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떠이선 왕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떠이선 왕조는 18세기 베트남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을 통해 건국된 왕조이다. 1771년 떠이선 출신의 응우옌 삼형제가 꽝남국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 시초가 되었으며, 1777년 꽝남국을 멸망시키고 후 레 왕조를 붕괴시켰다. 이후 북벌을 통해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레 왕조를 멸망시켰으나, 응우옌푹아인과의 대립 끝에 1802년 멸망했다. 떠이선 왕조는 사회 개혁과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며, 청나라, 시암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맺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떠이선 왕조 - 락검-쏘아이뭇 전투
    1785년 1월 19일 또는 20일에 벌어진 락검-쏘아이뭇 전투는 응우옌 후에가 이끄는 떠이선 왕조군이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시암의 지원을 받던 응우옌 왕조군을 격파한 전투로, 떠이선 왕조의 승리를 확고히 하고 베트남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다.
  • 베트남의 군주 - 민망 황제
    민망 황제는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로 즉위 후 국호를 변경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으나, 기독교 탄압과 반란 야기로 국제적 고립과 프랑스 식민지화의 길을 열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 베트남의 군주 - 뜨득 황제
    뜨득 황제는 1847년부터 1883년까지 베트남을 통치한 응우옌 왕조의 황제로, 기독교 탄압, 쇄국 정책, 프랑스와의 전쟁 패배, 사이공 조약 체결 등을 겪었으며, 그의 사후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 베트남의 왕조 - 응우옌 왕조
    응우옌 왕조는 응우옌 푹 아인이 떠이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을 통치한 왕조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며, 프랑스 침략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고,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현재의 베트남과 거의 같은 영토를 통일했다.
  • 베트남의 왕조 - 전 레 왕조
    전 레 왕조는 980년 레 호안이 건국하여 북송의 침략을 격퇴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왕위 계승 분쟁과 국력 쇠퇴로 1009년 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떠이선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8세기 말 베트남의 정치적 분열
18세기 말 베트남의 정치적 분열: 응우옌 후에 통제 지역 (회색), 응우옌 냑 통제 지역 (노란색), 응우옌 르 통제 지역 (녹색, 이후 응우옌 아인에게 점령됨)
기본 정보
공식 명칭대월국
일반 명칭떠이선 왕조
지위레 왕조 내 공국 (1778–1788), 청나라 조공국 내 내부 제국 체제 (1789–1802), 잔존 국가 (1801–1802)
정부 형태반란 정부 (1771–1778), 절대 군주제 (1778–1802)
건국응우옌 냑이 떠이선 왕조를 세움 (1778년)
멸망응우옌 아인이 동경을 점령 (1802년 6월 18일)
이전 국가레 왕조, 응우옌 주, 찐 주
계승 국가응우옌 왕조
수도도반 (1776–1788), 푸쑤언 (1788–1801), 박성 (1801–1802)
공용어베트남어, 쯔놈 (공식)
종교베트남 민간 신앙, 불교, 도교, 가톨릭교, 이슬람교
통화구리 합금 및 아연 동전
현재 국가베트남,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왕조
왕가 이름응우옌 떠이선
영지꾸이년, 푸쑤언, 프엉호앙쭝도
국가대월 (베트남) 왕국
칭호대월 황제/안남 왕
청나라로부터 받은 칭호: 자오지 군왕, 안남 국왕
창건자응우옌 냑
마지막 통치자응우옌 꽝또안
건국 연도18세기
폐지 연도1802년
통치자
초대 황제태덕 (1778–1788)
제2대 황제꽝쭝 (1788–1792)
마지막 황제까인틴 (1792–1802)
통치자 칭호황제
역사
이전 사건떠이선 반란 발발 (1771년)
주요 사건 1레 왕조 붕괴 (1789년 2월 3일)
주요 사건 2응우옌 아인이 동경을 점령 (1802년 6월 18일)
인구
1800년약 1000만 명

2. 역사

18세기 베트남에서는 후 레 왕조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되어, 북부는 찐 씨, 남부는 꽝남국의 응우옌 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응우옌 씨가 지배하는 지역이 폭정으로 다스려지면서,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응우옌반냑, 응우옌반루, 응우옌후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삼형제도 응우옌 씨이기는 하지만 꽝남 응우옌 씨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레 왕조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대거 남하하여 꽝난 응우옌 씨의 수도 후에를 공략했다.

떠이선의 세력들은 후 레 왕조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전투를 계속하여, 1777년자딘(현 호치민 시티)에서 꽝남국을 멸망시켰다. 이 때에 꽝남 응우옌 씨 일족 중 응우옌푹아인만은 겨우 살아남아 시암으로 도망쳤다. 1778년, 응우옌반냑은 중부 지역의 황제를 선언한다. 1786년에 응우옌반후에는 레 왕조 내부의 불화를 이용해 북벌을 하게 했고, 이것으로 레 왕조가 붕괴되었다. 응우옌반후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를 존속시켰지만, 불안을 느낀 소통제는 청나라로 망명했다. 1789년 응우옌반후에는 내정에 개입한 청나라군을 격퇴하고,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응우옌반후에는 북벌을 감행한 것으로 인해 형인 응우옌반냑과 대립하였고, 응우옌반후에도 황제를 칭했다. 한편, 시암으로 망명한 응우옌 푹 아인은 시암의 원조를 받아 항전을 계속했다. 응우옌반후에는 응우옌반냑의 세력을 흡수하고, 응우옌푹아인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출진 직전에 잠겼다. 아들 응우옌꽝또안이 후사를 이어받아, 응우옌푹아인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렸지만, 외교전에 실패해 라오스나 남중국해 화인 세력 등을 차례로 적으로 돌려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1802년 응우옌푹아인에 의해 수도 탕롱이 함락되고, 떠이선 왕조는 멸망하였다.

2. 1. 배경

18세기 베트남은 레 왕조가 법적으로 통치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북쪽의 정 주와 남쪽의 응우옌 주 두 가문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4] 북쪽의 정 주는 수도 탕롱에서, 남쪽의 응우옌 주는 수도 후에에서 통치하며 서로 전쟁을 벌였다.[4] 양측은 국가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이 시기 농민들의 삶은 토지 소유권이 소수의 지주에게 집중되고 황실 관료들의 부패와 압제로 인해 고달팠다.[4] 심지어 과거 시험 급제 자격이 돈 있는 자들에게 팔리기도 했다.

정 주와 응우옌 주 사이의 전쟁이 끝난 후, 정 주는 평화를 누렸지만,[4] 응우옌 주는 캄보디아와 샴 왕국을 공격했다.[4] 응우옌 주는 이 전쟁에서 대개 승리하여 무토지 빈민이 정착할 새로운 땅을 개척했지만, 잦은 전쟁은 막대한 자금, 자원, 인명을 희생시켰다.[4]

18세기 대월에서 후 레 왕조는 명목상의 지위였고, 북부는 정씨가, 남부는 광남 응우옌씨가 다스리며 '정-응 분쟁'이라 불리는 항쟁을 반복하며 국가는 쇠락해 갔다. 직접적인 항쟁이 수그러든 후에도, 동경 정씨의 통치 하에서는 지주와 관료들의 토지 사유화가 진행되었고, 쾌락에 빠진 정강(鄭杠)에 의해 농촌은 황폐해졌다. 1735년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반란이 잇달았다.

광남국에서도 1765년 무왕 응우옌푹쾃(Nguyễn Phúc Khoát)이 죽은 후, 어린 정왕 응우옌푹투언(Nguyễn Phúc Thuận)의 섭정이 된 장복란(張福巒)을 중심으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광남 응우옌씨는 이전부터 아유타야 왕조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캄보디아와 혼인 관계를 맺고, 이를 이용한 남진 정책으로 메콩 삼각주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1757년에는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현재의 캄보디아 남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지만, 1767년 톤부리 왕조의 딱신왕이 다시 캄보디아에 침공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를 잃은 광남국은 백성들에게 더욱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게 되어 지방은 황폐해졌다.

2. 2. 떠이선 농민 운동의 발발과 전개

18세기 베트남은 후 레 왕조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북부는 찐 씨, 남부는 꽝남국의 응우옌 씨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5] 응우옌 씨의 폭정으로 인해 1771년 떠이선 출신의 세 형제,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루, 응우옌후에가 반란을 일으켰다.[5] 이들은 꽝남 응우옌 씨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5]

떠이선 형제는 백성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압제 종식, 국가 재통합, 하노이레 황제 권력 회복을 목표로 내세웠다.[5] 또한 부패한 관리 제거와 토지 재분배를 약속했다.[5]

1773년, 떠이선군은 항구 도시 퀴년을 점령했다.[5] 응우옌 씨의 엄격한 법률에 불만을 품은 상인들이 이 봉기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5]

후 레 왕조의 찐 씨는 이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1774년 꽝남 응우옌 씨의 수도 후에(Phú Xuân)를 함락시켰다.[5][6]

꽝남 응우옌 씨와 찐 씨 양쪽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떠이선군은 찐 씨에게 복종 의사를 표시하여 후 레 왕조로부터 "광남진수선무대사(廣南鎮守宣撫大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떠이선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1776년 자딘(호치민 시티)을 점령하고 꽝남 응우옌 씨 일족 대부분을 살해했다.[6] 응우옌푹아인은 간신히 시암으로 탈출했다.[6]

1778년, 응우옌반냑은 퀴년의 황제성에서 황제를 선언했다.

2. 3. 북벌과 레 왕조의 멸망

18세기 베트남은 후 레 왕조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북부는 찐 씨, 남부는 꽝남국의 응우옌 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1771년 꽝남국의 폭정에 반발하여 떠이선 출신의 세 형제,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루, 응우옌후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꽝남 응우옌 씨와는 무관한 인물들이었다. 후 레 왕조는 이를 기회로 삼아 남하하여 꽝남국의 수도 후에를 공격했다.

떠이선 농민 반란군의 전쟁 북


떠이선 세력은 후 레 왕조에 항복하는 척하면서 전투를 계속하여, 1777년 자딘(현 호찌민시)에서 꽝남국을 멸망시켰다. 이때 응우옌푹아인만이 살아남아 시암으로 피신했다. 1778년 응우옌냑은 중부 지역에서 황제를 선언했다. 1786년 응우옌후에는 레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북벌을 감행하여 레 왕조를 무너뜨렸다. 응우옌후에는 레 현종의 딸 레 응옥 헌 공주와 결혼했다. 레 왕조의 레 치우 통 황제는 청나라로 망명하여 건륭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789년 응우옌후에는 내정에 간섭하는 청나라군을 응옥 호이-동 다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 레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켰다.[7][12] 응우옌 후에는 청나라와 조공 관계를 회복하려 했으며,[12] 건륭제는 응우옌 후에를 ''안남국왕(An Nam quốc vương)''으로 책봉하여 베트남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12]

1793년 푸옌의 오페라 하우스


1800년에 주조된 Tây Sơn 왕조의 경성제(Cảnh Thịnh)의 왕실 청동 북


태덕 9년(1786년) 6월, 응우옌 후에는 해운령을 넘어 정씨가 장악하고 있던 후춘을 점령하고, 7월에는 홍하 삼각주로 침공하여 후 레 왕조의 수호를 선포했다. 이로 인해 동경 정씨는 내분으로 패주했다. 응우옌 후에는 승룡(昇龍)(현재의 하노이)에 입성하여 레 헌종에게 원수로 임명되고 그의 딸과 결혼했으나, 헌종은 곧 승하했다. 소통제가 즉위했지만, 응우옌 후에는 이를 무시하고 승룡을 떠났다.[22] 태덕 10년(1787년) 4월, 응우옌 냑은 귀인(歸仁)에서 황제를 자칭하고(태덕제), 응우옌 후에를 북평왕, 응우옌 르를 북정왕[22]으로 봉했다.

2. 4. 응우옌푹아인과의 대립과 왕조의 멸망

18세기 베트남에서는 후 레 왕조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하고, 북부는 찐 씨, 남부는 꽝남국의 응우옌 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응우옌반냑, 응우옌반루, 응우옌후에)가 반란을 일으켜 1777년 자딘(현 호치민 시티)에서 꽝남국을 멸망시켰다. 이 때 꽝남 응우옌 씨 일족 중 응우옌푹아인은 시암으로 망명했다.

1786년 응우옌반후에는 후 레 왕조 내부의 불화를 이용해 북벌을 감행, 레 왕조를 붕괴시켰다. 1789년에는 내정에 개입한 청나라군을 격퇴하고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응우옌반후에는 북벌로 인해 형인 응우옌반냑과 대립했고, 응우옌반후에도 황제를 칭했다. 한편, 시암으로 망명한 응우옌푹아인은 시암의 원조를 받아 항전을 계속했다.

응우옌반후에는 응우옌반냑의 세력을 흡수하고 응우옌푹아인을 토벌하려 했지만, 출진 직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응우옌꽝또안이 뒤를 이어 응우옌푹아인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외교 실패로 열세에 처했다. 광중(Quang Trung, 응우옌후에)은 천지회(Tiandihui), 백련교(White Lotus) 등에 피난처를 제공하고, 진첨보(Chen Tien-pao)(陳添保) 등 중국 해적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13] 복수를 준비했으나, 1792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모든 계획은 중단되었다.[14][15][16]

광중의 사후, 응우옌꽝토안(Nguyễn Quang Toản)이 10세의 나이로 경성제(Emperor Cảnh Thịnh)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그의 삼촌 부이닥투옌(Bui Dac Tuyen)에게 있었다. 부이닥투옌의 대규모 숙청으로 떠이선 왕조는 약화되었고, 이는 피뇨 드 베하인(Pigneau de Behaine)이 고용한 프랑스 군사 모험가들의 도움을 받은 응우옌 아인이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800년 응우옌 아인은 뀌년(Quy Nhơn) 성을 점령했고, 1801년에는 푸쑤언(Phú Xuân)을 점령하여 응우옌꽝토안을 탕롱(Thăng Long)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1802년 응우옌푹아인은 탕롱을 포위했고, 응우옌꽝토안은 탈출했지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로써 떠이선 왕조는 24년 만에 멸망하고,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가 베트남을 장악했다. 응우옌은 패배한 떠이선 지도자 부이티쑤언(Bùi Thị Xuân)을 코끼리 발에 짓밟아 죽임(crushing by elephant)으로 처형하고, 그녀의 심장과 간을 병사들에게 먹였다.

떠이선 왕조의 인장

3. 대외 관계

3. 1. 청나라와의 관계

레 치우 통(Lê Chiêu Thống) 황제는 권력 유지를 위해 중국 청 제국의 건륭제(Qianlong Emperor)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이를 승인하고 1788년 대규모 청나라 군대를 베트남 남부로 진격시켜 수도 탕롱(Thăng Long)을 함락시켰다.[23]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는 청나라 군대와 싸우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모았다. 그는 전투 전 군대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청나라 군대가 음력 설을 축하하고 있을 때, 응우옌 후에는 기습 공격으로 응옥 호이-동 다 전투(Battle of Ngọc Hồi-Đống Đa)에서 그들을 패배시키고 레 치우 통과 함께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떠이선 왕조는 중국 해적의 지원을 받았다.[7][12] 이후 응우옌 후에는 청나라-샴의 양면 공격을 저지하고 청나라의 레 왕조 복원 시도를 막기 위해 조공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12] 응우옌 후에는 응우옌 꽝 빈(Nguyễn Quang Bình)이라는 이름으로 건륭제에게 의례적인 복종 요청을 보냈다.[12]

1789년, 건륭제는 응우옌 후에가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 사절단을 베이징으로 직접 이끌고 간다는 조건으로 조공 관계를 재확립하고 응우옌을 안남 국왕으로 책봉하는 데 동의했다.[12] 건륭제에게 이러한 합의를 수락한 동기는 청나라의 우월성을 유지하고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12] 중국과 베트남의 자료들은 응우옌 후에가 사칭자를 사절단과 함께 베이징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화려한 황실의 환대를 받았다는 데 동의했다.[12] 건륭제는 그 제안을 승인하고 응우옌 후에에게 ''안남국왕(An Nam quốc vương)''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는 응우옌 후에가 베트남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되었고 레 치우 통은 더 이상 지원받지 못했음을 나타냈다.[12]

태덕 10년(1787년) 7월, 소통제(昭統帝)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건륭제(乾隆帝)의 허락을 얻은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孫士毅)는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홍하 삼각주에 침공하여 승룡(昇龍)을 점령했다. 후레 왕조의 복고를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손사의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 해에 큰 기근이 발생했고, 청나라 군대가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민심은 후레 왕조로부터 이탈했다. 이 보고를 들은 阮惠는 12월에 격문을 발표하고,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여 연호를 “광중(光中)”으로 정했다(광중제). 태덕 12년/광중 2년 1월 5일(1789년1월 30일) 광중제의 군대는 승룡에 압박했고, 돈더(埬栘)에서 청나라 군대를 패주시켰다. 손사의의 탈출 소식을 들은 소통제는 북경으로 망명했고, 여기서 후레 왕조도 멸망했다.

3. 2. 시암(태국)과의 관계

떠이선 왕조는 이전 응우옌 왕조의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응우옌 아인(Nguyễn Ánh)은 이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시암(Siam)의 왕 탁신(Taksin)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시암 군대는 1780년에 베트남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전쟁에서 떠이선 군을 패배시키지 못하고, 점령했던 영토를 다시 잃는 일이 반복되었다. 1782년, 시암 왕이 반란으로 사망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응우옌 아인의 군대는 베트남에서 쫓겨났다. 1785년, 시암은 다시 침략하여 메콩 삼각주 일부를 점령했지만, 르어껌-소아이뭇 전투(Battle of Rạch Gầm-Xoài Mút)에서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에게 패배했다.

경흥 37년(1776년),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은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베느에게 아들 阮福景(응우옌푹경)을 인질로 제공하는 대가로 지원을 요청했다. 자딘(嘉定)은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이 한때 점령했으나, 곧 떠이선 군에게 탈환되었고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은 富國島로 탈출했다. 또한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은 시암 차크리 왕조의 라마 1세로부터 수병 2만(일설에는 5만)과 배 300척의 원군을 얻었다. 메콩 삼각주의 중국계 세력도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을 도왔다.

태덕 7년 12월 9일(1785년1월 19일) 응우옌후에(阮惠)가 이끄는 떠이선 군과 응우옌푹아인(阮福映)-시암 연합군은 메콩강 중류, 美湫 부근의 에서}}에서 전투를 벌였다.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해수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한 작전으로, 이튿날 아침에는 시암 군이 거의 궤멸되었다. 주력을 잃은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의 군대는 패주했다. 이후 시암이 베트남 영토를 침략하는 일은 없었다.

3. 3. 프랑스와의 관계

4. 사회와 문화

4. 1. 사회 개혁

4. 2. 문화 발전

5. 역대 군주

5. 1. 뀌년 정권

1778년 응우옌반냑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떠이선 왕조를 개창했다. 그는 스스로 중앙 황제(中朝皇帝)라 칭하고 연호를 정덕(正德)이라 하였다.

대수이름재위 기간
1응우옌반냑 국왕
(Vua Nguyễn Văn Nhạc)
1778년 ~ 1793년
2응우옌꽝바오 국왕
(Vua Nguyễn Quang Bảo)
1793년 ~ 1802년


5. 2. 푸쑤언 정권

응우옌후에(Nguyễn Văn Huệ) 국왕은 1788년부터 1792년까지, 응우옌꽝또안(Nguyễn Quang Toản) 국왕은 1793년부터 1802년까지 재위하였다. 응우옌후에는 연호를 광중(光中)이라 하였다. 응우옌꽝또안은 즉위 후 연호를 경성(景盛)으로 하였다가, 1801년부터 보흥(宝興)으로 바꾸었다.

대수이름재위 기간
1응우옌후에 국왕
(Vua Nguyễn Văn Huệ)
1788년 ~ 1792년
2응우옌꽝또안 국왕
(Vua Nguyễn Quang Toản)
1793년 ~ 1802년


6. 주요 인물

떠이선 왕조를 지탱한 "서산칠호장(Tây Sơn thất hổ tướng)"과 "서산오봉자(Tây Sơn ngũ phụng thư)"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서산칠호장에는 진광요(陳光耀), 원문설/阮文雪중국어, 무문용/武文勇중국어, 무정수/Võ Ðình Túvi, 레번흥(黎文興)/Lê Văn Hưng (tướng Tây Sơn)vi, 리문보/Lý Văn Bưuvi, 원문록(阮文祿)/阮文祿 (西山朝)중국어이 속한다. 서산오봉자에는 배씨춘(裴氏春), 배씨안/裴氏雁중국어, 쩐티란/Trần Thị Lanvi, 후인티푹/Huỳnh Thị Cúcvi, 응웬티융/Nguyễn Thị Dungvi이 속한다.

7. 평가 및 의의

참조

[1] 서적 Việt Nam: A History from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Unknown
[3] 서적 A History of Southeast Asia: Critical Crossroad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4] 서적 Unknown
[5] 서적 Unknown
[6] 서적 Unknown
[7] 서적 Unknown
[8] 서적 Unknown
[9] 서적 Unknown
[10] 서적 Sino-Vietnamese Relations
[11] 서적 Tay Son Uprising
[12] 서적 White Lotus Rebels and South China Pirate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3] 서적 Pirates of the South China Coast, 1790-1810 Stanford University Press
[14] 웹사이트 Maritime violence and state formation in Vietnam: Piracy and the Tay Son Rebellion, 1771–1802 (book chapter, 2014) https://www.research[...] Research Gate 2019-02-07
[15] 간행물 Đại Nam chính biên liệt truyện :s:zh:大南正編列傳初集/卷三十
[16] 웹사이트 Maritime violence and state formation in Vietnam: Piracy and the Tay Son Rebellion, 1771–1802 (book chapter, 2014) https://www.research[...] Research Gate 2019-02-07
[17] 서적 Unknown https://books.google[...]
[18] 서적 Unknown https://books.google[...]
[19] 웹사이트 SINO-VIETNAMESE RELATIONS, 1771-1802: FROM CONTENTION TO FAITHFUL CORRELATION https://www.research[...] Research Gate 2019-02-06
[20] 웹사이트 Tay Son Uprising (1771-1802) In Vietnam: Mandated By Heaven? https://www.research[...] Research Gate 2019-02-07
[21] 서적 Unknown
[22] 기타 クアン・チュン博物館の像では、阮侶の称号は「東定王」となっている。
[23] 기타 乾隆帝の十全武功におけるベトナム遠征軍のこ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