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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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밍간(Mingghan)은 몽골어로 '천(千)'을 의미하며, 몽골 제국이 정복한 지역에서 천호(千戸), 하자라(hāzāra) 등으로 불린 군사 및 행정 단위이다. 칭기즈 칸은 1206년 몽골 제국 건국 후 95개의 밍간을 설치했으며, 각 밍간은 유목 집단과 유목지를 분봉받아 군사, 행정, 경제적 기능을 수행했다. 밍간 제도는 몽골 제국의 팽창과 함께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몽골 제국의 군사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밍간 제도는 칭기즈 칸이 재편성한 십진법 군사 조직에서 기원하며, 케식(친위대) 제도와도 연관되어 밍간장(천인대장)의 자제들이 케식에 들어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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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밍간 | |
|---|---|
| 밍간(明安) | |
| 민족 | 몽골족 |
| 생애 | |
| 출생 | 1180년경 |
| 사망 | 1223년 |
| 활동 시기 | 칭기즈 칸 시대 |
| 주요 활동 | |
| 직위 | 천호장 |
| 역할 | 케식의 지휘관, 몽골 제국의 장군 |
| 가족 관계 | |
| 아들 | 타가이 |
| 기타 | |
| 관련 인물 | 칭기즈 칸 |
2. 명칭
몽골어 "밍간(Mingghan)"은 "천(千)"을 의미하며, 각 지역에서 다양하게 불렸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호(千戸)"로, 아라비아 문자 문화권에서는 "하자라(هزاره/hāzāra)"로 불렸다. 원대(元代) 한문 사료에서 보이는 "명안"(明安)은 Mingγanmn을 음역한 것이다.[35]
몽골 제국은 정복한 각 지역에서 밍간 제도를 시행했기 때문에 유라시아 전역에서 밍간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현지 언어에서 '천'(千)을 뜻하는 단어로 밍간을 바꿔 불렀는데,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호'(千戸), 아라비아 문자 문화권에서는 '하자라'(هزاره/hāzāra)라고 불렀다. 한편, '밍간'을 그대로 음역한 경우도 있었는데, 원대 한문 사료에 나오는 '명안'(明安)이라는 인명도 실제로는 Mingγan을 음역한 것이다.[35]
일본에서는 "천호(千戸)" 또는 "천호장(千戸長)"으로 표기되었으나, 몽골사 연구가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천호 제도'라는 말은 중화식 '호(戸)'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인(人)'을 기초 단위로 했던 유목민에게는 적절하지 않고 '천인대 제도'(千人隊制度)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6] 최근 일본의 몽골사학 연구에서는 밍간을 "천인대(千人隊)"로 번역하는 용례가 늘고 있다.
3. 역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밍간(Mingγan)이라는 용어를 한문 사료의 기록을 따라 '천호'(千戸) 또는 '천호장'(千戸長)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몽골어 및 페르시아어 사료를 이용하고 중국 중심적인 사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천호제도'(千戸制度)라는 명칭도 나타났다. 몽골사를 연구한 일본 학자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천호제도'라는 말은 중화식의 '호'(戸)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인'(人)을 기초 단위로 했던 유목민에게는 적절하지 않고 '천인대제도'(千人隊制度)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6] 이러한 주장에 따라 최근 일본의 몽골사 연구에서는 밍간을 '천인대'(千人隊)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3. 1. 기원과 초기 발전
예로부터 몽골 고원의 유목 국가들은 십진법을 기초로 하는 사회·군사 단위를 편성했으며, 그 기원은 기원전 흉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테무친이 등장할 무렵, 몽골에서는 부족이나 씨족이 숙영할 때 적군의 침입에 대비해 원형의 진을 짰고, 이를 몽골어로 쿠리엔(Kürien)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쿠리엔은 1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1쿠리엔=1천 명 부대는 당시 유목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단위였다.[37]
12세기 말, 몽골부 키야트 씨족의 수장이 된 테무친이 처음 거느렸던 군대는 키야트 씨족에 속한 여러 쿠리엔들이었다. 《몽골비사》에서 '13익'(翼, 13쿠리엔)이라고 칭하는 이들 쿠리엔은 씨족적인 체제에서 결성된 것으로 테무친은 이들 '13익'들에 대해 특별히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며, 심지어 각 쿠리엔(익)의 수장들은 테무친의 출병 요청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한편 '13익' 안에서 제2익(翼)은 테무친 직속이었고, 테무친의 여러 아들과 형제, 너커르(동지), 케식(친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무친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지 않은 키야트 씨의 여러 쿠리엔들을 의지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에 직속된 부대(즉 제2익)을 확대시킨다는 방침을 취했다. 때문에 '13익'의 대부분은 테무친이 몽골 고원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연 소멸되었고, 제2익에서 케식을 맡고 있던 자들이 천인대를 이끄는 장군이 되어, 훗날 몽골 제국의 간부층이 된다.[38]
1203년, 테무친은 아직 몽골에 복속되지 않은 마지막 유력 부족인 나이만 부를 치면서 "숫자를 숫자로 보태고, 1천을 1천으로 해서, 천호(千戸)의 관인, 백호(百戸)의 관인, 십호(十戸)의 관인을 그에 임명한다"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군세를 재편성해 천인대로 구분하고 각각 천인대장(千人隊長) ・ 백인대장(百人隊長) ・ 십인대장(十人隊長)을 지명하였다. 재편성된 천인대는 재래의 씨족적 원리가 아닌 테무친이 정한 제도에 따라 행동했고, 천인대장도 기존의 씨족장이 아니라 테무친의 너커르나 케식이었던 자들로 임명되었다.
3. 2.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밍간 제도
1203년, 테무진은 나이만부를 정벌하면서 자신의 군세를 천인대로 재편성하고, 각 천인대의 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을 임명했다.[9] 이들은 기존의 씨족적 원리가 아닌 테무진이 정한 제도에 따라 행동했으며, 천인대장은 테무진의 노코르(료우), 케식(친위대) 출신 중에서 임명되었다.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테무진은 칭기즈 칸을 칭하며 몽골 제국을 건국하고 국가 체제 제정에 힘썼다. 칭기즈 칸은 즉위 직후 몽골 고원 통일에 공헌한 공신들을 "천인대장"으로 임명하고, 1천 명의 유목 집단과 유목지를 분봉했다. 이때 제정된 천인대는 95개였으며, 칭기즈 칸은 이 중 12개를 자신의 아들들(조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에게 분봉하여 제국의 우익으로, 12개를 자신의 아우들(카사르, 카치운, 옷치긴)에게 분봉하여 제국의 좌익으로 삼았다.
칭기즈 칸은 남은 "중군"을 다시 우익(서방)과 좌익(동방)으로 나누어, 서쪽의 "오른손의 알타이 산에 근거한 만인대"의 만인대장을 보오르추로, 동쪽의 "왼손의 카라운 지돈에 묶인 만인대"의 만인대장을 무칼리로 임명하여 좌우 양익을 통괄하게 했다. 칭기즈 칸이 정한 이러한 국가 구조는 몽골 제국의 기본 형태로, 이후 많은 변화 속에서도 천인대를 중심으로 한 "좌익·우익·중군"의 삼극 구조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10]
3. 3. 칭기즈 칸 사후의 변화
칭기즈 칸이 사망할 당시(1227년) 밍간은 129개에 달했다. 이 중 칭기즈 칸의 여러 아들 및 형제들의 상속분(28개)을 제외한 101개 밍간은 막내아들에게 상속한다는 몽골의 풍습에 따라 칭기즈 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가 물려받게 되었다.[40]
그러나 칭기즈 칸 사후 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 칸이 대칸으로 즉위하면서, 툴루이가 대칸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에 우구데이 칸은 금나라 정복 이후 정복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툴루이 울루스가 소유한 밍간에 두 가지 변화를 주었다.[40]
이때 독립한 밍간은 우익(서방)보다 좌익(동방)에 속한 자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유력한 다섯 밍간을 '좌익의 다섯 투하'라고 불렀다. 우익보다 좌익의 독립성이 강했던 이유는 칭기즈 칸이 중앙아시아 원정에 종사했을 때 우익의 밍간은 칭기즈 칸의 직접 지휘를 받았던 반면, 좌익의 밍간 일부는 칭기즈 칸의 부하였던 무칼리 국왕의 지배하에 금나라 공략에 참여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42]
결과적으로 툴루이가 상속받은 101개의 밍간(10만 1천 명) 중 1만 명은 우구데이의 케식이 되었고, 4천 명은 쿠덴의 울루스에 속하게 되었으며, 6만 6천 명은 독립된 울루스를 형성하였다. 툴루이 울루스에는 21개의 밍간(2만 1천 명)만이 남게 되었고, 이전보다 독립된 좌익이 소멸되고 우익에 편중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좌익 밍간의 독립화와 우익 밍간의 툴루이 울루스로의 종속화는 그 후로도 지속되었고, 이후의 몽골 제국의 정국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43]
3. 4. 몽골 제국의 내분과 쇠퇴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에서 쿠빌라이는 좌익 밍간을 기반으로 승리하여, 좌익 밍간은 원나라에서 우대받았다.[45] 반면 우익 밍간은 쿠빌라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원나라 시대에 정치 중심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면서 몽골 고원의 밍간에 대한 기록은 줄어들었다. 1368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대도를 잃고 몽골 고원으로 돌아온 북원의 고관들은 밍간에 의지했고, 이는 북원이 명나라의 압박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평가받는다.[46]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걸쳐 몽골에서 벌어진 내란 속에서 밍간은 오토크(otoq)로 변용되었고, 여러 오토크를 포함하는 '''투먼'''(만인대)이 새로운 유목 집단의 기초 단위가 되었다.
4. 군사 제도
몽골 제국은 군대를 십진법에 기초하여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로 구성하고, 각 단위에 십인대장, 백인대장, 천인대장, 만인대장을 임명했다.[48] 이러한 체계는 몽골군이 신속하게 병력을 동원하고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게 했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 몽골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 사료명 | 저자 | 내용 |
|---|---|---|
| 몽달비록 | 자오궁(남송) | 몽골군은 병사를 수십만 명 동원할 때에도 문서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원수부터 천호(천인대장), 백호(백인대장), 패자두(십인대장)까지 명령이 전달되어 실행된다.[18] |
| 요하네스 데 플라노 카르피니(프란체스코회) | 칭기스 칸은 10명 위에 십인대장, 10명의 십인대장 위에 백인대장, 10명의 백인대장 위에 천인대장, 10명의 천인대장 위에 만인대장을 두도록 했다. 전군에는 2~3명의 지휘관이 있지만, 실제로는 1명이 최고 지휘권을 가졌다.[19][20] | |
| 세계 정복자의 역사 | 알라웃딘 아타말리크 주바이니(호라산) | 모든 사람은 10개의 부대로 나뉘고, 각 단위마다 지휘관이 임명된다.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로 지휘관이 있으며, 긴급 시에는 만인대장부터 십인대장까지 명령이 하달된다.[19][21] |
| 동방견문록 | 마르코 폴로(베네치아 공화국) | 군대는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로 편제되어 각 단위마다 지휘관이 있다. 각 지휘관은 상관에 대해 책임을 지며,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병력을 동원한다.[22][23] |
위 기록들은 몽골군이 십진법에 따라 편성되었고 각 단위에 지휘관이 임명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지휘관이 여러 직책을 겸임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주바이니는 만인대장이 다른 직책도 겸했다고 기록한 반면, 카르피니는 각 분대장이 별개였다고 기록했다. 몽골 제국 초기에는 무칼리, 보오르추처럼 여러 직책을 겸한 사례가 있었지만, 원나라 시대에는 그러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칭기즈 칸의 원래 원칙은 겸직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여러 직책을 겸하는 것은 제국 초기의 특수한 사례였다고 추측된다.[24]
5. 케식(친위대)과의 관계
1206년 칭기즈 칸은 밍간 제도를 정비하면서 케식텐(친위대) 제도도 재편하여 그 규모를 1만 명으로 늘렸다. 칭기즈 칸은 밍간의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경호를 돌아가며 설 사람을 1천 명씩 뽑아 넣으라고 명령하여, 케식텐 구성원을 밍간 지휘관의 자제들로부터 선출하도록 했다.[49]
대칸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케식은 대칸의 친위군이자 의복, 식사 등을 맡아보는 가정 기관이기도 했으며, 간부 양성 기관의 역할도 했다. 몽골 제국을 이끌어나갈 유망한 밍간 지휘관의 자녀들은 케식텐에 들어가 국가적 서무에 종사하고 장차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동시에 칸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였다.[50] 몽골 제국 시대에 이름을 남긴 고관대작 대부분은 칭기즈 칸에게 임명된 밍간 지휘관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케식으로 성장해 훗날 케식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다.
『몽골비사』에는 1만 명의 케식이 구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헵테울(Kebte’ul, 숙영)은 라시드웃딘의 『집사』에서 '친위천인대'(hezāre-ye buzurg) 또는 '칭기즈 칸 직속의 천인대'(hazāra-ye khāṣṣ-i Chīnkkīz Khān)라 불리는 군단에 해당하였다.[51]
6. 칭기즈 칸의 천인대장
칭기즈 칸이 직접 임명한 초기 천인대장들은 몽골 제국의 핵심 귀족층을 이루었다. 대원 울루스나 훌라구 울루스의 고관들 대다수는 칭기즈 칸 시대 천인대장의 후손이라고 칭했다. 몽골 시대에는 칭기즈 칸 시대의 천인대장을 언급하는 사료가 많이 편찬되었는데, 그중 『원조비사』와 『집사』는 칭기즈 칸의 천인대장 목록을 기록하고 있어 천인대장 연구의 기본 사료가 된다.
『원조비사』는 88명의 천인대장과 95개의 천인대를, 『집사』는 129명의 천인대장을 언급하고 있는데, 양측의 기록에는 차이점이 많다. 한 사료에만 언급되는 천인대장이 다수 발견되는 등의 차이는 『원조비사』가 몽골 제국 건국 시점(1206년)을, 『집사』가 칭기즈 칸 사망 시점(1227년)을 기준으로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1206년 이후 몽골 제국에 귀순하여 천인대장에 임명된 오이라트의 쿠투카 베키 등은 『원조비사』에 기록되지 않았다.[52]
『집사』에는 "3천인을 거느린 잘라이르부의 무칼리 국왕"과 같이 복수의 천인대를 소유한 천인대장이 보이는데, 이는 한 사람이 복수의 천인대를 통솔한 것이 아니라 상급 천인대장이 하급 천인대장의 임명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집사』는 하급 천인대장을 생략하고 상급 천인대장만을 기술한 것으로, 『원조비사』에는 나오고 『집사』에는 나오지 않는 인명 대부분은 생략된 하급 천인대장일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집사』는 우르우트 부족의 천인대장으로 케흐테이만을 언급하지만, 『원조비사』는 케흐테이의 아버지 주르체데이와 동생 부지르도 천인대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1227년 시점에서 상급 천인대장이었던 케흐테이만을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53]
마찬가지로, 무칼리(3위)의 친족인 토게(10위)는 "무칼리의 3천인대"의 하급 천인대장, 알치 쿠레겐(86위)의 친족인 오울 쿠레겐(79위)과 치구 쿠레겐(85위)은 "알치 쿠레겐의 5천인대"의 하급 천인대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원조비사』와 『집사』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천인대장 목록이다.
| 천인대장 | 페르시아어 표기(『집사』) | 한자 표기(『원조비사』) | 공신 순위 | 소속 | 부족 | 비고 |
|---|---|---|---|---|---|---|
| 뭉릭 에치게 | Munklīk Ījīka | 蒙力克額赤格 | 1 | 중군 우익 | 콩코탄 | 콩코탄 부의 수장 |
| 보오르추 노얀 | Būrjī Nūyān | 孛斡児出 | 2 | 중군 우익 | 아룰라트 | 사준의 한 사람, 우익의 만인대장, 원사 권119에 열전 |
| 무칼리 국왕 | Mūqalī Kūyānk | 木合黎国王 | 3 | 중군 좌익 | 잘라이르 | 사준의 한 사람, 좌익의 만인대장, 원사 권119에 열전 |
| 코르치 우순 에브겐 | Qūrjī Nūyān | 豁児赤 | 4 | 중군 우익 | 바아린 | 10개의 천인대를 거느렸으며 만인대장으로 임명 |
| 이르게이 노얀 | Īūkāi Nūyān | 亦魯該 | 5 | 우구데이 가 | 잘라이르 | 우구데이의 왕부 |
| 주르체데이 | 主児扯歹 | 6 | 중군 좌익 | 우르우트 | 『집사』에는 아들인 케흐테이와 혼동, 원사 권120에 열전 | |
| 쿠난 노얀 | Kūnān Nūyān | 忽難 | 7 | 주치 가문 | 게니게스 | 주치의 왕부 |
| 쿠빌라이 노얀 | Qūbīlai Nūyān | 忽必来 | 8 | 콜겐 가문 | 바를라스 | 사구의 한 사람, 콜겐의 왕부 |
| 젤메 | Yīsū Būqā Tāīshī | 者勒蔑 | 9 | 중군 좌익 | 우리얀 한 | 『집사』에서는 후계자인 아들 예수 부카만 기록 |
| 토게 | 禿格 | 10 | 중군 좌익? | 잘라이르 | 무칼리(3위)의 종형제, 『집사』에는 대응 인물 없음 | |
| 데게이 | Takā | 迭該 | 11 | 우구데이 가 | 베스투 | 우구데이의 왕부 |
| 톨룬 체르비 | Tūlūn Jarbī | 脱欒扯児必 | 12 | 중군 우익 | 콩코탄 | 뭉릭 에치게(1위)의 아들 |
| 옹구르 | Ūnkūr Nūyān | 汪古児 | 13 | 중군 좌익 | 바야우트 | 원래 바우르치(음식 담당 관리) 직책 |
| 칠구테이 | 出勒格台 | 14 | ? | 술두스 | 원래 우르두치(칼 찬 자) 직책 | |
| 보로클 노얀 | Būrqūl Nūyān | 孛忽勒 | 15 | 중군 우익 | 후신 | 사준의 한 사람, 무칼리의 부관, 원사 권119에 열전 |
| 시기 쿠투그 | Shīkī Qūtūqū | 失吉忽禿忽 | 16 | 중군 우익 | 타타르 | 예케 자르구치(대단사관) 직책 |
| 구추 | 古出 | 17 | 옷치긴 가문 | 메르키트 | 옷치긴 가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코코추 | 闊闊出 | 18 | 옷치긴 가문 | 베스투 | 옷치긴 가문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코르코순 | 豁児豁孫 | 19 | 옷치긴 가문 | ? | 옷치긴 가문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후순 | 許孫 | 20 | ? | 케레이트 | 『집사』에 대응 인물 없고, 원사 권122에 열전 | |
| 퀼다르 세첸 | Qūildār Sājān | 忽亦勒荅児 | 21 | 중군 좌익 | 망구트 | 실제 1206년 이전 사망, 원사 권121에 열전 |
| 시르구이 | 失魯該 | 22 | ? | 제레이트(Je'üreyid) | 『집사』에 대응 인물 없지만 원사 권132에 손자 열전 | |
| 제데이 노얀 | Jadī Nūyān | 者台 | 23 | 중군 우익 | 망구트 | 톨루이의 왕부 |
| 타가이 | 塔該 | 24 | ? | 술두스 | 『집사』에 대응 인물 없지만 원사 권129에 손자 열전 | |
| 챠칸 코아 | (Tughrīl) | 察合安豁阿 | 25 | 콜겐 가문 | 노구즈 | 『집사』에는 뒤를 이은 아들 토오릴만 기록 |
| 아라크 노얀 | (Mankqul Turkān) | 阿剌黒 | 26 | 중군 우익 | 바아린 | 손자 바얀은 원사 권127에 열전 |
| 소르칸 시라 | (Sudun Nūyān) | 鎖児罕失剌 | 27 | 중군 우익 | 술두스 | 『집사』에는 뒤를 이은 손자 소돈 노얀만 기록 |
| 부르칸 카라차 | Bālūqān Qālja | 不魯罕 | 28 | 중군 우익 | 바를라스 | 손자 쿠룸시는 원사 권135에 열전 |
| 카라차르 | Qārājār | 哈剌察児 | 29 | 차가타이 가문 | 바를라스 | 차가타이의 왕부, 티무르 가문의 시조 |
| 코코추스 | 闊可搠思 | 30 | 차가타이 가문 | 바아린 | 차가타이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수이게투 체르비 | Sūkātū Jarbī | 速亦客禿扯児必 | 31 | 중군 우익 | 콩코탄 | 뭉릭 에치게(1위)의 아들 |
| 나야아 노얀 | Nāya Nūyān | 乃牙阿 | 32 | 중군 좌익 | 바아린 | 바아린 부족의 세 천인대를 거느렸으며 만인대장에도 임명 |
| 조스쿠 | 種索 | 33 | 옷치긴 가문 | 노야킨 | 옷치긴 가문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쿠추구르 | Kūchūkūr | 古出古児 | 34 | ? | 베스투 | 데구이(11위)의 동생 |
| 바라 오로나울타이 | 巴剌 | 35 | ? | 오로나울 | 증손자로 산동 복주의 만인대장이었던 매려 | |
| 다이르 | Dāīr | 荅亦児 | 36 | 우구데이 가문 | 콩코탄 | 인도 방면 탐마치 초대 사령관 |
| 무게 | Mūka Nūyān | 木格 | 37 | 차가타이 가문 | 잘라이르 | 차가타이의 왕부 |
| 부지르 | Būjir Nūyān | 不只児 | 38 | 중군 좌익 | 우르우트 | 주르체데이(6위)의 아들 |
| 몽케우르 | Mūnkkūr | 蒙古兀児 | 39 | 주치 가문 | 시지우트 | 주치의 왕부 |
| 도르아다이 | Tūlādāī bāūrchī | 朶囉阿歹 | 40 | 중군 좌익? | 잘라이르 | 『집사』 「천인대 일람」 외 곳곳에서 발견 |
| 보겐 | 孛堅 | 41 | 오로우르 | 아들 쿠두는 원사 권135에 열전 | ||
| 쿠두스 | Qūtūs Qalja | 忽都思 | 42 | 중군 좌익 | 바를라스 | 쿠빌라이(8위)의 동생 |
| 마랄 | 馬剌勒 | 43 | ? | ? | 상세 불명 | |
| 제브게 | 者卜客 | 44 | 카사르 가문 | 잘라이르 | 카사르 가문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주치 자우르칸 | jūchī jāūrqāī | 余嚕罕 | 45 | ? | 잘라이르 | 원사 권131에 손자 아우르쿠치 열전 |
| 코코 부카 | 闊闊 | 46 | ? | ? | 상세 불명 | |
| 제베 | Jebe Nūyān | 者別 | 47 | 소속 불명 | 베스투 | 사구의 한 사람, 『집사』 「일람」에 미기재 |
| 우두타이 | 兀都台 | 48 | ? | ? | 상세 불명 | |
| 바라 제르비 | Balā Nūyān | 巴剌扯児必 | 49 | 중군 우익 | 잘라이르 | 알카이 카사르(후술)의 동생 |
| 케테 | hūshītāī? | 客帖 | 50 | 주치 가문 | 후진 | 주치의 왕부 |
| 수베테이 | Sūbadāi Bahādūr | 速別額台 | 51 | 중군 좌익 | 우리얀한 | 사구의 한 사람, 자손은 대대로 톨루이 가문 섬김 |
| 몽케 카르자 | Mūnkā Qalja | 蒙可哈勒札 | 52 | 중군 좌익 | 망구트 | 퀴르달 세첸(21위)의 아들 |
| 쿠르차쿠스 | 忽児察忽思 | 53 | ? | ? | 상세 불명 | |
| 게우기 노얀 | Kūkī Nūyān | 苟吉 | 54 | 중군 우익 | 키야트 | 『집사』에는 몽케트와 두 사람이 1개 천인대 소유 |
| 바다이 | Bādāī | 巴歹 | 55 | 소속 불명 | 오르나우르 | 공적으로 다르한 칭호 |
| 케시리크 | Qīshlīq | 乞失里克 | 56 | 소속 불명 | 오르나우르 | 바다이의 동료, 증손자 哈剌哈孫은 원사 권136에 열전 |
| 케흐테이 노얀 | Kehtei Nūyān | 客台 | 57 | 중군 좌익 | 우르우트 | 1227년 시점 우르우트 부족 4개 천인대 거느림 |
| 차우르카이 | 察兀児孩 | 58 | 카치운 가문 | 우리얀한 | 카치운의 왕부 | |
| 옹기란 | 翁吉㘓 | 59 | ? | ? | 상세 불명 | |
| 도곤 | 脱歓 | 60 | ? | ? | 상세 불명, 보로굴(15위)의 아들이라는 설 | |
| 테무르 | 帖木児 | 61 | ? | 수니투 | 상세 불명 | |
| 몽게투 | Mūkatū Qiyān | 蔑格禿 | 62 | 중군 우익 | 키야트 | 『집사』에는 게우기와 함께 두 사람이 1개 천인대 소유 |
| 카다안 다르두르칸 | Qadān Kabtāūl | 合荅安 | 63 | 중군 우익 | 수니트 | 우구데이 시대 케식 장으로 발탁 |
| 모로카 | 抹囉合 | 64 | ? | ? | 상세 불명 | |
| 도리 부카 | 朶哩不合 | 65 | ? | ? | 상세 불명 | |
| 이두카타이 | 亦都合歹 | 66 | 차가타이 가문 | ? | 차가타이 가문의 왕부, 『집사』에 대응 인물 없음 | |
| 시라쿠르 | 失剌忽勒 | 67 | ? | 케레이트 | 『집사』에 대응 인물 없지만 원사 권134에 손자 열전 | |
| 베둔 | 倒温 | 68 | ? | ? | 상세 불명 | |
| 타마치 | 塔馬赤 | 69 | ? | ? | 상세 불명 | |
| 모쿨 쿠란 | Mūqūr Qūrān | 合兀㘓 | 70 | 중군 우익 | 아다르킨 | 아다르킨 부족 수장 |
| 아르치 | 阿勒赤 | 71 | ? | ? | 상세 불명 | |
| 토사카 | Dūsūqa | 脱撒合 | 72 | 중군 우익 | 도르벤 | 자손은 주로 훌라구 울루스에서 활약 |
| 톤퀴다이 | 統灰歹 | 73 | ? | ? | 상세 불명, 친카이와 동일인물 설 | |
| 토브카 | 脱不合 | 74 | ? | 케레이트 | 『집사』에 대응 인물 없지만 원사 권134에 손자 열전 | |
| 아지나이 | 阿只乃 | 74 | ? | ? | 상세 불명, 안추르와 동일인물 설 | |
| 토이데게르 | 禿亦迭格児 | 76 | ? | ? | 상세 불명 | |
| 세체우르 | 薛潮兀児 | 77 | ? | 콜라스 | 원래 바우르치(음식 관리자) 직책 | |
| 제데르 | 者迭児 | 78 | ? | ? | 원사 권123 직탈아와 동일인물 설 | |
| 우랄 큐레겐 | Ūlār Kūrūān | 斡剌児古咧堅 | 79 | ? | 옹기라트 | 칭기즈 칸 어머니 호엘룬의 동생 |
| 킹기야다이 | Kīnkiyātāī | 軽吉牙歹 | 80 | 중군 우익 | 올쿠누트 | 칭기즈 칸 어머니 호엘룬의 동생 |
| 부카 퀴레겐 | 不合古咧堅 | 81 | ? | 바야우트 | 바야우트 부족 수장, 부르간 하툰 | |
| 쿠릴 | 忽憐勒 | 82 | ? | ? | 상세 불명, 콩라트부 설 | |
| 아식 퀴레겐 | Shīkū Kūrkān | 阿失黒古咧堅 | 83 | 중군 좌익 | 콩기라트 | 콩기라트 부족 4개 천인대 거느림 |
| 카다이 쿠레겐 | 合歹古咧堅 | 84 | 중군 좌익? | 콩기라트 | 알치 쿠레겐(86위)의 종형제 | |
| 치브 쿠레겐 | Jīkū Kūrkān(部族史) | 赤古古咧堅 | 85 | 중군 좌익? | 콩기라트 | 알치 쿠레겐(86위)의 아들 |
| 알치 쿠레겐 | Aljī Kūrkān | 阿勒赤古咧堅 | 86 | 중군 좌익 | 콩기라트 | 콩기라트 부족 수장, 5개 천인대 거느림 |
| 부투 쿠레겐 | Būtū Kūrkān | 不禿古咧堅 | 87 | 중군 좌익 | 이키레스 | 이키레스 부족 수장, 3개 천인대 거느림 |
| 아라쿠시 데기트 쿠리 | Alāqūsh Tīkīn | 阿剌忽失的吉惕忽哩 | 88 | 중군 우익 | 옹구트 | 옹구트 부족 수장, 4개 천인대 거느림 |
참조
[1]
서적
Genghis Khan and the Building of the Mongol Empire
The Rosen Publishing Group, Inc
2017
[2]
서적
The Conquests of Genghis Khan
Twenty-First Century Books
2008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710–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4]
서적
Genghis Khan: Conqueror of the World
https://archive.org/[...]
Tauris Parke Paperbacks
2004
[5]
문서
杉山2004,351-352頁
[6]
문서
杉山2004,30頁
[7]
문서
本田1991,7頁
[8]
문서
"「十三翼」の内、5,6,9,11翼の首長はテムジンに背き去り、3,4,7,10,12翼の首長は消息不明で、最後までテムジンに忠実であったのは第8翼のみであった(本田1991,11頁)。"
[9]
문서
『モンゴル秘史』巻7,191節(那珂1907,272頁)
[10]
문서
杉山2004,55-57頁
[11]
문서
従来、『モンゴル秘史』の記述に基づいてトゥルイは即位したオゴデイ・カアンに自らの有する千人隊を全て譲り、オゴデイ時代には配下の遊牧地・遊牧民を有していなかったと説明されてきた。しかし、近年の研究によってトゥルイ家からオゴデイ家の移った千人隊は一部に過ぎず、オゴデイ・カアンの時代にもトゥルイ・ウルスとそこに所属する千人隊は存続し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されている(村岡1996,63-64頁)。
[12]
문서
この重臣たちの抗議はトゥルイの寡婦[[ソルコクタニ・ベキ]]によって諫められ止められたと記録されている。しかし村岡倫は後述する千人隊の独立化が抗議を受けた記録がないことから、この4千人隊もコデンの統治下に入るのではなく独立したウルスになるのであったら重臣達の抗議は起きなかったのはではないかと述べている(村岡1996,81頁)。
[13]
문서
村岡1996,79-80頁
[14]
문서
村岡1996,82-84頁
[15]
문서
村上1972,356-358頁
[16]
문서
杉山正明は他に候補があったにも関わらずクビライが燕京地方(後の大都)を首都と選んだ理由として、自らの即位を助けた「左手の五投下」、東方三王家といった東方の勢力に便宜を図る意図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している(杉山2004,137-139頁
[17]
문서
本田1991,29頁
[18]
문서
趙珙『蒙韃備録』「起兵数十万、略無文書、自元帥至千戸・百戸・牌子頭、伝令而行」
[19]
문서
訳文は大葉1986,2頁より引用
[20]
문서
護2016,55-56頁
[21]
문서
佐口1994,30-31頁
[22]
문서
訳文は大葉1986,3頁より引用
[23]
문서
愛宕1970,151/155頁
[24]
문서
大葉1986,3-6頁
[25]
문서
村上1976,40/51頁
[26]
문서
片山1980,1-2頁
[27]
문서
本田1991,23-24頁
[28]
문서
本田1991,19-21頁
[29]
문서
本田1991,22頁
[30]
문서
本田1991,34-40頁
[31]
문서
村上1972,342-395頁
[32]
문서
本田1991,21頁。しかし本田は「これは余りにもピッタリしすぎる憾みがあり、左右両翼軍或は諸子弟に与えられた軍の千戸長の所属・経歴が隈無く簡明にされるのでなければ、確実とはいえないかもしれぬ」とも述べている。実際に、「四狗」の一人として著名で明らかに下級千人隊長ではないジェベが『集史』の「千人隊長一覧」に記載されていない(しかし、ベスト部族史には「千人隊長である」と記される)など、検討を要する課題は多い。
[33]
서적
《26사 정요사전》(二十六史精要辞典)
인민일보출판사(人民日报出版社)
[34]
서적
《중국역대관제대사전》(中国历代官制大辞典)
베이징출판사(北京出版社)
[35]
문서
스기야마 마사아키(2004), 351-352쪽. 예를 들면 『원사』(元史)권135 열전22의 명안(明安)、같은 책 권150 열전37의 석말명안(石抹明安) 등이 있다.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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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플라노 드 카르피니의 『몽골인의 역사』에 보이는 몽골 인식과 한계 - 몽골인의 관습과 몽골역사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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