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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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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일본 황실의 신노케 분가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의 해군 군인이자 외교관이었다. 그는 1862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불교 승려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세속적인 삶으로 돌아와 해군에 입대했다. 영국 유학 후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참여했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행사 등 외교 활동에도 기여했다. 1895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을 계승했으나, 아들이 요절하여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는 1913년에 사망했으며, 현재 도쿄의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 공원, 후쿠시마현의 텐쿄카쿠 등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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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
이름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일본어 표기有栖川宮威仁親王
로마자 표기Arisugawa-no-miya Takehito-Shinnō
추가 정보稠宮 (사와의 미야)
출생1862년 2월 11일
출생지야마시로국 교토
사망1913년 7월 10일
사망지일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 (실제 고베)
매장일1913년 7월 17일
매장지도요시마오카 묘지
신위친왕
경칭전하
가문아리스가와노미야
아버지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레이겐 천황의 현손)
어머니모리 노리코
부인마에다 야스코
자녀쓰구코 여왕
다네히토 왕
미에코 여왕 (도쿠가와 요시히사의 부인)
칭호조구 (稠宮)
어인불명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874년 – 1913년
최종 계급원수 해군대장
주요 참전청일 전쟁
러일 전쟁
서훈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금치훈장 (3등)
대훈위국화장경식
군사 참의관군사참의관
기타 정보
관련 인물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아버지)

2. 생애

교토에서 일본 황실의 신노케 분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家일본어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리스가와 다카히토 친왕이며, 어머니는 측실 모리 노리코였다. 본래 불교 승려가 될 예정이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세속으로 돌아와 1871년 도쿄로 이주했다.

1874년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77년 사쓰마 전쟁 당시 가고시마에 파견되어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1878년 메이지 천황의 유자(猶子)가 되어 친왕선하를 받고 다케히토(威仁)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이복형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아리스가와 다케히토와 부인 마에다 야스코.


해군 장교 시절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영국 유학 시절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해군 장교로서 경력을 쌓으며 영국에서 두 차례 유학했다. 첫 번째는 1879년 영국 해군 함선 HMS Iron Duke에 탑승하여 실무를 익혔고, 두 번째는 1881년부터 그리니치의 해군대학에서 수학했다. 1880년 가가 번의 마지막 다이묘였던 마에다 요시야스의 딸 마에다 야스코와 결혼했으며, 1889년에는 부부 동반으로 유럽과 미국을 순방했다.

1890년대에는 코르벳함 가쓰라기, 순양함 다카오, 치요다 등의 함장을 역임했다. 1891년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후일 니콜라이 2세)의 접대를 맡던 중 오쓰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895년 이복형 타루히토 친왕의 사망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당주 자리를 계승했다.

청일 전쟁(1894–1895) 중에는 순양함 마쓰시마하시다테의 함장을 맡아 참전했으며, 이후 소장(1896년), 중장(1899년), 대장(1905년)으로 진급했다. 1896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식에 메이지 천황의 대리로 참석했고, 1902년에는 영국 에드워드 7세로부터 명예 바스 훈장 기사 대십자장(GCB)을 받았다.[2][3] 러일 전쟁에서의 공로로 금치훈장(3급)을 받았으며, 1905년에는 독일 제국 황태자 빌헬름의 결혼식에 천황 대리로 참석했다.

1905년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제독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해군 복무 중에도 병가를 자주 냈으며, 1909년 고베의 별장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하며 사실상 은퇴했다. 유일한 아들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네히토 왕이 1908년 충수염으로 요절하면서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1913년 7월 3일 고베의 별장에서 사망했으나, 공식 발표는 7월 10일에 이루어졌다. 실제 사망일과 공식 발표일 사이인 7월 7일 명예직인 해군 원수 계급이 부여되었으며, 이는 사후 추서로 간주되지 않는다. 사후 최고 등급의 국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도쿄 별궁 터는 현재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 공원이 되었고, 후쿠시마현 이나와시로의 별장 텐쿄카쿠는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

1862년 2월 11일 (분큐 2년 1월 13일), 교토에서 일본 황실의 신노케(親王家) 분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有栖川宮家|아리스가와노미야케일본어)의 자손으로 태어났다.[1] 아명은 '추궁'(稠宮)이었다. 아버지는 아리스가와 다카히토 친왕이고, 어머니는 측실인 모리 노리코(森則子)였다.[1] 그가 태어났을 때는 아직 도쿠가와 막부 시대였으며,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에게는 이미 적자(嫡子)인 타루히토 친왕이 있었기 때문에, 추궁은 장차 교토의 몬제키(門跡) 사찰인 묘호인(妙法院)의 몬슈(門主, 주지)를 상속받아 불교 승려가 될 예정이었다.[1][2]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제도가 바뀌면서 궁문적(宮門跡) 제도가 폐지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 추궁의 묘호인 상속 예정은 취소되었다.[2] 같은 해,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도쿄로 이주하게 되면서 추궁도 함께 도쿄로 갔다.[1][2]

1874년(메이지 7년) 7월 8일, 메이지 천황을 만난 추궁은 해군 군인이 되라는 명을 받았고, 같은 달 13일 해군병학료(海軍兵学寮, 이후 일본 해군병학교) 예과에 입학했다.[2] 1876년(메이지 9년)에는 가가번 번주 마에다 요시야스의 넷째 딸 마에다 야스코(前田慰子)와 약혼했다.[2]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가고시마현 역도 정벌 총독으로 규슈에 부임 중이던 이복형 타루히토 친왕의 부름을 받고 배를 타고 가고시마로 가서 타루히토 친왕과 함께 전쟁터를 시찰했다.[2]

1878년(메이지 11년) 4월, 당시 40세가 넘도록 정식 부인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한 타루히토 친왕은 메이지 천황에게 추궁을 사실상의 양자로 삼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청원했다.[3] 당시에는 아직 구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이라 황족의 계승권 문제는 천황의 재량으로 결정되었으며, 5월 18일 칙허(勅許)가 내려졌다.[3]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 26일, 추궁은 메이지 천황의 유자(猶子, 법적인 아들은 아니지만 아들과 같이 여겨지는 존재)가 되어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고 다케히토(威仁)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친왕(親王)이 되었다.[3]

1879년(메이지 12년), 다케히토 친왕은 태정관의 명령으로 영국 해군 중국 함대 기함인 HMS 아이언 듀크에 승선하여 약 1년간 함상 실무를 경험했다.[3] 귀국 후인 1880년(메이지 13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12월 1일에는 영국 유학 명령을 받았다.[3] 열흘 뒤인 12월 11일, 약혼자였던 마에다 야스코와 결혼했다.[3]

신혼 생활도 잠시, 1881년(메이지 14년) 1월 다케히토 친왕은 부인 야스코를 일본에 남겨두고 영국의 그리니치 해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4] 출항 시에는 외국 공사로 유럽을 방문하는 구 히로시마번 번주 아사노 나가코토 부부도 동행했다.[4] 그는 3년 반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883년(메이지 16년) 6월에 귀국했다.[4]

2. 2. 해군 및 외교 경력

1874년 메이지 천황의 명에 따라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학했다. 1877년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쓰마 전쟁에 참관인으로 파견되어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1878년 5월 18일, 메이지 천황의 칙허를 받아 천황의 유자(猶子)가 되었고, 같은 해 8월 26일 친왕선하를 받아 다케히토(威仁)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1879년, 태정관의 명령으로 영국 해군의 극동 함대 기함인 HMS 아이언 듀크(Iron Duke)에 승선하여 약 1년간 함상 훈련을 받았다. 채널 함대에서 복무한 후 1880년 소위로 임관하여 일본으로 귀국했다. 같은 해 12월 1일, 영국 유학 명령을 받았고, 12월 11일 마에다 야스코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인 1881년 1월, 다케히토 친왕은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그리니치에 있는 해군대학에서 사관 후보생으로 3년 반 동안 수학하고 1883년 6월 귀국했다.

1889년 2월 16일, 대일본제국 헌법 반포 직후 부인 야스코와 함께 미국을 거쳐 유럽 각국을 순방했다. 이 여행의 비용은 부인의 친정인 마에다 후작가가 부담했다.[6] 홍콩, 상하이를 거쳐 1890년 4월 5일 고베항으로 귀국했다.[7] 같은 해 2월, 귀족원 황족 의원에 취임했다.[8]

해군 경력으로는 1890년 초 코르벳함 가쓰라기의 함장을 맡았고, 같은 해 말에는 순양함 다카오를 지휘했다.

1891년,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니콜라이(후일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접대를 맡았다. 그러나 황태자 방문 중 오쓰 사건이 발생하여 니콜라이 황태자가 부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일본 외교사상 초유의 사건이었으나, 다케히토 친왕의 요청으로 메이지 천황이 직접 문병하는 등 일본 측의 성의 있는 대응으로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는 피할 수 있었다.

1892년, 순양함 치요다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청일 전쟁 (1894–1895) 발발 당시에는 해군 대좌 계급으로 요코스카 해병단장, 이후 대본영 부속으로 근무하며 육상 근무를 했다. 황해 해전 이후인 1894년 12월 8일, 연합함대 기함인 순양함 마쓰시마의 함장이 되어 함대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15일, 이복형인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이 사망하면서 아리스가와노미야의 당주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고, 장례를 위해 일시 귀국해야 했다. 그가 함선으로 복귀했을 때는 웨이하이웨이 해전이 이미 끝난 후여서, 결국 실전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이후 순양함 하시다테를 지휘했다.

1896년 11월 11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기념식)에 메이지 천황의 명의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영국을 방문했다. 1899년 9월 26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02년 11월, 영국에드워드 7세 국왕으로부터 명예 바스 훈장 기사 대십자장(GCB, 민간 부문)을 수여받았다.[2][3]

1905년 6월 28일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메이지 천황러일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금치훈장 (3급)을 수여했다. 같은 해 다시 유럽을 방문하여, 부인과 함께 독일 제국 황태자 빌헬름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공작부인의 결혼식에 천황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귀국길에는 다시 영국을 방문했다.

2. 3.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 계승

1878년 4월, 당시 40세가 넘도록 후사를 얻지 못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치카노미야(稠宮, 다케히토의 아명)를 사실상의 양자로 삼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메이지 천황에게 청원했다. 당시에는 아직 구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황족의 계승 문제는 천황의 재량으로 결정될 수 있었고, 같은 해 5월 18일 칙허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8월 26일, 치카노미야는 메이지 천황의 유자(猶子, 법적인 관계는 없으나 아들과 같이 여기는 사람)가 되어 친왕선하를 받고 다케히토라는 이름을 하사받으며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1880년 12월 11일, 다케히토 친왕은 마에다 야스코와 결혼했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이후인 1890년 2월에는 귀족원 황족 의원에 취임했다.[8]

1895년 1월, 양아버지이자 9대 당주였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사망하자, 다케히토 친왕은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제10대 당주를 계승했다. 메이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훗날의 다이쇼 천황)의 교육을 담당하는 동궁 보도(東宮輔導)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케히토 친왕에게는 성인이 된 아들이 없었다. 유일한 아들인 타네히토 왕이 1908년 4월 7일, 충수염 수술 후 장폐색증으로 인해 20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9][13] 당시 시행 중이던 황실전범은 황족의 양자 입적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제42조), 타네히토 왕의 사망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남계 후사가 끊어져 단절이 확정되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후사를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토로하며, 가문의 선례에 따라 황족의 자손이 가문을 이어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14][15]

같은 해 11월 8일, 다케히토 친왕의 딸인 사네코 여왕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작의 아들 요시히사에게 시집갔다.

2. 4. 만년

어린 시절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해군 복무 중 잦은 병가를 냈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의 교육을 담당하는 동궁부도(東宮輔導)에 임명되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해군에서는 명목상 현역으로 있었으나 실제 군 복무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러일 전쟁 발발 당시 해군 중장이었으나, 일시적으로 대본영에 소속된 것 외에는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특히 쓰시마 해전 당시에는 독일 제국의 황태자 빌헬름의 결혼식 참석차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1908년 3월 2일, 아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네히토 왕이 충수염을 앓게 되었고[9], 수술 후 잠시 호전되는 듯했으나 4월 2일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장폐색증으로 발전했다.[11] 다케히토 친왕 부부는 급히 에타지마로 갔으나 손쓸 방법이 없었고, 다네히토 왕은 4월 7일 오후 4시 10분에 훙거했다.[9][12][13] 이로 인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남계 후사가 없어 구 황실전범 제42조의 양자 금지 규정에 따라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 다케히토 친왕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후사를 잃은 심정과 함께 "아리스가와노미야 선대의 계통을 생각하면, 선례를 따라 황자손이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다"며 황족 후손이 가문을 이어가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14]. 이토는 법규 내에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답했다[15]. 같은 해 11월 8일, 딸 사네코 여왕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작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히사와 결혼했다.

아들 다네히토 왕의 사망 이후 폐결핵을 앓게 된 다케히토 친왕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09년 9월, 효고현 고베시 다루미구에 있던 마이코 별장으로 거처를 옮겨 요양 생활을 시작하며 사실상 은퇴했다.[16]

1910년 「황족 신위령」(皇族身位令) 제정 시, 메이지 천황의 지시로 의견을 요청받았을 때 유일하게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오쿠다 요시토 등이 마이코 별장을 방문해 설명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설명을 듣고 납득하여 원안대로 3월 3일에 공포되었다.[17][18][19] 1911년 4월 4일에는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사세보시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이코 별장을 방문하여 다케히토 친왕을 문병했다.[20]

1912년 4월 12일, 딸 부부인 사네코와 요시히사가 손녀 기쿠코를 데리고 마이코 별장을 방문했다.[21] 당시 사네코·요시히사 부부의 장녀는 일찍 사망했기에, 기쿠코는 다케히토 친왕의 유일한 손녀였다. 다케히토 친왕은 우울한 기분 속에서도 손녀 기쿠코를 보며 "기쿠메, 기쿠메"라고 부르며 웃는 등 크게 기뻐했으며, 기쿠코 역시 할아버지를 잘 따랐다. 부부는 야스코 비의 조언에 따라 기쿠코를 별장에 남겨두고 돌아갔다.[22] 같은 해 메이지 천황붕어했을 때는 건강 악화로 도쿄로 돌아갈 수 없어 장례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별당 히라야마 시게노부를 대신 보냈다.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의 보문품(普門品)과 수량품(壽量品)을 직접 필사하기도 했다.[23]

1913년 7월 3일, 다케히토 친왕은 고베 마이코 별장에서 훙거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사실은 즉시 발표되지 않았고, 시신은 특별히 마련된 열차로 도쿄 고지마치의 저택으로 옮겨진 뒤인 7월 10일에야 공식적으로 사망이 발표되었다. 실제 사망일(7월 3일)과 공식 발표일(7월 10일) 사이인 7월 7일, 그는 명예직인 해군 원수로 진급했는데, 이 때문에 이 진급은 사후 추서로 간주되지 않는다. 사후 최고 등급의 국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중앙)과 수행원 이토 히로부미(왼쪽).

3. 결혼과 가족

1880년 12월 11일, 다케히토 친왕은 가가 번의 마지막 다이묘였던 마에다 요시야스의 넷째 딸 마에다 야스코(前田慰子, 1864년 3월 15일 ~ 1923년 6월 30일)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이름원문 표기생몰년비고
이사코 여왕績子女王|이사코 조오jpn1885년 10월 17일 ~ 1886년 9월 30일요절
타네히토 왕有栖川宮栽仁王|아리스가와노미야 타네히토 오jpn1887년 9월 22일 ~ 1908년 4월 7일일본 해군병학교 재학 중 충수염으로 사망.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남자 후계자.
미에코 여왕實枝子女王|미에코 조오jpn1891년 2월 14일 ~ 1933년 4월 25일도쿠가와 요시히사 공작과 결혼. 딸은 훗날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과 결혼한 기쿠코 비.



아들인 타네히토 왕이 에타지마의 일본 해군병학교 재학 중이던 1908년 충수염으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러나 다케히토 친왕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다이쇼 천황은 자신의 셋째 아들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에게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옛 칭호인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를 내려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이후 노부히토 친왕은 다케히토 친왕의 외손녀이자 타네히토 왕의 조카인 다카마쓰노미야 기쿠코와 결혼하였다. 다케히토 친왕은 타네히토 왕 사후 후계 문제를 걱정했으나, 1913년 6월 22일 궁내대신 와타나베 치아키 백작을 통해 이러한 내락을 전달받고 안심했다고 전해진다[25][24].

4. 기념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을 기리는 여러 기념물과 장소가 남아있다.


  •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 공원: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에 위치한 공원으로, 원래 다케히토 친왕의 도쿄 별궁 터였다. 현재는 광대한 정원이 일반에 공개되어 있으며, 공원 내에는 타케히토 친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텐쿄카쿠: 후쿠시마현 이나와시로정에 있는 다케히토 친왕의 옛 별장으로, 그가 직접 설계했다.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부지에는 그의 대형 청동 입상이 있는데, 이 동상은 원래 도쿄도 쓰키지의 해군참고관 앞에 1921년 10월 24일 준공되었던 것이다[36]. 신카이 타케타로가 제작했으며, 받침대를 포함하여 20m에 달하는 크기였다[36]. 제막식에는 황족과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 등 많은 인사가 참석했다[36]. 이 동상은 1984년에 현재 위치인 텐쿄카쿠로 이전되었다.

후쿠시마현의 별저 (현・텐쿄카쿠)

  • 가나가와 현립 근대 미술관 하야마관: 가나가와현 미우라군 하야마정에 위치하며, 다케히토 친왕의 해변 별장이 있던 자리이다. 친왕 사후 다카마쓰노미야 별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가나가와현이 부지를 취득하여 현재에 이른다.
  • 씨사이드 호텔 마이코 빌라 고베: 효고현 고베시 타루미구에 위치한 호텔로, 다케히토 친왕이 1913년 7월 10일 훙거한 장소인 마이코 별저 터에 세워졌다[28][29].
  • 야보 텐만구 기념 석비: 도쿄도 구니타치시의 야보 텐만구 매화 숲 안에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 전하 강림 기념' 석비가 있다. 이는 1908년 8월 1일, 다케히토 친왕의 선도로 이루어진 일본 최초의 드라이브 투어 '엔조회'가 이곳을 목적지로 삼았던 것을 기념한다.
  • 토쿠요 기념비: 홋카이도 오쿠시리정에 있는 기념비로, 1931년에 완성되었다. 1880년 영국 군함이 아오나에 곶에서 좌초되었을 때, 당시 해군 소위보로 승선해 있던 다케히토 친왕이 섬 주민 및 다른 나라 군함과 협력하여 구조 활동을 펼친 공적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이후 두 차례의 큰 쓰나미(1983년 동해 중부 지진, 1993년 홋카이도 남서쪽 해역 지진)를 견뎌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5. 관련 단체

단체명직책
대일본 제국 수난 구제회초대 총재
일본 해원 섭제회초대 총재
제국 해사 협회초대 총재
수교사총재


참조

[1]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2] 뉴스 Birthday Honours The Times 1902-11-10
[3] 간행물 London Gazette 1902-11-28
[4]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5]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6] 서적 威仁親王行実(上) 1926
[7] 서적 威仁親王行実(上) 1926
[8]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 貴族院・参議院議員名鑑
[9] 간행물 官報 2950777/14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01-04-07
[10]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1]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2]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3] 간행물 官報 2950777/14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01-04-07
[14]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5]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6]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7]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8]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19]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0]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1]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2]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3]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4]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5]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6] 간행물 官報 2952383/20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13-07-10
[27] 간행물 官報 2955398/18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13-07-06
[28]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29] 간행물 官報 2955398/18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13-07-10
[30] 간행물 官報 2955398/18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13-07-10
[31]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32]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33]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34]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35]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36] 서적 威仁親王行実(下) 1926
[37] 간행물 官報 第1051号「叙任及辞令」明治19年1月4日
[38] 간행물 官報 第1928号「宮廷錄事」「彙報 - 大日本帝国憲法発布記念章送付」 http://dl.ndl.go.jp/[...] 1889-11-30
[39] 간행물 官報 第3737号「叙任及辞令」明治28年12月11日
[40] 간행물 官報 号外「叙任及辞令」明治39年12月30日
[41] 간행물 官報 第7771号「叙任及辞令」明治42年5月24日 http://dl.ndl.go.jp/[...] 1909-05-24
[42] 간행물 官報 第282号「叙任及辞令」1913年7月8日
[43] 간행물 官報 第282号「叙任及辞令」大正2年7月8日 http://dl.ndl.go.jp/[...] 1913-07-08
[44] 문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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