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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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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케는 일본 황실에서 황족에게 부여되는 명칭으로, 현재 아키시노노미야, 히타치노미야, 미카사노미야, 다카마도노미야 4개의 궁가가 존재한다. 궁가는 천황의 직계가 아닌 황족으로, 각 궁가는 당주, 창설 시기, 창설자, 인원수 등의 정보를 갖는다. 2006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다른 미야케는 계승할 남자가 없어 존속에 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현행 황실전범은 양자를 인정하지 않아, 후사가 없으면 궁가는 단절될 수 있다.

2. 현재의 궁가

현재의 미야케
미야케현 당주창설창설자현 인원수비고
border 아키시노노미야후미히토 친왕1990년(헤이세이 2년) 6월 29일상황 (125대 천황 아키히토)의 황2자 후미히토 친왕4명직궁가
border 히타치노미야마사히토 친왕1964년 (쇼와 39년) 9월 30일쇼와 천황 황2자 마사히토 친왕2명직궁가
border 미카사노미야(미정)1935년 (쇼와 10년) 12월 2일다이쇼 천황 황4남 타카히토 친왕3명직궁가
border 다카마도노미야노리히토 친왕비 히사코1984년 (쇼와 59년) 12월 6일타카히토 친왕의 3남 노리히토 친왕2명


2. 1. 현존하는 궁가

현존하는 미야케
미야케현 당주창설창설자현 인원수비고
아키시노노미야후미히토 친왕1990년 (헤이세이 2년) 6월 29일상황 (125대 천황 아키히토)의 황2자 후미히토 친왕4명직궁가
히타치노미야마사히토 친왕1964년 (쇼와 39년) 9월 30일쇼와 천황 황2자 마사히토 친왕2명직궁가
미카사노미야타카히토 친왕비 유리코1935년 (쇼와 10년) 12월 2일다이쇼 천황 황4남 타카히토 친왕3명직궁가
다카마도노미야노리히토 친왕비 히사코1984년 (쇼와 59년) 12월 6일타카히토 친왕의 3남 노리히토 친왕2명



현재 일본 황실에는 아키시노노미야, 히타치노미야, 미카사노미야, 다카마도노미야의 4개 미야케가 존재한다. 각 미야케의 상세 정보는 위 표와 같다. 미카사노미야의 현재 당주는 공석이다.

2. 2.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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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궁가의 역사

3. 1. 고대 ~ 중세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걸쳐, 황족과 관련된 신관이 특수한 춤이나 신사를 계승할 때 '궁(宮)'의 이름을 부여하는 관습이 생겨났다.[9] 이 관습은 친왕선하 제도의 이후, 특히 황족의 관습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9]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 순덕 천황의 황자 충성왕이 '''이와쿠라노미야''', 젠토 친왕이 '''요츠지노미야'''를 칭하며, 자손에게 궁호가 전해졌다.[9]

친왕쇼군(궁쇼군)도 고레야스 친왕의 딸이 큐메이 친왕의 정실이 되어 후계자를 낳은 것을 고려하면, 초대 무네타카 친왕(고사가 천황의 황자)부터 마지막(4대) 모리쿠니 친왕까지 대대로 정이대장군의 직위와 친왕의 신분을 세습한 '친왕쇼군가'로 볼 수 있으며, 이것 또한 '궁가'의 선구로 보는 견해도 있다.[9]

본격적인 세습친왕가의 효시로 여겨지는 것은, 무로마치 시대에 성립된 가메야마 천황의 황자 쓰네아키라 친왕을 시조로 하는 '''도키와이노미야'''와 고니조 천황의 황자 쿠니요시 친왕을 시조로 하는 '''코데라노미야'''이다.[9] 두 친왕 모두,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당시의 지묘인통다이카쿠지통의 양통대립의 정세에 휘둘려, 실제로는 황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 친왕에게는 소령이 있었고, 자손에게 대대로 경제적 기반으로 전해졌다.[9]

무로마치 시대에는, 구 남조의 후예인 '''오구라노미야、타마가와노미야'''와 같은 예도 보인다.[9] 어느 경우든, 황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황족이, 황위를 확보한 본가에 정치적으로 대항하는 형태로 분가를 창립하는, 라는 패턴은 공통된다. 그 당시의 천황에게는, 오히려 달갑지 않은 사태로서, 세습친왕가가 발족했던 것이다.[9]

하지만, 오닌의 난 이후에는, 조정의 극심한 쇠퇴로 인해, 세습친왕가의 창설은 조정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해졌고, 조정에게 오히려 환영할 만한 사태로 변해갔다.[9]

중세의 궁가 문제는 마츠조노 사이의 연구[10]에 자세히 나와 있다.

3. 2. 중세 ~ 근세: 4친왕가

무로마치 시대에 성립된 후시미노미야를 비롯하여, 가쓰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의 4개 세습친왕가가 존재했다. 각 궁가는 황위 계승과도 관계가 있었다.

후시미노미야북조 제3대 스고 천황의 첫째 황자 영인친왕이 시조이다. 제3대 사다후사 친왕의 첫째 아들인 히코히토 왕이 방계에 해당하는 쇼코 천황이 후사가 없이 붕어함에 따라 1428년에 제102대 고하나조노 천황이 되어 황위를 계승했다. 이 고하나조노 천황이 현재 황실의 남계 조상이 되었다. 한편, 사다후사 친왕의 둘째 아들 사다츠네 친왕(고하나조노 천황의 동생)의 남계 자손은 대대로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으며, 특히 제20대·23대 구니이에 친왕부터 많은 자손이 미야케를 창설했다. 1947년에 현행 황실 전범 하에서 신적 강하를 면치 못했다. 세습친왕가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재의 황실 및 가쓰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는 모두 후시미노미야 가문이 시조이다.

가쓰라노미야고요제이 천황의 첫째 황자 세이진 친왕의 제6 왕자 토시히토 친왕에 의해 창설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으나, 1589년에 히데요시에게 친자 쓰루마쓰가 태어났기 때문에 인연이 해소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청에 따라, 토시히토 친왕에게 소령이 주어지고 "하치조노미야"의 궁호를 받은 것이 시작이다. 이후, "토키와이노미야", "쿄고쿠노미야", 그리고 "가쓰라노미야"로 개칭하여 1881년의 제12대 당주 스미코 내친왕이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1625년 고요제이 천황의 제7 황자 요시히토 친왕에 의해 창설되었다. 처음에는 "다카마쓰노미야"라고 칭했다. 요시히토 친왕에게 후사가 없어, 고미즈노오 천황의 제6 황자이며 친왕의 조카에 해당하는 나가히토 친왕이 제2대를 계승하여, 하나마치노미야 또는, 모모조노미야라고 칭했다. 그런데, 1654년 형인 고코묘 천황이 붕어했기 때문에, 나가히토 친왕은 제111대 고사이 천황으로 황위를 계승했다. 미야케는 고사이 천황의 제2 황자 유키히토 친왕이 계승하여 아리스가와노미야로 개칭되었다. 1913년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사망하여 단절되었다.

간인노미야는 황통의 단절을 우려한 아라이 하쿠세키의 건의로 창설되었다. 히가시야마 천황의 제6 황자이며 나카미카도 천황의 동복 동생에 해당하는 나오히토 친왕이, 막부로부터 1000석의 소령을 헌상받아, 1718년 조부인 레이겐 법황으로부터 "간인노미야"의 궁호를 받았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나카미카도 천황의 증손에 해당하는 고모모조노 천황1779년에 후사 없이 붕어함에 따라, 제2대 노리히토 친왕의 여섯째 아들 스케노미야가 제119대 고카쿠 천황으로 황위를 계승했다. 고모모조노 천황에게는 유일한 황녀로서 요시코 내친왕이 있어 방계에 해당하는 고카쿠 천황의 중궁이 되어, 온닌 친왕·에츠닌 친왕을 낳았지만 어느 쪽도 후사가 없이 사망했다. 나카미카도 천황으로부터의 황통은 여계도 포함하여 단절되었다. 선제의 방계에 해당하는 미야케에서 황위를 계승한 것은 고카쿠 천황이 마지막이며, 고카쿠 천황의 황자 닌코 천황 이후에는, 그 아들(황태자)이 차대 천황으로 즉위하여, 현재의 황실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미야케로서는, 노리히토 친왕의 첫째 아들 요시히토 친왕(고카쿠 천황의 형)이 제3대로 계승하지만, 그 손자인 제5대 아리히토 친왕이 자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한 번 끊어진다. 그 후 메이지 시대가 되어, 후시미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고토히토 친왕이 제6대로 계승했지만, 그 아들인 제7대 하루히토 왕에게 다시 자손이 없어, 신적 강하 후의 1988년에 사망하면서 절가했다.

미야케 출신 황족이 황통을 계승한 것은, 3가지 경우가 있다.

3. 3. 근현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새로운 궁가들이 잇따라 신설되었고, 출가했던 황족이 환속하여 천황의 울타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분큐 3년(1863년)에 중천궁(후에 가양궁을 거쳐 구니노미야로 개칭), 겐지 원년(1864년)에 야마시나노미야, 이후 1870년까지 나시모토노미야, 쇼고인노미야(개칭하여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초노미야, 히가시후시미노미야(개칭하여 고마쓰노미야)의 각 궁가가 설립되었다.

1889년, 황실 전범 제정으로 영세 황족제가 확립되었다. 1900년에는 가요노미야가 제왕가에 열거되었고 1903년에는 히가시후시미노미야, 1906년에는 다케다노미야, 아사카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의 3궁가가 설립되었다. 다케다·아사카·히가시쿠니 각 궁가는 모두 메이지 천황의 황녀를 비로 맞이했다.

다이쇼 천황의 3황자 중 1913년노부히토 친왕아리스가와노미야의 제사를 계승하기 위해 다카마쓰노미야의 궁호를 받아 궁가를 창립했다. 1922년야스히토 친왕이 지치부노미야의 궁호를, 1935년다카히토 친왕미카사노미야의 궁호를 받아 각각 궁가를 창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점령 하에서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의 지침에 따라 황실 재산의 국유화, 황족의 재산에 관한 특권 정지 등이 결정되었다. 궁핍한 국가 재정으로는 종전 규모의 황실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지치부노미야, 다카마쓰노미야, 미카사노미야의 3 직궁가(다이쇼 천황 소생)를 제외한 11궁가 51명이 황족의 신분을 떠나게 되었다.

1947년 황실전범 개정으로 11개 궁가 51명이 황족 신분을 떠나게 되었다. 현대에는 1964년히타치노미야, 1984년다카마도노미야, 1988년가쓰라노미야의 각 궁가가 창설되었으나 모두 후사가 없다. 그리고 1990년아키시노노미야 가가 창설되었다.

4. 궁가 계승의 문제점

황위 계승 문제

2006년(2006년)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에게 히사히토 친왕이 탄생했다. 그 외의 미야케(히타치, 미카사, 다카마도)에 대해서는, 1954년(1954년)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이후, 미야케를 계승하거나 새롭게 미야케를 창설할 수 있는 황족 남자는 탄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3 미야케는 현재 규정으로는, 장래에 절가가 확실하다.

후시미노미야 계열 황족 (구 황족)이 황적을 이탈한 1947년(1947년) 10월 이후, 미야고 보유자의 자녀에게 미야케를 계승할 수 있는 남자(와카미야)가 존재한 것은 다음의 2가지 예뿐이다.

# 미카사 와카미야: 도모히토 친왕 (2012년(2012년)에 훙거)

# 아키시노 와카미야: 히사히토 친왕

이 중 도모히토 친왕은 아버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보다 먼저 훙거했기 때문에, 미야고가 다음 대에 계승된 예는, 전후 1예도 없다.

황족 남자의 현저한 감소에 따른 황위 계승 문제와 함께, 미야케의 존속도 위기적인 상황이다.

4. 1. 현행 제도의 한계

현행 황실전범양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궁가에 후사가 없을 경우 (남자가 태어나지 않거나, 요절한 경우) 타 궁가의 황족에게 궁호 계승은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된다. 후사가 없으면, 설령 옛 세습친왕가라 할지라도 단절을 피할 수 없다.

에도 시대까지는 세습친왕가(후시미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칸인노미야, 카츠라노미야)만이 계승되었으며,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다른 궁가 또는 내정황족 (천황의 최근친)의 남자가 계승했다. 그러나 현행 황실전범 하에서는 이러한 계승이 불가능하다.

구·현 황실전범 하에서는 궁가 자체를 타가의 황족이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궁가의 제사에 관해서는 타가의 황족이 계승한 예가 있다. 아리스가와노미야가는 1908년(메이지 41년) 후사인 타네히토 왕이 요절하여 절가가 확실해진 뒤,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은 황자손에 의한 계승을 강하게 희망했다.[3] 1913년(다이쇼 2년) 미야 노부히토 친왕에게 "타카마츠노미야"의 칭호가 주어졌다.[5] 타카마츠노미야는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옛 칭호이다. 1923년(다이쇼 12년) 아리스가와노미야가가 단절되자, 타카마츠노미야는 그 장례식에서 상주를 맡았고,[7] 타카마츠노미야가가 아리스가와노미야가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러한 제사 계승은 초법규적 조치로 받아들여졌다.[8]

이 외에, 황족 남자가 신적강하하여 단절된 궁가의 제사를 계승한 예로, 카쵸 히로노부(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3남)나 히가시후시미 지카타(쿠니노미야 쿠니요시 왕의 3남)가 있다.

4. 2. 제사 계승의 예외

구·현 황실전범 하에서는 궁가 자체를 타가의 황족이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궁가의 제사에 관해서는 타가의 황족이 계승한 예가 있다.

아리스가와노미야는 1908년(메이지 41년), 후사인 타네히토 왕이 요절하여 절가가 확실해진 뒤,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아리스가와노미야 선대의 계통을 생각하면, 선례에 따라 황자손이 들어오게 하는 것을 희망하는 다른 뜻은 없다"라고 인정하고, 황자손에 의한 계승을 강하게 희망했다. 1913년(다이쇼 2년) 6월, 중병이 된 타케히토 친왕에게 후계자 문제의 내유가 전달되었다. 같은 해 7월 6일, 다이쇼 천황의 셋째 황자 미야 노부히토 친왕에게 "타카마츠노미야"의 칭호가 주어졌다. 타카마츠노미야는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옛 칭호이며, 또한 타케히토 친왕의 외손 도쿠가와 키쿠코와 노부히토 친왕의 약혼도 내정되었다. 1923년(다이쇼 12년), 아리스가와노미야는 타케히토 친왕 비 이코의 붕어에 의해 단절되자, 타카마츠노미야는 그 장례식에서 상주를 맡았고, 타카마츠노미야가 아리스가와노미야가의 제사를 계승했으며, 또한, 동가에 관련된 자료를 간행했다. 제사의 계승에 의해, 노부히토 친왕을 실질적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가의 후계자로 한 것은, 이토에 의한 "초법규적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이 외에, 황족 남자가 신적강하하여 단절된 궁가의 제사를 계승한 예로, 카쵸 히로노부 (후작,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의 3남)나 히가시후시미 지카타 (백작, 쿠니노미야 쿠니요시 왕의 3남)가 있다.

4. 3. 황위 계승 문제와의 연관성

황족 남자의 현저한 감소에 따른 황위 계승 문제와 함께, 미야케의 존속도 위기적인 상황이다. 2006년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에게 히사히토 친왕이 탄생하기 전까지, 1954년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이후, 미야케를 계승하거나 새롭게 미야케를 창설할 수 있는 황족 남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히타치, 미카사, 다카마도의 3 미야케는 현재 규정으로는, 장래에 절가가 확실하다.

후시미노미야 계열 황족(구 황족)이 황적을 이탈한 1947년 10월 이후, 미야케를 계승할 수 있는 남자(와카미야)가 존재한 경우는 미카사의 도모히토 친왕(2012년에 훙거)과 아키시노의 히사히토 친왕 두가지 뿐이다. 이 중 도모히토 친왕은 아버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보다 먼저 훙거했기 때문에, 미야케가 다음 대에 계승된 예는 전후 한 번도 없다.

5. 기타

5. 1. 황실에서의 '미야'

궁호는 일본 황실에서 황족에게 붙이는 칭호이고, 어칭호는 황실에서 황족의 아이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5. 2. 성씨

법적으로 성에 "미야(노미야)"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현대에도 특이한 신사(神事)나 춤을 계승해 온 신관(신직자)에 대해 "미야(노미야)"를 붙여 전혀 다른 성씨로 하는 습관이 남아있지만, 이는 궁호가 아니며 황족과 관계가 있다는 정의에 따른 현대의 "궁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 특이한 신사나 춤은 황족과 관련된 작법이나 오래된 신도의 작법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신도 내에서는 궁가라는 단어를 "연관된 자·계승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신직자가 습명이나 개명에 있어 "미야(노미야)"를 붙이는 것에 대해 신사청은 금지하지 않고 있으며, 헤이세이 시대에도 가정재판소의 허가는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종전 이후 신도 관계자 이외의 자가 "미야(노미야)"를 붙이는 허가를 받은 자는 한 명도 없다).

참조

[1] 서적 荒木 1985
[2] 서적 高松宮妃喜久子 1998
[3]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4]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5] 간행물 大正2年宮内省告示第8号 https://dl.ndl.go.jp[...] 官報 1913-07-06
[6] 서적 高松宮妃喜久子 1998
[7] 간행물 宮廷録事 https://dl.ndl.go.jp[...] 官報 1923-07-03
[8]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9] 논문 〈宮家〉成立の諸前提 同成社 2021
[10] 서적 中世の王家と宮家 https://aris.agu.ac.[...] 臨川書店 2023-07
[11] 간행물 宮廷録事 https://dl.ndl.go.jp[...] 官報 1892-12-17
[12] 웹사이트 宮内庁Webサイト 皇室 https://www.kunaicho[...] 宮内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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