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시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정부 시대는 1120년 윌리엄 애설링의 죽음으로 시작된 잉글랜드의 내전이다. 헨리 1세 사후, 그의 딸 마틸다와 조카 스티븐이 왕위 계승을 다투며 혼란이 발생했다. 스티븐이 왕위를 차지했지만, 마틸다와 그녀의 지지자들의 반란으로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싸였다. 1138년부터 로버트 글로스터 백작의 반란, 스코틀랜드의 침공, 웨일스인들의 독립 시도 등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 1141년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이 포로로 잡히고 마틸다가 런던에 입성했으나, 윈체스터 전투에서 로버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교착 상태가 이어지다, 1153년 월링퍼드 조약으로 스티븐은 왕위를 유지하고 헨리 피츠엠프러스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고 헨리 2세가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정부시대 - 대지의 기둥
켄 폴릿이 1989년에 발표한 역사 소설인 대지의 기둥은 12세기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킹스브리지라는 가상의 마을에 대성당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당시 사회의 혼란과 변화를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 무정부시대 - 월링퍼드 조약
월링퍼드 조약은 1153년 스티븐 왕과 앙주 백작 헨리 커트맨틀 간에 체결되어 18년간의 무정부 시대를 종식시키고 헨리를 후계자로 지명하며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작을 알린 합의이다. - 11세기 분쟁 - 동로마-조지아 전쟁
동로마-조지아 전쟁은 10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왕국 간에 발생한 영토 분쟁, 정치적 경쟁,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일련의 분쟁과 갈등을 의미한다. - 11세기 분쟁 - 티베트 분열 시대
티베트 분열 시대는 랑다르마 왕의 암살 후 토번 제국이 분열되어 여러 군소 왕국이 난립한 시기이며, 티베트 불교는 닝마파를 중심으로 박해받았지만 몽골의 침공과 원나라의 지배를 거쳐 샤카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종식되었다. - 11세기 잉글랜드 -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1066년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침공과 점령으로 일어난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은 잉글랜드의 정치, 문화,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치며 앵글로색슨 귀족의 몰락과 노르만족의 지배 계층 부상,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확립, 봉건 제도 확립, 앵글로-노르만 문화 발전 등 사회 전반의 변화를 가져왔다. - 11세기 잉글랜드 -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게르만 부족들이 브리튼 섬에 정착하여 여러 왕국을 건설하고 기독교 전파, 왕국 간 다툼, 바이킹 침략 등을 겪으며 발전했지만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막을 내린 시기로, 고대 영어 발전과 독특한 문화, 정치 체제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무정부시대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무정부시대 |
시기 | 1135년 12월 – 1153년 11월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및 노르망디 공국 |
결과 | 월링퍼드 조약: 스티븐이 왕위를 유지하는 대신 마틸다의 아들 헨리가 후계자로 지명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티븐 오브 블루아 지지 세력 |
교전국 2 | 신성로마황후 마틸다 & 헨리 플랜태저넷 지지 세력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스티븐 오브 블루아 마틸데 드 불로뉴 여백작 |
교전국 2 지휘관 | 신성로마황후 마틸다 로버트 글로스터 헨리 플랜태저넷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알바 왕 다비드 1세 |
전투 목록 | |
주요 전투 | 워크 공성전 클리더로 전투 스탠더드 전투 링컨 전투 윈체스터 패주 옥스퍼드 공성전 윌턴 전투 월링퍼드 |
시각 자료 | |
![]() |
2. 발단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 윌리엄 애설링이 1120년 선박 침몰로 죽으면서 노르망디가의 남계 자손이 단절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255] 헨리 1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간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1135년 헨리 1세가 죽자 그 조카 스티븐 블루아가 남동생 윈체스터 주교 헨리 블루아의 도움을 받아 잉글랜드 왕위를 장악했다.[254] 스티븐의 초기 치세는 잉글랜드 남작들의 반란과 웨일스인들의 독립 시도, 스코트인들의 침략으로 얼룩졌다.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커다란 반란들이 계속되자 마틸다는 이복오라비(즉 헨리 1세의 사생아)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의 지원을 받아 1139년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노르만 왕조 제3대 헨리 1세에게는 20명이 넘는 서자가 있었지만, 상속권을 가진 적자는 단 2명뿐이었다. 게다가 1120년에 그 중 한 명인 윌리엄을 화이트 쉽 난파 사고로 잃었다. 이 사건 이후 헨리 1세는 후처를 맞이했지만, 자녀는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하인리히 5세에게 앞서 과부가 된 또 다른 적자인 딸 마틸다를 1127년에 불러들여 후계자로 지명하고 제후들에게 맹세하게 했다. 또한, 마틸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유력 프랑스 귀족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와 재혼시켰다. 이 혼인은, 종래 적대 관계에 있던 앙주 가문을 아군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는 반면, 잉글랜드 및 노르망디 공국 제후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블루아 가문의 에티엔이 런던에 들어가 잉글랜드 왕국을 장악하고 잉글랜드 왕 스티븐이 되었다. 그는 헨리 1세가 사망 직전에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고, 또한 동생 윈체스터 주교 헨리의 협력으로 교회의 지지를 받아 마틸다에 대한 맹세는 강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여성 상속인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왕국의 살리카 법도 이용했다.
잉글랜드 및 노르망디 제후들은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에 대한 거부감과 노르망디의 오랜 숙적인 앙주 백작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스테판의 즉위를 지지했다. 마틸다는 맹세 위반이라며 로마 교황에게 호소했지만, 교황과 캔터베리 대주교도 스테판을 지지했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숙부에 해당하는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1세도 1138년 스탠다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철수했다.
2. 1. 헨리 1세의 후계 문제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 윌리엄 애설링이 1120년 선박 침몰로 사망하면서 노르망디가의 남계 자손이 단절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255] 헨리 1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간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그 조카 스티븐 블루아가 남동생 윈체스터 주교 헨리 블루아의 도움을 받아 잉글랜드 왕위를 장악했다.[254]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둘러싼 왕위 계승 위기는 11세기와 12세기 프랑스 북서부의 여러 공작과 백작들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자주 충돌하면서 발생했다.[2]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2세 공작은 잉글랜드를 노르만 정복하여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 남부로 진격했다. 윌리엄 사후 그의 자녀들은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3] 윌리엄의 아들 헨리 1세는 형 윌리엄 2세가 죽은 후 권력을 잡았고, 틴슈브레 전투에서 형 로버트 커스토즈를 격파했다.[4] 헨리는 자신의 영토를 유일한 적자인 윌리엄 아델린에게 상속하려 했다.[5]
1120년, ''백선(White Ship)''이 바르플뢰르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던 중 침몰하여 아델린을 포함한 약 300명이 사망했다.[6] 아델린의 사망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은 불확실해졌다. 당시 서유럽의 계승 규칙은 불확실했는데,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장자 상속이 보편화되고 있었지만,[8]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장남이 가부장적 토지를, 차남 이하의 아들이 더 작거나 최근에 획득한 영지를 받는 전통이 있었다.[8]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자 헨리에게는 마틸다라는 적자 외에 다른 자녀가 없었다.[10] 헨리는 루뱅의 아델라이자와 재혼했지만, 적자가 더 생길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대신 마틸다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11] 마틸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5세와 결혼하여 황후 칭호를 얻었고, 1128년에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재혼했다.[12] 앙주의 통치자는 노르만의 전통적인 적이었기 때문에 조프루아는 앵글로-노르만 엘리트에게 인기가 없었다.[13] 헨리의 국내 정책, 특히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높은 수준의 수입 징수로 인해 긴장이 계속 커졌지만,[14] 갈등은 국왕의 개성과 명성으로 억제되었다.[15]
헨리는 1127년, 1128년, 1131년에 자신의 궁정에서 마틸다를 자신의 직계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녀의 후손을 그녀 다음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는 서약을 하도록 요구했다.[16] 스티븐은 1127년에 이 서약을 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마틸다, 조프루아 사이의 관계는 국왕의 생애 말년에 점점 더 긴장되었다. 1135년 헨리에게 노르망디의 왕실 성을 마틸다에게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이 그녀에게 즉시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했지만, 헨리는 이를 거부했다.[18] 노르망디 남부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고, 조프루아와 마틸다는 반란군을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했다.[8] 이 대결 중에 헨리는 리옹-라-포레 근처에서 병들어 사망했다.[13]
|thumb|upright=1.3|alt=A medieval picture of King Stephen being crowned|스테판 왕의 대관식을 묘사한 13세기 그림
헨리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는 스테판이 차지했다. 스테판은 블루아의 스테판-헨리와 노르망디의 아델라의 아들이었고, 마틸다와는 사촌 관계였다. 스테판은 헨리의 봉신으로서 영지를 받았고 불로뉴의 마틸다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북서부와 남동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다.[20][21] 1135년까지 스테판은 앵글로-노르만 사회에서 확고한 인물이었고, 그의 남동생 헨리는 윈체스터 주교가 되었다.[22]
헨리 1세의 사망 소식이 퍼졌을 때, 제프리와 마틸다는 앙주에 있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포함한 왕실 군대에 맞서 반군을 지원하는 것이 매우 어색했다.[8] 스테판은 불로뉴에 있었고, 헨리의 사망 소식을 듣자 군사 가신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떠났다. 12월 8일까지 런던 외곽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도착했고, 그 다음 주 동안 잉글랜드에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28]
런던의 군중들은 스테판이 새로운 왕에게 새로운 권리와 특권을 부여할 것이라고 믿고 그를 새로운 군주로 선포했다.[29] 블루아의 헨리는 교회의 지지를 스테판에게 전달했다. 스테판은 로저에게 왕실 재무부를 넘기도록 지시하면서 윈체스터로 진격했다.[30] 12월 15일, 헨리는 스테판이 교회에 광범위한 자유와 자유를 부여하겠다는 협정을 전달했다.[31] 헨리는 고인이 법정에서 맹세를 하도록 주장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32] 또한 헨리는 휴 빅드에게 왕이 임종 시 계승에 대한 마음을 바꿔 스테판을 지명했다고 맹세하도록 설득했다.[32] 스테판의 대관식은 12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34]
한편, 노르만 귀족들은 르 노브르에 모여 스테판이 잉글랜드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테오발트를 왕으로 선포하는 것을 논의했다.[36] 테오발트는 12월 21일 리외에서 노르만 남작들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만났지만, 스테판의 대관식 소식에 방해받았다.[37] 테오발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분할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작들이 즉시 지지를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노르만족의 제안에 동의했다.[38] 스테판은 이후 테오발트에게 재정적 보상을 했고, 테오발트는 그 대가로 블루아에 머물면서 동생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39]
노르만 왕조 제3대 헨리 1세에게는 20명이 넘는 서자가 있었지만, 상속권을 가진 적자는 단 2명뿐이었다. 1120년 화이트 쉽 난파 사고로 윌리엄을 잃은 후, 헨리 1세는 신성 로마 황제하인리히 5세에게 과부가 된 딸 마틸다를 1127년 후계자로 지명하고 제후들에게 맹세하게 했다. 또한, 마틸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와 재혼시켰다. 이 혼인은 앙주 가문을 아군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지만, 잉글랜드 및 노르망디 공국 제후들의 반감을 샀다.
2. 2. 스티븐의 왕위 찬탈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 윌리엄 애설링이 1120년 선박 침몰로 사망하면서 노르망디가의 남계 자손이 단절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255] 헨리 1세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간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지만, 1135년 헨리 1세가 죽자 그의 조카 스티븐 블루아가 남동생 윈체스터 주교 헨리 블루아의 도움을 받아 잉글랜드 왕위를 장악했다.[254]헨리 1세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 왕위는 그의 딸 마틸다가 아닌 스테판이 차지하게 되었다. 스테판은 북부 프랑스의 강력한 백작 중 한 명인 블루아의 스테판-헨리와 정복왕 윌리엄의 딸인 노르망디의 아델라의 아들이었다. 스테판은 자신의 영지가 없는 차남으로서 헨리의 봉신이 되어 그의 궁정에 참여하고 그의 원정에 참여했다.[20] 그 대가로 그는 영지를 받았고 1125년 불로뉴의 마틸다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불로뉴와 잉글랜드 북서부와 남동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불로뉴 백작의 딸이자 유일한 상속녀였다.[21] 1135년까지 스테판은 앵글로-노르만 사회에서 확고한 인물이었고, 그의 남동생 헨리는 윈체스터 주교가 되었다.[22]
헨리 1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퍼졌을 때, 왕위 계승 후보자 중 많은 사람들이 적절하게 대응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제프리와 마틸다는 앙주에 있었고,[8] 이들 남작 중 다수는 고인이 제대로 매장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겠다는 맹세를 했고, 이는 그들이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24] 스테판의 형인 테오발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되었고, 여전히 블루아에 있었다.[26]
스테판은 불로뉴에 있었고, 헨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자 군사 가신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떠났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도버와 캔터베리의 항구를 점령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 스테판의 접근을 거부했다고 한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판은 12월 8일까지 런던 외곽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도착했고, 그 다음 주 동안 잉글랜드에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28]
런던의 군중들은 전통적으로 잉글랜드 왕을 선출할 권리를 주장했고, 그들은 스테판이 새로운 왕에게 새로운 권리와 특권을 부여할 것이라고 믿고 그를 새로운 군주로 선포했다.[29] 블루아의 헨리는 교회의 지지를 스테판에게 전달했다. 스테판은 로저에게 왕실 재무부를 스테판에게 넘기도록 지시하면서 윈체스터로 진격할 수 있었다.[30] 12월 15일, 헨리는 스테판이 캔터베리 대주교와 교황 사절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교회에 광범위한 자유와 자유를 부여하겠다는 협정을 전달했다.[31] 스테판이 마틸다 여제를 지지하기 위해 했던 종교적 맹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헨리는 고인이 법정에서 맹세를 하도록 주장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32] 또한 헨리는 고인의 왕실 집사였던 휴 빅드에게 왕이 임종 시 계승에 대한 마음을 바꿔 스테판을 지명했다고 맹세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32] 스테판의 대관식은 12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34]
한편, 노르만 귀족들은 르 노브르에 모여 스테판이 잉글랜드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테오발트를 왕으로 선포하는 것을 논의했다.[36] 테오발트는 12월 21일 리외에서 노르만 남작들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만났지만, 그들의 논의는 다음 날 스테판의 대관식이 열릴 것이라는 잉글랜드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의해 방해받았다.[37] 테오발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분할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작들이 즉시 지지를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노르만족의 제안에 동의했다.[38] 스테판은 이후 테오발트에게 재정적 보상을 했고, 테오발트는 그 대가로 블루아에 머물면서 동생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39]
스테판은 대관식 직후 잉글랜드 북부 문제에 즉시 개입해야 했다.[33]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는 헨리 1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북부를 침공하여 칼라일, 뉴캐슬어폰타인과 기타 주요 요새들을 점령했다.[33] 당시 잉글랜드 북부는 분쟁 지역이었으며, 스코틀랜드 왕들은 전통적으로 컴벌랜드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데이비드는 노섬브리아에 대한 권리도 주장했다.[41] 스테판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더럼에서 데이비드와 만났다.[42] 데이비드가 점령한 영토의 대부분을 칼라일을 제외하고 반환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그 대가로 스테판은 데이비드의 아들 노섬브리아 공작 헨리의 잉글랜드 내 소유, 즉 헌팅던 백작 영지를 인정했다.[42]
남쪽으로 돌아온 스테판은 1136년 부활절에 첫 번째 왕실 궁정을 열었다.[43] 스테판은 새로운 왕실 칙서를 발표하여 교회에 약속한 내용을 확인하고, 헨리의 왕실 숲 정책을 뒤집고 왕실 법률 시스템의 남용을 개혁할 것을 약속했다.[45] 스테판은 헨리 1세의 정책을 계승하는 자연스러운 후계자임을 자처했고, 기존의 일곱 개의 백작령을 기존 소유자들에게 재확인했다.[46] 부활절 궁정은 사치스러운 행사였으며, 행사 자체, 의복, 선물에 많은 돈이 지출되었다.[47] 스테판은 참석자들에게 토지와 특전을 부여하고, 수많은 교회 재단에 토지와 특권을 기증했다.[48] 스테판의 왕위 계승은 교황의 비준을 받아야 했고, 블로아의 헨리는 스테판의 형인 테오발드와 프랑스 왕 루이 6세로부터 지지 증언을 받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루이 6세에게 스테판은 프랑스 북부 앙주 세력에 대한 유용한 균형을 제공했다.[49]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그해 말 편지를 통해 스테판을 왕으로 확정했고, 스테판의 고문들은 스테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 편지를 잉글랜드 전역에 널리 배포했다.[50]
스테판의 초기 치세는 잉글랜드 남작들의 반란과 웨일스인들의 독립 시도, 스코트인들의 침략으로 얼룩졌다.[254] 1136년 1월 루흐르 전투에서 웨일스군의 승리, 4월 리처드 피츠 길버트 드 클레어의 매복 성공 이후, 남부 웨일스가 반란을 일으켰다.[51] 오와인 귀네드와 그루피드 압 리스는 카마던 성을 포함한 상당한 영토를 점령했다.[41] 스테판은 웨일스로 보내 이 지역을 진압했지만 모두 실패했다.[52] 한편, 스테판은 남서부의 두 번의 반란을 진압했다.[53]
앙주의 제프리는 1136년 초에 노르망디를 공격했고, 잠정적인 휴전 이후 같은 해 말에 침공했다.[54] 스테판은 1137년에야 공작령으로 돌아와 루이 6세 및 테오발드와 만나, 이 지역에서 앙주 세력의 증가에 대항하기 위해 비공식 지역 동맹에 동의했다.[56] 이 거래의 일환으로 루이는 스테판의 아들 유스타스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유스타스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57] 스테판은 1135년 말 제프리가 점령한 노르망디와 앙주 경계의 아르장탕 지역을 되찾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58] 스테판은 이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편성했지만, 이프르의 윌리엄이 이끄는 플랑드르 용병 부대와 현지 노르만 남작 간의 마찰로 인해 군대의 두 부대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59] 노르만군은 왕을 버리고 탈주했고, 스테판은 캠페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60] 스테판은 제프리와 다시 휴전에 동의하여 노르망디 국경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연간 2,000 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54]
스테판의 즉위 첫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스테판은 스코틀랜드와의 북부 국경을 안정시키고, 제프리의 노르망디 공격을 억제했으며, 루이 6세와 평화를 유지하고,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남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63] 그러나 잉글랜드 북부는 이제 데이비드와 헨리 공자가 통제했고, 스테판은 웨일스를 포기했으며, 노르망디의 전투는 공작령을 상당히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점점 더 많은 수의 남작들은 스테판이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토지나 칭호를 주지 않았다고 느꼈다.[64] 스테판은 또한 빠르게 돈이 떨어지고 있었다. 헨리의 상당한 재산은 스테판의 더 사치스러운 궁정을 운영하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싸우는 용병 군대를 모집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으로 인해 1138년까지 고갈되었다.[65]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블루아 가문의 에티엔이 런던에 들어가 잉글랜드 왕국을 장악하고 잉글랜드 왕 스티븐이 되었다. 그는 헨리 1세가 사망 직전에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고, 또한 동생 의 협력으로 교회의 지지를 받아 마틸다에 대한 맹세는 강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여성 상속인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왕국의 살리카 법도 이용했다.
잉글랜드 및 노르망디 제후들은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에 대한 거부감과 노르망디의 오랜 숙적인 앙주 백작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스테판의 즉위를 지지했다. 마틸다는 맹세 위반이라며 로마 교황에게 호소했지만, 교황과 캔터베리 대주교도 스테판을 지지했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숙부에 해당하는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1세도 1138년 스탠다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철수했다.
3. 왕위 쟁탈전
1138년 동안 여러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65] 헨리 1세의 사생아이자 마틸다 황후의 이복 형제인 로버트는 노르망디와 글로스터 백작령을 통제하는 강력한 앵글로-노르만 남작 중 한 명이었다.[66] 1138년, 로버트는 스테판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마틸다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켄트와 잉글랜드 남서부 전역에서 대규모 지역 반란을 촉발시켰지만, 로버트 본인은 노르망디에 머물렀다.[67] 프랑스에서 조프루아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다시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역시 다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여 자신의 조카인 마틸다 황후의 왕위 주장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요크셔로 남하했다.[69]
스테판은 반란과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하여 노르망디보다는 잉글랜드에 우선적으로 집중했다. 그의 아내 마틸다는 로버트의 통제하에 있는 주요 항구인 도버를 되찾기 위해 불로뉴에서 배와 자원을 받아 켄트로 보내졌다.[66] 스테판의 기사단 소수는 스코틀랜드와의 전투를 돕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데이비드의 군대는 그해 8월 요크 대주교인 서스턴의 군대에 의해 표준 전투에서 패배했다.[69]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여전히 잉글랜드 북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69] 스테판은 직접 글로스터셔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먼저 웨일스 변경지로 북쪽으로 쳐들어가 헤리퍼드와 슈루즈베리를 점령한 다음 배스로 향했다.[66] 브리스톨은 그에게 너무 강력했고, 스테판은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약탈하는 것에 만족했다.[66] 도버는 그해 말에 마침내 여왕의 군대에 항복했다.[71]
스테판의 잉글랜드 군사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역사가 데이비드 크라우치는 이를 "최고 수준의 군사적 성과"라고 묘사한다.[71] 국왕은 자신의 군사적 우위를 이용하여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을 기회를 잡았다.[71] 스테판의 아내 마틸다는 스테판과 데이비드 사이에 또 다른 협정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이를 더럼 조약이라고 불렀다. 노섬브리아와 컴브리아는 그들의 충성과 국경에서의 미래의 평화를 조건으로 데이비드와 그의 아들 헨리에게 실제로 부여될 것이다.[69] 라눌프, 체스터 백작은 칼라일과 컴벌랜드를 전통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이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넘어가게 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이는 전쟁에서 오랫동안 지속될 결과를 초래할 문제였다.[132]
1139년까지 로버트와 마틸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할 것이 임박해 보였다. 제프리와 마틸다는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확보했고, 로버트와 함께 해협 횡단 원정을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데 한 해를 시작했다.[72]
한편 스티븐은 몇 개의 추가적인 백작령을 창설하여 다가올 분쟁을 준비했다.[74] 헨리 1세 시대에는 소수의 백작령만 존재했으며, 이는 대체로 상징적인 성격이었다. 스티븐은 그보다 훨씬 많은 백작령을 만들고, 그들을 충성스럽고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채웠으며, 국가의 더 취약한 지역에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토지와 추가적인 행정 권한을 부여했다.[75] 스티븐은 그의 주요 고문인 왈레란 드 보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몽 쌍둥이와 그들의 남동생, 사촌들은 이 새로운 백작령의 대부분을 받았다.[77] 1138년 이후 스티븐은 그들에게 워체스터, 레스터, 허트퍼드, 워릭 그리고 펨브로크 백작령을 주었는데, 특히 스티븐의 새로운 동맹인 헨리 왕자가 컴벌랜드와 노섬브리아에서 소유한 재산과 결합되었을 때, 이는 문제의 남서부, 체스터와 왕국의 나머지 지역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는 넓은 영토를 만들었다.[78]
스티븐은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일련의 주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왕실 행정부는 솔즈베리 주교 로저 오브 솔즈베리가 이끌었고, 로저의 조카들인 링컨 주교 알렉산더 오브 링컨과 엘리 주교 나이젤이 각각 지원했으며, 재상이었던 로저의 아들 로저 르 포어가 지원했다.[79] 이 주교들은 교회 통치자이면서 강력한 토지 소유주였으며, 새로운 성을 짓고 군사력 규모를 늘리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스티븐은 그들이 엠프레스 마틸다에게 망명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1139년 6월, 스티븐은 옥스퍼드에서 법정을 열었는데, 이때 브리타니의 앨런과 로저의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스티븐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건일 것이다.[80] 스티븐은 로저와 다른 주교들에게 잉글랜드에 있는 모든 성을 항복하라고 요구함으로써 대응했다. 이 위협은 주교들의 체포로 뒷받침되었는데, 데바이시스 성에 피신한 나이젤은 예외였다. 이 주교는 스티븐이 성을 포위하고 로저 르 포어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한 후에야 항복했다.[81] 나머지 성들은 왕에게 항복했다.[80] 이 사건으로 주교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은 제거되었지만, 스티븐이 고위 성직자, 특히 그의 형제 헨리와의 관계에 손상을 입혔을 수 있다.[83] 이제 양측 모두 전쟁 준비를 마쳤다.
앙주 침공은 마침내 8월에 시작되었다. 발드윈 드 레버스는 노르망디에서 웨어럼으로 건너와 엠프리스 마틸다의 침공군을 맞이할 항구를 점령하려 시도했지만, 스티븐의 군대는 그를 남서부로 후퇴하게 만들었다.[114] 다음 달, 엠프리스는 과부 여왕 아델리자의 초청을 받아 아룬델에 상륙했고, 9월 30일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엠프리스는 140명의 기사와 함께 잉글랜드에 도착했다.[114] 마틸다는 아룬델 성에 머물렀고, 로버트는 반란을 지원하고 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할 기회를 잡은 글로스터의 마일스와 연합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진군하여 월링퍼드 성과 브리스톨로 향했다.[116]
스티븐은 즉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룬델을 포위하고 성 안에 마틸다를 가두는 것으로 대응했다.[117] 그 후 스티븐은 형제인 헨리 드 블로이스가 제안한 휴전에 동의했다. 휴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티븐은 먼저 마틸다를 포위에서 해제한 다음, 그녀와 그녀의 기사 가신들이 남서부로 호송되어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재회하도록 허용했다.[117] 스티븐이 라이벌을 풀어준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당시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가 엠프리스를 풀어주고 로버트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스티븐에게 가장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스티븐은 엠프리스가 아니라 로버트를 분쟁의 주요 상대로 여겼을 수 있다.[117] 스티븐은 또한 아룬델에서 군사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성은 거의 난공불락으로 여겨졌고, 그는 로버트가 서쪽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동안 자신의 군대가 남쪽에 묶여 있는 것을 우려했을 수 있다.[118]
엠프리스에게 새로 전향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마틸다는 이제 글로스터와 브리스톨에서 남서쪽 데본과 콘월까지, 서쪽 웨일스 변경지대까지, 동쪽으로 옥스퍼드와 월링퍼드까지 뻗어 런던을 위협하는 영토를 통제했다.[121] 그녀는 로버트의 거점인 브리스톨 근처, 하지만 이복 형제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떨어진 글로스터에 자신의 궁정을 설립했다.[122] 스티븐은 이 지역을 되찾기 시작했다.[123] 그는 템스 회랑을 통제하는 월링퍼드 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브리엔 피츠카운트가 점령하고 있었고, 스티븐은 이곳이 너무 잘 방어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4] 스티븐은 성을 봉쇄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트라우브리지를 공격하고, 그 과정에서 사우스 세르니와 말름즈베리의 성을 점령했다.[125] 한편, 글로스터의 마일스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월링퍼드에서 스티븐의 후위 부대를 공격하고 런던 진격을 위협했다.[126] 스티븐은 서부 작전을 포기하고 상황을 안정시키고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동쪽으로 돌아가야 했다.[127]
1140년 초, 전년도에 스티븐이 성을 몰수했던 엘리의 나이젤 주교도 스티븐에 반란을 일으켰다.[127] 나이젤은 이스트 앵글리아를 점령하려 했고, 보호적인 펜랜드로 둘러싸인 엘리 섬에 작전 기지를 세웠다.[127] 스티븐은 즉각 대응하여 펜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보트를 묶어 둑길을 만들어 섬을 기습 공격했다.[128] 나이젤은 글로스터로 도망쳤지만, 그의 병력과 성은 점령되었고, 동쪽의 질서는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128]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병력은 스티븐이 1139년 작전에서 점령했던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129]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헨리 드 블로이스는 바스에서 평화 회담을 열었고, 로버트는 엠프리스를 대표했고, 마틸다 여왕과 테오발드 대주교는 왕을 대표했다.[130] 이 회담은 헨리와 성직자들이 평화 협정의 조건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붕괴되었고, 스티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131]
체스터의 라눌프는 스티븐이 잉글랜드 북부를 헨리 왕자에게 선물한 것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132] 라눌프는 크리스마스 이후 왕자가 스티븐의 궁정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는 계획을 세웠다.[132] 스티븐은 이 계획에 대한 소문을 듣고 헨리를 직접 북쪽으로 호송했지만, 이 제스처는 라눌프에게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었다.[132] 라눌프는 이전에 스티븐이 점령하고 있는 링컨 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었고, 사회적인 방문을 가장하여 기습 공격으로 요새를 점령했다.[133] 스티븐은 북쪽으로 링컨으로 진군하여 라눌프와 휴전에 동의했는데, 아마도 그를 엠프리스의 파벌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라눌프가 성을 계속 점령할 수 있도록 했다.[134] 스티븐은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라눌프, 그의 형제, 그들의 가족이 링컨 성에서 최소한의 경비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는 그 자신의 기습 공격의 좋은 목표였다.[134] 방금 맺은 거래를 포기하고 스티븐은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북쪽으로 급히 향했지만,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라눌프는 링컨에서 탈출하여 엠프리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고, 스티븐은 성을 포위해야 했다.[134]
1141년 2월 링컨 근처에서 양군이 격돌하여 스티븐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마틸다는 런던에 입성하여 "잉글랜드의 여주인(Lady of the English)"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녀의 거만한 태도는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곧 옥스퍼드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스티븐의 아내 마틸드는 용병대를 이끌고 항전을 계속했고, 1142년 9월 윈체스터 근처의 전투에서 로버트를 포로로 잡았다.
3. 1. 초기 전투 (1139-1140)
1138년 동안 여러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65] 헨리 1세의 사생아이자 마틸다 황후의 이복 형제인 로버트는 노르망디와 글로스터 백작령을 통제하는 강력한 앵글로-노르만 남작 중 한 명이었다.[66] 1138년, 로버트는 스테판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마틸다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켄트와 잉글랜드 남서부 전역에서 대규모 지역 반란을 촉발시켰지만, 로버트 본인은 노르망디에 머물렀다.[67] 프랑스에서 조프루아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다시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역시 다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여 자신의 조카인 마틸다 황후의 왕위 주장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요크셔로 남하했다.[69]스테판은 반란과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하여 노르망디보다는 잉글랜드에 우선적으로 집중했다. 그의 아내 마틸다는 로버트의 통제하에 있는 주요 항구인 도버를 되찾기 위해 불로뉴에서 배와 자원을 받아 켄트로 보내졌다.[66] 스테판의 기사단 소수는 스코틀랜드와의 전투를 돕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데이비드의 군대는 그해 8월 요크 대주교인 서스턴의 군대에 의해 표준 전투에서 패배했다.[69]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여전히 잉글랜드 북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69] 스테판은 직접 글로스터셔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먼저 웨일스 변경지로 북쪽으로 쳐들어가 헤리퍼드와 슈루즈베리를 점령한 다음 배스로 향했다.[66] 브리스톨은 그에게 너무 강력했고, 스테판은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약탈하는 것에 만족했다.[66] 도버는 그해 말에 마침내 여왕의 군대에 항복했다.[71]
스테판의 잉글랜드 군사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역사가 데이비드 크라우치는 이를 "최고 수준의 군사적 성과"라고 묘사한다.[71] 국왕은 자신의 군사적 우위를 이용하여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을 기회를 잡았다.[71] 스테판의 아내 마틸다는 스테판과 데이비드 사이에 또 다른 협정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이를 더럼 조약이라고 불렀다. 노섬브리아와 컴브리아는 그들의 충성과 국경에서의 미래의 평화를 조건으로 데이비드와 그의 아들 헨리에게 실제로 부여될 것이다.[69] 라눌프, 체스터 백작은 칼라일과 컴벌랜드를 전통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이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넘어가게 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이는 전쟁에서 오랫동안 지속될 결과를 초래할 문제였다.[132]
1139년까지 로버트와 마틸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할 것이 임박해 보였다. 제프리와 마틸다는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확보했고, 로버트와 함께 해협 횡단 원정을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데 한 해를 시작했다.[72]
한편 스티븐은 몇 개의 추가적인 백작령을 창설하여 다가올 분쟁을 준비했다.[74] 헨리 1세 시대에는 소수의 백작령만 존재했으며, 이는 대체로 상징적인 성격이었다. 스티븐은 그보다 훨씬 많은 백작령을 만들고, 그들을 충성스럽고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채웠으며, 국가의 더 취약한 지역에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토지와 추가적인 행정 권한을 부여했다.[75] 스티븐은 그의 주요 고문인 왈레란 드 보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몽 쌍둥이와 그들의 남동생, 사촌들은 이 새로운 백작령의 대부분을 받았다.[77] 1138년 이후 스티븐은 그들에게 워체스터, 레스터, 허트퍼드, 워릭 그리고 펨브로크 백작령을 주었는데, 특히 스티븐의 새로운 동맹인 헨리 왕자가 컴벌랜드와 노섬브리아에서 소유한 재산과 결합되었을 때, 이는 문제의 남서부, 체스터와 왕국의 나머지 지역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는 넓은 영토를 만들었다.[78]
스티븐은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일련의 주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왕실 행정부는 솔즈베리 주교 로저 오브 솔즈베리가 이끌었고, 로저의 조카들인 링컨 주교 알렉산더 오브 링컨과 엘리 주교 나이젤이 각각 지원했으며, 재상이었던 로저의 아들 로저 르 포어가 지원했다.[79] 이 주교들은 교회 통치자이면서 강력한 토지 소유주였으며, 새로운 성을 짓고 군사력 규모를 늘리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스티븐은 그들이 엠프레스 마틸다에게 망명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1139년 6월, 스티븐은 옥스퍼드에서 법정을 열었는데, 이때 브리타니의 앨런과 로저의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스티븐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건일 것이다.[80] 스티븐은 로저와 다른 주교들에게 잉글랜드에 있는 모든 성을 항복하라고 요구함으로써 대응했다. 이 위협은 주교들의 체포로 뒷받침되었는데, 데바이시스 성에 피신한 나이젤은 예외였다. 이 주교는 스티븐이 성을 포위하고 로저 르 포어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한 후에야 항복했다.[81] 나머지 성들은 왕에게 항복했다.[80] 이 사건으로 주교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은 제거되었지만, 스티븐이 고위 성직자, 특히 그의 형제 헨리와의 관계에 손상을 입혔을 수 있다.[83] 이제 양측 모두 전쟁 준비를 마쳤다.
|thumb|alt=1140년 잉글랜드의 정치 세력을 보여주는 색상 지도|1140년 웨일스와 잉글랜드 남부의 정치 지도; 빨간색 = 스티븐의 통제 지역, 파란색 = 마틸다, 회색 = 토착 웨일스인]]
앙주 침공은 마침내 8월에 시작되었다. 발드윈 드 레버스는 노르망디에서 웨어럼으로 건너와 엠프리스 마틸다의 침공군을 맞이할 항구를 점령하려 시도했지만, 스티븐의 군대는 그를 남서부로 후퇴하게 만들었다.[114] 다음 달, 엠프리스는 과부 여왕 아델리자의 초청을 받아 아룬델에 상륙했고, 9월 30일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엠프리스는 140명의 기사와 함께 잉글랜드에 도착했다.[114] 마틸다는 아룬델 성에 머물렀고, 로버트는 반란을 지원하고 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할 기회를 잡은 글로스터의 마일스와 연합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진군하여 월링퍼드 성과 브리스톨로 향했다.[116]
스티븐은 즉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룬델을 포위하고 성 안에 마틸다를 가두는 것으로 대응했다.[117] 그 후 스티븐은 형제인 헨리 드 블로이스가 제안한 휴전에 동의했다. 휴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티븐은 먼저 마틸다를 포위에서 해제한 다음, 그녀와 그녀의 기사 가신들이 남서부로 호송되어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재회하도록 허용했다.[117] 스티븐이 라이벌을 풀어준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당시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가 엠프리스를 풀어주고 로버트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스티븐에게 가장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스티븐은 엠프리스가 아니라 로버트를 분쟁의 주요 상대로 여겼을 수 있다.[117] 스티븐은 또한 아룬델에서 군사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성은 거의 난공불락으로 여겨졌고, 그는 로버트가 서쪽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동안 자신의 군대가 남쪽에 묶여 있는 것을 우려했을 수 있다.[118]
엠프리스에게 새로 전향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마틸다는 이제 글로스터와 브리스톨에서 남서쪽 데본과 콘월까지, 서쪽 웨일스 변경지대까지, 동쪽으로 옥스퍼드와 월링퍼드까지 뻗어 런던을 위협하는 영토를 통제했다.[121] 그녀는 로버트의 거점인 브리스톨 근처, 하지만 이복 형제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떨어진 글로스터에 자신의 궁정을 설립했다.[122] 스티븐은 이 지역을 되찾기 시작했다.[123] 그는 템스 회랑을 통제하는 월링퍼드 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브리엔 피츠카운트가 점령하고 있었고, 스티븐은 이곳이 너무 잘 방어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4] 스티븐은 성을 봉쇄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트라우브리지를 공격하고, 그 과정에서 사우스 세르니와 말름즈베리의 성을 점령했다.[125] 한편, 글로스터의 마일스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월링퍼드에서 스티븐의 후위 부대를 공격하고 런던 진격을 위협했다.[126] 스티븐은 서부 작전을 포기하고 상황을 안정시키고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동쪽으로 돌아가야 했다.[127]
|thumb|left|alt=헨리 왕자의 은화 사진|헨리 왕자의 은화 페니, 스티븐과의 평화 협정 후 노섬벌랜드의 코르브릿지에서 그의 이름으로 주조되었다.]]
1140년 초, 전년도에 스티븐이 성을 몰수했던 엘리의 나이젤 주교도 스티븐에 반란을 일으켰다.[127] 나이젤은 이스트 앵글리아를 점령하려 했고, 보호적인 펜랜드로 둘러싸인 엘리 섬에 작전 기지를 세웠다.[127] 스티븐은 즉각 대응하여 펜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보트를 묶어 둑길을 만들어 섬을 기습 공격했다.[128] 나이젤은 글로스터로 도망쳤지만, 그의 병력과 성은 점령되었고, 동쪽의 질서는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128]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병력은 스티븐이 1139년 작전에서 점령했던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129]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헨리 드 블로이스는 바스에서 평화 회담을 열었고, 로버트는 엠프리스를 대표했고, 마틸다 여왕과 테오발드 대주교는 왕을 대표했다.[130] 이 회담은 헨리와 성직자들이 평화 협정의 조건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붕괴되었고, 스티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131]
체스터의 라눌프는 스티븐이 잉글랜드 북부를 헨리 왕자에게 선물한 것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132] 라눌프는 크리스마스 이후 왕자가 스티븐의 궁정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는 계획을 세웠다.[132] 스티븐은 이 계획에 대한 소문을 듣고 헨리를 직접 북쪽으로 호송했지만, 이 제스처는 라눌프에게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었다.[132] 라눌프는 이전에 스티븐이 점령하고 있는 링컨 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었고, 사회적인 방문을 가장하여 기습 공격으로 요새를 점령했다.[133] 스티븐은 북쪽으로 링컨으로 진군하여 라눌프와 휴전에 동의했는데, 아마도 그를 엠프리스의 파벌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라눌프가 성을 계속 점령할 수 있도록 했다.[134] 스티븐은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라눌프, 그의 형제, 그들의 가족이 링컨 성에서 최소한의 경비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는 그 자신의 기습 공격의 좋은 목표였다.[134] 방금 맺은 거래를 포기하고 스티븐은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북쪽으로 급히 향했지만,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라눌프는 링컨에서 탈출하여 엠프리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고, 스티븐은 성을 포위해야 했다.[134]
1141년 2월 링컨 근처에서 양군이 격돌하여 스티븐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마틸다는 런던에 입성하여 "잉글랜드의 여주인(Lady of the English)"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녀의 거만한 태도는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곧 옥스퍼드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스티븐의 아내 마틸드는 용병대를 이끌고 항전을 계속했고, 1142년 9월 윈체스터 근처의 전투에서 로버트를 포로로 잡았다.
3. 2. 링컨 전투와 마틸다의 런던 입성 (1141)
전쟁 첫 해에는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마틸다는 잉글랜드 남서부와 템스 계곡 주변을 장악했고, 스티븐 왕은 잉글랜드 동남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전투는 공성전, 약탈전, 산병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모두 기본적으로 소모전의 양상을 띠었는데, 이 시기의 성관들이 방어력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병력은 용병이 다수였다. 1141년 스티븐이 링컨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면서 스티븐의 권위는 붕괴했다. 그러나 마틸다가 여왕 대관식을 올리려고 런던으로 들어갔다가 스티븐을 지지하는 시민들에게 쫓겨났고, 그 직후 스티븐의 아내 마틸데 드 불로뉴 여백작이 이끄는 군대가 윈체스터 전투에서 글로스터 백작을 붙잡아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면서 전세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1142년 옥스퍼드 공방전에서 스티븐이 마틸다를 거의 붙잡을 뻔 했으나 마틸다는 옥스퍼드 성관을 빠져나와 얼어붙은 템스강을 건너 탈출했다.
스티븐과 그의 군대가 1141년 초 링컨 성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로버트 오브 글로스터와 체스터의 라눌프는 다소 더 많은 병력으로 왕의 위치로 진격했다.[135] 이 소식이 스티븐에게 전해지자, 그는 전투를 벌일지 아니면 후퇴하여 추가 병력을 모을지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스티븐은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1141년 2월 2일에 링컨 전투가 벌어졌다.[135] 왕은 군대의 중앙을 지휘했고, 그의 오른편에는 브리타니의 앨런이, 왼편에는 오말의 윌리엄이 있었다.[136] 로버트와 라눌프의 군대는 기병에서 우위를 점했고, 스티븐은 자신의 기사들 중 다수를 하마시켜 견고한 보병 부대를 형성하게 했다. 그는 스스로 그들과 합류하여 전투에서 도보로 싸웠다.[136] 스티븐은 뛰어난 연설가가 아니었고, 전투 전 연설을 클레어의 볼드윈에게 위임했는데, 그는 고무적인 선언을 했다.[138] 윌리엄의 군대가 앙주 군의 웨일스 보병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후, 전투는 스티븐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139] 로버트와 라눌프의 기병대가 스티븐의 중앙을 포위했고, 왕은 적군에게 포위당했다.[139] 왈레론 드 보몽과 윌리엄 오브 입르를 포함한 스티븐의 지지자들 중 다수가 이 시점에서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스티븐은 계속 싸웠고, 먼저 칼로, 칼이 부러지자 빌린 전투 도끼로 자신을 방어했다.[140] 마침내 그는 로버트의 부대에게 압도당하여 구금된 채 전장에서 끌려갔다.[140]
로버트는 스티븐을 글로스터로 데려갔고, 거기서 왕은 마틸다 여제를 만났으며, 그 후에는 전통적으로 고위 죄수를 수감하는 데 사용되는 브리스톨 성으로 이송되었다.[142] 그는 처음에는 비교적 좋은 조건에 갇혀 있었지만, 나중에는 보안이 강화되었고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142] 여제는 이제 그의 자리에 스스로 여왕으로 즉위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동의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대관식이 필요했다.[143] 스티븐의 동생 헨리는 교황 특사 자격으로 부활절 전에 윈체스터에서 교회의 입장을 고려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여제가 잉글랜드에서 교회 업무를 통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데 동의하면 교회의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여제 마틸다와 개인적인 거래를 했다.[144] 헨리는 스티븐의 왕관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고갈된 왕실 재정을 여제에게 넘겨주었고, 편을 바꾸기를 거부한 스티븐의 지지자들 다수를 파문했다.[145] 캔터베리의 대주교 테오발드는 마틸다를 그렇게 빨리 여왕으로 선포하려 하지 않았고, 테오발드를 수장으로 한 성직자와 귀족 대표단이 브리스톨에서 스티븐을 만나 그들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자문했다. 즉,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포기해야 하는지 여부였다.[144] 스티븐은 상황을 고려할 때, 자신의 신하들을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에서 해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동의했다.[146]
성직자들은 부활절 후에 다시 윈체스터에 모여 여제를 그녀의 대관식의 전조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여주인"으로 선언했다.[146] 마틸다의 추종자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지만, 다른 주요 귀족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런던에서 온 대표단은 머뭇거렸다.[147] 마틸다 여왕은 편지를 써서 스티븐의 석방을 요구했다.[148] 마틸다 여제는 6월에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런던으로 진격했고, 그녀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149] 타워 오브 런던을 통제하는 제프리 드 맨데빌의 지원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븐과 마틸다 여왕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여전히 도시에 접근해 있었고 시민들은 여제를 환영하는 것을 두려워했다.[150] 6월 24일, 예정된 대관식 직전에, 도시는 여제와 제프리 드 맨데빌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마틸다와 그녀의 추종자들은 간신히 시간을 맞춰 옥스퍼드로 혼란스러운 후퇴를 했다.[151]
한편, 앙주의 조프루아는 노르망디를 다시 침공했고, 여전히 잉글랜드에서 싸우고 있던 보몽의 왈레론이 부재한 틈을 타, 센 강 남쪽과 리슬 강 동쪽의 모든 공작령을 점령했다.[152] 이번에도 스티븐의 동생 테오발드로부터 도움은 오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프랑스와의 문제, 즉 새로운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그의 아버지의 지역 동맹을 거부하고 앙주와의 관계를 개선했으며, 테오발드에 대해 더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이듬해 전쟁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어 이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153] 조프루아의 노르망디에서의 성공과 스티븐의 잉글랜드에서의 약세는 로버트와 여제에게 잉글랜드의 땅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노르망디의 재산을 조프루아에게 잃을까 두려워하는 많은 앵글로-노르만 남작들의 충성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154] 많은 이들이 스티븐의 파벌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왈레론은 1141년 중반에 배반을 결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앙주 군과 동맹을 맺어 자신의 조상 재산을 확보하고 우스터셔를 여제의 진영으로 데려오기 위해 노르망디로 건너갔다.[155] 왈레론의 쌍둥이 형제 레스터의 로버트는 동시에 분쟁에서 효과적으로 철수했다. 엘리의 나이젤 주교와 같은 여제의 다른 지지자들은 이전의 요새로 복귀했고, 다른 이들은 잉글랜드 서부에서 새로운 백작령을 받았다. 동전 주조에 대한 왕실의 통제가 붕괴되어, 전국 각지에서 지역 남작과 주교들이 동전을 주조하게 되었다.[156]
3. 3. 윈체스터 전투와 포로 교환 (1142)
전쟁 첫 해에는 양측 모두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마틸다는 잉글랜드 남서부와 템스 계곡 주변을 장악했고, 스티븐 왕은 잉글랜드 동남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전투는 소모전의 양상을 띠었는데, 이 시기의 성관들이 방어력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병력은 용병이 다수였다. 1141년 스티븐이 링컨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면서 스티븐의 권위는 붕괴했다.[157] 그러나 마틸다가 여왕 대관식을 올리려고 런던으로 들어갔다가 스티븐을 지지하는 시민들에게 쫓겨났고, 그 직후 스티븐의 아내 마틸데 드 불로뉴 여백작이 이끄는 군대가 윈체스터 전투에서 글로스터 백작을 붙잡아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면서 전세는 원점으로 돌아갔다.[165]스티븐의 아내 마틸다는 국왕이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국왕의 대의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틸다 여왕은 스티븐의 남은 부관들을 불러 모아 그와 왕족들을 남동부에 배치했고, 인구가 황후를 거부하자 런던으로 진격했다.[157] 여왕은 스티븐의 더 충성스러운 추종자들로부터 진정한 동정과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157] 주교는 길드포드에서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 여왕을 만나 지지를 그녀에게로 옮겼다.[159]
황후의 입장은 윈체스터 궤멸에서의 패배로 바뀌었다. 런던에서 후퇴한 후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황후는 7월에 윈체스터에 있는 그의 주교 성을 포위했다.[160]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틸다 여왕과 이프르의 윌리엄은 런던에서 온 새로운 병력으로 강화된 자신들의 군대로 앙주 군대를 포위했다.[161] 황후 마틸다는 측근인 피츠 백작과 콘월의 레지날드와 함께 도시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고, 나머지 군대는 왕실 군대를 지연시켰다.[162] 그 후의 전투에서 황후의 군대는 패배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 자신도 후퇴 중에 포로로 잡혔지만, 마틸다는 지쳐서 데바이즈에 있는 그녀의 요새로 탈출했다.[163]
스티븐과 로버트가 모두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장기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이 열렸지만, 마틸다 여왕은 황후에게 어떠한 타협도 제안하려 하지 않았고, 로버트는 그에게 스티븐 편으로 돌아설 것을 권유하는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164] 대신 11월에 양측은 단순히 두 지도자를 교환했다.[165] 헨리는 또 다른 교회 회의를 열어 이전 결정을 번복하고 스티븐의 통치 정당성을 재확인했으며, 1141년 크리스마스에 스티븐과 마틸다의 새로운 대관식이 거행되었다.[164]
1142년 초, 스티븐은 병에 걸렸고, 부활절 무렵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166] 그는 회복되어 북쪽으로 가서 새로운 군대를 일으키고 체스터의 제4대 백작 라눌프 드 제르농에게 다시 한번 편을 바꾸도록 성공적으로 설득했다.[167] 그런 다음 스티븐은 그 해 여름에 시렌체스터 성, 옥스퍼드셔 뱀프턴 성, 도싯 워햄 등을 공격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168] 1142년 중반에 로버트는 제프리를 돕기 위해 노르망디로 돌아갔고, 그 해 말에 영국으로 돌아왔다.[169] 한편, 마틸다는 스티븐 군대에게 압박을 받고 옥스퍼드에서 포위되었다.[168] 옥스퍼드 성은 강력한 요새였고, 스티븐은 이를 공격하기보다는 마틸다가 포위된 것을 알고 장기간 포위하는 것으로 결정해야 했다.[170] 크리스마스 직전에 황후는 성에서 몰래 나와 얼음이 언 강을 걸어서 건너 왕실 군대를 지나 윌링포드까지 안전하게 탈출했고, 성의 수비대는 다음 날 항복할 수 있었다.[171]
3. 4. 교착 상태 (1143-1146)
1140년대 중반 잉글랜드 양측 간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앙주의 조프루아는 1144년 루앙을 점령한 후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으면서 노르망디에서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172] 1143년 윌턴 전투에서 스티븐은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포위되었으나, 그의 관리인 윌리엄 마텔의 활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173][174] 스테판은 윌리엄의 충성에 대한 댓가로 셔본 성을 그의 몸값과 교환했다.[175]1143년 말, 에식스 백작인 제프리 드 멘데빌이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76] 스테판은 제프리를 체포하고 그의 성들을 넘겨받았지만, 제프리는 풀려나자 엘리 섬을 거점으로 케임브리지를 공격하며 런던으로 진격하려 했다.[178] 스테판은 벌웰 성을 포함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제프리를 막았다.[179]
1144년, 체스터의 라눌프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랭커스터 영지를 분할했다.[180] 서쪽에서는 글로스터 백작과 그의 추종자들이 왕당파 영토를 약탈했고, 월링포드 성은 앙주 세력의 요새로 남아 있었다.[180] 한편, 앙주의 조프루아는 루앙을 점령하여 노르망디를 완전히 장악했고, 루이 7세는 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했다.[167][181] 이 시기 스테판은 윌리엄 이프르 등 자신의 가신에게 의존했고, 백작들의 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다.[182]
1143년 이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스테판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183] 글로스터의 마일스가 사망하여 서쪽의 압박이 줄었고,[184] 제프리 드 멘데빌도 1144년 9월 벌웰 공격 중에 사망했다.[185] 1145년, 스테판은 패링던 성을 탈환했다.[185] 북쪽에서는 스테판이 체스터의 라눌프와 협정을 맺었지만, 1146년 라눌프를 체포하고 성을 넘겨받으려다 실패했다.[180] 이 일로 스테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갔다.[186]


4. 전쟁의 종결
1153년 헨리 피츠엠프러스가 잉글랜드를 재침했을 때, 양측 병력은 모두 전쟁에 지쳐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256] 월링퍼드 성관 공성전 이후 스티븐과 헨리는 월링퍼드 조약을 맺어 평화에 합의했다.[256] 이 조약에서 스티븐은 왕위를 유지하되 헨리를 후계자로 삼았다.[256]
1153년 스티븐의 적자 불로뉴 백작유스타스 4세가 급사하자, 스티븐은 마틸다의 아들 앙리와 평화 협정 (워링퍼드 협정, 윈체스터 협정이라고도 함)을 맺고, 자신의 왕위 승인과 교환하여 앙리를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조약 이듬해인 1154년 10월 25일 스티븐이 도버에서 사망한 후, 헨리가 헨리 2세로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했다.
4. 1. 월링퍼드 조약 (1153)
1153년 헨리 피츠엠프러스가 잉글랜드를 재침했을 때, 양측 병력은 모두 전쟁에 지쳐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256] 월링퍼드 성관 공성전 이후 스티븐과 헨리는 월링퍼드 조약을 맺어 평화에 합의했다.[256] 이 조약에서 스티븐은 왕위를 유지하되 헨리를 후계자로 삼았다.[256]헨리 핏츠엠프레스는 1153년 초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에서 그를 지원했다.[205] 스테판은 말름즈베리를 포위한 헨리 군대와 에이번 강에서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실패했다.[206] 악천후로 인해 임시 휴전에 동의하고 런던으로 돌아갔고, 헨리는 미들랜즈를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다.[206] 헨리와 그의 동맹군은 남서부, 미들랜즈, 잉글랜드 북부 대부분을 장악했다.[207] 부활절 직전 잉글랜드 고위 성직자 대표단은 스톡브리지에서 헨리와 그의 고문들을 만나 협상된 평화를 추구한다고 강조했다.[208]
스테판은 월링퍼드 성에 대한 포위를 강화했고, 헨리는 포위를 풀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210][211] 스테판은 대규모 병력을 모아 옥스퍼드에서 진군했고, 두 진영은 7월 월링퍼드에서 템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으나, 양측 남작들은 전투를 피하려 했다.[211][212] 그 결과, 교회의 중재로 휴전이 이루어졌다.[212]
월링퍼드 이후, 스테판과 헨리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스테판의 아들 유스타스는 평화로운 결과에 분노하여 캠브리지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했다.[213] 유스타스의 죽음은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214]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스테판은 옥스퍼드와 스탬퍼드를 잃었고, 노팅엄 성은 앙주 가문의 점령 시도에서 살아남았다.[215] 한편, 스테판의 형제인 블로이스의 헨리와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는 양측 사이에 영구적인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216]
11월, 스테판과 헨리 핏츠엠프레스는 윈체스터에서 만나 윈체스터 조약을 체결했다.[217] 스테판은 헨리 핏츠엠프레스를 양자이자 후계자로 인정하고, 헨리는 스테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스테판의 남은 아들 윌리엄은 헨리에게 충성하고 왕위 주장을 포기했다. 주요 왕실 성들은 헨리를 대신하여 보증인들이 보유하고, 스테판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으며,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해산될 것이었다.[218] 스테판과 헨리는 평화의 입맞춤으로 조약을 체결했다.[219]
1153년 스티븐의 적자 불로뉴 백작유스타스 4세가 급사하자, 스티븐은 마틸다의 아들 앙리와 평화 협정 (워링퍼드 협정, 윈체스터 협정이라고도 함)을 맺고, 자신의 왕위 승인과 교환하여 앙리를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조약 이듬해인 1154년 10월 25일 스티븐이 도버에서 사망한 후, 헨리가 헨리 2세로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했다.
4. 2. 헨리 2세의 즉위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작
1153년 헨리 피츠엠프러스가 잉글랜드를 재침했을 때, 양측 병력은 모두 전쟁에 지쳐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월링퍼드 성관 공성전 이후 스티븐과 헨리는 월링퍼드 조약을 맺어 스티븐이 왕위를 유지하되 헨리를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다.[256] 조약 이듬해인 1154년 스티븐이 죽고 헨리가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앙주가 출신 최초의 앵글인의 왕이 탄생했다. 헨리 2세의 즉위로 잉글랜드는 18년간의 내전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티븐이 헨리를 후계자로 인정한 것은 내전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220] 1154년에는 윌리엄이 헨리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221] 역사가 그레이엄 화이트는 윈체스터 조약을 "불안정한 평화"라고 묘사했다.[222]
1154년 스티븐은 플랑드르 백작인 티에리를 만나기 위해 도버로 갔으나, 위 질환으로 10월 25일 사망했다.[224] 헨리는 1154년 12월 8일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엘리너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했다.[225] 1155년 4월에는 왕실 법정이 소집되어 귀족들이 왕과 그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25]
헨리 2세는 헨리 1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내세우며 왕국 재건을 시작했다. 스티븐의 19년 통치는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로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문제는 스티븐의 왕위 찬탈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227] 헨리는 어머니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귀 기울일 것임을 보여주었다.[228]
잉글랜드는 전쟁으로 광범위한 고통을 겪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혼란, 사악함, 강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기록했다.[230] 왕실 화폐 제도는 파편화되었고, 왕실의 숲의 법은 붕괴되었다.[231][232] 헨리는 외국 용병을 추방하고 승인되지 않은 성을 파괴하는 한편, 왕실 재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235] 1160년대까지 재정 회복 과정은 완료되었다.[237]
전후 잉글랜드 국경 주변에서도 활동이 급증했다.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말콤 4세에게 압력을 가하여 잉글랜드 북부 영토를 반환받고 북부 국경을 재요새화했다.[239] 북웨일스와 남웨일스에서 두 차례의 캠페인을 벌여 웨일스 왕자 오와인 그위네드와 리스 압 그리피드가 복종하게 했다.[240]
5. 무정부 시대의 영향
이 내전은 쌍방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남북조 시대나 오닌의 난과 비슷한 전개로 흘러갔다. 제후들의 사기는 낮았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배신이 잇따랐으며, 싸움이 장기화되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스티븐에게는 또 다른 아들 기욤/Guillaume프랑스어 1세 (불로뉴 백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앙리가 사실은 스티븐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반면, 사촌인 스티븐과는 사이가 좋았다는 소문도 있다.
5. 1.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해
이 내전은 쌍방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남북조 시대나 오닌의 난과 비슷한 전개로 흘러갔다. 제후들의 사기는 낮았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배신이 잇따랐으며, 싸움이 장기화되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스티븐에게는 또 다른 아들 기욤/Guillaume프랑스어 1세 (불로뉴 백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앙리가 사실은 스티븐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반면, 사촌인 스티븐과는 사이가 좋았다는 소문도 있다.
5. 2. 왕권의 재정립과 행정 개혁
스티븐이 헨리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내전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220] 새로운 통화 발행과 행정 개혁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의 통치는 더 지속될 수도 있었고, 헨리의 대륙 내 입지도 불안정했다.[220]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은 어렸고 1153년에 왕위에 도전할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상황은 바뀔 수 있었다. 1154년에는 윌리엄이 헨리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221] 역사가 그레이엄 화이트는 윈체스터 조약을 "불안정한 평화"라고 묘사하며, 1153년 말 상황이 여전히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현대 역사가들의 판단을 반영했다.[222]그럼에도 스티븐은 1154년 초 왕국을 여행하며 통치 활동을 재개했다.[223] 잉글랜드 남서부에 왕실 영장을 발급하고, 요크에서 법정을 열어 북부 귀족들에게 왕실 권위를 재확인시켰다.[221] 같은 해 스티븐은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를 만나기 위해 도버로 이동했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이미 병들어 가족 문제를 정리하려 했다고 추정한다.[224] 스티븐은 위 질환으로 10월 25일에 사망했다.[224]
헨리는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1154년 12월 8일에 상륙하여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은 후 엘리너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25] 1155년 4월에는 왕실 법정이 소집되어 귀족들이 왕과 그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25] 헨리는 자신을 헨리 1세의 정당한 후계자로 칭하며 왕국 재건에 착수했다.[226] 스티븐은 전쟁 동안 헨리 1세의 통치 방식을 유지하려 했지만, 새 정부는 스티븐의 19년 통치를 혼란과 문제의 시기로 규정하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스티븐의 왕위 찬탈로 돌렸다.[227] 헨리는 또한 어머니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귀 기울일 것임을 보여주었다.[228] 여러 조치가 즉시 시행되었지만, 헨리가 통치 초기 8년 중 6년 반을 프랑스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작업이 원격으로 이루어져야 했다.[229]
잉글랜드는 전쟁으로 광범위한 피해를 입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혼란, 사악함, 강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기록했다.[230] 남서부, 템스 계곡, 이스트 앵글리아 등 많은 지역에서 전투와 약탈로 황폐화가 심각했다.[231] 중앙 집권화되었던 왕실 화폐 제도는 스티븐, 여황제, 지방 영주들이 각자 동전을 주조하면서 파편화되었다.[231] 왕실의 숲의 법은 국가의 많은 지역에서 붕괴되었다.[232] 그러나 일부 지역은 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스티븐의 남동부 영토와 글로스터 및 브리스톨 주변의 앙주 영지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데이비드 1세는 잉글랜드 북부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231] 왕의 영지 수입은 분쟁 기간 동안, 특히 1141년 이후 심각하게 감소했으며, 새로운 동전 주조에 대한 왕실 통제는 남동부와 이스트 앵글리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제한적이었다.[233] 스티븐이 종종 남동부에 기반을 두면서, 점차 윈체스터보다는 웨스트민스터가 왕실 정부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234]
헨리는 외국 용병 추방과 승인되지 않은 성 파괴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235] 로버트 토리니는 375개의 성이 파괴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수의 성이 파괴되었거나, 분쟁 종료 시 단순히 버려졌을 수 있다.[235] 헨리는 또한 헨리 1세의 재정 절차를 부활시키고 회계 표준을 개선하여 왕실 재정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236] 1160년대까지 이러한 재정 회복 과정은 완료되었다.[237]
전후 잉글랜드 국경 지역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왕과 웨일스 지역 통치자들은 잉글랜드의 내전을 틈타 분쟁 지역을 점령했다. 헨리는 이러한 상황을 되돌리려 했다.[238] 1157년 헨리의 압력으로 스코틀랜드의 말콤 4세는 전쟁 중 점령했던 잉글랜드 북부 영토를 반환했고, 헨리는 즉시 북부 국경을 재요새화하기 시작했다.[239] 웨일스에서 앵글로-노르만 지배를 복원하는 것은 더 어려웠지만, 헨리는 1157년과 1158년에 북웨일스와 남웨일스에서 두 차례의 군사 작전을 통해 웨일스 왕자 오와인 그위네드와 리스 압 그리피드를 복종시키고 내전 이전의 토지 분할에 동의하도록 했다.[240]
5. 3. 정치적 교훈: 권력 승계의 중요성
이 내전은 쌍방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남북조 시대나 오닌의 난과 비슷한 전개로 흘러갔다. 제후들의 사기는 낮았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배신이 잇따랐으며, 싸움이 장기화되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스티븐에게는 또 다른 아들 기욤 (윌리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앙리가 사실은 스티븐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반면, 사촌인 스티븐과는 사이가 좋았다는 소문도 있다.
6. 한국 역사와의 비교
7. 평가
이 내전은 쌍방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남북조 시대나 오닌의 난과 비슷한 전개로 흘러갔다. 제후들의 사기는 낮았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배신이 잇따랐으며, 싸움이 장기화되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스티븐에게는 또 다른 아들 기욤 (윌리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앙리가 사실은 스티븐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반면, 사촌인 스티븐과는 사이가 좋았다는 소문도 있다.
7. 1. 역사학계의 논쟁
무정부 시대의 내전에 대한 현대 역사의 상당 부분은 12세기 중반 또는 그 시기에 가까이 살았던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 기반하며, 이 시기에 대한 비교적 풍부한 설명을 제공한다.[241] 주요 연대기 기록들은 모두 상이한 사건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상당한 지역적 편견을 담고 있다.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작성된 ''스테파누스 행적''(Gesta Stephani)과 말름즈베리의 윌리엄의 ''새로운 역사''(Historia Novella),[242] 노르망디에서 오데릭 비탈리스가 1141년까지의 기간을 다룬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와 토르니의 로베르가 그 이후 몇 년간의 역사를 썼다.[242] 잉글랜드 동부의 헌팅던의 헨리는 ''영국사''(Historia Anglorum)를 저술했다.[243]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피터버러 연대기는 무정부 시대 동안의 상황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로 기억된다.[244] 대부분의 연대기는 분쟁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245]
"무정부 시대"라는 용어의 사용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기원한다. 윌리엄 스텁스는 ''잉글랜드 헌법사''에서 이 시기의 정치적 측면을 분석, 1140년대에 잉글랜드 헌법 발전의 명백한 단절을 강조했으며, 그의 제자인 존 호레이스 라운드가 "무정부 시대"라는 용어를 만들도록 했다.[247] 이후 역사가들은 이 용어를 비판했는데, 재정 기록 및 기타 문서를 분석한 결과, 분쟁 기간 동안 법과 질서의 붕괴가 더 미묘하고 국지적이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248] 1990년대의 추가 연구에서는 전후 재건 기간 동안의 헨리의 노력을 재해석하여, 이전까지 추정했던 것보다 스테판의 전시 정부와의 더 큰 연속성을 제시했다.[249] "무정부 시대"라는 명칭은 현대 역사가들이 여전히 사용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사용된다.[250]
이 내전은 쌍방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남북조 시대나 오닌의 난과 비슷한 전개로 흘러갔다. 제후들의 사기는 낮았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배신이 잇따랐으며, 싸움이 장기화되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스티븐에게는 또 다른 아들 기욤 (윌리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주 백작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앙리가 사실은 스티븐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7. 2. 대중문화 속의 무정부 시대
무정부 시대의 내전은 가끔 역사 소설에 사용되었다. 엘리스 피터스의 1137년과 1145년 사이에 설정된 형제 캐드펠에 관한 역사 추리 소설 시리즈에는 스테판 왕, 마틸다 황후,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이 등장한다.[251] 피터스는 내전을 본질적으로 지역적인 이야기로 묘사하며, 슈루즈베리와 그 주변 지역에 초점을 맞춘다.[251] 피터스는 1138년 슈루즈베리를 점령한 후 슈루즈베리 수비대를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판을 관대하고 합리적인 통치자로 묘사한다.[252] 반면, 켄 폴레트의 역사 소설 ''대지의 기둥''과 이를 기반으로 한 TV 미니시리즈는 스테판을 무능한 통치자로 묘사한다. 폴레트는 책을 시작하면서 오스틴 레인 풀의 ''화이트 쉽'' 침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사용하여 이후 사건들의 역사적 배경을 설정하지만, 다른 많은 면에서 폴레트는 전쟁을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인물과 문제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서사적인 의상 드라마 TV 각색에서도 재현되었다.[253]참조
[1]
인용
[2]
인용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인용
[12]
인용
[13]
인용
[14]
인용
[15]
인용
[16]
인용
[17]
인용
[18]
인용
[19]
인용
[20]
인용
[21]
인용
[22]
인용
[23]
인용
[24]
인용
[25]
인용
[26]
인용
[27]
인용
[28]
인용
[29]
인용
[30]
인용
[31]
인용
[32]
인용
[33]
인용
[34]
인용
[35]
인용
[36]
서적
King (2010)
[37]
서적
King (2010)
[38]
서적
Barlow
[39]
서적
Barlow
[40]
간행물
Helmerichs
[41]
서적
Carpenter
[42]
서적
King (2010)
[43]
서적
King (2010)
[44]
서적
King (2010)
[45]
서적
Carpenter
[46]
서적
White (2000)
[47]
서적
Crouch (2002)
[48]
서적
Crouch (2008a)
[49]
서적
Crouch (2008b)
[50]
서적
Crouch (2002)
[51]
서적
Carpenter
[52]
서적
Crouch (1998)
[53]
서적
Bradbury
[54]
서적
Barlow
[55]
서적
Crouch (2008b)
[56]
서적
Crouch (2008b)
[57]
서적
Barlow
[58]
서적
Davis
[59]
서적
Davis
[60]
서적
Davis
[61]
서적
Crouch (2008b)
[62]
서적
Pettifer
[63]
서적
Barlow
[64]
서적
Barlow
[65]
서적
Carpenter
[66]
서적
Barlow
[67]
서적
Stringer
[68]
서적
Chibnall
[69]
서적
Carpenter
[70]
서적
Bradbury
[71]
서적
[72]
서적
[73]
서적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80]
서적
[81]
서적
[82]
서적
[83]
서적
[84]
서적
[85]
서적
[86]
서적
[87]
서적
[88]
서적
[89]
서적
[90]
서적
[91]
서적
[92]
서적
[93]
서적
[94]
서적
[95]
서적
[96]
서적
[97]
서적
[98]
서적
[99]
서적
[100]
서적
[101]
서적
[102]
서적
[103]
서적
[104]
서적
[105]
서적
[106]
서적
[107]
서적
[108]
서적
[109]
서적
[110]
서적
[111]
서적
2010
[112]
서적
[113]
서적
[114]
서적
[115]
서적
2010
[116]
서적
[117]
서적
[118]
서적
[119]
서적
1994
[120]
서적
1994
[121]
서적
[122]
서적
[123]
서적
[124]
서적
[125]
서적
[126]
서적
[127]
서적
[128]
서적
[129]
서적
[130]
서적
[131]
서적
[132]
서적
[133]
서적
[134]
서적
[135]
서적
[136]
서적
[137]
서적
2002
[138]
서적
[139]
서적
[140]
서적
[141]
서적
Bennett
[142]
서적
King (2010)
[143]
서적
King (2010)
[144]
서적
King (2010)
[145]
서적
King (2010)
[146]
서적
King (2010)
[147]
서적
Chibnall
[148]
서적
Chibnall
[149]
서적
Chibnall
[150]
서적
Chibnall
[151]
서적
King (2010)
[152]
서적
Carpenter
[153]
서적
Crouch (2008b)
[154]
서적
Davis
[155]
서적
Davis
[156]
서적
Blackburn
[157]
서적
Crouch (2002)
[158]
서적
Bennett
[159]
서적
Barlow
[160]
서적
Bradbury
[161]
서적
Barlow
[162]
서적
Chibnall
[163]
서적
Barlow
[164]
서적
Barlow
[165]
서적
Barlow
[166]
서적
Bradbury
[167]
서적
Barlow
[168]
서적
Bradbury
[169]
서적
Chibnall
[170]
서적
Bradbury
[171]
서적
Chibnall
[172]
서적
Davis
[173]
서적
Bradbury
[174]
서적
Bradbury
[175]
서적
Bradbury
[176]
서적
Bradbury, p.141.
[177]
서적
Bradbury, p.143.
[178]
서적
Bradbury, p.144.
[179]
서적
Bradbury, p.145.
[180]
서적
Barlow, p.179.
[181]
서적
Amt, p.7.
[182]
서적
Crouch (2002), p.269; White (1998), p.133.
[183]
서적
Bradbury, p.158.
[184]
서적
Bradbury, p.147.
[185]
서적
Bradbury, p.146.
[186]
서적
Davis, p.97.
[187]
서적
Barlow, p.180.
[188]
서적
Barlow, p.180; Chibnall, pp.148–149.
[189]
서적
Davis, pp.111–112.
[190]
서적
King (2010), p.243; Barlow, p.180.
[191]
서적
Davis, pp.111–113.
[192]
서적
Davis, p.112.
[193]
서적
Davis, p.113.
[194]
서적
Chibnall, pp.141, 151–152.
[195]
서적
King (2010), p.253.
[196]
서적
King (2010), p.254.
[197]
서적
King (2010), p.255.
[198]
서적
Davis, p.107; King (2010), p.255.
[199]
서적
Carpenter, p.188.
[200]
서적
King (2010), p.237.
[201]
서적
Davis, p.105.
[202]
서적
Davis,. p.105; Stringer, p.68.
[203]
서적
Davis, pp.100–102.
[204]
서적
King (2010), p.264.
[205]
서적
Bradbury, pp.178–179.
[206]
서적
Bradbury, p.180.
[207]
서적
Bradbury, p.181.
[208]
서적
King (2007), pp.25–26.
[209]
서적
King (2007), p.26.
[210]
서적
Bradbury, p.182.
[211]
서적
Bradbury
[212]
서적
Bradbury, King, Crouch
[213]
서적
King, Crouch
[214]
서적
King
[215]
서적
Bradbury
[216]
서적
King, Bradbury
[217]
서적
King
[218]
서적
King, Bradbury, Barlow
[219]
서적
King
[220]
서적
Bradbury, Holt
[221]
서적
Crouch
[222]
서적
White
[223]
서적
Amt
[224]
서적
King
[225]
서적
White
[226]
서적
White
[227]
서적
White
[228]
서적
King
[229]
서적
White
[230]
서적
Huscroft
[231]
서적
Barlow
[232]
서적
Carpenter
[233]
서적
White, Blackburn
[234]
서적
Green
[235]
서적
Amt
[236]
서적
White
[237]
서적
Barratt
[238]
서적
Warren
[239]
서적
White, Carpenter
[240]
서적
White, Huscroft, Carpenter
[241]
서적
King
[242]
서적
Davis
[243]
서적
Davis
[244]
서적
Davis, Bradbury
[245]
서적
Davis
[246]
문서
Dyer, p.4; Coss, p.81
[247]
웹사이트
Review of King Stephen
http://www.history.a[...]
2011-05-12
[248]
문서
White (2000), pp.14–15; Hollister, pp.51–54
[249]
문서
White (2000), pp.75–76
[250]
문서
White (2000), p.12; Carpenter, p.176; King (1994), p.1
[251]
문서
Rielly, p.62
[252]
문서
Rielly, p.68
[253]
뉴스
Blood on Their Hands, and Sex on Their Minds
http://tv.nytimes.co[...]
The New York Times
2010-07-22
[254]
서적
영국사
기린원
1996-04-15
[255]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256]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