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드루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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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비아 드루실라는 기원전 59년에 태어났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으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결혼했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하여 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헌신적인 아내이자 로마 가정의 모델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사후에는 그의 유산을 상속하고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으며 권력을 유지했다. 그녀는 아들 티베리우스를 권력에 밀어 넣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이자 조언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영향력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리비아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로마 여성의 이상적인 자질을 나타내는 공적인 이미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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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드루실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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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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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율리아 아우구스타 |
로마 황후 | 재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 |
배우자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기원전 43년–39년)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38년–기원후 14년) |
자녀 | 티베리우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아버지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
어머니 | 알피디아 |
출생일 | 기원전 59년 1월 30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로마 공화국 |
사망일 | 기원후 29년 9월 28일 (향년 87세)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로마 제국 |
매장지 | 아우구스투스 영묘 |
2. 초기 생애와 첫 번째 결혼
리비아 드루실라는 기원전 59년 1월 30일에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와 그의 아내 알피디아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에 포함된 '드루실라'라는 축약형은 그녀가 집안의 첫째 딸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2][3]
기원전 39년 제2차 삼두정치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추종자들 사이에 미세눔 협정이 체결되어 평화가 찾아오고 사면령이 발표되면서, 리비아는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7] 같은 해,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개인적으로 소개되었다. 당시 리비아는 이미 아들 티베리우스를 두고 있었고, 둘째 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대 드루수스)를 임신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자 편에서 함께 싸웠던 귀족 신분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를 기원전 43년경 결혼시켰다.[6] 리비아의 아버지는 필리피 전투 이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자결하였으나,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편에서 옥타비아누스에 계속 맞섰다.
기원전 42년, 리비아는 첫 아들이자 훗날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를 낳았다. 기원전 40년, 페루시아 전쟁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탄압을 피해 리비아 가족은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제2차 삼두정치에 반대하며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삼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했고, 이후 리비아와 남편, 어린 아들 티베리우스는 그리스로 이주했다.[7]
3. 아우구스투스와의 결혼
전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스크리보니와 결혼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를 보자마자 즉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8]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9년 10월 30일, 스크리보니가 자신의 딸 율리아를 낳은 바로 그날 그녀와 이혼했다.[9] 리비아가 임신 6개월이었을 무렵, 그녀의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리비아와 이혼하도록 설득당하거나 강요받았다.
리비아는 기원전 38년 1월 14일에 둘째 아들 드루수스를 출산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가 임신 중일 때 결혼 가능 여부를 신관에게 자문했고, "태아의 아버지가 (전) 남편이면 괜찮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에 따라 드루수스가 태어난 지 불과 3일 뒤인 1월 17일,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는 전통적인 대기 기간을 생략하고 결혼했다.[11] 리비아의 전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마치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듯 리비아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인도했다.[11]
이 결혼은 순수한 애정 외에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 공화정 초기부터 명망 높았던 귀족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의 리비아와의 결합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귀족층과의 대립을 완화하고 그들의 협력을 얻는 데 옥타비아누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명문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연결 및 클라우디우스 네로네스의 정치적 생존 보장은 이 격동적인 시기 결혼의 더 현실적인 설명일 수 있다.
리비아와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사산을 제외하고는 자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51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녀는 남편의 특권적인 조언자로서 지위를 누렸고, 다른 이들을 위해 그에게 청원하며 그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가장의 권위(patria potestas)가 강했던 로마 사회에서 아내로서는 이례적인 역할이었다.[1]
4. 제정 시대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서의 역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패배하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실력자가 되면서 사실상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했고, 리비아는 초대 황제의 아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부부는 로마 가정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부와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족은 팔라티노 언덕의 집에서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리비아는 고귀한 로마 마트로나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보석이나 의상을 피하고, 남편에게 충실하며 가정을 돌보는 데 헌신했으며, 직접 남편의 옷을 만들기도 했다.[1] 이러한 리비아의 모습은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얻는 바탕이 되었다.
리비아는 단순한 황제의 아내에 머무르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신뢰받는 조언자로서 그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른 사람들의 청원을 남편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이는 가부장제가 강했던 로마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1] 기원전 35년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에게 자신의 재산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고 공공장소에 그녀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했다.[1] 리비아는 갈리아의 구리 광산, 헤로데 왕국의 대추야자 농장, 로마 이집트의 파피루스 늪 등을 소유하고 직접 관리하며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후원자 그룹을 형성하여 갈바나 오토 같은 인물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1]
리비아와 아우구스투스는 51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그 사이에는 리비아가 사산한 한 번의 임신 외에는 자녀가 없었다.[10] 당시 로마 사회에서 기혼 남성의 외도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가이우스 마케나스의 아내 테렌티아와의 관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리비아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인내했다고 전해진다. 오히려 급하고 때로는 잔혹한 면모를 보였던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의 영향을 받아 점차 관대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변해갔으며, 리비아의 간청으로 사형을 면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율리아만이 유일한 친자식이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는 중요한 과제였다. 리비아는 자신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를 권력의 중심에 두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1] 드루수스는 유능한 장군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았고 조카딸인 안토니아 마이너와 결혼하여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미래의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낳았으나, 기원전 9년 낙마 사고로 요절했다.[10] 아우구스투스는 처음에는 누이의 아들 마르켈루스, 이후에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이들 모두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리비아가 경쟁자들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대 역사가 타키투스는 리비아가 기원전 23년 마르켈루스의 죽음[12]이나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으며[13], 카시우스 디오 역시 비슷한 소문들을 기록했다.[14] 결국 서기 4년, 리비아의 아들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양되어 후계자 지위를 굳혔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양자였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추방되고 살해된 사건[13][14]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율리아와 그 남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반란 혐의로 처형되거나 추방된 사건[17][18][19] 배후에도 리비아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타키투스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
고대 기록들은 리비아를 위엄 있고 남편에게 충실하며 정숙한 황후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한 권력욕을 가진 야심가로 그리기도 한다. 카시우스 디오는 리비아가 자신을 훔쳐본 알몸의 남성들을 "정숙한 여성에게 그런 남자들은 조각상과 다름없다"고 말하며 구해준 일화와, 아우구스투스에게 존경받는 비결을 묻자 "스스로 엄격히 정숙함을 지키고, 남편이 기뻐하는 일을 기꺼이 하며, 그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특히 그의 애인들에 대해 알려고도, 신경 쓰지도 않는 척했다"고 답했다는 일화를 전한다.[32] 이러한 기록들은 리비아가 로마 제정 초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복합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가정에서 아들 드루수스의 미망인 소 안토니아와 그 자녀들을 돌보는 등 자애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4. 1. 아우구스투스 사후와 티베리우스와의 갈등
기원후 14년 8월 19일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로마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으로 재산의 3분의 1을 리비아에게, 나머지 3분의 2를 티베리우스에게 남겼다. 또한 유언을 통해 리비아를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시키고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이로써 리비아는 남편 사후에도 '''율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주로 정치적 반대자들이 퍼뜨린 악의적인 이야기로 여겨진다.[20] 가장 유명한 소문 중 하나는 리비아가 정원의 무화과에 독을 발라 아우구스투스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21]
초기에는 리비아와 새로운 황제가 된 아들 티베리우스의 관계가 원만해 보였다. 기원후 20년에는 리비아에 대한 비판이 반역죄로 간주되었고, 24년에는 베스탈 신녀들 사이의 극장 좌석이 주어지는 등[1] 그녀는 로마에서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실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점차 어머니의 정치적 지위, 특히 자신이 어머니 덕분에 황제가 되었다는 인식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원로원이 리비아에게 부여하려 했던 '조국의 어머니(Mater Patriae)'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국부(Pater Patriae)'로 불렸던 것과 대조적이다.[1] 티베리우스 자신도 '국부' 칭호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리비아가 오만하고 지배적으로 티베리우스의 결정에 간섭하려 했다고 묘사한다. 대표적인 예로, 황후와의 친분을 믿고 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우르굴라니아[22][23], 그리고 게르마니쿠스 독살 혐의를 받았으나 리비아의 탄원으로 처벌을 면했던 무나티아 플란키나의 사례가 있다.[24] (플란키나는 리비아 사후 다시 기소되어 기원후 33년 자살했다.) 기원후 22년에는 리비아가 로마 중심부에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하는 동상을 세우면서 티베리우스보다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기도 했다.
고대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으로 은퇴한 주된 이유 중 하나로 더 이상 어머니의 간섭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25] 타키투스에 따르면 기원후 22년까지 "모자 사이에 진정한 조화가 있었거나, 아니면 잘 숨겨진 증오가 있었다"고 한다.[26] 카시우스 디오는 티베리우스가 즉위할 때부터 이미 어머니를 깊이 혐오했다고 기록했다.[27] 기원후 22년 리비아가 병에 걸렸을 때 티베리우스는 로마로 급히 돌아왔지만,[1] 기원후 29년 그녀가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는 업무를 핑계로 카프리 섬에 머물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손자인 칼리굴라를 보내 추도 연설을 하게 했다.[28][29][30]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가 오기를 기다리느라 장례가 며칠 지연되었고, 결국 시신의 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례를 치렀다는 세부 사항을 덧붙였다.[1] 티베리우스는 리비아의 신격화를 막았고, 원로원이 사후에 부여한 모든 명예를 거부했으며 그녀의 유언 집행마저 취소했다.[1]
리비아의 권위는 세야누스의 야심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세야누스는 리비아가 죽은 후에야 본격적으로 권력 장악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한편, 리비아는 대 아그리피나가 추방된 후 남겨진 칼리굴라와 그의 여동생들을 거두어 죽을 때까지 양육했다.
리비아의 명예는 사후 13년이 지난 기원후 42년, 손자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완전히 회복되고 신격화되었다. '디바 아우구스타'(Divina Augusta, 신성한 아우구스타)로 명명된 그녀의 조각상은 코끼리가 끄는 전차에 실려 공개 경기마다 등장했고,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남편의 조각상과 함께 세워졌으며, 그녀를 기리는 경기가 열리고 여성들은 맹세할 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훗날 칼리굴라는 리비아를 "여성 오디세우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5. 리비아에 대한 평가와 유산
아우구스투스는 기원후 14년 8월 19일에 사망하고 곧 로마 원로원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으로 재산의 3분의 1을 리비아에게, 3분의 2를 티베리우스에게 남겼다. 또한 유언을 통해 리비아를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시키고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이로써 리비아는 남편 사후에도 '''율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새 이름으로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 타키투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주로 정적들이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으로 여겨진다. 가장 유명한 소문은 리비아가 정원의 무화과에 미리 독을 발라 아우구스투스를 살해했다는 것이다.[20] 로마 정원에서 재배되던 특정 무화과 품종이 '리비아나'라고 불린 것은 그녀의 정원 관리 능력 때문이거나 이 소문에 대한 빈정거림일 수 있다.[21]
한동안 리비아와 새로운 황제가 된 아들 티베리우스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기원후 20년에는 리비아에 대한 비판이 반역죄로 간주되었고, 기원후 24년에는 베스타 여신들 사이에 극장 좌석이 주어졌다. 리비아는 로마에서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실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점차 어머니의 정치적 지위, 특히 자신이 어머니 덕분에 황제가 되었다는 인식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원로원이 리비아에게 부여하려 했던 ''Mater Patriae''("조국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국부''("국가의 아버지")로 불린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으나, 티베리우스 자신도 ''국부'' 칭호를 계속 거부했다.[1]
타키투스와 카시우스 디오 같은 고대 역사가들은 리비아가 오만하고 지배적인 태도로 티베리우스의 결정에 간섭하려 했다고 묘사한다. 대표적인 예로, 황후와의 친분을 이용해 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우르굴라니아[22][23]와 게르마니쿠스 살해 혐의를 받았으나 리비아의 도움으로 처벌을 면한 무나티아 플란키나[24]의 사례가 있다. (플란키나는 리비아 사후인 기원후 33년에 다시 기소되어 자살했다.) 기원후 22년에는 리비아가 로마 중심부에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하는 동상을 세우면서 티베리우스보다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기도 했다.
고대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으로 은퇴한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어머니와의 갈등을 꼽는다.[1][25] 타키투스에 따르면, 기원후 22년까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진정한 조화가 있었거나, 아니면 잘 숨겨진 증오가 있었다."[26] 디오는 티베리우스가 즉위할 때부터 이미 리비아를 혐오했다고 전한다.[27] 기원후 22년 리비아가 병에 걸렸을 때 티베리우스는 로마로 급히 돌아왔지만,[1] 기원후 29년 그녀가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는 업무를 핑계로 카프리에 머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칼리굴라를 보내 추도 연설을 하게 했다.[28][29][30]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가 어머니의 시신이 부패할 때까지 장례를 미루었다고 기록했으며, 리비아의 신격화와 사후 명예 부여를 거부하고 유언 집행도 취소했다고 전한다.[1] 리비아의 유해는 화장 후 남편을 비롯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사람들이 묻힌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되었다.
리비아의 명예는 그녀가 사망한 지 13년 후인 기원후 42년, 손자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가 되어서야 완전히 회복되고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그녀는 ''디바 아우구스타''("신성한 아우구스타")로 불리게 되었고, 코끼리가 끄는 전차에 그녀의 조각상이 실려 모든 대중 경기에 등장했다. 그녀의 동상은 남편의 동상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세워졌고, 그녀를 기리는 경주가 열렸으며, 여성들은 신성한 맹세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우디우스가 리비아를 신격화한 것은 당시 신이었던 아우구스투스와 직접적인 혈연이나 양자 관계가 없었던 그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녀와 아우구스투스의 무덤은 이후 알 수 없는 시기에 약탈당했다.
로마 북쪽에 위치했던 그녀의 갈리나스 알바스의 별장 유적에서는 상상의 정원 풍경을 그린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발굴되어 현재 로마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31]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유명한 조각상 중 하나인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도 이 별장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자료들은 리비아를 둘러싼 여러 부정적인 소문을 언급하면서도, 그녀를 자부심 있고 위엄 있는 여성, 남편에게 충실하고 걸맞은 배우자, 항상 침착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녀는 아내, 어머니, 미망인, 태후로서의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했다. 카시우스 디오는 그녀에 관한 두 가지 일화를 기록했다. 한번은 알몸의 남성들과 마주쳤을 때, 그들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정숙한 여성에게 그런 남자들은 조각상과 다름없다"고 말하여 목숨을 구해주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존경을 받은 비결을 묻는 질문에는 "스스로 철저히 정숙함을 지키고, 그가 기뻐하는 일을 기꺼이 행하며, 그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특히 그의 애인들에 대해 모르는 척했다"고 답했다.[3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미망인이 된 후 리비아에게서 오만함과 노골적인 권력욕이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리비아는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숭배 분위기의 주요 수혜자였으며, 이는 티베리우스의 반감을 샀다. 그녀는 자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원전 39/38년 첫 남편과의 이혼, 그리고 기원전 12년 아우구스투스의 강요로 이루어진 티베리우스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이혼 과정에서 그녀의 역할은 논란의 대상이다. 그녀가 단순히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이었는지, 아니면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중요한 조언자였다는 점은 여러 고대 자료에서 인정하지만, 그녀의 실제 영향력의 크기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상의할 내용을 미리 목록으로 작성하고 그녀의 답변을 메모하여 참고했다고 한다. 리비아의 이미지는 동전이나 초상화를 통해 전해지는데, 기원전 16년 지방 화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초상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로서 로마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 어머니상, 나아가 여신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제국의 선전(프로파간다)에 활용되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로마 부족 중 하나가 '리비아'로 명명되기도 했다.[33] 후대의 칼리굴라는 그녀를 "여성 오디세우스"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그녀의 지략과 정치적 수완을 암시하는 평가로 볼 수 있다.
5. 1. 대중문화 속의 리비아
리비아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클라우디우스다''에서 리비아는 타키투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마키아벨리적인 정치 책략가로 그려진다. 그녀는 공화정의 부활을 막고 티베리우스를 권좌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여러 죽음과 불명예의 배후로 묘사된다. 소설 속 리비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신의 처벌을 두려워하며, 손자 클라우디우스에게 사후 신격화를 약속받아 사후 세계의 행복을 보장받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제국의 안녕을 위한 그녀의 강한 헌신과 균형을 이루며, 그녀의 책략은 제국 통치 하에서만 가능한 로마인의 공동선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 정당화된다.[41][42]
존 매독스 로버츠의 SPQR 시리즈 단편 소설 "희생의 왕"에서 리비아는 데키우스 메텔루스에게 율리아의 연인 중 한 명의 살인 사건 조사를 의뢰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콜린 매컬로의 소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리비아는 남편 아우구스투스의 교활하면서도 효과적인 조언자이자, 남편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루크 데브니시의 "로마의 여제" 시리즈 소설 ''늑대의 소굴''(2008)과 ''독사의 둥지''(2010)는 리비아의 삶과 시대를 허구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그녀가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데이비드 위샤트의 마르쿠스 코르비누스 미스터리 소설 ''오비디우스''(1995)와 ''게르마니쿠스''(1997)에서 리비아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후 작품인 ''세야누스''(1998)에서는 사후에 언급된다.
1968년 ITV 텔레비전 드라마 ''카이사르''에서는 소니아 드레스델이 리비아 역을 연기했다.[43]
1976년 BBC 텔레비전 드라마 ''나는 클라우디우스''에서는 시안 필립스가 리비아 역을 맡아 열연했으며,[44] 이 역할로 BAFTA 상을 수상했다.[45]
2003년 텔레비전 영화 ''Imperium: Augustus''에서는 샬롯 램플링이 리비아를 연기했다.[46]
2007년 HBO/BBC 텔레비전 드라마 ''로마''에서는 앨리스 헨리가 리비아 역을 맡았다.[47]
2021년 Sky Atlantic 드라마 ''도미나''는 로마 원수정의 부상을 리비아의 역할과 관계에 초점을 맞춰 다룬다. 드라마 속 리비아는 공화국을 회복시키겠다는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유지를 받들고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함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린 리비아는 메도우 노브레가, 청소년 및 젊은 성인 리비아는 나디아 파크스, 성인 리비아는 카시아 스무트니악이 연기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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