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조제프 드 몽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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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은 171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 군인으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 1756년 캐나다 식민지의 군사 지휘관으로 부임하여, 총독 보드뢰유와 갈등을 겪었으며, 유럽식 전투를 선호하고 원주민 전술을 경시했다. 7년 전쟁 중 오스위고 요새, 윌리엄 헨리 요새에서 승리했으나, 카리용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퀘벡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몽칼름은 사후에도 그의 업적을 기려 여러 장소와 랜드마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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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조제프 드 몽칼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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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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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고존 |
다른 이름 | 상베랑 후작 |
로마자 표기 | Rui-josepeu deu mongkalmeu-gojon |
출생일 | 1712년 2월 28일 |
출생지 | 프랑스, 님 근교, 샤토 드 캉디악 |
사망일 | 1759년 9월 14일 |
사망지 | 누벨프랑스, 퀘벡주, 퀘벡 시 |
매장지 | 퀘벡 시티, 아브라함 평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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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프랑스 왕국 |
군대 | 프랑스 왕국군 |
복무 기간 | 1721년–1759년 |
최종 계급 | 중장 |
지휘 | 오세루아 연대 몽칼름 연대 누벨프랑스 총사령관 |
주요 참전 전투 |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켈 포위전 필립스부르크 포위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프라하 포위전 피아첸차 전투 아시에타 전투 7년 전쟁 오스위고 요새 전투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 카리용 전투 보포르 전투 아브라함 평원 전투 |
수상 | 성 루이 왕립 군사 훈장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안젤리크 루이즈 탈롱 뒤 불레 |
2. 생애
1712년 프랑스 남부 님 근교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9세에 군에 입대하였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34]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1756년 봄, 누벨 프랑스(캐나다) 주둔 프랑스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 등과 함께 파견되었다. 이는 기존 사령관이었던 장-알망 디에스코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부임 후, 현지 총독이었던 보드뢰유 총독과 군 지휘권 및 전략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29][30]
캐나다에서의 주요 전투로는 1756년 온타리오 호수의 오스위고 요새 함락과 1757년 윌리엄 헨리 요새 점령이 있다. 특히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는 군사적 승리였으나, 항복한 영국군을 몽칼름의 원주민 동맹군이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이후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 《모히칸 족의 최후》에서 몽칼름이 학살을 막지 못한 인물로 묘사되는 배경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1712년 프랑스 남부 님 근교의 캉디악 성에서 루이 다니엘 드 몽칼름과 마리 테레즈 드 피에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몽칼름 가문은 로브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9세 때인 1721년, 레지멘 드 에노(régiment d'Hainault)의 소위로 프랑스 왕립 육군에 입대하며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1729년 그를 위해 대위 직위를 구매해주었다.173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생베랑 후작(Marquis de Saint-Véran)이 되어 작위와 관련된 명예, 권리, 그리고 부채까지 상속받았다. 그의 재정 상황은 안젤리크 루이즈 탈롱 뒤 불레이(Angélique Louise Talon du Boullay)와의 결혼으로 개선되었다. 처음에는 재산과 영향력을 고려한 결혼이었을 수 있으나, 두 사람은 헌신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캉디악에 정착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다섯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몽칼름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1733년 켈 공방전과 1734년 필립스부르크 공방전에서 싸웠다.[34][2]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연대는 프랑스에 주둔 중이었으나, 전투를 원했던 몽칼름은 필리프 샤를 드 라 파르(Philippe Charles de La Fare)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몽칼름과 나중에 누벨 프랑스에서 그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되는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는 함께 프라하 공방전에 참여했다.
1743년에는 레지멘 도세로이(régiment d'Auxerrois)의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장-바티스트 프랑수아 데마레, 마르키 드 마이부아(Jean-Baptiste François Desmarets, marquis de Maillebois)가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1744년 성 루이 훈장을 수여받았다.[3] 1746년 피아첸차 전투에서는 부하들을 독려하다가 다섯 차례 칼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몇 달간의 감금 후 가석방되었고,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포로 교환으로 현역 복귀가 가능해진 후, 1747년 다시 이탈리아 원정에 합류했다. 그는 아시에타 전투에서 머스킷 총탄에 또다시 부상을 입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벤티밀리아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 벨-일 공작(Charles Louis Auguste Fouquet, duc de Belle-Isle)이 그해 겨울 은퇴하자, 그의 군대는 몽칼름을 포함한 준장들의 지휘 아래 남겨졌다.
1748년 아헨 조약 체결로 전쟁이 끝나자[4], 1749년 몽칼름은 평화 시기에 새로운 연대를 창설하는 드문 기회를 얻어, 자신이 가끔 시찰하는 기병 연대인 몽칼름 연대(régiment de Montcalm)를 창설했다.[5] 이후 그는 저택을 부여받아 1748년부터 1755년까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2. 2. 뉴프랑스 부임과 보드뢰유와의 갈등
1756년 봄, 캐나다 식민지의 장교였던 장-알망 디에스코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자, 루이 15세는 몽칼름 준장을 뉴프랑스의 사령관으로 파견했다.[34] 이때 프랑수아-가스통 드 레비 기사가 부사령관으로, 루이-앙투안 드 부갱빌 대위가 부관으로 함께 파견되었다.
당시 뉴프랑스의 총독은 퀘벡 출신의 피에르 드 리고, 보드뢰유-카바니알 후작(이하 보드뢰유)이었다. 보드뢰유는 캐나다 해군 출신으로, 트로와 리비에르와 루이지애나 총독을 역임한 경험이 있었다. 캐나다는 국민개병제를 시행하고 있어 캐나다군의 지휘권은 원칙적으로 총독에게 있었지만, 7년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과 몽칼름 휘하의 프랑스 정규군 5개 연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군 최고 지휘관은 몽칼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캐나다 민병들은 같은 캐나다 출신인 보드뢰유를 더 신뢰했고, 보드뢰유 역시 몽칼름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몽칼름과 프랑스군, 보드뢰유와 캐나다군 사이에는 큰 갈등이 생겼다. 부임 이듬해 몽칼름은 본국의 육군 대신에게 보드뢰유에 대한 불만을 담은 비밀 문서를 보냈고, 보드뢰유 역시 "프랑스 장교들이 우리를 바보 취급한다"며 본국 해군부에 불만을 표출했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몽칼름과 보드뢰유의 갈등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선 복합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군사 조직과 부처에 소속되어 있었다. 몽칼름은 육군(''troupes de terres'') 소속으로 국방부에 보고했고, 보드뢰유는 해군(''compagnies franches de la marine'') 소속으로 해군부에 보고했다.[19] 이는 서로 다른 지휘 체계, 경력 경로, 후원자를 의미했으며, 각자의 영향력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충돌이 불가피했다.[19] 몽칼름은 보드뢰유의 군사적 경험 부족을 지적하며 국방부 장관 아르장송 백작에게 그를 교체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고,[19] 보드뢰유 역시 몽칼름의 불복종을 문제 삼아 해군부 장관에게 그의 교체를 요구했다. 결국 국왕 자문회는 전략에 대한 불일치를 피하기 위해 몽칼름에게 보드뢰유의 지휘를 받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몽칼름이 그 외 다른 면에서는 동등한 계급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다.[20]
둘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대표했다. 역사가 기 프레고는 이 갈등이 "단순한 개인적 다툼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를 포함했고, 사회가 스스로 무장하여 견디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21] 몽칼름은 프랑스 본토 귀족 장교의 문화를 대변하며 전쟁을 프랑스 왕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기회로 여겼다.[20] 반면, 캐나다 식민지 출신인 보드뢰유는 전쟁을 뉴프랑스의 영토 보전과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보았다.[22]
셋째,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있었다. 몽칼름은 유럽식 정규전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식민지 방식은 이제 시대가 지났고, 이제 전쟁은 '계획된 작전, 군대, 포병, 포위, 전투를 갖춘 유럽식 기반'으로 확립되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23] 그는 보세주르 요새 함락 이후 실추된 프랑스의 군사적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24] 숙련도가 낮다고 여긴 캐나다 민병대와 원주민보다는 프랑스 정규군에 의존했다. 특히 그는 원주민의 전투 방식, 예를 들어 머리 가죽 벗기기 등을 야만적이라 여기며 프랑스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생각했다.[24] 카리용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원주민 대표단에게 "당신들이 필요 없는 때에 왔다. 죽은 시체만 보러 온 건가? 요새 뒤로 가면 시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영국군을 격파하는 데 당신들이 필요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27] 반면, 보드뢰유는 요새 확장, 지속적인 소규모 교전, 기습 공격, 그리고 원주민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기존의 "식민지 방식"을 기반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다.[25][26] 그는 민병대와 원주민의 게릴라전 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29][30]
이러한 뿌리 깊은 갈등은 1758년, 몽칼름이 중장으로 진급하여 보드뢰유보다 높은 계급을 얻고 군사 전략 결정에 사실상 자유로운 권한을 얻으면서 대부분 해결되거나 적어도 무의미해졌다.[28]
3. 북아메리카에서의 군사 활동
누벨프랑스에서의 몽칼름의 군사 활동은 초기 승리와 좌절, 그리고 내부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몬트리올 도착 직후 그는 영국령 북아메리카와의 국경 상황을 파악하고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1756년 오스웨고 요새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며 유능한 지휘관의 등장을 알렸으나, 이 과정에서 총독 보드뢰유와의 전술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이 시작되었다.[6][7][8][9]
1757년에는 윌리엄 헨리 요새 포위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뉴욕 침공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전투 후 항복한 영국군 포로들에 대한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의 학살 사건[10]과, 후속하여 포트 에드워드로 진격하지 않기로 한 몽칼름의 결정은 보드뢰유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군공으로 몽칼름은 1758년 10월 20일 프랑스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31]
1758년 카리용 전투는 몽칼름의 군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록된다. 약 4,000명의 병력으로 16,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격퇴한 이 전투는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함께, 영국군 사령관 제임스 애버크롬비의 무능함 덕분이기도 했다.[6] 이 승리로 몽칼름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그는 승리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며 캐나다 민병대와 원주민 동맹군의 기여를 폄하했고, 보드뢰유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난하는 등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보드뢰유는 몽칼름의 소환을 요청하기까지 했다.[6]
그러나 1757년 윌리엄 피트가 영국 총리가 되어 북미 전선에 집중하면서 전세는 영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영국은 막대한 자원을 동원하여 공세를 강화했고, 프랑스 식민지는 본국의 지원 부족과 흉작으로 인한 식량 위기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11] 루이 15세는 방어선을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으로 축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몽칼름은 식민지의 모든 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12] 그는 퀘벡의 방어에 기대를 걸었지만, 점증하는 영국의 위협 속에 점차 비관적인 전망을 갖게 되었다.[13]
1759년,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이 퀘벡으로 진격해왔다. 수개월간의 포격과 공방전 끝에[14], 9월 13일 영국군은 기습적으로 아브라함 평원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15] 몽칼름은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16][17], 이어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완패했다. 몽칼름 자신도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다음 날 아침 사망했다.[31] 그의 죽음과 퀘벡 함락은 사실상 북미에서 프랑스 세력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몽칼름과 보드뢰유의 끊임없는 불화는 뉴프랑스의 방어 노력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프랑스군의 패배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몽칼름은 뛰어난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의 경직된 사고와 내부 갈등,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의 결정적 실수는 결국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능력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29][30]
3. 1. 오스위고 요새 전투 (1756년)

몬트리올에 도착한 몽칼름은 즉시 영국령 북아메리카와의 국경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는 국경 근처에 영국군이 집결하는 규모에 우려를 표하며 방어 시설 점검을 위해 카리용 요새로 떠났다. 그 사이 총독 보드뢰유는 온타리오 호 건너편 영국 요새인 오스웨고 공격을 위해 프롱트낙 요새에서 병력 준비를 시작했다.[6] 몽칼름이 카리용 요새에 병력을 모은 것은 영국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정찰병으로부터 긍정적인 보고를 받은 후, 보드뢰유와 몽칼름은 오스웨고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몽칼름이 프롱트낙 요새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프랑스 정규군, 캐나다 민병대,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구성된 3,500명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7] 8월 9일, 이들은 호수를 건너 신속하게 영국 요새를 포위했다. 8월 13일 아침, 프랑스군은 9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요새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으며, 증원군은 반대편을 포위했다. 공격 중 영국 사령관이 사망했고, 요새는 곧바로 항복했다.[7]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80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1,700명의 포로를 잡았고, 돈, 군사 서신, 식량, 총, 보트 등을 노획했다. 점령된 요새는 불태워지고 파괴되었다.[8] 그러나 항복 이후, 몽칼름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이 100명이 넘는 포로를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
오스웨고 요새 전투는 몽칼름이 북아메리카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비교적 빠르고 쉽게 얻은 이 승리는 프랑스군에 유능한 지휘관이 부임했음을 영국 측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칼름은 보드뢰유가 사용한 공격 전략과 캐나다 민병대의 실질적인 전투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이는 이후 프랑스군의 작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몽칼름과 보드뢰유 사이의 깊어지는 갈등의 시작점이 되었다.
3. 2.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 (1757년)
1757년, 몽칼름은 누벨프랑스 총독 보드뢰유의 명령에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여 챔플레인 호수 남쪽의 영국 기지인 윌리엄 헨리 요새와 더 남쪽에 있는 포트 에드워드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전투는 몽칼름에게 가장 큰 군사적 성공 중 하나가 되었다.1757년 8월 3일, 몽칼름은 포트 카리용에서 프랑스 정규군과 캐나다 민병대 6,200명,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 1,800명과 함께 윌리엄 헨리 요새를 공격했다.[6] 요새는 3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항복했다. 항복 조건에 따라 영국 수비대는 포트 에드워드까지 프랑스군의 호송을 받기로 했으며, 18개월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었다. 또한 모든 영국군 포로는 프랑스 측에 반환되었고, 프랑스군은 요새의 모든 물자와 탄약을 확보했다.
그러나 수비대가 요새를 떠날 때, 몽칼름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이 이들을 공격하여 약 2,000명의 포로 중 2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항복 조건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였으며, 몽칼름은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10] 이 학살 사건으로 인해 보드뢰유는 몽칼름의 해임을 본국에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몽칼름은 영국군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포트 에드워드가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도로 상태가 중포를 옮기기에 적합하지 않고, 영국 수비대가 도착하기 전에 증원될 것을 우려했다. 이 결정은 보드뢰유를 격분시켰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6]
포트 윌리엄 헨리 포위전에서의 승리는 뉴욕 침공의 희망을 이어가게 했다. 몽칼름은 이 군사적 공로를 바탕으로 중장으로의 승진을 요청했고, 1758년 10월 20일 프랑스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었다.[31]
3. 3. 카리용 전투 (1758년)
1758년 발발한 카리용 전투는 몽칼름의 군 경력에서 가장 눈부신 승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그는 약 3,600명의 병력으로 15,000명[6](정규군 6,000명, 민병대 9,000명)이 넘는 영국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몽칼름의 뛰어난 지휘 능력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영국군 사령관 제임스 애버크롬비의 전략적 무능함과 전투 중 발생한 여러 실수에 크게 힘입은 결과이기도 하다.1758년 7월, 뉴프랑스 총독 보드뢰유는 몽칼름에게 샹플레인 호수 근처 카리용 요새로 가서 영국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임스 애버크롬비가 이끄는 영국군은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7월 5일 영국군은 요새 공격을 시작했으나, 부사령관의 사망 등으로 공격이 지연되는 사이 캐나다 증원군이 도착하여 몽칼름의 병력은 3,6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6]
요새 자체의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했고 적군의 수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영국군 사령관 애버크롬비의 결정적인 실수들 덕분에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애버크롬비는 프랑스군의 약한 목재 방어 시설을 파괴할 중포를 가져오지 않았으며, 영국군이 쉽게 요새를 우회할 수 있는 약점을 공략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실책 덕분에 프랑스군은 안정적으로 머스킷 사격을 유지하며 영국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6]
카리용 전투는 프랑스에게는 큰 성공이었고 영국에게는 심각한 차질을 안겨주었으며, 이 승리로 몽칼름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그는 프랑스로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며 종종 과장된 주장을 펼쳤고, 함께 싸운 캐나다 민병대와 원주민 전사들의 기여는 폄하했다. 또한 몽칼름은 보드뢰유가 병력 규모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을 학살에 가까운 전투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이에 보드뢰유는 즉각 반박하며 몽칼름을 프랑스로 소환하고 슈발리에 드 레비를 후임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6] 이 전투 후 영국군 사령관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카리용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몽칼름의 뉴프랑스에서의 입지는 총독 보드뢰유와의 계속되는 불화와 프랑스 본국으로부터의 인력 및 보급 지원 부족으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전술적 견해 차이와 갈등은 이후 몽칼름의 몰락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3. 4. 퀘벡 전투 (1759년)
1758년 후반기에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막대한 자원을 조직했고, 반면 프랑스 식민지는 흉작으로 기아 직전에 놓였으며 프랑스 본국의 증원 및 물자 지원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북미에서 영국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11] 이에 루이 15세는 식민지에 세인트로렌스 강 계곡으로 방어선을 좁히고, 오하이오 강 지역의 모든 요새와 온타리오 호, 샴플레인 호 주변의 요새들을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의 전쟁 장관은 포트 카리용에서처럼 몽칼름이 역경 속에서도 적의 계획을 좌절시킬 방법을 찾을 것이라 믿으며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12]그러나 이러한 소식과 임박한 영국의 공격 위협은 몽칼름의 사기를 꺾었고, 그는 포위 공격 시 도시를 지킬 희망을 거의 잃었다.[13]
1759년 5월, 제임스 울프 장군과 찰스 손더스 부제독이 이끄는 영국군이 퀘벡에 도착했다.[31] 영국군은 오스위고와 나이아가라 요새를 탈환하며 압박을 가했다.[32] 6월 말, 울프의 군대는 퀘벡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7월 12일부터 두 달 동안 도시를 포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14] 몽칼름은 여러 차례 영국군의 상륙 시도를 격퇴했는데, 대표적으로 7월 31일 보포 전투가 있었다.[14] 8월 한 달 동안 영국군은 퀘벡 주변 시골 지역을 황폐화시켰다.[14]

9월 13일, 영국군은 랑스 오 풀롱에서 다시 한번 상륙을 시도하여 프랑스군을 기습했다. 프랑스 측의 과실로 인해 울프 군대는 강둑을 따라 올라와 퀘벡에서 2km 떨어진 아브라함 평원에 4,500명의 병력을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14][15][31] 몽칼름은 처음에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31]
몽칼름은 전투를 피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안을 따라 주둔한 병력이 도착하여 병력을 보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그의 가장 큰 실수로 여겨진다.[16][31] 그는 영국군이 진지를 구축하도록 내버려두면 그들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어 공격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17] 이 경솔한 결정은 식민지 장교들에게 강하게 비난받았고, 퀘벡 함락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31] 뒤이어 벌어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완패했고, 몽칼름은 전투 중 치명상을 입었다.[31]


치명상을 입은 몽칼름은 의사에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의사가 다음 날 아침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하자, 그는 "그것 참 다행이군, 퀘벡이 항복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33] 그는 다음 날 아침 사망했다.[31] 몽칼름은 부댕에게 백지 위임을 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군 엘리트들은 육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퀘벡 함락의 책임을 부댕에게 떠넘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아브라함 평원의 명판에 적힌 몽칼름에 대한 평가("용감하고, 선량하며 위대한")를 두고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캐나다 군사사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29][30]
4. 죽음과 유산
1759년 9월, 제임스 울프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아브라함 평원에 포진하자, 몽칼름은 이를 믿지 못하다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투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완패했고, 몽칼름은 도시로 돌아오는 길에 머스킷 총에 등을 맞는 치명상을 입었다.[31] 세 명의 병사의 도움으로 도시로 돌아온 그는 외과 의사로부터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오후에 몽칼름은 마지막 힘을 다해 캐나다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마지막 공식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18] 그는 또한 전투에서 사망한 울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항복 의사를 밝히려 했다. 몽칼름은 1759년 9월 14일 오전 5시경 사망했다. 오전 8시, 그의 시신은 울술린회 성가대 아래 포탄 구덩이에 묻혔다.[18] 치명상을 입은 후 의사에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물었고, 다음 날 아침까지 살 수 없다는 답을 듣자 "그것 참 다행이군, 퀘벡이 항복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33]
2001년 10월 11일, 몽칼름의 유해는 울술린회 수녀원에서 Hôpital-Général de Québec 묘지에 새로 마련된 묘소로 이장되었다.
몽칼름의 이름은 그의 사후에도 여러 방식으로 기려졌다. 프랑스 해군은 그의 영예를 기려 4척의 군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철갑함 ''알마(Alma)''급 (1865–1891)
- 장갑 순양함 몽칼름(Montcalm) (1898–1926)
- ''라 갈리소니에르''급 순양함 몽칼름(Montcalm) (1933–1969, 자유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
- F70형 프리깃 몽칼름(Montcalm) (1975–2017)
또한 캐나다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사관후보생 몽칼름 분대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장소와 랜드마크는 다음과 같다.
- 몽칼름 궁, 퀘벡 시, 퀘벡
- 몽칼름 거리, 몬트리올, 퀘벡
- 몽칼름 애비뉴, 플래츠버그, 뉴욕
- 몽칼름, 뉴햄프셔
- 몽칼름 중등학교, 런던, 온타리오
- 몽칼름 거리, 파리 (파리 18구), 캉, 클레르몽페랑, 라 로셸, 프랑스
- 몽칼름 거리(Rue Montcalm), 헐, 퀘벡
- 몽칼름 크레센트, 캘거리, 앨버타
- 몽칼름 가, 디트로이트, 미시간
- 몽칼름 애비뉴, 세인트캐서린스, 온타리오
- 몽칼름 가, 밴쿠버, 브리티시컬럼비아
- 몽칼름 가, 오타와, 온타리오
- 몽칼름 가, 티콘데로가, 뉴욕 (1933년 명명)
- 몽칼름 애비뉴, 버펄로, 뉴욕
- 몽칼름 공원, 옛 포트 조지 부지, 오스웨고, 뉴욕
- 몽칼름 애비뉴(원래 "Avenue du Montcalm"), 역사적으로 프랑스 도시였던 플래츠버그, 뉴욕, 캐나다-미국 국경에서 남쪽으로 약 28.97km
- 몽칼름 고등학교, 몽칼름, 웨스트버지니아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과 관련 없음)
- 몽칼름 애비뉴, 브라이튼, 매사추세츠
- 몽칼름 호수, 몽칼름 군, 미시간
- 몽칼름 군, 서부 미시간 (울프 장군은 미시간에 지명이 없지만, 몽칼름은 군과 호수 이름을 가지고 있음)
- 몽칼름 클로스, 오레와, 오클랜드, 뉴질랜드
- 몽칼름 애비뉴, 베코모, 퀘벡
- 몽칼름 로드, 워필드, 브리티시컬럼비아
- 몽칼름 가, 레이크 조지 (마을), 뉴욕
- 몽칼름 로드, 찰턴, 런던, 영국
- 몽칼름 거리, 몽펠리에, 프랑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아브라함 평원의 명판에 적힌 몽칼름에 대한 평가인 "용감하고, 선량하며 위대한"(gallant, good and great영어)을 두고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29][30] 그는 캐나다 군사사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의 경솔한 판단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자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는 퀘벡 함락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31] 몽칼름 사후, 프랑스 군 엘리트들은 육군의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 함락의 책임을 당시 누벨프랑스 총독이었던 보드뢰유(Vaudreuil)에게 떠넘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5. 몽칼름에 대한 평가
역사가 기 프레고는 몽칼름과 보드뢰유 사이의 갈등이 단순한 개인적 다툼을 넘어, 당시 사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무장하고 지켜내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제였다고 지적했다.[21] 이 갈등의 근본 원인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사회와 군사 문화를 대표했기 때문이다. 몽칼름은 프랑스 본토 장교의 문화를 대변하며 7년 전쟁을 뉴 프랑스의 상황과 관계없이 프랑스 왕국의 명예를 지키는 전쟁으로 보았다.[20] 반면, 보드뢰유는 캐나다 식민지 장교의 문화를 대표하며 전쟁을 뉴 프랑스의 영토 보전과 생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이해했다.[22]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이어졌다. 몽칼름은 기존의 "식민지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이제 전쟁은 "계획된 작전, 군대, 포병, 포위, 전투를 갖춘 유럽식 기반"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그는 이러한 유럽식 전쟁 방식이 보쇠주르 요새 함락 이후 프랑스의 군사적 명예를 지키고 높이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24] 반대로 보드뢰유는 요새를 확장하고, 영국군의 침략을 꾸준히 막아내며, 국경을 지키고, 기습 공격을 활용하며, 특히 원주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의존하는 기존의 "식민지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고 믿었다.[25][26] 몽칼름은 특히 원주민을 활용하는 방식을 프랑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일부 프랑스 본토 장교들은 원주민의 전투 방식, 특히 머리 가죽 벗기기 관습을 잔혹하다고 여겼다.[24] 몽칼름은 카리용 전투에서 승리한 후 원주민 대표단에게 "당신들이 필요 없는 때에 왔다. 죽은 시체만 보러 온 건가? 요새 뒤로 가면 시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영국군을 격파하는 데 당신들이 필요 없다"고 말하며 원주민의 기여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7]
1758년, 몽칼름이 중장으로 진급하여 보드뢰유보다 계급이 높아지고 군사 전략 결정권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해소되었다.[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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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French and Ind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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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calm Louis-Joseph de Canada: A People's History
http://www.cbc.ca/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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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ブラーム平原の戦い
https://archive.i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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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ontcalm, Loui-Joseph de, Marquis de Montcalm - The Canadian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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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カナダ史 世界各国史第23巻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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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the Plains of Abraham - Quebec
http://www.provinc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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