년 초 나치가 집권하자 만하임의 사회학 연구소는 문을 닫아야 했다. 당초 제출했던 교수자격 청구논문인 '궁정 사람'(Der höfische Mensch)은 결국 심사가 중단되었고, 1969년에야 출간되었다. 1933년 엘리아스는 파리로 도피하였다. 엘리아스의 부모는 브레슬라우에 계속 남았는데, 아버지는 1940년에 죽었고,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서 1941년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엘리아스는 파리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암스테르담의 Steufonds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사설 강사로 일하였다. 1935년, 엘리아스는 영국으로 망명지를 옮겨 자신의 대작 《문명화 과정》을 썼으며, 1939년에 이르러 유대인 난민 구호 단체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았다.

1939년에 그는 런던 경제 연구소(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옛 지도 교수 만하임과 만나 연구 장학생이 되기도 하였다. 1940년에 독일군이 영국까지 침략하자 엘리아스는 독일인이었다는 이유로 리버풀과 맨섬에 있는 수용소에서 여덟 달 동안 구금당하였다. 수용소에서 그는 정치 강의를 하고 자신이 쓴 연극 '불쌍한 야코프의 노래'(Die Ballade vom armen Jakob, 1987년에 출간)을 올리기도 했다.

1941년에 풀려난 엘리아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런던 대학의 노동자 교육 협회(성인 대상 교육 기관)에서 저녁 강의를 맡았으며 나중에는 레스터 대학교에서 심리학, 경제학, 경제사 저녁 강의도 맡았다. 또 다른 고등 교육 기관에서도 때때로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캠브리지에서는 독일 이민자 출신인 정신분석학자 S. H. 푹스 밑에서 집단 치료사로 활동했으며, 푹스와 함께 1952년에 집단 분석 협회(Group Analytic Society)를 창립하여 집단 치료사로 일하였다.

1954년에 엘리아스는 레스터 대학교에서 전임 강사 자리를 얻어 1962년에 정년 퇴직할 때까지 레스터 대학 사회학과에서 가르쳤다. 레스터에서 엘리아스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는 존 엘드리지와 앤서니 기든스 등이 있었다. 1962년에서 1964년까지 엘리아스는 아크라 인근 르공에 있는 가나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교환 교수를 지냈다. 1965년에 유럽으로 돌아와서 암스테르담에 자리를 잡았으나, 독일 여러 대학의 초빙 교수로 강의를 했다. 1969년 《문명화 과정》이 재출간되면서 그의 명성과 인기가 크게 올랐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는 빌레펠트 대학교의 학제간 연구 센터에서 초빙 교수를 지냈다. 엘리아스는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상(1977년)과 사회학 및 사회과학 유럽 아말피 상(1987년)을 처음으로 둘 다 받았다. 사회학 저작 외에도 엘리아스는 때때로 시나 수필을 쓰기도 하였다.

엘리아스가 오렌지-나사우 훈장 사령관에 임명됨(1987)


1990년 8월 1일, 엘리아스는 암스테르담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7-1924)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1897년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오늘날의 브로츠와프)에서 헤르만 엘리아스와 소피 엘리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직물업 사업가였고,[18] 어머니는 전형적인 주부였다.[18]

1915년 아비투어 통과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보병으로 복무했다.[18] 처음에는 동부 전선, 나중에는 서부 전선에서 활동하다 1917년 신경 쇠약으로 군 복무 불가 판정을 받고 브레슬라우의 의무병으로 전보되었다.[18]

같은 해,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의학 공부를 시작했고,[18]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철학 공부를 하며 카를 야스퍼스의 세미나에 참여했다.[18] 1919년 의사 예비 시험(Physikum) 통과 후 의학 공부를 중단했다.[18]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8]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줄면서, 1922년 철물 공장 수출부장으로 일하며 학자금을 마련했다.[18]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 지도하에 '이념과 개인'(Idee und Individuum)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18] 이 논문에서 엘리아스는 칸트의 '선험(a priori)'을 반박했다.[18] 신칸트주의에서 사회적 측면을 다루지 않는 데 실망한 엘리아스는 지도 교수와 심하게 다투었고, 결국 사회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18]

1925년까지 브레슬라우에서 독일 시온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 유대인 청년 운동 조직 '청백'(Blau-Weiss)의 주요 지식인으로 활동했다.[18] 이 시기 에리히 프롬, 레오 스트라우스, 레오 뢰벤탈, 거숌 숄렘 등과 교류했다.[18]

2. 2. 시온주의 운동과 사회학으로의 전환 (1925-1933)

1897년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유대인 지식인 가정에서 성장했다.[18] 1915년 대학 입학 종합 시험을 통과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보병으로 복무하다가 신경 쇠약으로 의무병으로 전보되었다.[18]

전후 엘리아스는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카를 야스퍼스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다.[18] 1919년 의사 예비 시험(Physikum)을 통과했지만,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철학 공부에 집중했다.[18]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학자금 마련을 위해 철물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18]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의 지도하에 '이념과 개인'(Idee und Individuum)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18] 이 논문에서 엘리아스는 칸트의 '선험(a priori)' 개념을 비판하고,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신칸트주의에 실망하여 사회학으로 전향했다.[18]

1925년까지 엘리아스는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에리히 프롬, 레오 스트라우스, 레오 뢰벤탈, 거숌 숄렘 등과 교류했다. 같은 해, 알프레드 베버 밑에서 근대 과학의 발달에 관한 교수자격 청구논문을 쓰기 시작했다.[2] 그러나 1930년, 이 작업을 포기하고 카를 만하임의 조교가 되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로 옮겼다. 1933년 나치 집권으로 만하임의 사회학 연구소가 문을 닫자, 엘리아스는 제출했던 교수자격 청구논문 심사가 중단되었고, 파리로 망명하였다.[2]

2. 3. 망명과 《문명화 과정》 집필 (1933-1939)

1897년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1933년 나치의 집권으로 인해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18] 파리에서 2년간 사설 강사로 일하며 암스테르담의 Steufonds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다.[2] 1935년에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1939년까지 자신의 대표작인 《문명화 과정》을 집필하며 유대인 난민 구호 단체의 지원을 받았다.[3] 이 책에서 엘리아스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문명의 "탈문명화 돌진"으로 묘사하고, 문명화된 신체 내에서 현대적 자아의 출현 과정을 밝혔다.[3][4]

1939년, 엘리아스는 런던 경제 연구소(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옛 지도 교수 카를 만하임을 만나 연구 장학생이 되었다.[5] 1940년 독일군 침략으로 인해 리버풀과 맨섬의 수용소에 8개월간 구금되었으나, 석방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연구와 강의를 계속했다.[5]

2. 4. 영국에서의 활동 (1939-1962)

1897년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보병으로 복무하다가 신경 쇠약으로 의무병으로 전보되었다.[18] 전쟁 이후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의학을 공부하였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도 수학하였다. 1924년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신칸트주의에 대한 실망으로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925년 엘리아스는 독일의 시온주의 운동에 관여하며, 에리히 프롬, 레오 스트라우스 등과 교류하였다. 알프레드 베버 밑에서 교수자격 청구논문을 준비하였으나, 1930년 이 작업을 포기하고 카를 만하임의 조교가 되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로 옮겼다. 1933년 나치 집권으로 인해 만하임의 사회학 연구소가 문을 닫자, 엘리아스는 파리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1939년 런던 경제 연구소에서 만하임과 재회하여 연구 장학생이 되었으나, 1940년 독일인이었다는 이유로 리버풀과 맨섬에 있는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수용소에서 엘리아스는 정치 강의를 하고 자신이 쓴 연극을 올리기도 했다.

1941년 풀려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저녁 강의를 맡았으며, 레스터 대학교 등에서 심리학, 경제학, 경제사 강의를 하였다. 캠브리지에서는 S. H. 푹스와 함께 집단 분석 협회를 창립하여 집단 치료사로 활동하였다.

1954년, 엘리아스는 레스터 대학교에서 사회학 전임 강사 자리를 얻어 1962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가르쳤다. 존 엘드리지, 앤서니 기든스 등이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다.

2. 5. 국제적 활동과 말년 (1962-1990)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엘리아스는 아크라 인근 르공에 있는 가나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교환 교수를 지냈다.[18] 1965년에 유럽으로 돌아와서 암스테르담에 자리를 잡았으나, 독일 여러 대학의 초빙 교수로 강의를 했다.[18] 1969년 《문명화 과정》이 재출간되면서 그의 명성과 인기가 크게 올랐다.[18] 1978년부터 1984년까지는 빌레펠트 대학교의 학제간 연구 센터에서 초빙 교수를 지냈다.[18] 엘리아스는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상(1977년)과 사회학 및 사회과학 유럽 아말피 상(1987년)을 처음으로 둘 다 받았다.[18] 사회학 저작 외에도 엘리아스는 때때로 시나 수필을 쓰기도 하였다.[18]

"문명화 과정"(문명화 과정)이 1969년 재출판된 후 그의 명성과 인기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그는 비엘펠트 대학교(비엘펠트 대학교)의 학제 간 연구 센터에서 일했으며, 1980년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엘리아스는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상(테오도르 W. 아도르노 상)(1977)과 유럽 아말피 사회학 및 사회과학 상(유럽 아말피 사회학 및 사회과학 상)(1987)을 모두 수상한 최초의 수상자였다. 1986년 독일 연방 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받았고, 90세 생일에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오렌지-나사우 훈장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9년 국제 사회학 협회의 전 세계 사회학자 설문 조사에서 "문명화 과정"(나중에 개정된 제목)이 20세기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7위를 차지했다. 1990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우리 시대의 거장"을 위한 노니노 상을 받았다. 사회학 연구 외에도 그는 항상 시를 썼다.

1990년 8월 1일, 엘리아스는 암스테르담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18]

1978년부터 1984년까지 독일의 보훔 대학교(ルール大学ボーフム)와 에서 강의를 했다[10]

1990년 8월, 암스테르담(アムステルダム)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였다[10]

3. 주요 이론 및 연구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권력, 행동, 감정, 지식 간의 관계를 시간에 따라 분석하는, 이른바 "피겨레이션 사회학"을 주창했다.[6] 그는 개인의 행위자 측면을 간과하지 않고 대규모 사회 구조의 출현과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성 네트워크인 대규모 사회적 피겨레이션 개념을 사용했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당시 지배적인 구조 기능주의 학파에 대해 구조보다 행위자를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비판이 거셌다.[6]

엘리아스의 이론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변적인 학자로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해당 분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엘리아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문명화 과정》(''Ü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으로, 1939년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나 1969년 재출판될 때까지 거의 무시되었다.[6]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유럽의 ''하비투스'' (사회적 태도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정신 구조)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한다. 중세 이후 유럽의 폭력, 성행위, 신체 기능, 식탁 예절 및 말투에 대한 기준이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하며, 궁정 에티켓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가 높아졌다고 설명한다.[6] 내면화된 "자제력"은 프로이트가 "초자아"로 인식한 "심리적" 자기 인식을 발전시켰다.[6] ''문명화 과정''의 두 번째 권은 이러한 과정의 원인을 점점 더 중앙 집중화되는 근대 초기 국가와 점점 더 차별화되고 상호 연결된 사회에서 찾는다.[6]

엘리아스의 연구는 1960년대에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때, 처음에는 그의 과정 분석이 신뢰를 잃은 "사회 다윈주의"의 연장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6]

엘리아스는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저술했다. 지식 사회학과 과학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는 영어로 쓰여졌으며, 에릭 더닝과 함께 집필하고 1986년에 출판된 스포츠 사회학에 관한 중요한 연구인 ''The Quest for Excitement''도 마찬가지이다.[6] 1984년 빌레펠트 대학교 개발 사회학 센터는 엘리아스를 초청하여 국제적으로 저명한 동료들이 모여 그의 문명화 과정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들을 직접 검토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주재하게 했다.[6]

1983년 엘리아스는 사후 그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재단을 설립했다.[6] 2017년 새로운 이사회가 재단의 경영을 인수했다.[6]

엘리아스는 1962년 레스터 대학교에서 은퇴할 때까지 ''Ü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이라는 책 한 권과 소수의 논문만 발표했지만, 1990년 사망할 때까지 15권의 책과 약 150편의 수필을 발표했다.[6]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를 매우 꺼렸으며, 교정을 통해 수정할 수 있었던 많은 오류가 원본 영어판에 포함되어 있었다. 21세기 초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재단은 UCD 프레스, 더블린과 협약을 맺어 18권에 달하는 엘리아스 작품의 새로운 학술판을 출판하게 되었다.[6]

그의 다른 주요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 "해군 직업의 기원에 관한 연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1(4) 1950: 291–309.
  • "관여와 분리의 문제",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7(3) 1956: 226–252.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1부", ''Sociology'', 5(2): (1971): 149–168.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2부", ''Sociology'', 5(3): (1971): 355–370.
  • "과학 이론과 과학의 역사: 최근 논의에 대한 논평", ''Economy & Society'', 1(2): (1972): 117–133.
  • "교화 과정 재검토: 스타니슬라스 퐁텐과의 인터뷰", ''Theory & Society'', 5: (1978): 243–253.
  • "공격성의 변화에 관하여", ''Theory & Society'', 5(2): (1978): 229–242.
  • "문명과 폭력: 국가의 폭력 독점 및 그 위반에 관하여". ''텔로스'', 54 (1982–83년 겨울): 134–154.
  • "사회학자들의 현재로의 후퇴", ''Theory, Culture & Society'', 4: (1987): 223–247.
  • "인간과 그들의 감정에 관하여: 과정사회학적 논고", ''Theory, Culture & Society'', 4(2–3): (1987): 339–361.
  • "성 간의 변화하는 권력 균형 – 과정사회학적 연구: 고대 로마 국가의 사례", ''Theory, Culture & Society'', 4 (2–3): (1987): 287–316.
  • "기호 이론: 서론, 1부", ''Theory, Culture & Society'', 6(2): (1989): 169–217.
  • "기술화와 문명", ''Theory, Culture & Society'', 12(3): (1995): 7–42.
  • "사회 과정 이론을 향하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48(3): (1997): 355–383.
  • "권력과 문명", ''Journal of Power'', 1(2): (2008): 135–142.

3. 1. 문명화 과정

엘리아스의 이론은 시간에 따른 권력, 행동, 감정, 지식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는 과정 사회학 또는 피겨레이션 사회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6]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변적인 학자로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해당 분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그의 연구에 대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그의 대규모 사회적 피겨레이션 또는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성 네트워크에 대한 개념이 개인의 행위자 측면을 간과하지 않고 대규모 사회 구조의 출현과 기능을 설명하기 때문이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당시 지배적인 구조 기능주의 학파에 대해 구조보다 행위자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6]

엘리아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문명화 과정''(Ü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으로, 1939년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나 1969년 재출판될 때까지 거의 무시되었다.[6] 첫 번째 권은 유럽의 ''하비투스'' 또는 "제2의 본성", 즉 사회적 태도에 의해 형성된 특정 개인의 정신 구조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한다.[6] 엘리아스는 중세 이후 유럽의 폭력, 성행위, 신체 기능, 식탁 예절 및 말투에 대한 기준이 점차적으로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가 높아짐에 따라, 궁정 에티켓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했다.[6]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적 관계망에 의해 부과된 내면화된 "자제력"은 프로이트가 "초자아"로 인식한 "심리적" 자기 인식을 발전시켰다.[6] ''문명화 과정''의 두 번째 권은 이러한 과정의 원인을 살펴보고 점점 더 중앙 집중화되는 근대 초기 국가와 점점 더 차별화되고 상호 연결된 사회의 웹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6]

1960년대에 엘리아스의 연구가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때, 처음에는 그의 과정 분석이 신뢰를 잃은 "사회 다윈주의"의 연장선으로 오해되었고, 상향식 "진보"라는 개념은 사회적 과정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연속적인 역사로 읽음으로써 기각되었다.[6]

엘리아스는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저술했다.[6] 지식 사회학과 과학에 관한 그의 거의 모든 연구는 영어로 쓰여졌으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에릭 더닝이 함께 집필하고 1986년에 출판된 스포츠 사회학에 관한 그의 중요한 연구인 ''The Quest for Excitement''도 마찬가지이다.[6]

3. 2. 피겨레이션 사회학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권력, 행동, 감정, 지식 간의 관계를 시간에 따라 분석하는, 이른바 "피겨레이션 사회학"을 주창했다.[6] 그는 개인의 행위자 측면을 간과하지 않고 대규모 사회 구조의 출현과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성 네트워크인 대규모 사회적 피겨레이션 개념을 사용했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당시 지배적인 구조 기능주의 학파에 대해 구조보다 행위자를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비판이 거셌다.[6]

엘리아스의 이론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변적인 학자로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해당 분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엘리아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문명화 과정》(''Ü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으로, 1939년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나 1969년 재출판될 때까지 거의 무시되었다.[6]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유럽의 ''하비투스'' (사회적 태도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정신 구조)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한다. 중세 이후 유럽의 폭력, 성행위, 신체 기능, 식탁 예절 및 말투에 대한 기준이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하며, 궁정 에티켓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가 높아졌다고 설명한다.[6] 내면화된 "자제력"은 프로이트가 "초자아"로 인식한 "심리적" 자기 인식을 발전시켰다.[6] ''문명화 과정''의 두 번째 권은 이러한 과정의 원인을 점점 더 중앙 집중화되는 근대 초기 국가와 점점 더 차별화되고 상호 연결된 사회에서 찾는다.[6]

엘리아스의 연구는 1960년대에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때, 처음에는 그의 과정 분석이 신뢰를 잃은 "사회 다윈주의"의 연장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6]

엘리아스는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저술했다. 지식 사회학과 과학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는 영어로 쓰여졌으며, 에릭 더닝과 함께 집필하고 1986년에 출판된 스포츠 사회학에 관한 중요한 연구인 ''The Quest for Excitement''도 마찬가지이다.[6] 1984년 빌레펠트 대학교 개발 사회학 센터는 엘리아스를 초청하여 국제적으로 저명한 동료들이 모여 그의 문명화 과정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들을 직접 검토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주재하게 했다.[6]

1983년 엘리아스는 사후 그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재단을 설립했다.[6] 2017년 새로운 이사회가 재단의 경영을 인수했다.[6]

엘리아스는 1962년 레스터 대학교에서 은퇴할 때까지 ''Ü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이라는 책 한 권과 소수의 논문만 발표했지만, 1990년 사망할 때까지 15권의 책과 약 150편의 수필을 발표했다.[6]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를 매우 꺼렸으며, 교정을 통해 수정할 수 있었던 많은 오류가 원본 영어판에 포함되어 있었다. 21세기 초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재단은 UCD 프레스, 더블린과 협약을 맺어 18권에 달하는 엘리아스 작품의 새로운 학술판을 출판하게 되었다.[6]

그의 다른 주요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 "해군 직업의 기원에 관한 연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1(4) 1950: 291–309.
  • "관여와 분리의 문제",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7(3) 1956: 226–252.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1부", ''Sociology'', 5(2): (1971): 149–168.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2부", ''Sociology'', 5(3): (1971): 355–370.
  • "과학 이론과 과학의 역사: 최근 논의에 대한 논평", ''Economy & Society'', 1(2): (1972): 117–133.
  • "교화 과정 재검토: 스타니슬라스 퐁텐과의 인터뷰", ''Theory & Society'', 5: (1978): 243–253.
  • "공격성의 변화에 관하여", ''Theory & Society'', 5(2): (1978): 229–242.
  • "문명과 폭력: 국가의 폭력 독점 및 그 위반에 관하여". ''텔로스'', 54 (1982–83년 겨울): 134–154.
  • "사회학자들의 현재로의 후퇴", ''Theory, Culture & Society'', 4: (1987): 223–247.
  • "인간과 그들의 감정에 관하여: 과정사회학적 논고", ''Theory, Culture & Society'', 4(2–3): (1987): 339–361.
  • "성 간의 변화하는 권력 균형 – 과정사회학적 연구: 고대 로마 국가의 사례", ''Theory, Culture & Society'', 4 (2–3): (1987): 287–316.
  • "기호 이론: 서론, 1부", ''Theory, Culture & Society'', 6(2): (1989): 169–217.
  • "기술화와 문명", ''Theory, Culture & Society'', 12(3): (1995): 7–42.
  • "사회 과정 이론을 향하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48(3): (1997): 355–383.
  • "권력과 문명", ''Journal of Power'', 1(2): (2008): 135–142.

3. 3. 스포츠 사회학

엘리아스는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저술했다. 지식 사회학과 과학에 관한 그의 거의 모든 연구는 영어로 쓰여졌으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에릭 더닝이 함께 집필하고 1986년에 출판된 스포츠 사회학에 관한 그의 중요한 연구인 ''The Quest for Excitement''도 마찬가지이다.[6]

3. 4. 시간 사회학

엘리아스의 이론은 시간에 따른 권력, 행동, 감정, 지식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6] 그는 이른바 피겨레이션 사회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6]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엘리아스는 오랫동안 주변적인 학자로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결국 해당 분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그의 연구에 대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그의 대규모 사회적 피겨레이션 또는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성 네트워크에 대한 개념이 개인의 행위자 측면을 간과하지 않고 대규모 사회 구조의 출현과 기능을 설명하기 때문이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당시 지배적인 구조 기능주의 학파에 대해 구조보다 행위자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6]

엘리아스는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저술했다.[6] 지식 사회학과 과학에 관한 그의 거의 모든 연구는 영어로 쓰여졌으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에릭 더닝이 함께 집필하고 1986년에 출판된 스포츠 사회학에 관한 그의 중요한 연구인 ''The Quest for Excitement''도 마찬가지이다.[6]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은 시간 사회학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다.

  • "관여와 분리의 문제",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7(3) 1956: 226–252.[6]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1부", ''Sociology'', 5(2): (1971): 149–168.[6]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2부", ''Sociology'', 5(3): (1971): 355–370.[6]
  • "과학 이론과 과학의 역사: 최근 논의에 대한 논평", ''Economy & Society'', 1(2): (1972): 117–133.[6]
  • "사회 과정 이론을 향하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48(3): (1997): 355–383.[6]
  • "권력과 문명", ''Journal of Power'', 1(2): (2008): 135–142.[6]

3. 5. 기타 연구

엘리아스의 이론은 시간에 따른 권력, 행동, 감정, 지식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피겨레이션 사회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6]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변적인 학자로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재발견되어 해당 분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그의 개념은 개인의 행위자 측면을 간과하지 않고 대규모 사회 구조의 출현과 기능을 설명한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당시 지배적인 구조 기능주의 학파에 대해 구조보다 행위자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6]

엘리아스는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저술했다.[6] 지식 사회학과 과학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는 영어로 쓰여졌으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에릭 더닝이 함께 집필하고 1986년에 출판된 스포츠 사회학에 관한 중요한 연구인 ''The Quest for Excitement''도 마찬가지이다.[6] 1984년 빌레펠트 대학교 개발 사회학 센터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를 초청하여 국제적으로 저명한 동료들이 모여 그의 문명화 과정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들을 직접 검토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주재하게 했다.[6]

엘리아스의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 "해군 직업의 기원에 관한 연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1(4) 1950: 291–309.
  • "관여와 분리의 문제",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7(3) 1956: 226–252.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1부", ''Sociology'', 5(2): (1971): 149–168.
  • "지식의 사회학: 새로운 관점. 2부", ''Sociology'', 5(3): (1971): 355–370.
  • "과학 이론과 과학의 역사: 최근 논의에 대한 논평", ''Economy & Society'', 1(2): (1972): 117–133.
  • "교화 과정 재검토: 스타니슬라스 퐁텐과의 인터뷰", ''Theory & Society'', 5: (1978): 243–253.
  • "공격성의 변화에 관하여", ''Theory & Society'', 5(2): (1978): 229–242.
  • "문명과 폭력: 국가의 폭력 독점 및 그 위반에 관하여". ''텔로스'', 54 (1982–83년 겨울): 134–154.
  • "사회학자들의 현재로의 후퇴", ''Theory, Culture & Society'', 4: (1987): 223–247.
  • "인간과 그들의 감정에 관하여: 과정사회학적 논고", ''Theory, Culture & Society'', 4(2–3): (1987): 339–361.
  • "성 간의 변화하는 권력 균형 – 과정사회학적 연구: 고대 로마 국가의 사례", ''Theory, Culture & Society'', 4 (2–3): (1987): 287–316.
  • "기호 이론: 서론, 1부", ''Theory, Culture & Society'', 6(2): (1989): 169–217.
  • "기술화와 문명", ''Theory, Culture & Society'', 12(3): (1995): 7–42.
  • "사회 과정 이론을 향하여",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48(3): (1997): 355–383.
  • "권력과 문명", ''Journal of Power'', 1(2): (2008): 135–142.

4. 한국과의 관계

5. 수상 및 영예


  • 197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 제1회 테오도르 아도르노 상(철학 분야의 탁월한 공적에 대해)을 수여받았다.
  • 1980년: 빌레펠트 대학교(Universität Bielefeld) 명예박사 학위(Ehrendoktorwürde)를 수여받았다.
  • 1986년: 독일 연방 공화국 연방 공로 훈장 대십자장(Großes Verdienstkreuz Bundesrepublik Deutschland)을 수여받았다.
  • 1987년: 네덜란드 국왕 오라녜-나소 훈장(Orde van Oranje-Nassau) 사령관 훈장을 수여받았다.
  • 1987년: 이탈리아 사회학·사회과학 유럽 아말피 상(Premio Europeo Amalfi/European Amalfi Prize for Sociology and Social Sciences)을 수여받았다.
  • 1990년: 이탈리아 국제 노니노 상(Premio Nonino) "현대의 현자" 상을 수여받았다.[17]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재단

엘리아스는 1983년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재단(Norbert-Elias-Stiftung)을 설립하고, 사회과학의 광범위한 연구에 대해 그 과정과 관계성에 기반한 이해를 촉진하도록 위탁했다. 그 유지를 재단이 계승하여, 이사회의 재량에 따라 후진 양성을 목표로 하는 도서상, 연구비 및 보조금 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11]

7. 저서

엘리아스의 저작들은 더블린대학교 출판부에서 신중하게 교정, 교차 참조 및 주석이 달린 새로운 판본으로 출판되었으며, 총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엘리아스가 언급하는 많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엘리아스의 수집된 에세이 3권은 이전에는 영어로 출판되지 않았거나, 매우 산발적으로 출판되어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담고 있어 중요하다.

주요 저서로는 『초기 저작들』(2006), 『궁정 사회』(2006), 『문명화 과정에 관하여』(2012), 『확립된 자들과 아웃사이더들』(2008), 『사회학이란 무엇인가?』(2012), 『죽어가는 자의 고독』과 『인간 조건』(2009), 『흥분에 대한 추구: 문명화 과정에서의 스포츠와 여가』(2008), 『관여와 분리』(2007), 『시간에 관한 에세이』(2007), 『개인들의 사회』(2010), 『독일인에 관한 연구』(2013), 『모차르트, 그리고 궁정 문화에 관한 다른 에세이들』(2010), 『상징 이론』(2011) 등이 있다.

초판 발행 연도순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1939년: '''문명화 과정'''
  • 1965년: '''확립된 자들과 외부자들''' (존 L. 스콧슨 공저)
  • 1969년: '''궁정 사회'''
  • 1970년: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 1982년: '''오늘날 죽어가는 자들의 고독에 관하여'''
  • 1983년: '''참여와 분리'''
  • 1984년: '''시간에 관하여'''
  • 1985년: '''인간의 조건'''
  • 1986년: '''흥분의 추구''' (에릭 더닝 공저)
  • 1987년: '''개인들의 사회'''
  • 1987년: '''인간의 운명'''
  • 1989년: '''독일인에 대한 연구'''
  • 1990년: '''자기 자신에 관하여'''
  • 1991년: '''모차르트. 천재의 사회학'''
  • 1991년: '''기호 이론'''
  • 1996년: '''가난한 야곱의 발라드'''
  • 1998년: '''와토의 사랑의 섬으로의 순례'''
  • 1998년: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리더: 전기적 선집'''
  • 1999년: '''세기의 증인들'''
  • 2002년: '''초기 저작들'''
  • 2004년: '''시와 속담'''


법정대학의 〈叢書・ウニベルシタス〉(총서·우니베르시타스)에는 『문명화의 과정』, 『궁정 사회』, 『죽어가는 자의 고독』, 『모차르트―어떤 천재의 사회학』, 『참가와 거리두기―지식사회학 논고』, 『사회학이란 무엇인가―관계구조·네트워크 형성·권력』, 『독일인론―문명화와 폭력』, 『시간에 관하여』, 『여러 개인의 사회―문명화와 관계구조』, 『스포츠와 문명화—흥분의 탐구』, 『정착자와 부외자—커뮤니티의 사회학』 등이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Norbert Elias and the Analysis of History and Sport: Systematizing Figurational Sociology Routledge
[2] 간행물 Family background of Norbert Elias 2013-08
[3] 서적 Norbert Elias and Violence Palgrave Macmillan
[4] 서적 The Body Reader: Essential Social and Cultural Readings NYU Press
[5] 웹사이트 Catalogue description Naturalisation Certificate: Norbert Elias. From Germany. Resident in London. Certificate... https://discovery.na[...] 1952-02-22
[6] 웹사이트 Norbert Elias : Norbert Elias Foundation Board http://norbert-elias[...]
[7] 서적 Die Juden der Frankfurter Universität
[8] 서적 Die Geschichte der Frankfurter Juden seit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9] 웹사이트 Hessische Biografie : Erweiterte Suche : LAGIS Hessen https://www.lagis-he[...] 2024-02-04
[10] 웹사이트 Hessische Biografie : Erweiterte Suche : LAGIS Hessen https://www.lagis-he[...] 2024-02-04
[11] 웹사이트 Norbert Elias - Norbert Elias http://norbert-elias[...] 2024-02-03
[12] 웹사이트 Norbert Elias http://norbert-elias[...] Norbert Elias Foundation 2024-02-04
[13] 웹사이트 Die Stipendien im Überblick - DLA Marbach https://www.dla-marb[...] 2024-02-04
[14] 웹사이트 Katalog (beta) https://www.dla-marb[...] DLA Marbach 2024-02-04
[15] 웹사이트 HyperElias@WorldCatalogue http://www.kuwi.uni-[...] 2024-02-04
[16] 서적 Der unendliche Prozeß der Zivilisation. Zur Kultursoziologie der Moderne nach Norbert Elias Campus
[17] 웹사이트 Premio Nonino https://premio.grapp[...] 2024-02-04
[18] 서적 문명화 과정 1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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