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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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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사르의 내전은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5년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이다. 기원전 53년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와 갈리아 전쟁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단 해산 후 로마 귀환을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시작했고,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스, 아프리카 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문다 전투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장악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되었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으나 기원전 44년 암살되었고, 그의 내전은 로마 공화정 붕괴의 원인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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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이름카이사르의 내전
일부로마 공화국의 내전
기간기원전 49년 1월 10일 – 기원전 45년 3월 17일 (4년 2개월 1주 2일)
장소히스파니아, 이탈리아, 그리스, 일리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결과카이사르파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카이사르파
마우레타니아
교전 세력 2폼페이우스파
누미디아
이집트
폰토스
지휘관
지휘관 1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가이우스 레빌루스
보쿠스 2세
보구드
클레오파트라 7세
지휘관 2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우티카의 카토
푸블리우스 바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마르쿠스 비불루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유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 (기원전 49년 초)10개 군단
병력 규모 2 (기원전 49년 초)15개 군단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Bellum civile alterum
기원전 49년의 공화정 로마
기원전 49년의 공화정 로마

2. 내전 전의 상황

기원전 53년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제1차 삼두정치가 붕괴되자, 폼페이우스는 점차 원로원파로 기울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폼페이우스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으나,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했다. 갈리아 전쟁으로 민중의 영웅이 된 카이사르를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통해 압박했고,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타협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며, 갈리아에서의 집정관직 참가 자격 부여 요청을 묵살했다.[1]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돕던 호민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했다. 기원전 49년 1월 1일,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을 "공화정의 적"으로 규정했다.

카이사르 내전 직전, 핵심 문제는 기원전 49년 이전 약 10년간 갈리아에 머물며 막대한 권력과 부를 축적한 카이사르가 어떻게 로마 정치 체계에 다시 들어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경계했다.[1]

기원전 50년 여름 이후, 상황은 더욱 강경해졌고,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치달았다.[4]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군대와 속주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두 번째 집정관직 출마를 거부했다.[4] 기원전 50년 12월 1일,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모두 군대와 지휘권을 포기하자는 제안이 찬성 370표 대 반대 22표로 가결되었으나, 폼페이우스와 집정관은 이를 거부했다.[5]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재임 중의 법적 문제와 기원전 50년대 후반 폼페이우스가 통과시킨 여러 법률 위반으로 기소될 것을 우려했다. 이로 인해 불명예스러운 망명을 당할 수도 있었다.[5] 그러나 이러한 기소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5] 카이사르는 두 번째 집정관직과 개선식을 얻지 못하면 정치적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을 알고 내전을 선택했다.[5]

2. 1.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제1차 삼두정치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2] 기원전 55년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공동 집정관직을 맡아 카이사르의 프로콘술 임기를 5년 연장했다.[2]

기원전 56년 로마 세계, 루카 회담에서 카이사르의 프로콘술직 5년 연장, 크라수스에게 시리아 속주, 폼페이우스에게 두 개의 히스파니아 속주와 아프리카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기원전 54년에 율리아가 사망하고,[2] 기원전 53년 카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되었다.[2]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원로원은 그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며 폼페이우스와 연대했다.[3]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는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3]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카이사르는 군대와 정치적 지위 없이는 몰락할 것을 우려했다.[4]

기원전 50년,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 해산과 로마 귀환을 명령하며, 집정관 재출마를 금지했다. 카이사르는 법적 불규칙성과 폼페이우스의 법률 위반으로 기소될 것을 우려했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5] 결국 카이사르는 두 번째 집정관직과 개선식을 얻지 못하면 정치적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을 알고 내전을 선택했다.[5]

2. 2. 원로원의 카이사르 압박

기원전 53년을 고비로 제1차 삼두정치가 깨지자 폼페이우스는 점점 원로원파에 기울었다. 갈리아 전쟁으로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 카이사르를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앞세워 압박해왔고,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타협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위해 일하던 호민관이었으나,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했다.[1]

카이사르의 지휘권과 군단을 박탈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은 이미 기원전 51년 봄에 시작되었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그 해에 알레시아 전투에서 베르징게토릭스를 상대로 승리하여 카이사르의 임무가 완료되었고, 따라서 그의 지휘권이 만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카이사르가 부재중에 두 번째 집정관직에 출마하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4]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 및 원로원파는 프로콘술(전 집정관)로서의 카이사르의 임기가 끝났다는 것을 이유로 로마로 돌아와 군대를 해산하도록 지시하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입후보하는 것을 금지했다.

3. 내전의 양상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토를 포함한 반(反)카이사르파는 기원전 49년 1월까지 몇 달 동안 서로 물러서거나, 적어도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었다.[6]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무너졌고, 반복되는 위기 상황은 타협의 가능성을 더욱 악화시켰다.[6]

기원전 49년 1월 1일, 카이사르는 다른 지휘관들도 동의한다면 기꺼이 사임하겠다고 밝혔지만, 동시에 자신과 폼페이우스 군대 사이의 불균형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자신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6] 카이사르의 대표들은 상원 지도자들에게 좀 더 온건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카이사르가 두 개의 군단과 임무(그리고 승전권)를 포기하지 않고 집정관에 출마할 권리를 유지하는 대신 트란살피나 갈리아를 포기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카토는 이러한 조건을 거부하고, 상원 앞에서 공개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한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6]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계속 군대를 모으는 가운데, 상원은 전쟁 직전인 기원전 49년 1월 7일 카이사르에게 직책을 포기하거나 국가의 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요구했다.[6] 며칠 후, 상원은 카이사르가 부재중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고 갈리아 총독직에 카이사르의 후임을 임명했다. 친(親)카이사르파 집정관들이 이러한 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상원은 이를 무시하고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집정관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최후의 상원 결정을 내렸다.[6] 이에 대한 반응으로, 여러 친카이사르파 집정관들은 자신의 곤경을 극적으로 보여주며 카이사르의 진영으로 도망쳤다.[6]

3. 1. 루비콘 도하와 이탈리아 진격 (기원전 49년)

기원전 49년 1월 12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제13군단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때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25] 이는 카이사르가 "의심할 여지 없이 반역자"가 된, 적대 행위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렸다.[6]

루비콘 강변에서 망설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제일 먼저 라벤나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주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티움을 공격하게 했다.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페사로, 파노,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1월 12일 쿠리오는 페사로, 1월 13일 파노,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켰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7]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후 군대에게 연설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르네상스 시대 비문. 리미니, 이탈리아.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에노발부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리고 200명에 달하는 상당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남하했으나, 국고에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 때문에 국고 재산은 고스란히 남았고, 1월 20일 쿠리오는 구비오에 입성해 플라마니아 가도의 요충지를 얻게 되었다.

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테렌티우스 바로와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오시모에서 군사를 이끌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했다. 카이사르는 오시모 근처 칭글리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오시모에 입성했다.

2월 5일 카이사르는 페르모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합류했으며 아스콜리피체노로 행군했다. 기원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오자 허둥지둥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콜리피체노도 쉽게 함락되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블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오에 주둔했고, 곧이어 에노발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체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오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에노발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오에도 입성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고,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3. 2. 히스파니아 원정 (기원전 49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4월 1일 로마에 입성하여 국고를 통해 전쟁 자금을 확보하고, 3월 25일 베네벤토, 3월 26일 카푸아 등 남부 이탈리아를 평정하였다. 4월 7일 로마를 떠난 카이사르는 자신의 배후를 다지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향했다.[8] 이 과정에서 약 1만 5천 개의 금괴, 3만 개의 은괴, 그리고 3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확보했다.[9] 당시 히스파니아에는 폼페이우스의 세 장수가 이끄는 7개 군단, 9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4월 19일,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저항에 부딪힌 카이사르는 5월 4일부터 12척의 선박을 건조하여 본격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폼페이우스는 에노발부스에게 12척의 선박을 주어 지원했으나,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데려갈 예정이던 트레보니우스의 3개 군단을 마실리아에 남겨두고 해상 공격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맡겼다.

카이사르는 6개 군단 2만 7000명과 보병,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나르본을 지나 피레네산맥을 넘어 6월 22일 바르셀로나 서쪽 130km 지점인 레리다에 도착했다. 히스파니아에서는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5개 군단 3만 명, 현지 병력 4만 8000명 등 총 7만 8000명의 보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레리다에서 양군은 대치했고, 세그레 강에 카이사르군이 참호를 건설했으나 갑작스러운 홍수로 떠내려갔다. 키케로를 비롯한 많은 의원들이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작은 배를 이은 다리를 완성해 전 군단을 건너게 했고, 6월 28일 벌어진 마실리아 해전에서 브루투스는 에노발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함대를 격파했다.

세그레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슈리스 강의 물길을 바꾸는 운하 공사를 시작했고,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탈영이 이어졌다. 8월 2일,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항복했다. 히스파니아 주둔 5개 군단이 해체되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그리스로 달아났다.

9월 17일 카이사르는 남쪽 끝 카디스에 도착하고, 9월 25일 타라고나에 입성했다. 히스파니아 남부에서 2개 군단을 이끌던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역시 전투 없이 투항한 뒤 폼페이우스에게로 가면서, 히스파니아의 모든 폼페이우스 군단은 해체되고 카이사르의 손에 들어갔다.

3. 3. 아프리카 원정 (기원전 49년)

쿠리오는 시칠리아를 평정한 후, 폼페이우스파 총독이 다스리는 아프리카 속주(현재의 튀니지)에 2개 군단과 기병 500기를 이끌고 8월 11일 상륙했다. 쿠리오는 우티카에서 아프리카 총독의 2개 군단을 격파했지만, 누미디아 왕 유바 1세가 이끄는 군대가 오면서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의 2개 군단이 도착하여 쿠리오의 군대는 4개 군단, 기병 800기가 되었고, 쿠리오는 5개 대대를 코르넬리우스 진지 수비에 맡기고 바그라다스 강으로 진군했다. 8월 20일 벌어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유바 1세는 코끼리 60마리, 기병 2000기,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쿠리오군을 포위하여 몰살시켰고, 쿠리오도 전사했다. 이로써 3.5개 군단 2만 명에 달하는 군대가 전멸했고, 코르넬리우스 진지의 5개 대대 3000명도 혼란 속에서 철수하다가 누미디아군에게 살해되거나 항복했다.

유바 1세는 개선 장군으로 우티카에 입성했고, 기원전 51년 집정관을 지낸 술키피우스 루푸스를 포함한 폼페이우스파 의원들도 함께 갔다. 이로써 쿠리오의 아프리카 원정은 10일 만에 처참하게 패배했다.

3. 4. 그리스 원정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온 뒤, 기원전 48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48년 1월 4일, 그는 1만 5000명의 보병과 500기의 기병을 이끌고 그리스로 떠나 1월 5일 그리스 해안에 상륙했다. 카이사르는 즉시 오리쿰을 공략하고, 이어서 아폴로니아1월 7일 함락시켰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선단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이끄는 선단에게 공격받아 침몰했다.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 남쪽에 진을 치고 폼페이우스 진영을 포위했다. 3월 26일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 군단이 닌페움에 상륙하여 4월 3일 카이사르와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부사령관 도미티우스에게 2개 군단과 기병 500기를 주어 마케도니아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는 1개 군단과 기병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는 5개 대대와 소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4월 15일부터 포위망 공사가 시작되었고, 6월 25일 3개월에 걸친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하여 테살리아로 퇴각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포로들을 모두 살해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함락시키고 7월 29일 파르살루스 평원에 도착했다. 폼페이우스도 추격을 시작해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양측이 다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승을 거두었다. 폼페이우스는 30명을 이끌고 라리사로 도망쳤고, 이 과정에서 에노발부스가 카이사르 기병에게 살해당했다.

파르살루스 전투를 기점으로 폼페이우스파는 양분되었다. 일부는 북아프리카로 가서 재기를 도모했고, 일부는 은퇴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고, 폼페이우스의 지지세력이었던 동방의 여러 지역이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섰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향했으나, 배에 탑승한 직후 살해되었다.[10]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머리와 인장 반지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 5. 알렉산드리아 전쟁과 동방 원정 (기원전 47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지 며칠 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이집트 왕실의 내전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편에 서서, 전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휘하 병사 일부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휘하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10] 이집트 군은 보병 2만 명, 기병 2천 기, 군선 72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반면, 카이사르는 보병 3,200명, 기병 800기, 군선 10척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치렀다.[11]

알렉산드리아 포위전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고, 환관 포티누스가 죽고 아킬라스도 아르시노에 공주에게 살해되었다. 카이사르는 파로스 등대를 탈취하고, 기원전 47년 2월 말경에는 도미티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합류하는 등 전세에서 우위를 점했다.[12]

이후 시가전에서 환관 가니메데스가 전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익사하면서, 기원전 47년 3월 27일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개선하며 전쟁을 종결지었다. 아르시노에 공주는 로마로 압송되었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의 왕위에 올랐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더 머물면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가졌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낳았다.[10]

기원전 47년 6월,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하여 젤라 전투에서 폰투스의 파르나케스 2세를 격파했다. 이 승리 후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la)라는 유명한 승전보를 보냈다.[12] 이후 카이사르는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돌아갔다.

3. 6. 제2차 아프리카 원정 (기원전 46년)

기원전 46년 4월,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의 탑수스(현재의 튀니지)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페트레이우스, 아프라니우스 등이 이끄는 폼페이우스파와 맞섰다. 폼페이우스파는 10개 군단 규모의 병력과 누미디아 연합군까지 동원했다.

4월 6일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누미디아 왕 유바와 폼페이우스파 연합군을 격파했다.[13] 이 전투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전사했고, 페트레이우스는 자살했다. 유바 왕도 자살하여 누미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아프라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의탁하려다 도적에게 살해당했고, 카토는 우티카에서 자살했다.[14]

3. 7. 제2차 히스파니아 원정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소탕하고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는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잔당과 히스파니아인들을 규합하여 13개 군단, 7만 명 규모의 봉기를 일으켰다.

기원전 45년 3월 17일, 카이사르는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파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라비에누스는 전사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간신히 도주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내전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1]

4. 내전의 결과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던 사람들에게 마리우스나 술라처럼 잔혹한 보복 대신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키케로,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을 살려주고 재산도 빼앗지 않았다.[22]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되어 국가 개조 사업을 추진했지만,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암살당했다.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시칠리아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보했으나, 기원전 35년 붙잡혀 처형되었다.

타프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은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폼페이우스 군 약 1만 명이 사망한 반면, 카이사르 측 사상자는 약 50명에 불과했다.[22]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 측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살하거나 처형되었다. 우티카를 점령했던 카토는 패배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22]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공동체에 벌금을 부과하고, 마우레타니아 왕 보구드(Bogud)의 아내 에우노에와 짧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22] 기원전 46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50일간의 감사제를 열고 '해방자(Liberator)' 칭호를 받았다.[22] 상원은 카이사르에게 많은 영예를 주었고, 그의 생일이 있는 달(퀸크틸리스, Quinctilis)은 그의 이름을 따 7월(July)로 바뀌었다.[22]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기원전 44년 공화국의 영토는 상당히 확장되었다. 아프리카 근처 노란색 부분은 카이사르에 의해 합병되었다. 키프로스(폼페이우스의 정복으로 합병됨) 또한 카이사르의 동방 정착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반환되었다.


카이사르는 나르보 마르티우스(Narbo Martius)를 거쳐 로마로 돌아오면서 참전 용사들을 위한 식민지를 건설하고, 지지자들에게 보상했으며, 여러 갈리아 도시에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2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화해하고,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직을 약속하기도 했다.[22]

카이사르는 다키아(Dacia)와 파르티아(Parthia) 원정을 계획했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3월의 이데스) 암살당했다.[23] 암살자 중에는 내전에서 공을 세운 카이사르의 장교들과 카이사르가 사면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내전을 로마 공화정 붕괴의 원인으로 보기도 하고,[24] 다른 학자들은 내전을 공화정 붕괴의 징후로 보기도 한다.

5. 연표

기원전 4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7년
기원전 46년
기원전 45년
기원전 44년


참조

[1]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2]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3] journal Pompey's three consulships: the end of electoral competition in the late roman republic? 2016
[4]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5] journal Why Did Caesar Cross the Rubicon? https://www.jstor.or[...] 2003
[6]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7] book The Oxford handbook of Roman epi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8]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9]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0]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1] website Domitius Calvinus, Gnaeus https://oxfordre.com[...] 2015-12-22
[12] website Pharnaces II https://oxfordre.com[...] 2015-12-22
[13]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4]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5]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6]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7]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18] journal The Caesar of the "Bellum Hispaniense" 1974
[19]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20]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21] website Caecilius Bassus, Quintus https://oxfordre.com[...] 2015-12-22
[22] journal Cicero's jokes on the consulship of Caninius Rebilus 1909
[23]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24] book (title missing from input)
[25] 문서 プルタルコスの『列伝』に記載されたエピソー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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