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런트 베이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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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런트 베이 폭동은 1865년 자메이카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흑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났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흑인들은 투표권 제한, 경제적 어려움, 백인 농장주들의 가혹한 처벌 등에 시달렸다. 폴 보글의 주도로 모런트 베이 법원으로 행진하던 흑인 시위대와 민병대 간의 충돌로 폭동이 시작되었고, 에드워드 존 에어 총독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서는 에어 총독의 행동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으며, 자메이카 의회가 해산되고 영국 직할 식민지로 전환되는 등 자메이카의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폭동의 주요 인물인 폴 보글과 조지 윌리엄 고든은 자메이카 국가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이 사건은 다양한 문학 작품과 음악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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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런트 베이 폭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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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 | |
발생일 | 1865년 10월 11일 |
위치 | 자메이카 모런트 만 |
공격 세력 | |
가해자 | 폭도 |
2. 배경
자메이카의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지 약 30년 후에 발생한 모런트 베이 폭동은 해방 이후에도 흑인 다수가 겪어야 했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정치적 권리 박탈에 근본적인 원인을 두고 있다. 형식적인 자유에도 불구하고, 과거 노예였던 이들과 그 후손들은 여전히 백인 지주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차별과 착취에 시달렸다. 식민 정부의 정책은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누적된 모순과 갈등은 결국 폭력적인 저항으로 이어졌다.
2. 1. 노예제 폐지와 견습 제도
자메이카의 노예제도는 노예 폐지법이 통과됨에 따라 1834년 8월 1일에 폐지되었다. 이 법은 또한 6세 이상의 이전 노예들이 4년에서 6년 동안 이전 소유주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영국 노예 폐지 운동가들의 항의로 견습 제도는 1838년 8월 1일에 완전히 폐지되었다.이 날부터 이전에 견습생이었던 자메이카인들은 자유롭게 고용주와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투표권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메이카인들은 자메이카 정치 시스템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인두세를 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식민 정부는 아이티 혁명과 같은 식민지 반란을 우려하여, 해방된 자메이카인 다수에게 과도한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선거권을 박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두세를 도입했다.
2. 2.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평등
1864년 선거 당시 자메이카의 총 인구는 436,000명이 넘었으나, 투표 자격이 있는 흑인 남성은 2,000명 미만에 불과했다. 당시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으며, 인구 구성상 흑인이 백인보다 32:1의 비율로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정치적 참여는 극히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반란 이전 자메이카의 가난한 흑인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864년에는 여러 차례의 홍수로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고, 1865년 이전 2년간 지속된 가뭄은 섬 전체를 괴롭혔다. 이는 콜레라와 천연두 유행으로 고통받았던 10년의 끝자락에서 발생한 재해로, 대다수 노예 해방자와 그 후손들의 경제적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설탕 산업의 연쇄 파산은 일자리를 빼앗고 경제적 공백을 심화시켰다.[5]백인 농장주와 자메이카 흑인 사이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해방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노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당시 총독이었던 에어는 음식 절도와 같은 경범죄에 대해서도 태형이나 죄수 쳇바퀴와 같은 가혹한 처벌을 시행했는데, 정치인 고든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우리가 이런 총독의 통치를 더 오래 받게 된다면,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자치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6]
1865년, 영국 침례교 선교 협회의 비서인 에드워드 언더힐 박사는 자메이카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런던의 식민지부에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에어 총독에게 전달되었으나, 그는 즉시 편지 내용의 진실성을 부인하려 했다. 하지만 자메이카의 가난한 흑인들은 이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언더힐 회의"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세인트 앤 교구의 농민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경작할 수 있는 왕실 토지를 요구하는 청원을 보냈으나, 이 청원은 먼저 에어 총독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의견을 덧붙여 보냈다.[7]
여왕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그녀는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기보다는 가난한 이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권고를 전했다. 많은 사람들은 에어 총독이 여왕의 의견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의 대표였던 고든은 자신의 지역 사람들에게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방법을 찾도록 독려하기 시작했다.[8]
고든의 지지자 중 한 명인 침례교도 집사 폴 보글은 행동에 나섰다. 1865년 8월, 보글은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의 농민들을 이끌고 수도인 스페니시 타운까지 87km를 행진하여 에어 총독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 그러나 총독은 이들의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9]
2. 3. 언더힐 서한과 흑인들의 불만
1864년 선거 당시 자메이카에서는 흑인 남성 2,000명 미만이 투표 자격을 가졌으며, 이는 총인구 436,000명이 넘는 상황에서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고, 흑인이 백인보다 32:1의 비율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폭동이 일어나기 전 자메이카의 상황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1864년에는 여러 차례의 홍수로 많은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으며, 1865년은 섬 전체가 콜레라와 천연두 유행으로 고통받았던 10년의 끝자락이었다. 게다가 1865년 이전 2년간 지속된 가뭄은 노예 해방 이후 생존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 대다수의 경제적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설탕 산업에서는 여러 기업이 파산하면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공백은 커져만 갔다.[5]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인 농장주와 자메이카 흑인 사이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고, 해방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노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지 윌리엄 고든은 음식 절도와 같은 경미한 범죄에 대해 태형을 가하거나 죄수 쳇바퀴를 돌리는 등 에어 총독의 가혹한 처벌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이런 총독의 통치를 더 오래 받게 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자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6]
1865년, 영국 침례교 선교 협회의 비서였던 에드워드 언더힐 박사는 런던의 식민지부에 편지를 보내 자메이카의 열악한 상황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 이 편지는 이후 자메이카 총독인 존 에어에게 전달되었으나, 그는 즉시 편지 내용의 진실성을 부인하려 했다. 그러나 자메이카의 가난한 흑인들은 이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언더힐 회의"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세인트 앤 교구의 농민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청원을 보내 경작할 수 있는 왕실 토지를 요구하며, 스스로는 토지를 구할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7] 이 청원은 먼저 에어 총독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의견을 담은 편지를 동봉하여 영국으로 보냈다.
여왕의 답변이 자메이카에 도착했을 때,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에어 총독이 여왕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 여왕은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권고만을 되풀이했다. 이에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의 대표 중 한 명이었던 고든은 자신의 지역 사람들에게 그들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알릴 방법을 찾도록 독려하기 시작했다.[8]
고든의 지지자 중 한 명은 침례교도 집사였던 폴 보글이었다. 1865년 8월, 보글은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의 농민들을 이끌고 수도인 스페니시 타운까지 87km를 행진했다. 이는 존 에어 총독을 직접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논의하고자 하는 시도였으나, 총독은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했다.[9]
3. 긴장 고조
1864년 선거 당시 자메이카에서는 극소수의 흑인 남성만이 투표권을 가졌는데, 이는 총인구 436,000여 명 중 2,000명 미만에 불과했다. 당시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으며, 인구 구성은 흑인이 백인보다 32:1 비율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폭동 직전 자메이카의 상황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864년에는 여러 차례의 홍수로 농작물 피해가 막심했고, 1865년은 섬 전체가 콜레라와 천연두 유행으로 고통받았던 10년의 끝자락이었다. 여기에 1865년 이전 2년간 지속된 가뭄은 노예 해방 이후 생존자와 그 후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설탕 산업의 연쇄적인 파산은 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경제적 공백을 심화시켰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백인 농장주와 자메이카 흑인 사이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해방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노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당시 총독이었던 존 에어는 음식 절도와 같은 경범죄에 대해서도 태형이나 죄수 쳇바퀴형과 같은 가혹한 처벌을 시행하여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6]
1865년, 영국 침례교 선교 협회의 비서인 에드워드 언더힐 박사가 런던의 식민지부에 편지를 보내 자메이카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편지는 에어 총독에게 전달되었으나 그는 편지의 내용을 부인하려 했다. 하지만 편지의 존재가 알려지자 자메이카의 가난한 흑인들은 "언더힐 회의"를 조직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인트 앤 교구의 농민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경작할 왕실 토지를 요구하는 청원을 보냈으나, 에어 총독을 거쳐 전달된 여왕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여왕은 도움을 주기보다 더 열심히 일하라는 취지로 답했고, 많은 사람들은 에어 총독이 여왕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으며 불신을 키웠다.[7][8]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안과 정치적 불만은 폭동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3. 1. 조지 윌리엄 고든과 폴 보글
1864년 선거 당시 자메이카에서는 흑인 남성 2,000명 미만이 투표권을 가졌으며, 이는 총인구 436,000명 중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고, 흑인이 백인보다 32:1의 비율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란 이전 자메이카의 상황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864년에는 여러 차례의 홍수로 농작물 피해가 컸고, 1865년은 섬 전체가 콜레라와 천연두 유행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였다. 게다가 1865년 이전 2년간 지속된 가뭄은 노예 해방 이후 생존자와 그 후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켰다. 설탕 산업의 연쇄 파산은 일자리를 빼앗고 경제적 공백을 키웠다.[5]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인 농장주와 자메이카 흑인 사이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해방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노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조지 윌리엄 고든은 당시 총독 존 에어가 음식 절도와 같은 경범죄에 대해 태형을 가하고 죄수 쳇바퀴를 돌리는 등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이런 총독의 통치를 더 오래 받게 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자치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저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6]
1865년, 영국 침례교 선교 협회의 비서인 에드워드 언더힐 박사는 런던의 식민지부에 편지를 보내 자메이카의 열악한 현실을 알렸다. 이 편지는 에어 총독에게 전달되었으나, 그는 즉시 편지 내용의 진실성을 부인하려 했다. 그러나 자메이카의 가난한 흑인들은 이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언더힐 회의"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세인트 앤 교구의 농민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경작할 왕실 토지를 달라고 청원했지만, 스스로 토지를 찾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7] 이 청원은 에어 총독을 거쳐 여왕에게 전달되었고, 에어는 자신의 부정적인 의견을 덧붙였다.
여왕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그녀는 도움을 주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취지로 답했고, 많은 이들은 에어 총독이 여왕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를 대표하는 두 명 중 한 사람이었던 고든은 이러한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교구 사람들에게 그들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알릴 방법을 찾도록 독려했다.[8]
고든의 중요한 지지자 중 한 명이 침례교도 집사였던 폴 보글이었다. 1865년 8월, 보글은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 지역 농민들을 이끌고 수도인 스페니시 타운까지 87km를 행진했다. 이는 에어 총독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어 총독은 이들의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9]
3. 2. 스페니시 타운 행진과 총독의 거부
고든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침례교도 집사 폴 보글은 1865년 8월, 세인트 토머스 인 더 이스트의 농민들을 이끌고 당시 수도였던 스페니시 타운까지 87km 거리를 행진했다. 이는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존 에어 총독에게 직접 설명하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으나, 에어 총독은 그들의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9]4. 반란과 진압
1865년 10월, 모런트 베이 법원에서 시작된 충돌과 폴 보글이 이끈 시위는 유혈 사태로 번졌다. 시위대는 지역 관리 및 민병대와 충돌하며 법원 건물을 불태웠고, 일시적으로 세인트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를 장악했다.[9]
사태가 커지자 존 에어 총독은 알렉산더 넬슨 준장이[11] 지휘하는 정부군을 파견해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정부군은 조직적인 저항 없이 반란을 진압했으나, 이 과정에서 반란과 무관한 다수의 흑인 주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즉결 처형이나 정식 재판 없는 처형이 자행되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들도 포함되었다.[12] 역사가 개드 휴먼은 이를 '공포 정치'로 규정했다.[9] 자메이카 마룬족 역시 영국 식민 당국에 협력하여 폴 보글을 생포하는 등 진압 작전에 가담했고, 이 과정에서 잔혹 행위와 초법적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13]
에어 총독은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봉기를 조직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9] 평소 자신을 비판하던 유력 정치인이자 사업가 조지 윌리엄 고든을 반란의 배후로 지목했다. 고든은 반란과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었음에도[14] 킹스턴에서 체포되어 계엄령이 선포된 모런트 베이로 이송, 계엄령 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14] 고든은 졸속 재판 끝에 불과 이틀 만인 10월 23일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16] 과도한 진압과 고든의 부당한 처형은 영국 본국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키며 식민 통치와 법 적용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15]
진압 과정에서 군인들은 최소 439명의 자메이카 흑인을 직접 살해했으며, 폴 보글을 포함한 354명을 체포하여 대부분 정식 재판 없이 처형했다.[17] 폴 보글은 1865년 10월 25일, 그의 형제 모세를 포함한 14명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18] 이 외에도 600명이 넘는 남녀가 태형을 당하거나 장기 징역형에 처해졌고, 수천 채의 가옥이 소실되어 많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진압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9]
4. 1. 모런트 베이 법원 사건

1865년 10월 7일, 모런트 베이 법원에서 한 흑인 남성이 오랫동안 버려진 설탕 농장에 무단 침입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교구의 가난한 자메이카 흑인들은 이러한 토지 불평등 문제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폴 보글 목사의 지도 아래 법원으로 평화롭게 행진했다.
재판 도중, 흑인 구경꾼 제임스 지오게건이 혐의에 대해 항의하면서 소란이 발생했다. 경찰이 그를 체포하여 법원 밖으로 내보내려 하자, 경찰과 다른 구경꾼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 두 명이 군중이 던진 막대기와 돌에 맞았다.[10] 재판은 속개되었고, 지오게건은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다음 월요일, 법원은 폭동, 체포 저항, 경찰 폭행 등의 혐의로 여러 남성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이 영장에는 폴 보글 목사를 체포하라는 지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보글 지지자들의 저지로 인해 그를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며칠 후인 10월 11일, 폴 보글은 이번에는 수백 명의 자메이카 농민 노동자들과 함께 다시 모런트 베이로 행진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행진자들이 "흑인에게 충성하고 백인을 떠나라"는 맹세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반란 준비 신호로 해석되기도 한다.[9]
모런트 베이 법원에 도착한 시위대는 지역 관리들과 농장주들로 급조된 경험 없는 소규모 자원 민병대와 마주쳤다. 군중이 민병대를 향해 돌과 막대기를 던지기 시작하자, 민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격렬하게 대응하여 법원과 인근 건물을 불태웠다. 민병대가 후퇴하기 전에 양측에서 25명 이상이 사망했다.[9] 이 사건 이후 이틀 동안, 봉기한 흑인 농민들은 세인트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를 장악하게 되었다.[9]
4. 2. 폴 보글의 행진과 민병대와의 충돌
1865년 10월 7일, 한 흑인 남성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던 설탕 농장에 무단으로 들어간 혐의로 모런트 베이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토지 불평등 문제와 맞물려 교구 내 가난한 자메이카 흑인들의 분노를 샀고, 이들은 폴 보글의 지도 아래 법원으로 평화롭게 행진했다. 그러나 재판 도중, 구경꾼이었던 제임스 지오게건이 혐의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경찰이 그를 체포하여 법원에서 끌어내려 하자, 경찰과 다른 구경꾼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지오게건을 쫓던 경찰 두 명이 군중이 던진 막대기와 돌에 맞았다.[10] 재판은 속개되었고, 지오게건은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되었다. 다음 주 월요일, 법원은 폭동, 체포 저항, 경찰 폭행 등의 혐의로 폴 보글 목사를 포함한 여러 남성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경찰은 보글을 따르는 이들의 저지로 인해 그를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며칠이 지난 10월 11일, 폴 보글은 이번에는 수백 명의 자메이카 농민 노동자들을 이끌고 다시 모런트 베이로 행진했다. 개드 휴먼(Gad Heuman)은 행진자들이 "흑인에게 충성하고 백인을 떠나라"는 맹세를 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아프리카 전통에서 맹세가 집단을 결속시키고 전쟁을 준비하는 방식이었음을 지적하며 반란을 준비하는 신호였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9]
모런트 베이 법원에 도착한 행진자들은 지역 관리들과 농장에서 급히 차출된 경험이 부족한 소규모 자원 민병대와 마주쳤다. 군중이 민병대를 향해 돌과 막대기를 던지기 시작하자, 민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법원과 인근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민병대가 후퇴하기 전까지 양측에서 25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이틀 동안, 봉기한 흑인 농민들은 세인트토머스 인 더 이스트 교구 지역을 장악했다.[9]
4. 3. 에어 총독의 강경 진압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존 에어 총독은 알렉산더 넬슨 준장[11] 휘하의 정부군을 파견하여 무장이 빈약한 반군을 추격하고 폴 보글을 재판에 회부하도록 지시했다. 정부군은 조직적인 저항에 거의 부딪히지 않았으나, 폭동이나 반란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다수의 흑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즉결 재판이나 정식 재판 절차 없이 총살 또는 교수형에 처해진 이들 중에는 레티티아 지오게건, 메리 앤 프랜시스 등 7명의 유색인 여성도 포함되었다.[12] 역사가 개드 휴먼은 이러한 상황을 '공포 정치'라고 묘사했다.[9] 한편, 자메이카 마룬족은 전 찰스 타운 감독관 알렉산더 피프의 지휘 아래 무어 타운에서 활동하며 보글을 생포하여 식민 당국에 넘기기 전까지 수많은 잔혹 행위와 초법적 살인을 저질렀다.[13]한 병사는 당시 상황을 "우리는 우리 앞의 모든 사람을 학살했다...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최종적으로 군인들은 439명의 자메이카 흑인을 직접 살해했으며, 폴 보글을 포함하여 체포된 354명은 이후 처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적법한 재판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 폴 보글 자신도 "재판을 받은 당일 저녁이나 다음날 아침"에 처형되었으며,[17] 10월 25일에는 그의 형제 모세를 포함한 14명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18]
흑인들이 스스로 이러한 규모의 봉기를 계획할 능력이 없다고 믿었던[9] 에어 총독은 조지 윌리엄 고든을 반란의 배후로 지목하여 체포했다. 고든은 혼혈 자메이카인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부유하고 명망이 높았으며 평소 에어 총독과 그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에어는 반란과 고든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킹스턴에서 그를 체포했다. 당시 킹스턴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으나, 에어는 고든을 계엄령 하에서 재판하기 위해 모런트 베이로 이송했다.[14] 고든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된 재판에서 불과 이틀 만인 10월 23일에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16] 반란 진압의 과도함과 더불어, 계엄령을 이용한 고든의 재판 및 처형은 영국 내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은 에어가 고든에게 계엄령을 적용한 것에 대해 심각한 헌법적 문제를 제기하며, 영국 속령이 법의 지배가 아닌 군사적 재량에 의해 통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려했다.[15]
이 외에도 600명이 넘는 남녀(임산부 포함)가 태형을 당하거나 장기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또한 군인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자메이카 흑인들이 소유한 수천 채의 집을 불태워 수많은 가족이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들었다. 이러한 에어 총독의 강경 진압은 영국령 서인도 제도 역사상 가장 가혹한 소요 사태 진압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잔혹성은 노예제 시대의 사건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9]
4. 4. 조지 윌리엄 고든의 체포와 처형
흑인들이 스스로 그러한 사건을 계획할 능력이 없다고 믿었던 에드워드 존 에어 총독은[9] (당시 널리 퍼진 백인들의 편견을 공유했기 때문에)[9] 대표격인 조지 윌리엄 고든을 체포했다. 혼혈 자메이카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던 고든은 부유하고 유명했으며, 총독과 그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었다. 에어 총독은 고든이 반란의 배후라고 믿었으나, 실제 고든은 반란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14]고든은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킹스턴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에어 총독은 그를 계엄령 하에서 재판받게 할 목적으로 모런트 베이로 이송했다.[14] 반란 진압의 과도함에 더해, 계엄령을 통해 고든을 재판하고 처형한 것은 영국 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들은 에어 총독이 고든에게 계엄령을 적용한 것에 대해 심각한 헌법적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며, 영국 속령이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군사적 재량에 따라 통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우려했다.[15] 고든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된 재판 끝에,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이틀 만인 10월 23일에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16]
5. 영국 내 반응과 논쟁
모런트 베이 폭동과 자메이카 정부의 강경 진압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에드워드 존 에어 총독의 조치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영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분열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9]
에어 총독의 행위를 비판하는 측은 그의 조치가 대량 살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1865년 12월 자메이카 위원회를 결성하여 에어 총독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고 재판 회부를 시도했다. 위원회에는 존 스튜어트 밀, 찰스 다윈,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 같은 저명한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참여했다.[19] 이들은 특히 조지 윌리엄 고든과 같은 영국 시민을 계엄령 하에서 처형한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이며 법치주의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반면, 에어 총독을 옹호하는 측은 그의 조치가 식민지의 질서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866년 8월 에어 옹호 위원회를 조직하여 에어 총독을 법적, 사회적으로 지원했다. 이 위원회에는 토머스 칼라일,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알프레드 테니슨 등 보수적인 성향의 유명 작가와 지식인들이 참여했다.[19]
에어 총독은 1866년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지지자들로부터는 환영받았으나 반대자들로부터는 '학살자'라는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다. 자메이카 위원회는 에어를 살인 혐의로 두 차례 기소하려 했으나 대배심은 기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폭동 당시 부당하게 체포되었던 알렉산더 필립스가 에어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필립스 대 에어'') 역시 에어의 승소로 종결되었다.[19]
결과적으로 에어 총독은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다. 일부 역사가들은 모런트 베이 폭동과 그에 대한 논쟁이 단순한 지역 소요를 넘어, 영국 정부가 이 사건을 빌미로 자메이카 의회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자메이카를 직할 식민지로 전환하여 제국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20]
5. 1. 자메이카 위원회와 에어 옹호 위원회
모런트 베이 폭동과 그 진압 과정에서 자메이카 정부가 수백 명을 살해하고 처형한 사실이 영국에 알려지자, 에드워드 존 에어 총독의 행동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9]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공인들이 에어 총독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이는 흑인들이 스스로 봉기를 계획했는지, 아니면 조지 윌리엄 고든과 같은 인물들이 그들을 이끌었는지에 대한 시각 차이와도 관련이 있었다.[9]에어 총독의 행위에 반대하는 측은 1865년 12월 자메이카 위원회(Jamaica Committee)를 결성했다. 이들은 에어 총독이 대량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그를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의 일부 급진적인 구성원들은 조지 윌리엄 고든과 같은 영국 시민을 살해한 것은 계엄령 하에서도 불법적인 행위이며,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에어가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원회를 이끈 주요 인물로는 국회의원 존 브라이트, 찰스 벅스턴, 피터 앨프레드 테일러와 학자 찰스 다윈, 토머스 헨리 헉슬리, 골드윈 스미스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존 스튜어트 밀, T. H. 그린, 헨리 포셋, A. V. 다이시, 토머스 휴스, 허버트 스펜서 등 영국의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위원회를 지지했다.[19]
반면, 에어 총독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1866년 8월 에어 옹호 위원회(Eyre Defence Committee)를 결성하여 법적 대응을 지원했다. 이 위원회에는 작가 토머스 칼라일,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알프레드 테니슨, 찰스 킹슬리와 과학자 존 틴들, 정치인 존 매너스 경, 제임스 브루데넬(제7대 카디건 백작) 등이 참여했다.[19] 이들은 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자메이카 위원회는 에어를 살인 혐의로 형사 고발하려 했으나, 대배심은 기소를 거부했다. 이후 위원회는 알렉산더 필립스라는 흑인 신사가 에어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인 ''필립스 대 에어'' 사건을 지원했다. 필립스 역시 고든과 유사하게 부당하게 체포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소송은 결국 에어의 승소로 끝났다.[19] 에어는 1866년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지지자들의 환영 만찬을 받았지만, 반대자들은 그를 학살자로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두 차례에 걸쳐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법적 절차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고 에어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논쟁과 폭동 사건은 결과적으로 영국이 제국에 대한 중앙 집중적인 통제를 강화하고, 자메이카 의회의 자치권을 박탈하여 자메이카를 직할 식민지로 만드는 명분으로 이용되었다.[20] 모런트 베이 폭동은 단순한 지역 소요를 넘어 자메이카의 정치적 지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된다.
5. 2. 필립스 대 에어 소송
에어를 반대하는 이들이 설립한 자메이카 위원회는 처음에 에어를 대량 살인 혐의로 형사 고발하려 했으나, 대배심은 기소하지 않았다. 이후 위원회는 에어를 상대로 한 소송인 ''필립스 대 에어''를 지원했다. 이 소송의 원고는 조지 윌리엄 고든과 유사하게 체포되었던 흑인 신사 알렉산더 필립스였다. 그러나 이 소송은 결국 에어의 승소로 결정되었다.[19]6. 반란의 결과와 영향
모런트 베이 폭동은 자메이카의 정치 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폭동 이후 에어 총독은 존 피터 그랜트로 교체되었고,[21] 자메이카 의회는 해산되어 2세기 이상 지속된 선출 대표 제도가 종식되었다.[22] 결과적으로 자메이카는 런던의 직접 통치를 받는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23] 일부 역사가들은 이 폭동이 단순한 지역 소요를 넘어 자메이카가 직할 식민지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6. 1. 자메이카 의회 해산과 직할 식민지 전환

폭동 이후 에어 총독은 1866년 8월에 부임한 존 피터 그랜트로 교체되었다.[21]
1830년대부터 고든, 에드워드 조던, 로버트 오스본과 같은 자유 유색인들이 자메이카 의회에 선출되는 사례가 늘어나자 식민 당국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 모런트 베이 폭동을 계기로 에어 총독은 식민지부의 지원을 받아 자메이카 의회가 스스로 헌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이로써 자메이카 식민지에서 200년 이상 이어져 온 선출 대표 제도는 막을 내렸다.[22]
의회가 해산된 후, 백인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총독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흑인 다수가 식민지 정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조던과 오스본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자메이카는 런던의 직접 통치를 받는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23]
모런트 베이 폭동과 그 진압 과정에 대한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에어 총독의 조치가 적절했는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는 당시 영국 시민들의 정치적 지지 성향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에어가 1866년 영국으로 돌아오자, 그의 지지자들은 환영 만찬회를 열었다. 반면, 반대자들은 에어를 학살자로 규탄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반대파는 '자메이카 위원회'를 설립하여 에어를 소환하고 폭동 진압 과정에서의 과도함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 위원회에는 존 브라이트, 존 스튜어트 밀, 찰스 다윈, 토머스 헨리 헉슬리, 토머스 휴스, 허버트 스펜서 등 영국의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참여했다. 이에 맞서 에어를 옹호하는 위원회도 결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칼라일, 찰스 킹슬리, 러스킨, 디킨스, 알프레드 테니슨 등 보수당 인사들과 보수 성향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에어는 두 차례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모런트 베이 폭동을 단순한 지역 소요 사태로 보지 않고, 이 사건이 자메이카 의회의 특권 포기와 자메이카의 직할 식민지 전환을 초래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6. 2. 자메이카 국가 영웅 선정
1969년, 폴 보글과 조지 윌리엄 고든은 자메이카 최고 훈장인 자메이카 국가 영웅으로 선정되었다.7. 대중문화 속의 모런트 베이 반란
20세기 전반에 걸쳐 여러 자메이카인들이 모런트 베이 폭동에 대해 글을 썼다.
- H. G. 드 리서: 오랫동안 신문 ''더 글리너''의 편집자였으며, 소설 ''복수''(1918)를 썼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 로저 메이스: 1954년 라스타파리 운동 소설 ''브라더 맨''으로 잘 알려진 작가로, 폭동 이후 계엄령 하에서 재판받고 처형된 혼혈 정치인[9]에 대한 연극 ''조지 윌리엄 고든''을 썼다. 이 연극은 1938년에 처음 공연되었다.
- V. S. 리드: 자신의 소설 ''뉴 데이''(1949)를 폭동을 기념하는 데 헌정했다.
자메이카 외 다른 국가의 작가들도 모런트 베이 폭동을 다루었다.
-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캐리비안''(1989) 제11장의 주제이다.
- 패트리샤 던커의 소설 ''제임스 미란다 배리''(1999)의 일부 배경이기도 하다. (2002년에는 ''의사: 소설''이라는 제목의 페이퍼백으로 재발행되었다.)
- 이탈리아 작가 아리고 보이토의 단편 소설 "L'alfier nero"(즉, 체스 게임에서 "검은 비숍")에서는 이 폭동이 노예 반란으로 잘못 언급되기도 한다.
음악 분야에서도 이 폭동을 다룬 작품이 있다. 레게 그룹 서드 월드는 1977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1865 (96° In The Shade)"에서 폴 보글과 조지 윌리엄 고든의 시각으로 모런트 베이 폭동의 사건들을 묘사했다.
> 널 자유롭게 하려고 싸우는 날 잡았지, 이제 면화 나무에 올가미를 보여주네, 널 위한 오락, 날 위한 순교... 누군가는 고통받고, 누군가는 불타겠지만, 나는 언젠가 내 사람들이 배울 것이라는 걸 알아, 태양이 하늘 높이 빛나는 것처럼, 오늘 나는 희생자로 여기 서 있는데 - 진실은 나는 절대 죽지 않을 거야.[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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