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묘교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묘교도는 헤이안 시대의 다이가쿠료에 설치된 유학 연구를 담당하는 학과이다. 묘교도는 묘교 하카세 1명, 조쿄 2명, 조쿠코 2명, 묘교토쿠교쇼 4명, 묘교쇼 4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삼경, 삼례, 삼전, 논어, 효경 등 11경을 교재로 사용했다. 묘교시는 묘교쇼가 시험을 치르는 제도였으나,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쇠퇴하여 본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묘교도의 교관직은 나카하라 씨와 기요하라 씨가 세습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명목상의 관직으로 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교육 - 국민학교
    국민학교는 1941년 국민학교령에 따라 설립된 초등 교육 기관으로,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화 교육의 일환으로 쇼와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반영되었으나,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995년 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 일본의 교육 - 방송대학학원
    방송대학학원은 1981년 방송대학학원법에 따라 설립된 일본의 특수법인으로, 교육 방송 계획이 1983년 방송대학 개설로 이어졌고, 2018년 지상파 방송 종료 후 BS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되었으며, 2003년 학교법인으로 재편되어 문부과학성과 총무성의 공동 관리를 받는다.
묘교도
개요
명칭명경도 (明経道)
설명대학료에 설치된 학과의 하나
성격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
역사
설치 시기7세기 후반 (대학료 설치와 함께)
주요 연구 경전주역
상서
시경
예기
춘추좌씨전
효경
교육 과정경전의 훈고 (訓詁, 주석) 및 의소 (義疏, 경전의 의미 해석) 연구
시험 과목명경 (明經)
제술
시험 방식경전 내용에 대한 이해도 평가, 질문에 대한 답변 능력 평가
졸업 후 진로문관 (文官) 관료
영향일본의 관료 양성 시스템에 큰 영향
인물
주요 교수박사 (博士), 조교 (助教) 등의 관직 존재
주요 인물스가와라노 기요공
미요시 기요유키
오에노 마사후사
나카하라노 모로토
같이 보기
관련 항목기전도
명법도
산학도

2. 명칭

본래 다이가쿠료의 본과였으며 특별한 명칭은 없었다. 유학 연구를 明経|묘교일본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나라 시대부터였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 다이가쿠료의 각 학과를 '도(道|도일본어)'라고 부르게 되면서 '묘교도'라는 명칭도 정착되었다. 당시 '도'라고 불린 학과에는 기덴도, 묘교도, 산도, 쇼도 등이 있었다.

3. 인원


  • 교관 : '''묘교 하카세'''(明経博士|묘교 하카세일본어) 1명 ・ 助教|조쿄일본어 2명 ・ 直講|조쿠코일본어 2명
  • 학생 : '''明経得業生|묘교토쿠교쇼일본어''' 4명 ・ '''明経生|묘교쇼일본어''' 400명
  • * 하지만 헤이안 시대 내내 학생 정원이 전부 채워지는 일은 없었다.

4. 교과서

헤이안 시대에는 주요 교과서로서 총 11경이 확립되었다. 이 11경은 다음과 같다.


5. 시험

명경시(明経試)는 필수 과목인 2개의 경전에서 총 3문제, 그리고 선택 과목인 다른 2개의 경전에서 3문제 또는 4문제가 출제되어, 총 10문제 중 6문제 이상을 맞춰야 합격할 수 있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기전도를 가르치는 문장박사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명경박사를 능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명경도는 점차 중심 학문의 지위를 잃어갔다. 본래 문장박사는 명경도에 부속된 직책으로 단 1명만 배정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경도를 중시하는 인식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명경박사를 지낸 토이치 아리마사(나카하라 씨의 시조)는 안와 2년(969년)에 작성한 해문(解文, 의견서)에서 기전도와 명법도를 "소도(小道, 중요하지 않은 학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내용은 『류주부선초』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장생 등 다른 분야의 학생들에게도 유학은 기본적인 교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명경도의 강의를 청강하는 경우가 많았다.

쇼랴쿠 4년(993년)에는 명경박사 나카하라 무네토키의 요청에 따라, 명경득업생(明経得業生, 정식 학생)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명경문자생 제도가 새로 만들어졌다. 8명에서 10명으로 구성된 명경문자생은 시험에 합격하면 득업생과 비슷한 자격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기요하라 씨의 후손인 후나바시 가와 후시하라 가가 명경박사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유학계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송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명경박사직은 점차 실권 없이 이름만 남은 명목상의 관직으로 변해갔다.

5. 1. 시험 문제

논어』와 『효경』 외에 최소 2개의 경전을 더 학습한 묘교쇼(明経生)는 '''묘교시'''(明経試, 나중에 '''묘교토쿠교시'''(明経得業試)로 이름이 바뀜)라는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뒤, 벼슬 등급을 받고 관직에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묘교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서위되거나 임관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6. 역사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삼례학파와 삼전학파 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묘교도는 점차 유교 전문가 양성 과정으로 변모하며 학술적 활기를 잃었다. 이 시기 기덴도의 몬조 하카세 지위가 상승하면서 묘교도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하락했지만, 유교 교육의 중요성으로 인해 文章生|몬죠쇼일본어 등 다른 과 학생들의 청강은 계속되었다. 교관직은 점차 나카하라 씨와 기요하라 씨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고, 학문적으로는 훈고학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쇼랴쿠 4년(993년)에는 명경득업생에 준하는 명경문자생 제도가 설치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기요하라 씨의 후손인 후나바시 가와 후시하라 가가 박사직을 세습하였으나, 송학의 부상 속에서 점차 명목상의 지위로 변화하였다.

6. 1. 쇠퇴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삼례학파와 삼전학파라는 학문적 흐름이 형성되어 서로 논쟁을 벌였으나, 헤이안 시대 중기에 이르러 묘교도는 점차 유교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으로 성격이 변하면서 학술적인 논쟁은 활기를 잃었다.

이 시기에는 기덴도의 교관인 몬조 하카세의 지위가 상승하여 묘교도의 교관인 묘교 하카세를 능가하게 되었다. 본래 몬조 하카세는 묘교도에 부속된 직책이었으나, 그 위상이 높아지면서 묘교도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하락하여 학과로서의 중심적인 위치를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 교육은 기본적인 소양으로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기덴도의 학생인 文章生|몬죠쇼일본어를 비롯한 다른 학과 학생들이 묘교도의 강의를 청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묘교도 내부에서는 본과로서의 자부심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묘교 하카세를 지낸 토이치 아리마사(나카하라 씨의 시조)는 안와 2년(969년)에 작성한 해문(解文)에서 기덴도와 명법도를 '소도(小道)' 즉, 중요도가 낮은 학문이라고 평가하며 묘교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이 내용은 『류주부선초』에 실려 있다).

한편, 묘교도의 교관직은 나카하라 씨와 기요하라 씨 두 가문이 대대로 이어받는 세습이 관례화되었고, 이로 인해 묘교도의 학문적 경향은 주로 경전의 자구를 해석하는 훈고학 연구에 치중하게 되었다. 명경과(明經科) 시험인 명경시(明經試)는 필수 경전 두 과목에서 총 3문제, 선택 경전 두 과목에서 3~4문제가 출제되어, 총 10문제 중 6문제 이상을 맞춰야 합격할 수 있었다.

또한, 쇼랴쿠 4년(993년)에는 묘교 하카세 나카하라 무네토키의 건의로 명경득업생(明經得業生)에 준하는 지위인 명경문자생 제도가 신설되었다. 8명에서 10명으로 구성된 명경문자생은 시험에 합격하면 득업생과 비슷한 자격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기요하라 씨의 후손인 후나바시 가와 후시하라 가가 박사직을 세습하였으나, 당시 유교 내에서 새롭게 부상한 송학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묘교 박사는 점차 명목상의 관직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6. 2. 세습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묘교도의 교관직은 나카하라 씨와 기요하라 씨 두 가문에 의해 사실상 세습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러한 세습 경향과 맞물려 묘교도 자체는 점차 훈고학 연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기요하라 씨의 후손인 후나바시 가와 후시하라 가가 박사 직위를 세습하였다. 하지만 당시 유교 학계에서는 새롭게 부상한 송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 가문이 세습한 묘교 박사직은 점차 실질적인 권위보다는 명목상의 관직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6. 3.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는 기요하라 씨의 후손인 후나바시 가와 후시하라 가가 박사직을 세습하였다. 하지만 당시 유학계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던 송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묘교도 박사는 점차 이름뿐인 명목상의 관직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갔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