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에서 발생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카이사르 암살자들(리베라토레스)과 제2차 삼두정치(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세력 간의 권력 투쟁으로, 필리피 전투에서 삼두정치가 승리하며 공화정의 종말을 가져왔다. 이 전투는 로마의 정치적 지형을 완전히 바꾸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정을 수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42년 - 필리피 전투
    필리피 전투는 기원전 4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후 로마 공화정 주도권을 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삼두정치 군대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해방자 군대 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로, 삼두정치 군대의 승리로 로마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 로마 공화국의 내전 - 카이사르의 내전
    카이사르의 내전은 기원전 49년부터 45년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승리하며 종신 독재관이 되었으나 암살당하며 로마 공화정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 로마 공화국의 내전 - 안토니우스의 내전
    안토니우스의 내전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탁을 명분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고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국 - 갈리아 전쟁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야망, 갈리아의 불안정, 게르만족 침입이 맞물려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 벌어진 로마의 갈리아 정복 전쟁으로, 카이사르의 권력 강화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전환점이 되었으나 기록의 신뢰성 및 잔혹성 비판도 존재한다.
  •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국 - 제2차 삼두정치
    제2차 삼두정치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카이사르 암살자 복수와 공화정 재건을 명분으로 결성한 5년 권한의 정치 동맹이었으나, 숙청, 자금난, 내분, 전쟁 등을 거치며 옥타비아누스의 단독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다.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리베라토레스의 내전
다른 명칭해방자들의 내전
일부로마 공화정의 내전
관련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시기기원전 43년 – 기원전 42년
장소마케도니아
결과삼두정의 승리
결과 상세리베라토레스의 파괴
제2차 삼두정치 하의 로마 공화정 재통일
남은 폼페이우스 저항 세력은 시칠리아와 파르티아로 도주
교전 세력
교전국 1삼두정
지원 세력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교전국 2리베라토레스
지원 세력파르티아 제국
폼페이우스파
지휘관 및 지도자
삼두정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베라토레스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병력 규모
삼두정53,000–108,000명
삼두정 상세40,000–95,000명 보병
13,000명 기병
리베라토레스60,000–105,000명
리베라토레스 상세40,000–85,000명 보병
20,000명 기병
관련 군단
삼두정레기오 X
레기오 III
레기오 IV
레기오 VI
레기오 VII
레기오 VIII
레기오 XII
레기오 XXVI
레기오 XXVIII
레기오 XXIX
레기오 XXX
기타
리베라토레스레기오 XXVII
레기오 XXXVI
레기오 XXXVII
레기오 XXXI
레기오 XXXIII
기타
사상자
총 사망자40,000명

2. 배경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브루투스카시우스 등 공화파 세력(일명 리베라토레스)은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 마케도니아, 시리아 등 동부 속주와 동맹 동부 왕국을 장악했다.[1] 이들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한편,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카이사르의 복수와 로마 세계 장악을 위해 공화파 군대 격파를 목표로 했다.[1]

2. 1. 카이사르 암살과 제2차 삼두정치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브루투스카시우스 등 공화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후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삼두정치는 서부 로마 군대를 장악하고 원로원의 반대를 제압했으며, 카이사르의 복수와 로마 세계 장악을 위해 공화파 군대 격파를 목표로 했다.[1]

삼두정치는 레피두스를 이탈리아에 남겨두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주력 부대(28개 군단)와 함께 북부 그리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42년,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와 데키디우스 삭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상대로 8개 군단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파견되었다. 필리피 인근에서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브루투스카시우스의 연합된 진격 부대와 만났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공화파의 진격을 막는 필리피 근처의 위치를 점령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속임수로 노르바누스가 이 위치를 떠나게 했지만, 노르바누스는 제때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았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측면을 우회하는 데 성공했을 때,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암피폴리스로 후퇴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삼두정치 군대의 주력이 도착했을 때(건강 문제로 디라키움에서 지연된 옥타비아누스는 제외), 그들은 암피폴리스가 잘 방어되고 있고 노르바누스가 그 마을을 지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1]

2. 2. 공화파의 세력 확장

카이사르 암살 이후, 리베라토레스라고도 알려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동부 속주와 동맹 동부 왕국을 장악했다.[1] 이들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3. 양측 군대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에서 양측 군대는 크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 군대, 그리고 브루투스카시우스가 이끄는 공화파 군대로 나뉘었다.

삼두정치 군대는 19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제4군단을 비롯하여 제6 군단, 제7 군단, 제8 군단, 제10 '에퀘스트리스' 군단, 제12 군단, 제3 군단 등과 제26, 제28, 제29, 제30 군단이 참전했다. 이들은 카이사르파 출신 정예병을 주축으로 수적 우세를 보였으며, 옥타비아누스는 13,000명, 안토니우스는 20,000명의 동맹 기병대를 보유했다.[1]

공화파 군대 역시 19개 군단(브루투스 휘하 8개, 카시우스 휘하 9개, 함대에 2개)과 동맹군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동방 동맹 왕국에서 징집된 병력과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옛 군단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제27, 제36, 제37, 제31, 제33 군단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제36군단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 군대에 합류한 폼페이우스의 옛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1] 카시우스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그가 카이사르의 병사였다는 사실에 아무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때 그의 병사가 아니라 우리 조국의 병사였습니다"라는 연설을 하고, 각 군단병에게 1500JPY, 각 백인대장에게 7500JPY를 선물했다.[1]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이 군대는 총 8만 명의 보병과 17,000명의 동맹 기병대를 소집했으며, 동맹 기병대에는 동방식으로 기마한 궁수 5,000명이 포함되었다.[1]

3. 1. 삼두정치 군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19개 군단을 이끌고 북부 그리스로 진격했다. 사료에서는 제4군단의 이름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제6 군단, 제7 군단, 제8 군단, 제10 '에퀘스트리스' 군단, 제12 군단, 제3 군단, 제26, 제28, 제29, 제30 군단도 참전했는데, 이 군단의 퇴역 군인들이 전투 이후 토지 정착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아피아누스는 이들 군단이 거의 정규 병력을 갖추었다고 기록했다.[1] 이들은 카이사르파 출신 정예병을 주축으로 구성되었으며, 수적으로 우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13,000명, 안토니우스는 20,000명의 동맹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

3. 2. 공화파 군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19개 군단(브루투스 휘하 8개, 카시우스 휘하 9개, 함대에 2개)과 동맹군 기병대를 보유했다. 이들은 동방 동맹 왕국에서 징집된 병력과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옛 군단병들로 구성되었다. 이 군대에는 동방에 주둔했던 카이사르의 옛 군단(아마 제27, 제36, 제37, 제31, 제33 군단)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해방자 군대의 상당수는 카이사르의 옛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었다.[1] 최소한 제36군단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 군대에 입대한 폼페이우스의 옛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었다.[1] 카이사르의 후계자에게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병사들의 충성심은 해방자들에게 민감한 문제였다.[1] 카시우스는 "그가 카이사르의 병사였다는 사실에 아무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때 그의 병사가 아니라 우리 조국의 병사였습니다"라는 강경한 연설을 하고, 각 군단병에게 1500JPY, 각 백인대장에게 7500JPY를 선물하여 병사들의 충성심을 강화하려 했다.[1] 아피아누스는 이 군대가 총 8만 명의 보병을 소집했다고 전한다.[1] 동맹 기병대는 총 17,000명이었으며, 여기에는 동방식으로 기마한 궁수 5,000명이 포함되었다.[1]

4. 필리피 전투

기원전 42년,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파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 10월 초에 벌어진 1차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를 격파하고 그의 진영을 점령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를 격파했다. 카시우스는 브루투스가 패배했다는 오보를 듣고 자살했다.[10] 이 전투는 카시우스의 자살을 제외하면 무승부였다.[11][12]

같은 날, 이오니아 해에서 공화파 함대가 삼두정치파의 증원군을 격파하면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10월 23일에 벌어진 2차 전투에서 브루투스 군대는 패배했고, 브루투스는 자결했다.[13][14] 이로써 로마 공화국은 삼두정치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4. 1. 1차 전투 (기원전 42년 10월 초)

필리피 전투는 고대 도시 필리피 서쪽 평원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 중 첫 번째 전투였다. 기원전 42년 10월 첫째 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치했고,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카시우스의 군대와 맞섰다.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밀어내고 그의 군단 야영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10] 그러나 남쪽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를 격파했고, 카시우스는 브루투스가 패배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듣고 자살했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의 남은 병력을 수습했고 양측은 전리품을 챙겨 각자의 야영지로 후퇴했는데, 카시우스의 자살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11][12]

필리피 1차 전투


같은 날, 이오니아 해를 순찰하던 공화파 함대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파의 증원군(2개 군단과 기타 병력, 물자)을 요격하여 파괴했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적 입지는 상당히 심각해졌다. 이미 고갈된 마케도니아테살리아 지역은 더 이상 그들의 군대에 오래 공급할 수 없었던 반면, 브루투스는 바다로부터 쉽게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두정치파는 더 많은 물자를 징발하기 위해 군단 하나를 아카이아 남쪽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병사 1인당 5,000 데나리우스, 백인대장 1인당 25,000 데나리우스를 추가로 지급하겠다는 약속으로 고조되었다.

4. 2. 2차 전투 (기원전 42년 10월 23일)

안토니우스는 3주 후 브루투스 군대 남쪽으로 병력을 천천히 진격시켜, 브루투스가 경계하지 않던 카시우스의 이전 야영지 근처 언덕을 요새화했다. 브루투스는 측면 공격을 피하고자 자신의 전선을 남쪽으로 연장하여 비아 에그나티아와 나란히 하고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브루투스의 방어 위치는 여전히 안전했고, 바다와 안전한 통신선을 유지하며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해상 우위를 이용하여 적을 지치게 만들면서 공개적인 교전을 피하는 원래 계획을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장교와 병사들 대부분은 지연 전술에 지쳐 공개 전투를 다시 시도하라고 요구했다. 브루투스와 그의 장교들은 병사들이 적에게 탈주할 위험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이오니아 해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의 패배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도 전한다. 동방 동맹군과 용병 일부가 탈주하기 시작하자, 브루투스는 10월 23일 오후에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필리피 전투 (제2차)


10월 23일에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브루투스 군대는 궤멸되었고, 브루투스는 자결하여 로마 공화국은 삼두 정치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는 훈련된 정예 군인들로 구성된 두 군대 간의 근접전으로 치러졌다. 화살이나 투창은 거의 무시되었고, 병사들은 빽빽한 대형을 이루어 칼로 서로 맞붙어 싸웠으며, 살육은 끔찍했다. 결국 브루투스의 공격은 격퇴되었고, 그의 군대는 혼란 속에 궤주하여 대열이 붕괴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궤주하는 군대가 방어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브루투스의 야영지 문을 점령하여, 브루투스 군대는 재편성될 수 없었고 삼두 정치의 승리는 완벽해졌다. 브루투스는 불과 4개 군단 병력으로 인근 언덕으로 퇴각했다. 항복과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다음 날 자결했다.[13][14]

5. 전투의 결과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브루투스의 시신을 존경의 표시로 자주색 옷으로 덮었다. 이는 두 사람이 친구였고,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안토니우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1]

전투에서 많은 로마 귀족들이 목숨을 잃거나 자결했다. 호르텐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카토 더 영거의 아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리비아의 아버지이자 훗날 옥타비아누스의 아내) 등이 그 예이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남편의 패배 소식을 듣고 뜨겁게 달궈진 석탄을 삼켜 자결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이야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포르키아가 브루투스보다 1년 이상 먼저 사망했다는 증거도 있다.[1] 살아남은 귀족들 중 일부는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하여 그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젊고 무자비한 옥타비아누스를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

해방자 군대의 잔여 병력은 징집되어 약 14,000명이 삼두정치 군대에 합류했다. 베테랑 퇴역 군인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필리피에 남아 로마 식민지가 된 필리피(''콜로니아 빅트릭스 필리펜시움'')에 정착했다.[1]

안토니우스는 동방에 남았고,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수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킬 땅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여전히 공화주의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필리피에서 공화주의 저항은 결정적으로 분쇄되었다.

한편, 동방에 남아있던 공화주의자들은 파르티아 제국으로 피신해 있던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파르티아는 해방자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폼페이우스도 지원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2차 삼두정치와 파르티아 사이의 적대 행위는 고조되었다.[1] 결국 파르티아는 기원전 40년에 침공을 시작했다.[1] 파르티아-공화주의 연합군은 초기에 시리아와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결국 제2차 삼두정치에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이 분쟁에서 사망했고, 소수의 공화주의 강경파만이 남아 저항을 계속했다.[15]

5. 1. 삼두정치의 승리와 공화정의 종말

플루타르코스안토니우스브루투스의 시신을 존경의 표시로 자주색 옷으로 덮었다고 전하는데, 그들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안토니우스의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고 요구했었다.[1]

호르텐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카토 더 영거의 아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리비아의 아버지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아내가 됨) 등 많은 로마 귀족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거나 그 후 자살했다. 포르키아(브루투스의 아내)는 남편의 패배 소식을 듣고 뜨겁게 달궈진 석탄을 삼켜 자살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일화는 신뢰하기 어렵고 포르키아가 브루투스보다 1년 이상 먼저 사망했다는 증거도 있다.[1]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등 탈출한 귀족들 중 일부는 안토니우스에게 항복을 협상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귀족들은 젊고 무자비한 옥타비아누스와 거래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

해방자들의 군대 잔여 병력은 징집되어 약 14,000명의 병사가 삼두정치 군대에 입대했다. 노련한 퇴역 군인들은 이탈리아로 돌려보내졌지만, 일부는 로마 식민지가 된 필리피 마을(''콜로니아 빅트릭스 필리펜시움'')에 남았다.[1]

안토니우스는 동방에 머물렀고,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수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킬 땅을 찾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시칠리아를 장악하고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여전히 공화주의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피에서 공화주의 저항은 결정적으로 분쇄되었다.[1]

동방에 남아 있던 공화주의자들은 파르티아 제국에 피신해 있던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중심으로 결집했는데, 파르티아는 해방자들뿐만 아니라 이전의 폼페이우스도 지원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삼두정치와 파르티아 사이의 적대 행위가 고조되었다.[1] 라비에누스와 동방의 계속되는 불안에 확신을 얻어 로마의 방어가 약하다고 판단한 파르티아는 기원전 40년에 침공을 시작했다. 파르티아-공화주의 연합군은 초기에 시리아와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결국 제2차 삼두정치에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이 분쟁에서 사망했고, 소수의 공화주의 강경파만 남아 캠페인을 계속했다.[15]

5. 2. 인명 피해와 정치적 영향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브루투스의 시신을 존경의 표시로 자주색 옷으로 덮었다. 이는 두 사람이 친구였기 때문이며,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안토니우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1]

전투에서 많은 로마 귀족들이 목숨을 잃거나 자결했다. 위대한 웅변가 호르텐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카토 더 영거의 아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리비아의 아버지이자 훗날 옥타비아누스의 아내) 등이 그 예이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남편의 패배 소식을 듣고 뜨겁게 달궈진 석탄을 삼켜 자결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이야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포르키아가 브루투스보다 1년 이상 먼저 사망했다는 증거도 있다. 살아남은 귀족들 중 일부는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하여 그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젊고 무자비한 옥타비아누스를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자 군대의 잔여 병력은 징집되어 약 14,000명이 삼두정치 군대에 합류했다. 베테랑 퇴역 군인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필리피에 남아 로마 식민지가 된 필리피(''콜로니아 빅트릭스 필리펜시움'')에 정착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에 남았고,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수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킬 땅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여전히 공화주의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필리피에서 공화주의 저항은 결정적으로 분쇄되었다.

한편, 동방에 남아있던 공화주의자들은 파르티아 제국으로 피신해 있던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파르티아는 해방자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폼페이우스도 지원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2차 삼두정치와 파르티아 사이의 적대 행위는 고조되었다.[1] 결국 파르티아는 기원전 40년에 침공을 시작했다.[1] 파르티아-공화주의 연합군은 초기에 시리아와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결국 제2차 삼두정치에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이 분쟁에서 사망했고, 소수의 공화주의 강경파만이 남아 저항을 계속했다.[15]

참조

[1] 서적 Augustus: Aufrührer, Herrscher, Heiland. Eine Biographie https://books.google[...] C.H. Beck 2010
[2] 웹사이트 The Battle of Philippi 42 BCE https://www.worldhis[...] 2023-06-08
[3] 서적 The Roman Republic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4] 서적 Augustus: The Life and Times of the Founder of the Roman Empire [B.C. 63–A.D. 14] https://books.google[...] T.F. Unwin 1903
[5] 서적 The Making of the Roman Army: From Republic to Empi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2
[6] 서적 Augustus: First Emperor of Rome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4
[7] 서적 A Companion to Latin Stud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1921
[8] 서적 The Civil Wars https://books.google[...] ReadHowYouWant.com 2006
[9] 서적 The Senate of the Roman Republic: Addresses on the History of Roman Constitutionalism https://books.google[...]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95
[10] 서적 Brutus: The Noble Conspirator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7
[11] 서적 The Roman History from the Foundation of Rome to the Battle of Actium ... https://books.google[...] J. and P. Knapton 1750
[12] 서적 The Fall of the Roman Republic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05
[13] 서적 A Primer History of Rome https://books.google[...] Bolchazy-Carducci Publishers 2000
[14] 서적 A History of Rom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Empire. With Chapters o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Art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1858
[15] 서적 Augustus: Aufrührer, Herrscher, Heiland. Eine Biographie https://books.google[...] C.H. Beck 20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