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고베르토 다 피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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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고베르토 다 피사 대주교는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마인츠 대주교에게 부제로 서품받았으며,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지지를 받아 피사 주교, 대주교를 역임했다. 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에 도착,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되었으나, 예루살렘 왕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추방당했다. 이후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사망했다. 역사가들은 그의 성지에서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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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베르토 다 피사 대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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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다고베르토 |
출생 | 피사 |
사망 | 1138년, 클뤼니 수도원 |
직업 | 추기경 대주교 |
교회 경력 | |
서임 | 교황 젤라시오 2세 |
임명 | 1116년 3월 6일 |
사임 | 1116년 5월 11일 |
임명 교회 | 피사 대교구 |
계승 | 피에트로 모리코니 |
2. 유년기 및 초기 생애
다고베르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마인츠 대주교였던 베칠로에게 부제로 서품받은 것으로 여겨진다.[1] 당시 베칠로는 서임권 투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했던 주요 인물이었으며,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지지했다.[2] 이러한 베칠로의 행보는 다고베르토의 경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베칠로는 1085년, 교황 지지파가 개최한 퀘들린부르크 시노드에서 성직 매매 혐의로 파문당했다.[2] 한편, 다고베르토라는 이름 자체는 그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나 에밀리아 출신일 가능성을 시사하는데, 이 지역에는 황제를 지지하는 강력한 도시들이 일부 존재했다.[3]
1080년대 말, 다고베르토는 입장을 바꿔 교황청의 확고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토스카나의 마틸다 백작부인과 가까워졌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다고베르토의 과거 불규칙했던 서임을 취소하고 정식으로 다시 서임했으며, 1088년 그를 피사의 주교로 임명했다.
1080년대 후반, 다고베르토는 입장을 바꾸어 교황청의 확고한 지지자 중 한 명인 토스카나의 마틸다 백작부인과 가까워졌다.[4]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다고베르토의 과거 서임 문제를 해결하고 정식으로 서임했으며, 1088년 그를 피사의 주교로 임명했다.[19][4] 그러나 그의 과거 경력 때문에 임명 초기에는 반발이 있었다. 피스토이아의 주교 페테르가 교황에게 항의했고, 대성당 참사회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에 다고베르토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19][4] 그는 피사의 시민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090년에는 다른 인사들과 함께 건물의 최대 높이를 규제하는 등[4] 실용적인 접근 방식으로 피사의 정치 및 경제 생활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4] 1092년에는 성직자들이 그의 문서에 서명하기 시작했으며,[4] 같은 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의 추천을 받아들여 피사 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그의 관할 아래 두었다.[19][4]
다고베르토는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1098년 말 피사 함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다.[6] 도중 비잔티움 제국 함대와 충돌하고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와 함께 라타키아를 잠시 봉쇄하기도 했으나,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의 반대로 철회하고 1099년 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20][7][21] 예루살렘 도착 당시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불분명했으나,[22][8] 곧 기존의 총대주교 대행 아르눌프 드 쇼크를 몰아내고 보에몽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3. 피사 대주교 서임
그러나 그의 과거 경력 때문에 임명 초기에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피스토이아의 주교 페테르(피에르)가 교황에게 항의했고, 대성당 참사회 역시 임명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했다.[19][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에 다고베르토는 점차 자신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피사의 시민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예를 들어 1090년에는 다른 유명 인사들과 함께 가옥의 최대 높이를 규제하는 조치에 참여했으며, 1092년부터는 성직자들이 그의 문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다고베르토는 문제에 대해 실용적으로 접근하면서 피사의 정치 및 경제 생활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4] 그는 교황 우르바노 2세 및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092년, 교황은 마틸다의 추천(청원)을 받아들여 피사 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 다고베르토를 대주교로 임명했다. 이와 함께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그의 교구에 편입시켰다.[19][4]
1094년 크리스마스를 로마에서 교황과 함께 보낸 다고베르토는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순방하는 교황을 수행했다. 이 순방에는 서임권 투쟁 이후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열린 피아첸차 공의회와 교황이 제1차 십자군을 선포한 클레르몽 공의회가 포함되어 있었다.[19][5] 다고베르토는 피사로 돌아와 교황청의 지원 아래 십자군 원정 참여를 설파했고,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5]
1098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다고베르토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왕의 궁정에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무어인으로부터 최근에 재정복한 영토에 교회 조직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다고베르토는 이 임무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알폰소 6세가 교황에게 보내는 선물(보물) 중 상당 부분을 그가 착복했다는 의심(소문)을 받기도 했다.[19]
4. 교황 특사 활동
다고베르토는 1094년 크리스마스를 교황 우르바노 2세와 함께 보냈고,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순방하는 교황을 수행했다. 이 순방에는 서임권 투쟁 이후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열린 피아첸차 공의회와 교황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한 클레르몽 공의회가 포함되어 있었다.[19][5] 이후 피사로 돌아온 다고베르토는 교황청의 지원 아래 십자군 참여를 설파했고,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19][5]
1098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다고베르토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왕의 궁정에 교황 특사로 임명했다.[19][5] 그는 무어인으로부터 최근에 되찾은 영토에 교회 조직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완수하며 능력을 입증했다.[19] 하지만 알폰소 6세가 교황에게 보내는 선물(보물)의 상당 부분을 다고베르토가 가로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19][5]
5. 제1차 십자군과 예루살렘 총대주교
총대주교가 된 다고베르토는 성지를 교회의 통제하에 두려 했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의 초기 통치자들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 및 그의 동생 보두앵 1세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9][23] 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요구하며 왕들과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모략과 재정 문제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총대주교직에서 폐위되고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11][12] 비록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탕크레드의 도움으로 잠시 복권되기도 했으나, 결국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 그는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직접 항소하여 지지를 얻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중 1105년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사망했다.[13][14][26] 그의 재임 기간은 초기 예루살렘 왕국에서 교회와 세속 권력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5. 1. 십자군 원정 참여
다고베르토는 1094년 크리스마스를 교황 우르바노 2세와 함께 보낸 뒤,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순방하는 교황을 수행했다. 이 순방에는 서임권 투쟁 이후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열린 피아첸차 공의회와 교황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한 클레르몽 공의회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고베르토는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피사로 돌아와 십자군 참여를 설교했으며,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5]
1098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다고베르토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왕의 궁정에 교황 특사로 임명했다. 그는 무어인으로부터 최근 수복한 영토에 교회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아 능숙하게 처리했지만, 알폰소 6세가 교황에게 보내는 보물 중 일부를 가로챘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1098년 말이 되기 전, 다고베르트는 정식 허가 없이 피사 함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다. 그의 함대는 비잔틴 제국 영토인 섬들을 약탈하고 비잔틴 해군과 교전을 벌인 후 시리아 해안에 도착했다.[6] 당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는 비잔틴 제국의 항구 도시 라타키아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다고베르트와 피사 함대는 보에몽을 도와 해상 봉쇄에 참여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 및 동방 기독교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은 다고베르트의 행동에 경악하며 그를 설득하여 봉쇄를 풀도록 했다. 결국 보에몽은 라타키아 포위를 포기해야 했고, 1099년 12월 21일 다고베르트와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했다.[7]
다고베르트가 동방으로 향했을 때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명확하지 않았다. 많은 역사가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8년 8월 1일에 사망한 르 퓌의 아데마르의 뒤를 이어 다고베르트를 십자군의 교황 사절로 임명했다고 보지만, 정작 우르바노 2세는 1099년 7월 29일에 사망했다. 다고베르트 본인도 1099년 9월 새로운 교황 파스칼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단순히 '피사 대주교'라고만 칭했다.[8]
1099년 크리스마스 직후, 기존의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던 아르눌프 드 쇼크가 교회법에 어긋난 선출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자, 보에몽의 지지를 받은 다고베르트가 그 자리에 선출되었다. 당시 여론은 성지를 교회의 재산으로 여겼으나, 아르눌프는 그 지배권을 확립하기에는 힘이 약했다. 반면 다고베르트는 (아마도) 교황 사절이라는 지위와 피사 함대의 지원을 바탕으로 더 강력한 입지를 가졌다. 그가 총대주교로 즉위하자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군주가 되는 부용의 고드프루아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 영토를 하사받았으며, 보에몽 역시 안티오키아 영토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당시 에데사 백작이었던 발두인은 다고베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고,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9]
다고베르트는 총대주교로서의 권력을 확립하고자 고드프루아에게 예루살렘 도시 자체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고드프루아는 1100년 4월 1일 부활절에 열린 의식에서, 자신이 죽거나 이교도로부터 두 개의 큰 도시를 정복할 때까지는 예루살렘 소유권을 유지하되, 이후에는 총대주교에게 유증하겠다고 발표하며 부분적으로 양보했다. 그러나 고드프루아는 그해 7월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다고베르트는 갈릴리의 탕크레드와 함께 야파 원정에 참여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기사들은 고드프루아의 동생인 발두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탕크레드의 지지를 받은 다고베르트는 예루살렘을 보에몽에게 넘기겠다는 편지를 썼지만, 편지는 중간에 가로채졌고 보에몽마저 튀르크족에게 사로잡히는 상황이 발생했다.[10]
결국 1100년 11월 11일, 발두인이 예루살렘 왕의 칭호를 받게 되자 다고베르트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두인은 피사 함대에 대한 다고베르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의 총대주교 지위를 인정해주었고, 1100년 크리스마스에 다고베르트는 발두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대관식을 집전했다.[11]
그러나 1101년 4월, 제노바 함대가 도착하면서 다고베르트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발두인이 더 이상 해군력 때문에 피사 함대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재정적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던 발두인은 경건한 신자들이 교회에 기부한 자금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때마침 다고베르트의 총대주교 임명의 적법성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고, 교황이 파견한 사절 포르토의 모리스 추기경이 상황을 조사하러 오자 발두인은 다고베르트가 보에몽에게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도록 부추겼다며 배신 혐의로 고발했다. 다고베르트는 발두인에게 뇌물을 주어 고발을 취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다고베르트가 왕에게 전달되어야 할 기금과 군대를 위해 모금된 기부금 일부를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황 사절 모리스 추기경에 의해 총대주교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안티오키아를 다스리던 탕크레드는 다고베르트를 자신의 도시로 환영하며 성 조지 교회를 내주었다. 모리스 추기경이 1102년 봄에 사망하고, 그해 가을 발두인이 탕크레드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되자, 탕크레드는 지원의 조건으로 다고베르트의 복귀를 내걸었다. 발두인은 이에 동의했지만, 곧 새로운 교황 사절인 파리의 로베르 추기경이 도착했다. 다고베르트 때문에 총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났던 아르눌프 드 쇼크는 로베르 추기경이 주재한 시노드에서 다고베르트에 대한 추가적인 혐의들을 제기했다. 그는 다고베르트가 동방으로 오는 길에 비잔틴 섬을 약탈하여 동료 기독교인을 공격했고, 보에몽과 발두인 사이에 내전을 일으키려 했으며, 순례자들을 위해 모금된 돈을 횡령했다고 고발했다. 결국 다고베르트는 이 시노드에서 다시 한번 총대주교직에서 폐위되었다. 탕크레드는 그를 다시 안티오키아로 받아들였지만, 더 이상 그의 복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역사가 스티븐 런시먼은 다고베르트가 부패하고 인색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퇴장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평가했다.[12]
다고베르트는 이후 로마로 가서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직접 항소했다. 그의 항소는 성공하여 총대주교직을 되찾았으나, 성지로 돌아오던 중 1105년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사망했다.[13][14] 그의 부재 기간 동안에는 에르메마르라는 사제가 총대주교 대리를 맡았고,[15] 그의 사후에는 아를의 기벨린이 총대주교직을 계승했다. 한편 피사 대주교 자리는 피에트로 모리코니가 계승했는데, 피사 시민들이 다고베르트가 죽기 전에 이미 모리코니를 선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다고베르트가 오랜 부재로 인해 피사에서의 지지를 잃었음을 시사할 수도 있지만, 피사 대성당 기록 보관소의 문서들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의 결정들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인용되고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16]
5. 2.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출
1098년 말, 다고베르트는 피사 함대를 이끌고 시리아 지방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비잔티움 제국 해군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1차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인 보에몽 1세의 영지인 안티오키아 공국 연안에 상륙했다. 그는 보에몽과 만나 제국의 항구 도시 라타키아를 함께 봉쇄했다.[20][6]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과 동방 정교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은 봉쇄를 풀도록 설득했고, 보에몽은 이를 받아들여 포위를 풀었다. 이후 다고베르트는 보에몽과 함께 1099년 12월 21일 예루살렘에 도착했다.[21][7]
다고베르트가 동방으로 갔을 때 그의 정확한 지위는 불분명하다. 많은 역사가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8년 8월 1일에 사망한 르퓌의 아데마르의 후임으로 그를 교황 특사로 임명했다고 보지만,[22] 우르바노 2세는 1099년 7월 29일에 사망했고, 다고베르트 자신은 1099년 9월 새 교황 교황 파스칼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단순히 '피사 대주교'라고만 칭했다.[8]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고베르트는 크리스마스 직후, 기존에 예루살렘 주교직을 맡고 있던 쇼끄의 아르눌프를 선출 과정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폐위시켰다. 보에몽의 지지와 (아마도) 교황 특사라는 직함에 힘입어 다고베르트는 새로운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당시 여론은 성지를 교회의 재산으로 여겼으나, 아르눌프는 이를 확립하기에는 힘이 약했다. 다고베르트는 피사 함대의 지원을 받아 더 강력한 입지를 확보했다. 즉위 직후, 예루살렘 왕국의 첫 통치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다고베르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 영토를 하사받았으며, 보에몽 역시 안티오키아에서 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당시 에데사의 영주였던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은 다고베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고,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9][23]
다고베르트는 총대주교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고드프루아에게 예루살렘 통치권을 자신에게 완전히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이는 기사들의 반발을 샀고, 고드프루아는 1100년 4월 1일 부활절에 열린 의식에서 자신이 죽거나 이교도로부터 두 개의 큰 도시를 정복할 때까지 예루살렘 소유권을 유지하되, 사후에는 총대주교에게 유증하겠다고 발표하며 부분적으로 양보했다.[9] 그러나 1100년 7월 18일, 다고베르트가 보에몽의 조카인 갈릴리 공작 탕크레드와 함께 자파 원정길에 올라있을 때 고드프루아가 갑자기 사망했다. 다고베르트는 탕크레드의 도움을 받아 보에몽에게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밀사가 레몽 드 생질에게 체포되어 편지는 전달되지 못했고,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튀르크 군대에 사로잡혔다.[10][24]
1100년 11월 11일,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이 다른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했다. 보두앵은 다고베르트가 이끌고 온 피사 함대의 해상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고, 1100년 크리스마스에 다고베르트의 집전 하에 대관식을 치렀다.[11][25] 그러나 1101년 4월, 제노바 함대가 도착하면서 보두앵은 더 이상 해상력을 피사 함대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고, 다고베르트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재정적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던 보두앵은 교회 재정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교황 파스칼 2세가 파견한 특사 모리스 추기경이 도착하자, 보두앵은 다고베르트가 보에몽과 공모하여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려 했다는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다급해진 다고베르트는 보두앵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고발을 철회시켰으나, 그가 왕을 위한 기금과 군대 유지비를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가을에 총대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다.[11]
다고베르트는 당시 안티오키아의 섭정이었던 탕크레드에게 도망쳐 환대를 받았다. 모리스 추기경은 1102년 봄에 사망했고, 그해 가을 보두앵이 탕크레드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탕크레드는 다고베르트의 복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보두앵은 이를 수락하여 다고베르트는 잠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교황 특사인 로베르 추기경이 도착하자, 다고베르트는 과거 라오디케아 봉쇄 당시 동방 정교회 신자 살해를 묵인한 책임, 보에몽과 공모하여 보두앵을 모함하고 내전을 일으키려 한 혐의, 순례자들의 복지를 위해 기부된 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다시 기소되어 폐위되고 안티오키아로 추방당했다. 탕크레드는 다시 그를 환대했지만, 더 이상 그의 복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12] 스티븐 런시먼은 다고베르트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으며 그의 퇴장은 유감스럽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2]
이후 다고베르트는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직접 항소하여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총대주교직을 되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중 1105년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사망했다.[13][14][26] 그의 공위 기간 동안에는 Ehremar|에르메마르la라는 사제가 총대주교직을 대행했으며,[15][27] 사후에는 아를의 기벨린이 총대주교직을 계승했다.[28] 피사 대주교직은 피에트로 모리코니가 이어받았는데, 피사 시민들이 다고베르트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모리코니를 선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다고베르트가 오랜 부재로 인해 고향에서의 지지를 잃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그러나 피사 대성당 기록 보관소의 헌장들은 그의 재임 중 활동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인용되고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16]
5. 3. 예루살렘 왕국과의 갈등
1098년 말, 다고베르토는 피사 함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향했다. 도중에 비잔티움 제국 해군과 충돌하고 제국령 섬들을 약탈하기도 했으나, 1차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인 보에몽과 합류하여 라타키아 항구를 봉쇄했다.[20][6] 그러나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봉쇄를 풀도록 설득했고, 보에몽은 이를 받아들여 다고베르토와 함께 1099년 12월 21일(또는 12월 9일)[21][7]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다고베르토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당시 그의 정확한 지위는 불분명하다. 많은 역사가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8년 사망한 르 퓌의 아데마르의 후임 교황 사절로 그를 임명했다고 보지만, 정작 다고베르토 자신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피사 대주교'라고만 칭했다.[22][8]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고베르토는 곧바로 기존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대행이었던 아르눌프 드 쇼크를 교회법상 선출이 무효라는 이유로 끌어내리고, 보에몽의 지지와 (아마도) 교황 사절이라는 직함을 내세워 새로운 라틴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당시 여론은 성지를 교회의 재산으로 여겼으나, 아르눌프는 영향력이 약해 이를 확립하지 못했다. 다고베르토는 피사 함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 그는 즉위 직후 고드프루아에게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고드프루아는 다고베르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 영토를 하사받는 형식을 취했고, 보에몽 역시 안티오키아에 대해 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고드프루아의 동생이자 당시 에데사 백작이었던 보두앵은 다고베르토에게 충성을 거부하며 좋지 않은 관계를 보였다.[23][9]
다고베르토는 총대주교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드프루아에게 예루살렘을 완전히 넘기라고 압박했다. 고드프루아는 기사들의 반발 속에서 부분적으로 양보하여, 1100년 부활절에 자신이 죽거나 이교도로부터 두 개의 큰 도시를 정복할 때까지는 영지를 보유하되, 사후에는 총대주교에게 유증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1100년 7월, 다고베르토가 보에몽의 조카인 갈릴리의 탕크레드와 함께 자파 원정에 나선 사이 고드프루아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다고베르토는 탕크레드의 도움을 받아 보에몽에게 예루살렘으로 와서 영지를 차지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밀사가 레몽 드 생질에게 체포되어 전달되지 못했고, 보에몽은 튀르크군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24][10]
결국 1100년 11월 11일,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이 다른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했다. 보두앵은 다고베르트가 이끌고 온 피사 함대의 해군력이 필요했기에, 다고베르토의 지위를 인정하고 1100년 크리스마스에 그로부터 대관식을 치렀다.[25][11] 그러나 1101년 4월 제노바 함대가 도착하면서 보두앵은 더 이상 피사 함대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재정적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던 보두앵은 교회가 보유한 막대한 부를 통제하려 했고, 마침 교황 파스칼 2세가 파견한 사절 포르토의 모리스 추기경이 도착하자 다고베르토를 보에몽과 공모하여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는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다급해진 다고베르토는 보두앵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고발을 취하하게 했으나, 곧이어 그가 왕실과 십자군을 위해 모금된 자금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모리스 추기경에 의해 총대주교직에서 파면되고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
다고베르토는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도망쳐 당시 섭정이었던 탕크레드의 환대를 받았다. 1102년 봄 모리스 추기경이 사망하고, 보두앵이 탕크레드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탕크레드는 다고베르토의 복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보두앵은 이를 수락하여 다고베르토는 잠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교황 사절인 파리의 로베르 추기경이 도착했고, 다고베르토가 이전에 축출했던 아르눌프 드 쇼크 등이 새로운 혐의들을 제기했다. 다고베르토는 라오디케아 봉쇄 당시 동방 정교회 신자 살해를 묵인한 점, 보에몽과 공모하여 보두앵에 대항하는 내전을 일으키려 한 점, 순례자들을 위해 기부된 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다시 총대주교직에서 폐위되어 안티오키아로 추방당했다. 탕크레드는 다시 그를 환대했지만, 더 이상 그의 복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스티븐 런시먼은 다고베르토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으며 그의 퇴장은 유감스럽지 않다고 평가했다.[12]
이후 다고베르토는 로마로 가서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직접 항소하여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총대주교직을 되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중 1105년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사망했다.[26][13][14] 그의 공석 기간 동안에는 Ehremar|에르메마르la라는 사제가 총대주교직을 대행했으며,[27][15] 사후에는 아를의 기벨린(Ghibbelin)이 그 뒤를 이었다.[28] 피사 대주교직은 피에트로 모리코니가 계승했는데, 피사 시민들이 다고베르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모리코니를 선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오랜 부재로 다고베르토가 피사에서의 지지를 잃었음을 시사할 수 있으나, 피사 대성당 기록 보관소의 문서들은 그의 재임 중 활동이 이후에도 계속 인용되고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16]
6. 후세의 평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다고베르토의 성지에서의 행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스티븐 런시맨 경은 그의 저서인 《제1차 십자군》에서 다고베르토를 활동적이고 똑똑하지만 허영심이 많고 야심만만하며 부정직하고 쉽게 영향받는 인물로 묘사했으며, 예루살렘에서의 행동을 강하게 비난하였다.[17][29]
하지만 1998년 마이클 마츠케는 연구를 통해 다고베르토를 옹호하며, 그의 행동이 종교적 이상주의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고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의도를 수행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재평가가 설득력이 있는지에 대해 강하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17]
패트리샤 스키너는 다고베르토의 경력을 조사하면서 그가 교회법에 반하여 행동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당시의 예외적인 상황에서 실용적으로 행동해야 했다고 주장한다.[18]
한편, 피사에 있는 성묘 교회Chiesa del Santo Sepolcroita의 이름은 다고베르토의 십자군 참여를 언급하는 것이다.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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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Mainz
http://www.newad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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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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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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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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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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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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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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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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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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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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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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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0]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ume 1, The First Crusad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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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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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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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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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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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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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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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 cit.
[28]
인용
op. cit.
[29]
인용
op.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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