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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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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트비히 베크는 1880년에 태어나 1944년에 사망한 독일 육군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재군비를 추진했으나, 히틀러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했다. 이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여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자살했다. 그는 군사적 전문성과 함께 히틀러에 저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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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베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6년 베크 상급대장
1936년 상급대장 시절의 베크
본명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테오도어 베크
출생1880년 6월 29일
출생지독일 제국 헤센나사우 주 프로이센 왕국 비스바덴-비브리히
사망1944년 7월 20일
사망지나치 독일 프로이센 자유주 베를린
배우자1916년 결혼, 1917년 사별한 아멜리에 파겐슈테허
자녀게르트루트 베크
부모루트비히 게오르크 에른스트 빌헬름 베크 (산업가), 베르타 드라우트
지지독일 제국 (1918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1933년까지)
나치 독일
군 경력
소속독일 육군 (국방군)
복무 기간1898년 – 1938년
최종 계급상급대장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보직
병무청장임기 시작: 1933년 10월 1일
임기 종료: 1935년 7월 1일
전임: 빌헬름 아담 (1877년)
후임: 자신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육군 참모총장임기 시작: 1935년 7월 1일
임기 종료: 1938년 8월 31일
전임: (신설)
후임: 프란츠 할더
상관: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 총사령관)
서훈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Lütvich Bek

2. 초기 생애와 경력

루트비히 베크는 1880년 6월 29일 독일 헤센 주의 비스바덴-비브리히(현재 비스바덴 시의 구역)에서 실업가 아버지와 베르타 사이에서 태어났다.[1] 베크 가문은 유서 깊은 군인 집안이었다. 1898년 아비투어 합격 후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모 장교로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종전 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 여러 참모 및 지휘관직을 맡았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육군부(Truppenamt)에서 육군 작가 그룹을 이끌며 독일 육군(국방군) 작전 교범인 ''Truppenführung''을 출판했다.[2] 이 책의 제1편은 1933년, 제2편은 1934년에 나왔으며, 수정된 버전은 현재도 독일 연방군에서 사용되고 있다.[3] 1932년에는 중장(Generalleutnant)으로 진급했다.

1934년, 베크는 빌헬름 아담 장군의 뒤를 이어 위장된 총참모부인 Truppenamt의 장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총참모부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2]

1930년 9월과 10월, 베크는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3명의 하급 장교(리히트 셰린거 소위, 한스 프리드리히 벤트, 한스 루딘) 재판에서 주요 변호 증인으로 나섰다. 이들은 라이히스베어(Reichswehr) 구성원이 정당 가입을 금지당했음에도 나치당원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세 장교는 나치 당원임을 인정하고, 나치당 가입이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베크는 이들이 나치 문헌을 배포하다 체포되자, 나치당이 선한 세력이므로 라이히스베어 직원이 당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판에서 베크는 피고인들의 선량한 성품을 증언하고, 나치당을 긍정적인 세력으로 묘사하며, 라이히스베어의 나치당 가입 금지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셰린거 소위가 나치당과 라이히스베어가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기 위한 "해방 전쟁"에서 함께 싸울 것이라고 말했을 때, 베크는 "라이히스베어는 매일 자신이 지도자들의 군대라고 말합니다. 젊은 장교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고 증언하며 그를 지지했다.

역사가 존 휠러-베넷 경은 베크가 한스 폰 제크트의 "지도자 군대"(Führerarmee) 원칙을 정치에 적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3. 나치 독일 초기 경력

루트비히 베크는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을 즉각 수용하며 "수년간 정치 혁명을 바랐지만,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21] 1934년 8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 권한을 흡수하여 총통이 되자, 베크는 히틀러의 최고 사령관 취임이 국군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1935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 파기를 선언한 후, 베크는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는 신생 독일 육군 건설에 매진하며 장갑부대 개발을 장려했지만,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은 전차전 지지자들이 바라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베크는 독일의 군사력을 1919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1933년 후반부터 히틀러가 고려한 것보다 더 많은 군사비 지출을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충분히 재무장되면 중앙 유럽과 동유럽 전체를 독일의 세력권으로 만들기 위한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모총장으로서 베크는 베를린 리히터펠데 교외의 검소한 집에 살면서 매일 9시부터 19시까지 근무했다. 그는 지성과 직업 윤리로 널리 존경받았지만, 종종 다른 장교들로부터 관리상의 세부 사항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크는 국방장관이 단순한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고, 참모총장은 제국 지도부에 직접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이에 반발했다.

1936년, 베크는 라인란트 진주에서 프랑스의 반응을 우려한 블롬베르크와 대립하여 히틀러를 강력히 지지하고, 동 지역의 재무장을 추진했다. 1937년 후반부터 1938년 초까지 베크는 독일군 계층 내에서 참모본부의 지위와 중요성에 대해 다른 장교들과 갈등을 심화시켰고, 모든 중요 사항 결정을 참모본부로 이전하기를 원했다.

1937년 5월, 베크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공 계획 실행 명령(폴 오토)을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8년 2월부터 3월의 안슐루스 동안 베크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략으로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폴 오토 명령을 신속하게 작성했다. 베크의 전쟁 개념에서는 전쟁이 제한적이며, 독일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충분한 힘을 가진 동맹국이 있다면 독일을 강국으로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베크는 군사 테크노크라트로서 당시 독일의 군사력으로는 영국프랑스 등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예상하고 히틀러의 외교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독일을 전쟁 전 강국으로 되돌리기 위해 히틀러가 주장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격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1940년 이전에는 무리라고 보았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주데텐 위기)가 격화되었을 때, 베크를 포함한 일부 육군 장교들은 히틀러가 체코 침공을 명령할 경우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를 체포하는 쿠데타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외교적 양보를 했기 때문에 체코 침공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베크는 히틀러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등을 해임한 것에 불만을 품고, 1938년 8월에 참모총장직 사표를 제출했고, 제1군 사령관을 명령받은 직후인 같은 해 10월에 예편하여 이후 군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4. 히틀러와의 갈등

1933년, 루트비히 베크(Ludwig Beck)는 나치당의 권력 장악(권력 장악)을 목격하고 "나는 수년간 정치 혁명을 바랐지만,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라며 즉각 수용했다.

1934년 8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의 사망으로 히틀러는 대통령 권한을 흡수하여 총통이 되었고, 국군 최고 사령관의 지위를 계승했다. 베크는 히틀러의 최고 사령관 취임이 국군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1935년 총통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 파기를 선언한 후, 베크는 전통 있는 참모총장이 되었다. 이후 참모총장으로서 신생 독일 육군 건설에 매진했다. 베크는 장갑부대 개발을 장려했지만, 하인츠 구데리안전차전 지지자들이 바라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베크는 독일의 군사력을 1919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33년 후반부터 그는 히틀러가 생각한 것 이상의 군사비 수준을 제안했다. 독일의 재군비가 충분히 완료되면, 베크는 독일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일을 유럽의 최 중요국으로 만들고 중앙 유럽 및 동유럽 전체를 독일의 영향권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모총장으로서 베크는 베를린 교외 리히터펠데의 검소한 집에 살면서 매일 9시부터 19시까지 근무했다. 그는 지성과 직업 윤리로 널리 존경받았지만, 종종 다른 장교들로부터 관리상의 세부 사항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크는 국방장관이 단순한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참모총장은 제국 지도부에 직접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베크에게 반발했다.

1936년, 베크는 라인란트 진주에서 프랑스의 반응을 우려한 블롬베르크와 대립하여 히틀러를 강력히 지지하고, 동 지역의 재무장을 추진했다. 1937년 후반부터 1938년 초까지 베크는 독일군 계층 내에서 참모본부의 지위와 중요성에 대해 다른 장교들과 갈등을 심화시켰고, 모든 중요 사항 결정을 참모본부로 이전하기를 원했다.

1937년 5월, 베크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공 계획 실행 명령(폴 오토)을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8년 2월부터 3월의 안슐루스 동안 베크는 독일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침략으로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폴 오토 명령을 신속하게 작성했다. 베크의 전쟁 개념에서는 전쟁이 제한적이며, 독일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충분한 힘을 가진 동맹국이 있다면 독일을 강국으로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군사 전문가로서 베크는 당시 독일의 군사력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등을 상대로 싸울 경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히틀러의 위압적인 외교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독일을 전쟁 전 강국으로 되돌리기 위해 히틀러가 주장하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공격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1940년 이전에는 무리라고 보았다.

1938년, 히틀러의 계획대로 체코 내에서 소수 민족으로 생활하는 독일계 주민의 민족 자결과 관련된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주데텐 문제)가 격화되었을 때, 베크를 포함한 일부 육군 장교들은 히틀러가 체코 침공을 명령할 경우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를 체포하는 쿠데타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에서 외교적 양보를 했기 때문에 체코 침공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베크는 히틀러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등을 해임한 것에 불만을 품고, 1938년 8월에 참모총장직 사표를 제출했고, 제1군 사령관을 명령받은 직후인 같은 해 10월에 예편하여 이후 군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5. 저항 운동

베크는 군부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아돌프 히틀러의 노력에 반대했다. 특히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전쟁 구실로 삼는 것을 막으려 했다.[4] 1935년 독일 외무부 국무장관 베르나르트 폰 뷜로, 헝가리 육군참모총장과 회의를 거듭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베크는 독일의 재군비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베크는 독일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시기를 1940년으로 보았고, 1938년의 전쟁은 독일이 패배할 "시기상조의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1938년 5월부터 베크는 ''그린 계획''에 반대하는 각서를 히틀러, 빌헬름 카이텔,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제출했다.[21] 그는 중일 전쟁으로 일본의 지원이 어렵고, 프랑스군이 유럽 최강의 전력이며, 영국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베크는 히틀러에게 "시기상조의 전쟁"을 피할 것을 촉구했지만, 히틀러는 베크의 주장을 "유치한 계산"이라고 비판했다. 베크는 1938년 8월 18일 총참모장 직에서 사임했고, 프란츠 할더 장군이 후임이 되었다.[21] 히틀러의 요청으로 베크의 사임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이후 베크는 아브베어 책임자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외무부 국무장관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 남작과 함께 독일 정부의 "반전" 그룹을 이끌었다. 이들은 독일이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1938년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이 독일에 넘어가면서 베크의 쿠데타 시도는 좌절되었다.[4]

1939년 가을, 베크는 할더 장군, 할마르 샤흐트, 카를 괴르델러,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한스 오스터 대령 등과 나치 정권 전복 쿠데타를 논의했다. 쿠데타 성공 시 베크, 괴르델러, 샤흐트의 3인 집정부가 독일을 통치하고, 연합국과 평화 협상을 통해 독일의 정복 지역 일부를 유지하려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레지스탕스는 비오 12세에게 히틀러 축출 쿠데타 지원을 요청했다. 요제프 뮐러가 로마로의 비밀 임무를 수행했고,[5] 바티칸은 중재 수단을 제공하기로 했다.[6][7] 1940년 1월부터 2월까지 베크는 괴르델러, 울리히 폰 하셀, 요하네스 포피츠와 회담을 갖고, 나치 정권 전복 후 베크가 섭정 위원회를 이끌기로 합의했다.[8]

1943년, 베크는 폭탄을 이용한 히틀러 암살을 두 차례 계획했다. 1944년 5월, 에르빈 롬멜 원수의 각서에서 베크가 새 정부의 수반이 되는 조건으로 쿠데타 참여 의사를 밝혔다. 1944년, 베크는 카를 괴르델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함께 7월 20일 음모의 주요 인물이었다. 베크는 히틀러 제거 후 독일 임시 정부의 국가 원수(Reichsverweser)(섭정) 겸 수반이 될 예정이었다.[9]

그러나 음모는 실패했고, 베크는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에게 구금되었다. 베크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프롬의 부하가 베크에게 사살(coup de grâce)을 가했다.[9] 베크는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베크는 칼 괴델러와 함께 반히틀러 저항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베크의 비판 대상은 히틀러의 군사·외교 지도였지만, 독재 체제 자체는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히틀러 암살 계획과 신정부 수립이 여러 차례 기획되었고, 성공 시 베크는 "대통령"으로 국가 원수에 취임하고, 괴델러와 함께 연합국과 휴전 협상을 할 예정이었다.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암살·쿠데타 작전이 실패했다. 베크는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자살 기회를 얻었지만 실패했고, 프롬의 명령을 받은 부하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6. 개인사

베크는 1916년 5월 12일 브레멘에서 아말리 크리스티네 아우구스테 루이제 파겐슈테허와 결혼했다.[10] 아말리는 1893년 5월 6일 브레멘에서 태어났다.[10] 아말리는 젊은 시절 오버스트도르프의 슈틸라하우스 요양원에서 결핵 치료를 받았다. 요양원 원장인 루프하르트 자토프 박사는 아이를 낳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결혼 후 그의 의견을 바꾸도록 설득받았다. 1917년 1월 1일, 아말리는 프로이센 하센나사우 비스바덴에서 게르트루트 베크를 출산했다.[11] 그러나 9개월 후인 1917년 11월 16일, 아말리는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베크는 아내가 사망했을 당시 서부 전선에서 복무 중이었고, 다섯 살 난 딸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자토프 박사가 게르트루트를 맡아, 다섯 명의 자녀와 여러 명의 입양아를 둔 그의 가족과 함께 살게 했다. 게르트루트는 14살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게르트루트는 노동 징용을 피하기 위해 동프로이센의 한 가족 친구의 임업지대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915년 10월 18일 태어난 군터 노이바우어를 만났다.[12] 이미 약혼했고 그의 부모가 23세인 그녀가 너무 어리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40년 3월 2일 베를린에서 결혼했다. 1941년 1월, 그들의 딸이 태어났다. 하지만 노이바우어는 1942년 2월 10일 레닌그라드 근처에서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 사망했다.

1944년, 연합군의 폭격 위험이 높다고 판단한 베크는 게르트루트와 그녀의 딸을 바이에른 알프스의 외딴 위치에 있는 오버스트도르프의 노이바우어 처가 식구들과 함께 머물도록 했다. 그들은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했을 당시에도 그곳에 있었다. 사건 8일 후, 게슈타포 대원 두 명이 그녀를 방문하여 함께 가 줄 것을 요청했다. 시누이인 안네마리가 늦은 시간이니 근처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룻밤 묵자고 제안했고, 게슈타포는 이를 수락했다. 그들이 떠난 후, 두 여성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증거가 될 만한 편지와 서류를 태웠다. 다음 날 아침 게슈타포는 그녀를 뮌헨으로 데려갔고, 세 살 된 그녀의 딸은 마을에 남았다. 결국 게슈타포는 그녀를 석방했고, 오버스트도르프로 돌아가 남은 생애를 보냈으며, 2008년에 사망했다.

7. 평가

하인츠 구데리안의 전차부대 집중 운용에 회의적이었던 참모총장 시절의 베크는 구식 장군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 1936년 초, 베크는 전차부대의 대전차 공격력 강조와 전차부대 집중 투입, 공격적인 운용이 가능한 완전 자동차화 사단 설립을 지지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악평은 구데리안과 보수적인 참모본부 장교들 사이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결과라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크는 어디까지나 군인이었고,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코 민주주의적이거나 평화주의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체제 하에서 히틀러에 저항한 인물로서 오늘날 독일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8. 미디어에서의 묘사

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를 다룬 모든 영화, 문학 작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베크는 등장한다. 1955년 영화 《히틀러 암살 음모》에서는 베르너 힌츠(Werner Hinz)가,[13] 1955년 영화 《장화 반란(Jackboot Mutiny)》에서는 카를 루트비히 디엘(Karl Ludwig Diehl)이,[14] 1990년 영화 《히틀러 암살 음모》에서는 이언 리처드슨(Ian Richardson)이,[15] 2004년 영화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에서는 레모 지로네(Remo Girone)가,[16] 2008년 영화 《발키리》에서는 테렌스 스탬프(Terence Stamp)가 각각 베크를 연기했다.[17]

참조

[1] 웹사이트 Ludwig August Beck https://www.ancestry[...] 2023-07-06
[2] NDB
[3] 웹사이트 On the German Art of War Truppenfuhrung https://www.rienner.[...] 2019-06-10
[4] 백과사전 Munich Agreement https://www.britanni[...] 2018-08-06
[5] 서적 The History of the German Resistance 1933–1945 McDonald & Jane's
[6] 서적 The History of the German Resistance 1933–1945 McDonald & Jane's
[7]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Secker & Warburg
[8] 서적 The History of the German Resistance 1933–1945 McDonald & Jane's
[9] 학술지 Colonel General Ludwig Beck: Conspirator National Military Intelligence Foundation
[10] 웹사이트 Amalie Christine Auguste Luise Pagenstecher https://www.ancestry[...] 2023-07-06
[11] 웹사이트 Gertrud K Beck (Neubaur - Neubauer) https://www.ancestry[...] 2023-07-06
[12] 웹사이트 G Neubaur in the Germany, Military Killed in Action, 1939-1948 https://www.ancestry[...] 2023-07-06
[13] 웹사이트 IMDB entry https://www.imdb.com[...]
[14] 웹사이트 IMDB entry https://www.imdb.com[...]
[15] 웹사이트 IMDB entry https://www.imdb.com[...]
[16] 웹사이트 Stauffenberg – full cast and crew https://www.imdb.com[...]
[17] 웹사이트 Valkyrie – Full Cast and Crew https://www.imdb.com[...]
[18] NDB
[19] 웹사이트 On the German Art of War Truppenfuhrung https://www.rienner.[...] 2019-06-10
[20]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독国外務大臣男爵「フォン、ノイラート」外三十三名叙勲ノ件
[21] 문서 역자에 따라 병무국, 군사국 등으로 변역되는 당시 육군 총참모부의 위장 조직이다. 1935년에 정식 참모본부 조직으로 개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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