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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루아 드 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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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활동한 귀족으로,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하 로렌 공작을 역임했으며, 십자군 원정 당시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니케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는 데 기여했다. 예루살렘 점령 후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왕의 칭호 대신 '성묘 수호자'를 사용했으며,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시온 기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파티마 왕조를 상대로 아스칼론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레몽과의 관계 때문에 아스칼론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고드프루아는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 총대주교와의 갈등을 겪었으며, 1100년 사망했다. 사후에는 영웅화되어 십자군과 관련된 다양한 문학 작품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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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루아 드 부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드프루아 드 부용, 1330년경 그림
고드프루아 드 부용, 마이트르 뒤 로망 드 포벨의 "고드프루아 드 부용 이야기", 1330년경
프랑스어Godefroy
네덜란드어Godfried
독일어Gottfried
라틴어Godefridus Bullionensis
통치
작위성묘의 수호자
재위 기간1099년 7월 22일 – 1100년 7월 18일
후임보두앵 1세 (예루살렘 왕)
로렌 공작
작위하 로렌 공작
재위 기간1089년–1096년
이전콘라트 2세
이후앙리 1세
가문
가문플랑드르 가
아버지외스타슈 2세
어머니이다 드 로렌
개인 정보
출생1060년경, 불로뉴, 플랑드르 백국
사망1100년 7월 18일, 예루살렘, 예루살렘 왕국
매장지성묘 교회, 예루살렘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기타 정보
참전제1차 십자군
도릴라이움 전투
안티오키아 공방전
아스칼론 전투

2. 생애

고드프루아는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의 후손으로[11][12],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와 고드프루아 3세의 딸 이드 드 불로뉴 사이에서 태어났다. 1060년경 출생했으며, 출생지는 불로뉴로 알려져 있으나, 13세기 연대기에 따르면 벨기에 브라방왈롱주의 바이시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1076년 외삼촌 고드프루아 4세가 사망하자 하 로렌 공국을 상속받을 예정이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 지역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 했다. 처음에는 고드프루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1082년 고드프루아에게 프랑스 아르덴 지역에 있는 부용을 주고 승인했다. 고드프루아는 황제에게 충성했고, 1089년 하 로렌 공작령을 돌려받았다.

하 로렌 공작이 되기까지, 그리고 공작이 된 이후에도 고드프루아는 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1093년에는 스테네이에서 '성 다고베르트 교회'를 되찾기 위한 포위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13] 그는 서임권 투쟁에서 로마 교황그레고리오 7세와 대립하는 하인리히 4세를 지원했으며, 슈바벤 공작루돌프의 군대와 싸우고 하인리히 황제가 로마에 입성했을 때 이탈리아에 종군하기도 했다.

고드프루아의 상속권을 두고 토스카나 변경백 마틸다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도전을 해왔다. 나뮈르 백작알베르 3세, 림부르크 공작 발레랑 1세, 시니 백작 아르놀 1세 등이 연합하여 고드프루아와 대립했으나, 고드프루아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물리치고 1087년 하 로렌을 지켜냈다.

2. 1. 출생과 가계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의 후손[11][12]인 고드프루아는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와 고드프루아 3세의 딸 이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드프루아는 둘째 아들이었기에 형보다 상속 기회가 적었다. 그러나 그의 외삼촌 고드프루아 4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상속자로 지명했고, 그는 하 로렌 공국의 다음 계승자가 되었다.[2]

2. 2. 하 로렌 공작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의 후손[11][12]으로,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와 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2세의 딸 이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삼촌인 고드프루아 4세로부터 하 로렌 공국을 상속받을 예정이었다.[2]

1076년 고드프루아 4세가 사망하자,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는 로렌 공작령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initially 고드프루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082년에 고드프루아에게 프랑스 아르덴 지역에 있는 부용을 주고 그를 승인했다. 이후 1089년, 고드프루아는 황제에게 충성한 대가로 하 로렌 공작령을 돌려받았다.[13]

하 로렌은 중세 프랑스 왕국과 독일 영토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1076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아들에게 하 로렌을 넘겨주고, 고드프루아에게는 부용과 안트베르펜 변경백령만을 주어 그의 충성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고드프루아는 서임권 투쟁 기간 동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갈등 속에서도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며 충성을 증명했다.

고드프루아의 지도력은 그의 상속지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시험받았다. 1076년 외삼촌에게서 로렌 영지를 상속받은 후, 토스카나 변경백 마틸다, 남뮈르 백작 알베르 3세, 벨루에의 테오데리크 백작 등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그에게 도전했다. 이들은 림부르크의 발레랑 1세와 시니의 아르놀 1세 등과 연합하여 고드프루아에 대항했다.

이러한 위협에 맞서 고드프루아는 그의 형제들인 외스타슈와 발두인의 도움을 받아 오랜 투쟁 끝에 1087년 하 로렌을 얻어냈다.

2. 3. 제1차 십자군 원정 이전의 행적

고드프루아는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의 후손으로[11][12],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와 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2세의 딸 이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13세기 연대기 작가 중 한 명은 현재 벨기에의 왈롱 브라반트에 있는 도시인 베지를 출생지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는 둘째 아들이었기에 형보다 기회가 적었다. 그러나 외삼촌 고드프루아 4세가 자식 없이 죽으면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상속자로 지명했고, 그는 하 로렌 공국의 다음 계승자가 되었다.[2]

1076년 고드프루아 4세가 죽자,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는 로렌 공작령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처음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082년 고드프루아에게 프랑스 아르덴 지역에 있는 부용을 주고 그를 승인했다. 그는 황제를 위해 전쟁을 벌이며 충성한 대가로 1089년 로렌 공작령을 돌려받았다.

고드프루아의 지도력은 다양한 적들을 상대로 자신의 상속지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크게 시험받았다. 고모인 토스카나 변경백 마틸다, 사촌인 남뮈르 백작 알베르 3세, 벨루에의 테오데리크 백작이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연합에는 베르됭의 테오데리크 주교와 전리품을 나누려는 두 명의 소규모 백작 림부르크의 발레랑 1세와 시니의 아르놀 1세가 합류했다. 이처럼 여러 적들이 그의 영토 일부를 빼앗으려 하자, 고드프루아의 형제들인 외스타슈와 발두인이 그를 도왔다.

1093년 고드프루아는 군대를 동원해 스테네이에서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하였다. 그 공격의 목적은 지역 귀족의 손아귀에 있던 '성 다고베르트 교회'를 되찾아서 고르즈 수도원에 되돌려주려는 것이었다.[13]

3.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고, 동생 불로뉴 백작 우스타슈, 불로뉴의 보두앵과 함께 십자군에 합류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이후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에 잔류하자, 레몽과 함께 1099년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했다. 레몽이 트리폴리를 원하고 예루살렘 왕위를 거절했기에 고드프루아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곳에서 왕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하여 성묘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 라는 명칭을 썼다.[14]

안티오키아에서 승리한 후, 십자군은 진군 경로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르퓌 주교는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했고,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 방어를 이유로 안티오키아에 남았다.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도 에데사로 향했다. 많은 보병은 예루살렘으로 계속 진군하기를 원했지만, 유력 제후였던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는 탄크레드 등을 자신의 세력으로 확보한 후 추가 진군을 거부했다. 십자군은 수개월 동안 안티오키아에 머무른 후, 장병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은 레이몽 4세의 결정에 따라 남쪽으로 진군을 재개했고, 고드프루아도 이에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후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라는 새로운 적과 마주했다.

1099년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와 전투를 벌였다. 1099년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공성 무기를 만들었고, 7월 14일~15일에 걸쳐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고드프루아와 그의 기사들이 처음으로 성벽을 넘어 예루살렘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이로써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 탈환과 성묘 교회를 다시 기독교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14]

3. 1. 십자군 참여와 콘스탄티노플 도착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예루살렘을 해방하고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이후 셀주크 제국에게 광대한 영토를 잃은 비잔틴 제국을 돕기 위해 군사 행동을 촉구했다. 고드프루아는 자신의 영지를 리에주 주교와 베르됭 주교에게 팔거나 저당잡혀 그 돈으로 십자군 군대를 모집했다.[3] 그의 형인 에우스타스와 그의 남동생 보두앵이 합류했는데, 보두앵은 유럽에 영토가 없었고 성지에서 영토를 찾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가장 큰 규모는 55세로 십자군 귀족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가 일으킨 군대였다. 그 결과 그는 원정을 이끌 것으로 예상했고, 그와 함께 여행한 교황 사절인 르퓌의 아데마르의 존재로 인해 이러한 주장이 강화되었다. 또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노르만 기사)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도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다.

고드프루아와 그의 형제들 에우스타스와 보두앵이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와 만나는 모습


교황 우르바노의 조언에 따라, 이 군대들 중 대부분은 한여름에 출발하여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각 군대는 별도로 이동했는데, 한 지역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자체적으로 먹이고 공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096년 봄에 처음 출발한 것은 민중 십자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20,000명의 하급 기사와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가 라인란트를 거쳐 헝가리로 향했다. 남부와 북부 프랑스 출신은 대부분 브린디시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항해했고, 고드프루아와 그의 두 형제는 로렌에서 온 40,000명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1096년 8월에 민중 십자군이 거쳐간 경로를 따라 출발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십자군 호소는 1095년 12월 루앙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태를 촉발했다. 1096년 봄과 초여름에 민중 십자군 구성원들은 라인란트 학살 동안 유대인 공동체를 약탈하고 학살했다.

민중 십자군이 6월에 헝가리에 들어간 후, 일련의 사건들이 그들을 호스트들과의 전면적인 전투로 이끌었고 10,000명 이상의 십자군이 사망했다. 그 결과 고드프루아와 그의 군대가 9월에 국경에 접근했을 때 그들이 들어가는 데 며칠간의 협상이 필요했다. 그는 마침내 11월에 위그 드 베르망두아가 이끄는 군대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다음 몇 달 동안 도착했다. 그가 예상했던 제한된 숫자와 달리, 1097년 5월까지 알렉시오스는 4,000~8,000명의 기마 기병과 25,000~55,000명의 보병이 그의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는데, 그 이유는 양측이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시오스는 단지 셀주크 투르크에게 잃어버린 비잔틴 영토를 되찾는 데 도움을 원했던 반면, 십자군은 무슬림으로부터 성지를 해방시키려고 했다. 알렉시오스가 충성 맹세를 요구했을 때, 고드프루아와 대부분의 십자군은 일부 영토를 황제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수정된 버전에 동의했다. 툴루즈의 레이몽은 예외였는데, 그는 황제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3. 2. 니케아, 안티오키아 함락

1097년 2월, 고드프루아와 그의 군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타란토 공작 보에몽,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 등의 군세와 합류했다. 같은 해 5월, 비잔틴 제국의 군세와 함께 진군을 계속한 십자군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에 위치한 도시 니케아에 도착했다. 니케아는 1085년부터 셀주크 왕조에 점령되어 있었으며, 십자군과 비잔틴 군은 포위전을 감행했다. 이 포위전 동안 고드프루아는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고, 대신 보에몽이 포위전을 지휘했다. 십자군·비잔틴 연합군은 이 포위전을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비잔틴 군은 극비리에 니케아 수비병과 회담을 갖고, 6월 19일에 십자군을 제치고 니케아를 점령했다. 포위전 종결 후, 통제가 되지 않는 십자군이 제국의 중요한 도시인 니케아를 약탈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잔틴 군의 선수를 치는 행위에 대해 십자군의 지도자들은 어느 정도 이해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양자 간에 불신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19세기의 화가 알퐁스 드 누빌이 1883년에 그린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기타 십자군 지도자들


고드프루아는 1099년에 최종적으로 성지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뚜렷한 군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97년, 도릴레움에 주둔하고 있던 보에몽의 군세가 킬리치 아르슬란 1세가 이끄는 셀주크 군의 기습을 받았다. 선두에 섰던 보에몽과는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던 고드프루아였지만, 터키군의 기습 소식을 들은 그는 소수의 기병대를 이끌고 셀주크 군에 반격을 감행하여 보에몽 등을 구원했다. 십자군은 그 후에도 꾸준히 소아시아를 진군했지만, 몇몇 문헌에 따르면 고드프루아는 진군 도중에 곰에게 습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10]

부상을 치료하고 진군을 계속한 고드프루아는 1097년 9월부터 시작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이 포위전은 1098년 6월까지 이어졌으며, 길고 고통스러운 포위전이 되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이 포위전이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약속했던 식량 제공을 중단했는데,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를 포위한 십자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십자군의 많은 수가 유럽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보에몽은 비잔틴 제국이 식량 제공 협약을 파기한 것을 받아들여, 안티오키아를 제국에 헌상하지 않고 자신의 봉토로 삼을 것을 선언했다. 그 후, 십자군은 십자군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탈환하려 시도한 셀주크계 제후들의 군세와 격돌하여 이를 격파한 것을 계기로, 안티오키아는 완전히 십자군의 세력에 편입되었다.

3. 3. 예루살렘으로의 진군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고, 동생 불로뉴 백작 우스타슈, 불로뉴의 보두앵과 함께 십자군에 합류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이후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에 잔류하자, 레몽과 함께 1099년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했다.[14]

안티오키아에서 승리한 십자군은 이후 진군 경로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르퓌 주교가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하고,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 방어를 이유로 안티오키아에 남았다.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도 에데사로 향했다. 많은 보병들은 예루살렘으로 계속 진군하기를 원했지만, 유력 제후였던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는 탄크레드 등을 자신의 세력으로 확보한 후 추가 진군을 거부했다. 십자군은 수개월 동안 안티오키아에 머무른 후, 장병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은 레이몽 4세의 결정에 따라 남쪽으로 진군을 재개했고, 고드프루아도 이에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십자군은 새로운 적과 마주했는데, 당시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다.

1099년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와 전투를 벌였다. 1099년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공성 무기를 만들었고, 7월 14일~15일에 걸쳐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고드프루아와 그의 기사들이 처음으로 성벽을 넘어 예루살렘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이로써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 탈환과 성묘 교회를 다시 기독교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14] 고드프루아는 원정 이후, 예루살렘에 병원 시설을 기부했다고 한다.

4. 예루살렘 왕국 통치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한 고드프루아는 레몽이 왕위를 거절하자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성묘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는 명칭을 사용했다.[14] 그는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고 시온 기사단을 창설하였다.[15]

1099년 아스칼론 전투에서 파티마 왕조를 격파했으나, 레몽과의 관계 때문에 아스칼론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고자 하여 고드프루아와 대립했다. 결국 고드프루아가 이집트를 빼앗아 왕국을 만들고 난 뒤에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자고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던 중 1100년 7월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의문점이 있다. 보에몽과 다임베르트가 짜고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하는 가운데, 의문사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확실치 않고, 기록마다 다른데, 단순 병사, 암살자의 화살에 맞고 피살당했다, 독살을 당했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생 에데사 백작이었던 보두앵이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고드프루아는 사후에 영웅화되어, 십자군 최고지도자, 가장 우수한 전사로써 음유시인의 이야기가 되어, 로엔그린 전설 등에서 알려진 백조의 기사 자손이라고 일컬어 졌으나, 실상은 십자군 지도자 중 1명에 불과하고, 타란토의 보에몽, 생질의 레몽, 교황사절 아데마르가 중심인물이었다. 사실 예루살렘의 주인으로 추대된 것도 가장 중립적이고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도시의 영주가 되는 모습. 윌리엄 오브 타이어의 ''Histoire d'Outremer''에서 발췌, 예이츠 톰슨 컬렉션의 대영 도서관 필사본(12번, 46쪽)에 있는 일화가 담긴 대문자 ''S''의 세부 묘사, 13세기.


1099년 7월 22일, 성묘 교회에서 의회가 열렸고 툴루즈의 레이몽이 왕관을 거절한 후, 고드프루아는 통치자가 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칭호보다 성묘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선호했으며, "구세주가 가시면류관을 썼던 곳에서 금관을 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의 칭호의 의미와 용법 모두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 원본 연대기 저술가는 더 모호한 용어인 "princeps" 또는 그의 이전 계급인 공작을 사용했다.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은 후대의 연대기 저술가들은 그가 "rex", 즉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고드프루아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아스칼론 전투에서 패배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 맞서 새로운 왕국을 방어해야 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인 피사의 다고베르트와 대립했다. 라틴족이 아스칼론을 점령할 뻔했지만, 레몽이 도시를 확보하는 것을 막으려는 고드프루아의 시도로 인해 그 도시는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남게 되었고, 이후 수년간 새로운 왕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100년, 고드프루아는 정복을 통해 직접적으로 새로운 영토를 확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1099년의 승리와 1100년의 원정으로 인해 아크레, 아스칼론, 아르수프, 야파, 카이사리아가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한편, 다고베르트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지만, 그 갈등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다고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의 봉토로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다.

4. 1. 통치자와 '성묘 수호자' 칭호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아 동생 불로뉴 백작 우스타슈, 불로뉴의 보두앵과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이후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에 잔류한 후, 레몽과 함께 1099년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했다. 레몽이 트리폴리를 갖기를 원하고 예루살렘 왕위를 거절했기에 고드프루아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의 왕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하여, '''성묘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 라는 명칭을 썼다.[14] 그는 시온기사단을 창설하였다.[14] 그의 가계는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졌다가 소수도원 문서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5]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아스칼론 전투에서 격파했으나, 레몽과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아스칼론을 탈취하지는 않았다. 성당기사단에게 솔로몬 왕의 신전 아래에 있는 상그리엘 문서들을 회수해 오라고 지시하였다.[11] 그는 상그리엘 문서를 통해 자신이 메로빙거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입증하려 하였다.[11]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기를 원했기에 대립했다. 결국 고드프루아가 이집트를 빼앗아 왕국을 만들고 난 뒤에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자고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던 중 1100년 7월에 죽었다.

예루살렘이 기독교 세력 하에 놓인 후, 성지에서의 통치 체제가 구축되었다. 1099년 7월 22일, 성묘 교회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때, 제후들은 레몽 4세에게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즉위를 요청받은 고드프루아가 이를 승낙함에 따라, 고드프루아는 초대 예루살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 왕을 칭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성묘 수호자라고 칭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 면류관을 쓴 곳에서 금으로 된 왕관을 쓰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며 그것 또한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그가 칭한 칭호의 의미나, 실제로 그렇게 칭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당시 문헌 중에는, ''princeps'' (제일인자, 창립자)라는 더 다의적인 칭호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문헌도 있는가 하면, 원정 전부터 그가 가진 공작의 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는 문헌도 존재한다. 또한,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은 역사가 등이 후세에 편찬한 문헌에는, ''Rex'', 또는 ''왕 (King)''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기술이 남아있다.

고드프루아의 치세는 매우 짧았지만, 그 안에서 그는 예루살렘 왕국을 이집트의 이슬람 세력인 파티마 왕조로부터 지켜냈고, 같은 해 8월에는 아스칼론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왕국의 처우를 둘러싸고 예루살렘 총대주교 당고베르토가 이끄는 로마 교회 세력과 대립했다. 또한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십자군은 아스칼론 전투에서 아스칼론을 완전히 제압할 기세였지만, 대립하는 레몽 4세가 아스칼론을 점령하여 세력 확대를 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아스칼론을 굳이 제압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손에 남겨진 아스칼론을 둘러싸고, 그 후 왕국은 오랫동안 무슬림과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1100년, 고드프루아는 정복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 확대를 꾀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099년의 대승리와 이어진 원정 덕분에, 아크레, 아스칼론, 아르수프, 야파, 카이사리아와 같은 많은 도시들이 예루살렘 왕국의 산하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고드프루아는 당고베르토 총대주교와 대립을 계속했다. 다만 이 대립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고베르토는 아마 예루살렘 왕국을 로마 교황 직속의 레엔으로 편입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최대 의도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또한 이 주장의 대부분은 기욤 드 티르의 문헌에 의거하고 있지만, 이 사건에 관한 그의 문헌의 기술은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겨진다. 당고베르토가 고드프루아에게 예루살렘과 야파의 통치권을 로마 교황에게 이양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욤 드 티르뿐이며, 아헨의 알베르토나 라프 드 칸과 같은 다른 당시의 역사가들은 모두, 당고베르토와 그와 동맹 관계에 있던 탕크레드 공은 고드프루아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의 아들과 혈족만이 예루살렘의 통치자 자리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고베르토의 책략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고드프루아가 죽었을 때, 당고베르토는 야파에 있었고, 그 예루살렘은 고드프루아의 가신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앙이 예루살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당고베르토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고베르토 총대주교는 1100년 12월 25일, 에데사에서 달려온 보두앙을 예루살렘 왕으로 인정하고, 스스로 그를 대관하도록 강요받았으며, 보두앙은 '''보두앙 1세'''로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했다.

4. 2. 통치 기간의 업적과 갈등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한 고드프루아는 레몽이 왕위를 거절하자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성묘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는 명칭을 사용했다.[14] 그는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고 시온 기사단을 창설하였다.[15]

1099년 아스칼론 전투에서 파티마 왕조를 격파했으나, 레몽과의 관계 때문에 아스칼론을 점령하지는 않았다.[11]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고자 하여 고드프루아와 대립했다. 고드프루아는 아크레, 아르수프, 야파, 카이사리아 등이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1100년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던 중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다. 동생 에데사 백작이었던 보두앵이 왕위를 계승했다.

1099년 7월 22일, 성묘 교회에서 의회가 열렸고, 고드프루아는 통치자가 되기로 동의했지만, 왕의 칭호 대신 "성묘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선호했다. 그의 칭호의 의미와 용법은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 원본 연대기 저술가들은 더 모호한 용어인 "princeps" 또는 그의 이전 계급인 공작을 사용했다. 다고베르트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지만, 그 갈등의 조건은 추적하기 어렵다. 다고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의 봉토로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다.

4. 3. 죽음

고드프루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점이 있다. 다임베르트와 보에몽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던 중 의문사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기록마다 단순 병사, 암살자의 화살에 의한 피살, 독살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그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이 왕위를 계승했다.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 있는 고드프루아의 위령비


아랍 역사가 이븐 알-칼라니시는 1099년 예루살렘의 영주 고드프루아가 아크레 요새 성벽을 공격하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기록했다.[1] 이 주장은 다른 이슬람 자료에도 반복되지만, 기독교 연대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헨의 알베르와 아우라의 에케하르트는 고드프루아가 1100년 6월 카이사레아를 방문하던 중 병에 걸려 7월 18일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고 언급한다.[2]

독살설도 제기되었으나, 장티푸스와 유사한 질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고드프루아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다.[3]

5. 유산 및 평가

고드프루아는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1099년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한 뒤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었다.[14] 그는 시온 기사단을 창설하였고, 그의 가계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가 소수도원 문서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5] 파티마 왕조를 격파하기도 했지만, 다임베르트와는 대립하기도 했다. 1100년 7월에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단순 병사, 암살자의 화살에 맞고 피살, 독살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11]

5. 1. 사후 영웅화

고드프루아는 사후에 십자군 최고의 지도자이자 가장 우수한 전사로 영웅화되어 음유시인들의 이야기에 등장했으며, 로엔그린 전설 등에 나오는 백조의 기사의 자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일 뿐이었고, 타란토의 보에몽, 생질의 레몽, 교황사절 아데마르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예루살렘의 주인으로 추대된 이유도 가장 중립적이고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4][15]

티레의 윌리엄은 고드프루아를 "키가 크고, 아주 큰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인 사람보다 더 컸다. 그는 비할 데 없이 강했으며, 튼튼하게 만들어진 팔다리와 강인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용모는 훌륭했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중간 정도의 금발이었다."라고 묘사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통치자인 고드프루아는 후대의 기록에서 십자군의 군사 지도자, 예루살렘의 아시즈를 제정한 입법가로 이상화되었다. 14세기 초에는 기사도의 이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구인의 위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고드프루아는 십자군의 여러 지도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예루살렘의 발두인 1세는 1100년 고드프루아의 뒤를 이어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아시즈는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였다.

고드프루아가 십자군에서 맡은 역할은 아길레르의 레이몽, 아헨의 알베르트, 익명의 ''게스타 프랑코룸'' 저자를 비롯한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소설에서 그는 최초의 십자군을 다룬 프랑스 ''무용담'' 모음인 "십자군 주기"의 영웅이었으며, 그를 백조의 기사 전설과 연결시켰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줄거리이다.

12세기 후반 티레의 윌리엄 시대에 이미 고드프루아는 원래 십자군의 후손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고드프루아는 엄청난 완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킬리키아에서 곰과 레슬링을 해서 이겼고, 한 번의 칼질로 낙타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다.

브뤼셀의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기마상


키가 큰 기사 동상. 그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정교한 갑옷을 입고 있다. 왼손에는 칼을 들고 있으며, 오른 다리에는 방패가 기대어져 있다.
16세기 호프키르헤 인스브루크에 있는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기념비를 둘러싼 영웅들 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청동상


19세기 중반부터 벨기에 브뤼셀의 로열 광장/코닝스플레인 중앙에 외젠 시모니스가 제작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기마 조각상이 서 있다. 이 조각상은 1848년 8월 24일에 제막되었다.

고드프루아는 ''성혈과 성배''와 ''다 빈치 코드''라는 책에서 제시된 의사 역사 이론의 핵심 인물이다.

2005년 고드프루아는 벨기에에서 프랑스어로 진행된 국민 영웅 투표인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에서 17위를 차지했다. 그는 플랑드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투표한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De Grootste Belg)에서는 100명의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에 들지 못했다.

5. 2.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고드프루아는 십자군 전쟁의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타란토의 보에몽, 생질의 레몽, 교황사절 아데마르 등이 십자군의 중심인물이었고, 고드프루아는 중립적이고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추대되었다. 그는 성묘수호자 칭호를 사용하며 예루살렘을 통치했고, 파티마 왕조를 격파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고, 그의 죽음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있다. 다임베르트와의 권력 갈등, 암살설, 독살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후에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로엔그린 전설과 같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11][14][15]

5. 3.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고드프루아는 사후 영웅으로 묘사되어 십자군 최고 지도자이자 뛰어난 전사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타란토의 보에몽, 생질의 레몽, 교황사절 아데마르 등이 중심 인물이었으며,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추대된 것은 중립적이고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5] 그는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1099년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한 뒤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었고 시온 기사단을 창설하였다.[14] 파티마 왕조를 격파하기도 했지만, 다임베르트와는 대립하기도 했다. 그는 1100년 7월에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11]

참조

[1] 서적 Defenders of the West Bombardier Books
[2] 서적 The Crusades: A Documentary Survey Marquette University Press 2023-07-18
[3] 간행물 Godfrey of Bouillon The Catholic Encyclopedia 1909
[4] 간행물 Lions, Tigers and Bears: encounters with wild animals and bestial imagery in the context of crusading to the Latin East Viator 2013
[5] 웹사이트 Genealogie de Godefroi de Buillon de Pierre Desrey http://users2.unimi.[...] Università degli Studi di Milano 2015-12-22
[6] 간행물 La genealogie avecques les gestes et nobles faitz darmes du trespreux et renommé prince Godeffroy de Boulion et de ses chevaleureux frères Baudouin et Eustace http://gallica.bnf.f[...] Michel Le Noir
[7] 간행물
[8] 간행물
[9] 간행물 Godfrey of Bouillon The Catholic Encyclopedia 1909
[10] 간행물 Lions, Tigers and Bears: encounters with wild animals and bestial imagery in the context of crusading to the Latin East Viator 2013
[11] 서적 다빈치 코드 2 베텔스만 코리아(주) 2004
[12]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2005
[13] 서적 앞의 책
[14] 서적 앞의 책
[15] 서적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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