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구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와 영국 간의 20세기 중반 어업 분쟁으로,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영국 어선들이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대구를 잡는 것을 두고 시작되었으며, 아이슬란드는 자국의 어업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어업 구역을 확대하려 했다. 각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어업 구역 확대를 둘러싸고 영국 해군과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 간의 무력 충돌과 외교적 갈등을 동반했다. 결국 아이슬란드는 목표를 달성하여 200해리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설정했고, 영국은 어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대구 전쟁은 국제 관계, 특히 국제법과 해양 자원 관리, 그리고 자유주의와 현실주의 등 국제 관계 이론에 중요한 사례로 연구되었으며, 대한민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배타적 경제 수역 설정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대구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이름타라 전쟁
다른 이름코달 전쟁
연안 전쟁
대구 전쟁
로마자 표기Þorskastríðin (아이슬란드어)
독일어 표기Kabeljaukriege
기간1958년 - 1976년
장소아이슬란드 근해
결과아이슬란드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아이슬란드 연안 경비대
교전 세력 2영국 해군
지휘관
지휘관 1아우스게일 아우스게일손
크리스찬 엘얀
지휘관 2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흄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정보 없음
병력 규모 2정보 없음
사상자 및 손실
사상자 10
사상자 20
추가 정보
관련 문서냉전
후크와 코드 전쟁
주요 분쟁 요인어업권 분쟁 및 영해 확장
영해 확장 범위4해리 (초기 영해)
12해리 (현재 영해)
50해리 (확장된 영해 주장)
200해리 (배타적 경제 수역)
아이슬란드 영해 확장1958년 4해리에서 12해리로 확대
이후 50해리, 200해리까지 단계적 확장
분쟁 발생 원인영국 어선들의 아이슬란드 연안에서의 과도한 어획 활동
분쟁 영향영국 어업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
아이슬란드 승리 요인국제법적 근거 및 아이슬란드 국민들의 강한 의지
참고 자료영국 국립기록보관소의 타라 전쟁 관련 자료
아이슬란드 외교 정책 분석 저널
아이슬란드 연안 경비대 자료
아틀라스 옵스큐라의 타라 전쟁 관련 기사

2. 역사적 배경

수 세기 동안 해산물은 영국 제도, 아이슬란드 및 기타 북유럽 국가 주민들의 식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9] 특히 9세기에 영국에 온 덴마크와 노르웨이 약탈자들은 북해 대구를 국가 식단에 도입했다.[10] 14세기 말부터 영국 어선들은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조업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어획량은 덴마크와 영국 간의 갈등을 야기했고, 1414년 덴마크 왕 에리크는 아이슬란드와 영국의 무역을 금지하고 어업 자원 고갈에 대해 항의했다. 잉글랜드-한자 동맹 전쟁 (1469~1474) 이후 외교관들은 영국 선박이 7년짜리 면허로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조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협정을 통해 이러한 분쟁을 해결했다.[11] 이는 두 국가 간 수 세기 동안 간헐적으로 분쟁이 발생하는 시작이 되었다.[114]

16세기 초부터 영국 선원과 어부들은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주요한 활동을 펼쳤다.[12][13] 19세기 후반 증기력의 발명으로 어업 범위가 증가하면서 아이슬란드 해역에서의 어획량이 더욱 늘어났다. 1893년, 덴마크 정부는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에 대해 50해리(92.6km)의 어업 제한을 주장했다. 영국 트롤어선 소유자들은 이에 반발했고, 영국 정부는 덴마크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1896년, 영국은 덴마크와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 선박의 아이슬란드 항구 정박을 허용하는 대신, 특정 지역에서의 조업을 금지했다.

1899년, 영국 증기 어선 카스피안 호가 덴마크 포함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영국 트롤어선 업주들은 덴마크 포함에 의한 벌금 부과에 항의하며 영국 해군의 개입을 요구했다. 1901년, '영국-덴마크 영해 협정'은 양국 해안선 주변에 3해리(5.556km)의 영해 한계를 설정했다. 이는 덴마크의 일부였던 아이슬란드에도 적용되었으며, 50년의 기한을 두었다.[15][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어업 활동이 감소하면서 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전쟁 이전 시대의 불완전한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 어장은 영국 어업에 매우 중요했다.[16] 1919년부터 1938년까지의 데이터는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영국의 총 어획량이 크게 증가했음을 보여준다.[17]

1949년, 아이슬란드는 1901년 덴마크와 영국 간의 협정 폐지 절차를 시작하고, 북쪽 어업 한계선을 4해리로 확장했다. 영국 트롤 어선들이 해당 어장을 사용하지 않아 큰 분쟁은 없었지만, 아이슬란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기 위해 추가 확장을 연기했다. 1952년, 아이슬란드는 어업 한계선을 4해리로 확장할 의향을 선언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아이슬란드의 일방적인 어업 한계선 확장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했지만, 영국 해군은 파견되지 않았다. 영국 트롤 어업계는 아이슬란드산 생선의 영국 항구 상륙 금지 조치를 통해 아이슬란드에 제재를 가했다. 냉전 상황에서 소련이 아이슬란드산 생선을 구매하며 아이슬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자, 미국도 아이슬란드산 생선을 구매하며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했다. 1956년, 유럽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의 결정에 따라 아이슬란드의 4해리 어업 한계선이 영국에 의해 인정되면서 분쟁은 종식되었다.

2. 1. 1958년 유엔 해양법 협약

1958년, 유엔은 86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국제 해양법 회의를 소집했다.[2] 이 회의에서 여러 국가들이 영해 한계를 12해리로 확장하려고 시도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2]

3. 제1차 대구 전쟁 (1958년 ~ 1961년)

1958년 9월 1일, 아이슬란드는 어업 구역을 4해리에서 12해리로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군함의 보호를 받으며 트롤어선 어업을 계속했다. 아이슬란드는 7척의 순찰선과[130] 1척의 PBY-6A 카탈리나 수상 비행기를 배치한 반면,[131] 영국은 구축함, 프리깃, 쾌속 부설함, 소해정, 해양작업지원선 등 53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대치했다.[129]

1958년 9월 4일, 아이슬란드 순찰선 ICGV 에지르가 영국 트롤 어선을 포획하려다 영국 군함 HMS 러셀의 방해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6일에는 V/s 마리아 줄라가 트롤어선 킹스턴 에메랄드에 발포하여 트롤어선이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36] 11월 12일, V/s 토르가 트롤어선 행크네스와 맞닿뜨렸다. 토르 함장은 영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4해리 밖으로 떠나라는 영국 제독의 요구를 거부하고 발포했다. 이에 영국 군함이 아이슬란드 함선을 침몰시키려 했고, 더 많은 영국 함선이 도착한 후 행크네스는 퇴각했다.

아이슬란드는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NATO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고 미군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친서방 각료들조차도 이 위협을 통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44] 1960년1961년 사이의 유엔해양법 회의 이후,[30][31]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1961년 2월 말에 12해리의 아이슬란드 어업 제한을 규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영국은 할당된 구역과 특정 계절에 따라 외부 6해리에서 3년 동안 어업권을 갖게 되었다. 아이슬란드 국회는 1961년 3월 11일 협정을 승인했다.[36]

4. 제2차 대구 전쟁 (1972년 ~ 1973년)

1972년, 아이슬란드 정부는 어업 한도를 50해리로 연장했다. 아이슬란드는 어류 보존과 총 어획량 증가를 목표로 했으며, 가장 유익한 어장이 50해리 이내에 있고 200해리 제한 순찰이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다.[52][53] 영국은 분쟁 해역에서 영국 어부들을 위한 최대 어획량 할당량 확보와 다른 확장의 선례가 될 어업 관할권의 일방적인 확장에 대한 인정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아이슬란드 확장에 이의를 제기했다.[52][54] 서유럽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아이슬란드의 일방적인 확장에 반대했다.[55]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이슬란드 총리가 아이슬란드의 대의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광범위한 전투의 일부라고 주장한 회의 후, 아이슬란드의 확장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56]

1972년 9월 1일, 아이슬란드 어업 한도를 50해리로 확대하는 법의 시행이 시작되었다.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는 새로운 배제구역 내에서 조업하는 비 아이슬란드 선박의 트롤 낚싯줄을 자르기 위해 어망 절단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9월 5일, ICGV 애기르함이 혼반키 북동쪽에서 조업하는 표시가 없는 트롤 어선과 조우했다. 트롤 어선의 주인은 해안 경비대의 명령을 따르라는 경고를 받은 후 라디오를 통해 ''룰, 브리타니아!''를 연주했다.[21] ICGV 애기르함은 트롤 어선의 트롤링 와이어 중 하나를 절단했고, 성난 선원들은 해안 경비대 선박에 석탄과 폐기물, 불도끼를 던졌다.[59] 1972년 11월 25일, 독일 트롤 어선 ''에를랑겐''의 선원이 아이슬란드 순찰선이 트롤 어선의 트롤 와이어를 절단하여 선원을 들이받아 머리 부상을 입었다.[60]

1973년 1월 18일, 18척의 트롤 어선의 그물이 잘렸다. 이로 인해 영국 선원들은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지 않는 한 아이슬란드 어업 지역을 떠나야 했다. 영국 해군은 트롤 어선을 방어하기 위해 특별 그룹을 구성했다. 1973년 1월 23일, 헤이마에이의 엘드펠 화산이 폭발하여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는 인명 구조를 위해 잠시 물러났다. 1973년 5월 17일, 영국 트롤 어선은 아이슬란드 해역을 떠났지만 이틀 후 영국 프리깃함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21] 아이슬란드 정치가들은 영국 해군의 진입에 분노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항소하거나 NATO 헌장 5조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62] 1973년 5월 26일, ICGV ''애기르''는 그림즈비 트롤 어선 ''에버튼''에게 정지를 명령했지만 어선의 선장은 제출을 거부했다. ''애기르''는 트롤 어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첫 번째 경고 사격을 가하고 나중에는 실탄을 발사했다. 올라푸르 요하네손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법 집행 조치"라고 말했다.[65]

1973년 8월 29일, ICGV ''애기르''가 HMS 아폴로와 충돌했을 때, 아이슬란드 선박에 탑승한 엔지니어 할도르 할프레드손이 감전사로 사망했다. 이는 분쟁에서 유일하게 확인된 사망자였다.[51][68][69] 1973년 9월 16일, NATO 사무총장 조셉 룬스는 레이캬비크에 도착하여 아이슬란드 장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모두 NATO 회원국이었다. NATO 내에서 일련의 회담 끝에 영국 군함은 10월 3일 소환되었다. 11월 8일, 영국의 어업 활동을 50해리 한도 내의 특정 지역으로 제한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영국 트롤 어선들이 연간 어획량을 130,000톤 이하로 제한할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협정은 1975년 11월에 만료되었고 제3차 대구 전쟁이 시작되었다.

4. 1. C. S. Forester 호 사건 (1974년)

1974년 7월 19일, 협정 체결 후 9개월이 넘는 시점에, 영국 어선 중 가장 큰 저인망 어선 중 하나인 'C. S. Forester'호[77]가 아이슬란드 어업 한계선 12해리(약 22km)[76] 이내에서 조업 중이었다. 이 배는 아이슬란드 해군 경비정 V/s 'Þór'(토르)[78]에 의해 100해리(약 185km) 추격 끝에 포격을 받고 나포되었다.[78] 'C. S. Forester'호는 여러 차례 경고를 받은 후 비폭발성 탄약으로 포격을 당했다. 어선은 적어도 두 발의 포탄을 맞았고, 기관실과 물탱크가 손상되었다.[79] 이후, 아이슬란드로 예인되어 갔다.[80] 선장인 리처드 테일러는 30일의 징역형과 5000GBP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선주는 2232GBP의 보석금을 낸 후 석방되었다. 선주는 또한 배를 풀어주는 대가로 총 26300GBP를 지불했다. 어선은 200톤의 어획고를 가지고 출항이 허가되었다.[78]

5. 제3차 대구 전쟁 (1975년 ~ 1976년)

1973년 제3차 유엔 해양법 회의에서 여러 국가들은 영해에 대한 100해리 제한을 지지했다.[30][31][84] 1975년 7월 15일, 제1차 오일쇼크로 경제적 위기를 겪은 아이슬란드 정부는 어업 제한을 현재 해안에서 200해리(200nmi)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85] 영국 정부는 배제 구역의 큰 증가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어부와 분쟁 지역에서의 활동에 문제가 발생했다. 대구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분쟁은 영국 어선 트롤 어선들이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가 그물을 자르는 것을 보았고, 아이슬란드 선박과 영국 트롤 어선, 프리깃, 예인선이 충돌하는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다.

1975년 12월 11일, 헬기 할바르드손(Helgi Hallvarðsson)이 지휘하는 토르(Þór)는 세이디스피요르드 항구를 떠나던 중 피오르드 입구에 정체불명의 외국 선박이 있는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선박은 3척의 영국 선박으로 확인되었다. Þór보다 3배 더 큰 원양 예인선인 Lloydsman, 영국 농수산식품부의 석유 굴착 장치 공급선인 스타 아쿠아리우스선, 그리고 후자의 자매선인 스타 폴라리스선이었다. 그들은 아이슬란드의 12해리(12nmi) 영해 내에서 강풍을 피해 대피하고 있었다.[86]

아이슬란드측 기록에 따르면 Þór의 사령관이 아이슬란드 영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3척의 예인선은 처음에 따랐다. 그러나 해안에서 약 2해리(2nmi) 떨어진 곳에서 해안 경비대가 스타 아쿠아리우스선을 추월하려고 할 때 우현으로 방향을 틀고 Þór의 항구 쪽을 강타했다고 한다. Þór가 속도를 높이는 동안에도 Lloydsman은 다시 항구 쪽과 충돌했다. Þór는 이러한 공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스타 폴라리스선이 나타났을 때 해안경비함Þór에서는 빈 탄환이 발사되었다. 하지만, 해안경비함Þór 은 스타 폴라리스선이 두 번째로 쳤을때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해안경비함Þór에서 또 다른 총알이 발사되었는데, 이번에는 스타 폴라리스선의 활을 명중하는 실탄이었다. 그런 다음 예인선은 후퇴했다. 대결 후 침몰 직전이었던 해안경비함Þór는 임시 수리를 위해 로드문다르피요르드로 항해했다.[87]

사건에 대한 영국의 보고는 상당히 다르며 Þór가 예인선 중 하나에 탑승하려고 시도했으며 Þór가 이탈하자 Lloydsman은 스타폴라리스선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돌진했다고 주장한다. 스타 아쿠아리우스선의 앨버트 맥켄지 선장은 Þór가 선미에서 접근하여 지원함을 공격한 후 방향을 틀고 약 100야드(약 91.44m) 범위에서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런던 주재 아이슬란드 대사 닐스 시구르드손(Niels Sigurdsson)은 해안경비함 토르가 영국 선박에 부딪힌 후 자기 방어를 위해 발포했다고 말했다. 아이슬란드는 이 사건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상의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개입을 거부했다.[88]

영국 해군은 즉각적으로 대형 프리깃 부대를 파견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전략적 목표가 소련 해군만큼 힐리와 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90] 제2차 및 제3차 대구 전쟁은 6년 후 포클랜드 전쟁과 마찬가지로 영국 해군에 의해 필요한 갈등으로 간주되었다.[91]

1976년 1월, HMS 안드로메다가 Þór와 충돌하여 선체에 구멍이 생겼다. 안드로메다의 선체가 움푹 패였다. 영국 국방부는 충돌이 "생명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영국 군함에 대한 "고의적인 공격"으로 여겨진다고 밝혔다. 반면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는 안드로메다가 "보트를 추월한 다음 신속하게 항로를 변경"하여 Þór를 충돌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후 영국 해군은 "트롤 어선의 날실을 절단하는 적"을 처리하는 데 "보다 신중한 접근"을 명령했다.[93]

1976년 2월 19일, 영국 농수산식품부 장관 프레드 프리트(Fred Preat)는 그림스비 출신의 어부가 아이슬란드 선박이 트롤을 절단한 후 산사니가 그를 치고 중상을 입었을 때 제3차 대구 전쟁의 첫 번째 영국 사상자가 되었다고 발표했다.[82]

영국은 총 22척의 프리깃함을 배치하고 전문 충돌정으로 재장착했다. 영국은 프리깃함 외에도 어업 트롤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총 7척의 보급선, 9척의 예인선, 3척의 지원선을 배치했지만 한 번에 배치된 선박은 6척에서 9척에 불과했다.[95] 아이슬란드는 순찰선 4척과 무장 트롤 어선 2척을 배치했다.[95][96] 아이슬란드가 케플라비크에 있는 NATO 기지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영국 정부는 어부들과의 구체적인 합의 없이 아이슬란드의 200해리 제외 구역 밖에 머물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1976년 5월 6일 저녁, V/s Týr는 HMS Falmouth와 충돌했다. 끔찍한 상황에서 Guðmundur Kjærnested 대위는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 총을 조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97] 제3차 대구 전쟁기간 동안에 총 55건의 충돌 사건이 발생했다.[100]

NATO가 중재한 회의에서, 1976년 6월 1일 아이슬란드와 영국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24척의 영국 트롤 어선은 200해리 한도 내에서 유지하고 총 30,000톤을 조업할 수 있었다.[101]

6. 결과

아이슬란드는 전반적인 목표를 달성했다. 반면, 이미 쇠퇴하고 있던 영국 어업은 역사적인 주요 어장에서 제외되어 큰 타격을 입었고 그림즈비, , 플릿우드와 같은 영국의 대규모 북부 항구 경제는 심각한 영향을 받아 수천 명의 숙련된 어부와 관련 무역 종사자들이 실직했다.[138] 2012년 영국 정부는 1970년대에 생계를 잃은 어부들에게 수백만 파운드의 보상 거래와 사과를 제안했다. 어부들이 일자리를 잃은 지 35년이 지난 지금, 2,500명의 어부에게 제공되는 1000GBP의 보상은 불충분하고 과도하게 지연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이슬란드의 주장이 인정됨에 따라 세계 각국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설정하였다. 대한민국일본과 같은 원양 어업을 하는 기존 어업 관계자들은 축소를 강요받게 되었으며, 어업권을 둘러싼 국제 재판도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7. 영향 및 교훈

"대구 전쟁"이라는 용어는 1958년 9월 초 영국 언론인이 처음 사용했다.[106] 대구 전쟁은 전통적인 전쟁이 아니라 무력 충돌로 묘사된다.[111][108][109][110]

2016년 연구에 따르면, 어업 한계 확장에 대한 욕구는 아이슬란드의 경우 경제적, 법적 요인이, 영국의 경우 경제적, 전략적 요인이 작용했다.[111] 이 분쟁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비용과 위험을 초래했다.

협상 실패의 원인으로는 아이슬란드의 민족주의와 당파 경쟁, 영국의 트롤링 산업 압력, 부처 간 경쟁, 개별 외교관의 일방적인 행동 등이 언급된다.[111] 특히 영국 농업·어업부는 영국 정부 결정에 외무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11]

2017년 연구에서는 강력한 국내적 압력으로 인한 고위 관료들의 확전과 잘못된 판단이 대구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7] 아이슬란드 고위 관료들은 국내 정치에 제약받아 영국에 타협안을 제시하기 어려웠지만, 영국 고위 관료들은 국내 여론에 덜 제약받았기 때문에 아이슬란드가 각 대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분석한다.[7]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영국, 아일랜드의 현재 배타적 경제 수역

7. 1. 국제 관계

국제 관계 학자들은 대구 전쟁을 통해 자유주의와 현실주의 이론, 비대칭 교섭 이론 등을 연구했다.[111] 대구 전쟁은 민주주의, 무역, 제도가 국가 간 행동을 평화롭게 한다는 자유주의 평화 원칙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111] 또한, 대구 전쟁은 강력한 힘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사례로 제시되며, 이는 강대국의 힘을 강조하는 현실주의 이론에 시사점을 준다.[111] 비대칭 교섭 이론가들은 구조적 힘이 부족한 아이슬란드가 문제 해결에 대한 더 큰 헌신을 통해 문제 해결력 우위를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111]

7. 2. 아이슬란드-영국 관계

대구 전쟁은 양국이 어업 분쟁에 휘말리거나 두 국가 간에 어떤 종류의 분쟁이 있을 때 아이슬란드와 영국의 뉴스 보도에 자주 언급된다. 특히, 아이세이브 분쟁[120][121][122], 유로 2016 16강전 아이슬란드-잉글랜드 경기[123][124][125] 등을 준비하는 동안 언론에 광범위하게 보도되었다.

2017년 2월, 대구 전쟁에 참여했던 두 척의 선박, 트롤선 ''아크틱 코르세어''와 아이슬란드 순찰선 ICGV ''오딘''의 선원들은 헐과 레이캬비크 도시 간의 우호와 우정의 표시로 종을 교환했다. 이 행사는 헐 박물관의 대구 전쟁 중과 그 이후 아이슬란드와 영국 간의 역사에 관한 프로젝트의 일부였다.[126]

7. 3.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대구 전쟁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 수역(EEZ) 개념이 국제 사회에 확산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은 이 사건을 통해 EEZ 설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96년 EEZ를 선포했다.

EEZ 선포 후, 대한민국은 주변국과의 어업 협정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8년에는 일본과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여 독도 주변 수역을 중간 수역으로 설정하고 양국 어선의 조업 조건을 규정했다. 2001년에는 중국과 한중어업협정을 체결하여 황해(서해)에서의 어업 질서를 확립하고 양국 어선의 조업 조건을 규정했다.

대구 전쟁의 경험은 대한민국이 해양 자원 보호와 어업 분쟁 해결에 있어 국제법과 외교적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Power and Tactics in International Negotiations: How Weak Nations Bargain with Strong Nation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 서적 Europe Since 1945: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0-22
[3] 웹사이트 How Iceland Beat the British in the Four Cod Wars https://www.atlasobs[...] 2018-06-21
[4] 웹사이트 Cabinet Papers: The Cod Wars https://www.national[...] National Archives (UK) 2020-12-05
[5] 뉴스 How the Cod War of 40 years ago left a Yorkshire community devastated http://www.yorkshire[...] 2016-01-13
[6]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7] 학술지 Neoclassical Realism in the North Atlantic: Explaining Behaviors and Outcomes in the Cod Wars http://osf.io/26ubp/ 2020-12-21
[8] 학술지 Do liberal ties pacify? A study of the Cod Wars 2017-06-06
[9] 뉴스 Fish fights: Britain has a long history of trading away access to coastal waters http://theconversati[...] 2020-03-05
[10] 뉴스 North Sea cod completes long journey back to sustainability https://www.ft.com/c[...] 2020-03-04
[11] 서적 Cod and Herring: The Archaeology and History of Medieval Sea Fishing https://pureadmin.qu[...] Oxbow Books 2020-03-04
[12] 서적 Tíu þorskastríð 1415–1976
[13] 서적 British trawlers and Iceland: 1919–1976 University of Gothenburg
[14] 서적 Memories of the: Lincolnshire Fishing Industry Countryside Books
[15] 학술지 How 'cod war' came: the origins of the Anglo-Icelandic fisheries dispute, 1958–61* 2004-11-01
[16] 서적 British Trawlers and Iceland: 1919–1976
[17] 서적 British Trawlers and Iceland: 1919–1976
[18] 서적 British Trawlers and Iceland: 1919–1976
[19] 서적 British Trawlers and Iceland: 1919–1976
[20] 서적 Troubled Waters NAFHA
[21] 학술지 The Cod and the Cold War 2006
[22] 서적 Troubled Waters
[23] 서적 Utanríkisþjónusta Íslands og utanríkismál: Sögulegt Yfirlit 1.
[24] PhD Troubled Waters. Cod War, Fishing Disputes, and Britain's Fight for the Freedom of the High Seas, 1948–1964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 2021-12-30
[25] 서적 Í eldlínu kalda stríðsins
[26] 학술지 Þorskastríð og fjöldi þeirra 1983
[27] 학술지 Tíunda þorskastríðið 1975–1976 1981
[28] Master's Why Did the Cod Wars Occur and Why Did Iceland Win Them? A Test of Four Theories https://skemman.is/h[...] 2022-02-14
[29] 웹사이트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Law of the Sea, 1958 http://legal.un.org/[...] United Nations 2015-11-04
[30] 웹사이트 The Cod Wars 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2015-11-04
[30] 웹사이트 Icy fishing: UK and Iceland fish stock disputes http://researchbrief[...] House of Commons Library 2012-12-19
[31] 웹사이트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A historical perspective) https://www.un.org/D[...] United Nations 2015-11-04
[32] 웹사이트 HMS Eastbourne on fishery protection duties http://www.iwm.org.u[...] 2014-01-20
[33] 논문 Troubled Waters: Cod War, Fishing Disputes, and Britain's Fight for the Freedom of the High Seas, 1948–1964 https://web.archive.[...]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 2014-01-20
[34] 뉴스 Tyrone Daily Herald https://www.newspape[...] 2014-01-20
[35] 서적 Landhelgisbókin Bókaútgáfan Setberg SF
[36]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Hafréttarstofnun Íslands
[37] 서적 Í eldlínu kalda stríðsins
[38] 서적 Guðmundur skipherra Kjærnested Örn og Örlygur
[39] 서적 Íslensk skip
[40] 간행물 Svipmyndir úr 70 ára sögu Landhelgisgæsla Íslands
[41] 학술지 How 'cod war' came: the origins of the Anglo-Icelandic fisheries dispute, 1958–61 2004-11-01
[42] 웹사이트 Did He Matter? The Colourful Andrew Gilchrist and the First Cod War http://www.gudnith.i[...] 2003
[43] 웹사이트 Tímarit.is https://timarit.is/p[...]
[44] 서적 Í eldlínu kalda stríðsins
[45] 서적 Uppgjör við umheiminn
[46] 학술지 Deconstructing Mediation: A Case Study of the Cod Wars 2016-01-01
[47] 웹사이트 Secon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Law of the Sea, 1960 http://legal.un.org/[...] United Nations
[48] 서적 The Anglo-Icelandic Cod War of 1972–1973
[49] 서적
[50] 웹사이트 Landhelgisgæslan á flugi https://www.lhg.is/u[...] Icelandic Coast Guard
[51] 웹사이트 15. Annað þorskastríðið. Tímabilið 19. maí 1973 til nóvember 1973. http://www.lhg.is/me[...]
[52] 서적 The Anglo-Icelandic Cod War of 1972–1973 University of California
[53] 학술지 Þorskar í köldu stríði http://timarit.is/vi[...] 2000
[54] 웹사이트 Icelandic Fisheries https://api.parliame[...] UK Parliament 1973-03-22
[55] 서적 Uppgjör við umheiminn
[56] 서적 Uppgjör við umheiminn
[57] Youtube History of the Cod Wars Part 3 https://www.youtube.[...] 2010-12-05
[58] 서적 Combat Fleets of the World 1988/89: Their Ships, Aircraft, and Armament https://books.google[...] Naval Institute Press
[59] 서적 Guðmundur skipherra Kjærnested Örn og Örlygur
[60]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61] 서적 High Stakes: Britain's Air Arms in Action 1945–1990 Pen and Sword
[62]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63]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64] 뉴스 Icelandic Ship Shells British Trawler After Chase https://www.nytimes.[...] 1973-05-27
[65] 뉴스 A Shelled Trawler Repaired by British https://www.nytimes.[...] 1973-05-28
[66] 뉴스 Iceland Patrol Boat And British Frigate Are in a Collision https://www.nytimes.[...] 1973-06-08
[67] 웹사이트 1973 http://www.napier-ch[...] The Napier Chronicles
[68] 서적 The Anglo-Icelandic Cod War of 1972–1973
[69] 웹사이트 Dauðsfall um borð i Ægi: Var það alda frá Statesman, sem grandaði manninum? http://timarit.is/vi[...]
[70]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71]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72]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73] 학술지 A western cold war: the crisis in Iceland's relations with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NATO, 1971–74 2003-12-01
[74]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75]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76] 서적 An encyclopedic dictionary of conflict and conflict resolution, 1945–1996 Greenwood Publishing Group
[77] 간행물 Fishing News international A. J. Heighway Publications
[78] 웹사이트 C S Forester H86 https://web.archive.[...] Hulltrawler.net 2013-08-16
[79] 웹사이트 Commons debate, 29 July 1974 https://api.parliame[...] 1974-07-29
[80] 간행물 The Illustrated London News The Illustrated London News & Sketch Ltd.
[81] 웹사이트 Cod Dispute Between Iceland and the United Kingdom http://mandalaprojec[...] American University 1997-04-10
[82] 웹사이트 Hansard debates – 19 February 1976 https://api.parliame[...] 1976-02-19
[83] 서적 Safeguarding the Nation: The Story of the Modern Royal Navy Seaforth Publishing
[84] 웹사이트 Thir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Law of the Sea, 1973–1982 http://legal.un.org/[...] United Nations 2015-11-04
[85]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86] 서적 What price cod? A tugmaster's view of the cod wars Hutton Press
[87] 서적 Í kröppum sjó : Helgi Hallvarðsson skipherra segir frá sægörpum og svaðilförum Örn og Örlygur
[88]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saga landhelgismálsins 1948–1976 Hafréttarstofnun Íslands
[89] 서적 Tony Crosland Cape
[90] 서적 One Hundred Days: Memoirs of a Falklands Battlegroup Commander Naval Institute Press
[91] 서적 Down South: A Falklands War Diary Penguin
[92] 서적 British Foreign Secretaries since 1974
[93] 간행물 Ships Monthly Endlebury
[94] 웹사이트 Tuesday 30 March 1993 https://web.archive.[...] 2015-11-10
[95] 서적 Jane's fighting ships: the standard reference of the world's navies London
[96] 서적 Í kröppum sjó : Helgi Hallvarðsson skipherra segir frá sægörpum og svaðilförum Örn og Örlygur
[97] 서적 Útkall: Týr er að sökkva Útkall
[98] 서적 Safeguarding the Nation: The Story of the Modern Royal Navy Seaforth Publishing
[99] 뉴스 Conflict at sea during furious 1970's Cod Wars https://www.portsmou[...] 2020-02-01
[100] 웹사이트 Cod Wars http://britishseafis[...] 2012-07-19
[101] 서적 Þorskastríðin þrjú
[102] 서적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of change in fishing power of English North Sea trawlers John Wiley and Sons
[103] 서적 The Dictionary of Twentieth Century History, 1914–1990 Oxford University Press
[104] 서적 Trawling: the rise and fall of the British trawl fishery University of Exeter Press
[105] 뉴스 Cod Wars payment is 'too little, too late' http://www.thetimes.[...] 2012-04-06
[106] 서적 British Trawlers and Iceland 1919–1976
[107] 웹사이트 From Iceland – Ask A Historian: Has Iceland Ever Been Involved in Any Wars Or Conflicts https://grapevine.is[...] 2017-07-14
[108] 학술지 Fishing in the mild West: democratic peace and militarised interstate disputes in the transatlantic community 2008-07-01
[109] 학술지 Time to Fight: Government Type and Conflict Initiation in Parliamentary Systems 2001-10-01
[110] 학술지 Institutional Constraints, Political Opposition, And Interstate Dispute Escalation: Evidence from Parliamentary Systems, 1946–89 1999-05-01
[111] 학술지 The Cod Wars: a re-analysis 2016-03-22
[112] 웹사이트 Privatising the seas: how the UK turned fishing rights into a commodity https://unearthed.gr[...] 2019-03-07
[113] 웹사이트 Possible EU Fishery Rights in UK Waters And Possible UK Fishery Rights in EU Waters Post-Brexit: An Opinion Prepared for the Scottish Fishermen's Federation http://www.sff.co.uk[...] Scottish Fishermen's Federation 2016-11-01
[114] 웹사이트 Fish fights: Britain has a long history of trading away access to coastal waters http://theconversati[...] 2019-03-26
[115] 서적 Iceland and European Integration: On the Edge Routledge
[116] 서적 The Nordic States and European Unity Cornell University Press
[117] 서적 Nordic Nationalism and Right-Wing Populist Politics Palgrave Macmillan UK 2017-01-01
[118] 뉴스 Brexit Could Spark The Next Big Fishing War https://www.huffpost[...] 2019-08-18
[119] 뉴스 Britain prepares for mackerel war with Iceland and Faroe Islands https://www.theguard[...] 2010-08-22
[120] 학술지 Building on Iceland's 'Good Reputation': Icesave, Crisis and Affective National Identities 2016-03-14
[121] 서적 Iceland and the International Financial Crisis: Boom, Bust and Recovery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4-01-30
[122] 뉴스 Iceland holds referendum on Icesave repayment plan http://news.bbc.co.u[...] BBC News 2010-03-06
[123] 뉴스 When tiny Iceland did beat England: It's time to brush up on the Cod Wars https://www.washingt[...]
[124] 뉴스 Celebrate Icelandic victory in the Cod Wars at a Coast Guard open house on Sunday http://icelandmag.vi[...]
[125] 뉴스 Iceland invoke the spirit of the Cod Wars in bid to beat England https://www.independ[...] 2016-06-26
[126] 뉴스 Cod Wars fishing vessels to exchange bells in cooperation gesture https://www.bbc.com/[...] BBC News 2017-02-20
[127] 문서 아이슬란드 연안 경비대는 아이슬란드어로 "영해 경비대"라고 부른다.
[128] 웹인용 Útfærsla efnahagslögsögunnar https://web.archive.[...] 2012-03-03
[129] 서적 Guðmundur skipherra Kjærnested Örn og Örlygur
[130] 서적 Íslensk skip
[131] 서적 Svipmyndir úr 70 ára sögu Landhelgisgæsla Íslands
[132] Youtube History of the Cod Wars (BBC Programme) https://www.youtube.[...]
[133] 서적 The Anglo-Icelandic Cod War of 1972–1973 1975-11-26
[134] 서적 (페이지 참조)
[135] 웹인용 Landhelgisgæslan á flugi https://www.lhg.is/u[...] Icelandic Coast Guard 2021-05-05
[136] 서적 15. Annað þorskastríðið. Tímabilið 19. maí 1973 til nóvember 1973. http://www.lhg.is/me[...]
[137] 뉴스 대구전쟁,영국-「아이슬란드」 소국포함에 속수무책…노해군국 https://www.joongang[...] 1973-05-29
[138] 뉴스 약소국의 벼랑끝 전술, 대구 전쟁 https://www.sedaily.[...] 2016-09-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