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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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두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은 후 6.25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공군 전투 조종사였다. 1950년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하여 참전했으며, 공군 전투 조종사로 활동하며 88회 출격했다. 1952년 8월 2일, 동료를 대신하여 출격했다가 강원도 간성 상공에서 항공기 공중폭발로 전사했다. 전사 후 대위로 특진되었으며,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2002년 7월 이달의 호국 인물로 선정되었고, 그의 편지가 사후 30년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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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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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두원 |
출생일 | 1926년 7월 5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경주 |
사망일 | 1952년 8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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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보 | |
서훈 | 을지무공훈장 |
직책 | 대한민국 공군 대위 |
2. 생애
경상북도 경주 출생이다. 광복 이전인 7세 때 동생과 단 둘이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3월 사가중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여 조종사 자격을 얻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였으며,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가운데 유일하게 조종사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조종사로서 F-51 전투기를 몰고 88회 출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2년 8월 2일, 작전 중 적의 지상 포화에 피탄되었으나 기체를 살리기 위해 귀환하던 중 강원도 간성 상공에서 항공기 공중폭발로 전사하였다.[2]
2. 1. 6.25 전쟁 참전과 전투조종사로서의 활약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했으며,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가운데 유일하게 조종사로 활약했다. 아군에 전투 비행대가 있다는 것과 전투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공군본부를 찾아가 당시 작전국장인 한해남 중령을 만나 1951년 7월부터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1952년 2월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 전투기 조종사로 88회 출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2년 8월 2일, 출격 편대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음에도 동료 조종사 대신 출격하여 내금강에 위치한 장안사 부근의 적 보급품 집결지를 공격하던 중 기상 악화로 계획된 고도를 유지하지 못했고 적 지상포화에 피탄되었다. 그러나 기체를 살리기 위해 비상탈출을 하지 않고 귀환하던 중 강원도 간성 상공에서 항공기 공중폭발로 산화했다.[2]
2. 2. 전사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였다. 그는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가운데 유일한 조종사였다. 아군에 전투 비행대가 있고 전투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대한민국 공군 본부를 찾아가 당시 작전국장 한해남 중령을 만났고, 이를 계기로 1951년 7월부터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2년 2월에는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어 F-51 전투기 조종사로서 88회 출격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1952년 8월 2일, 원래 출격 편대 명단에 없었음에도 동료 조종사를 대신하여 출격하였다. 내금강에 위치한 장안사 부근의 적 보급품 집결지를 공격하던 중, 기상 악화로 계획된 고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적의 지상 포화에 피탄되었다. 그는 기체를 살리기 위해 비상탈출을 하지 않고 귀환을 시도했으나, 강원도 간성 상공에서 항공기가 공중 폭발하여 전사하였다.[2]
3. 공적
6.25 전쟁 발발 이후 1950년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후 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종사 경력이 있었던 그는 공군으로 전군하였다. F-51 무스탕 전환훈련을 받고 1952년 3월 공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되었다. 강릉기지에서 출격해 원산, 고성, 간성, 신안주 등지의 작전에 투입되어 적 진지, 보급품 집적소 등에 대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여러 공적을 세웠다. 특히 1952년 6월 28일 목표 공격에서 정확한 폭격으로 해당 지역을 초토화시켜, 6.25 전쟁에서 보기 드문 미 국방성 특별수훈장을 받았다.
전투조종사가 되면서 최소 100회의 출격을 목표로 했던 박두원 대위는 1952년 8월 2일, 89회 출격을 마지막으로 전사하였다. 그의 전사 소식에 동료 조종사들은 다음날부터 그의 영정 사진을 안고 교대로 출격하여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해주는 깊은 전우애를 보여주었다.[3][4] 전사 당시 공군 중위 계급이었던 박두원은 전사 후 곧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고,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4. 학력/경력
- 1943년 3월: 일본 사가 사가중학교 졸업
- 1944년 3월: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졸업
- 1952년 2월: 대한민국 공군 간부후보생 16기 수료
- 1952년 3월: 대한민국 공군 소위 임관 (군번: 50945)
5. 서훈
- 을지무공훈장
- 비행훈장
- 대통령 표창
- 6.25 종군기장
6. 재일학도의용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10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였다. 당시 병역 의무가 없었음에도 자원하여 전쟁에 참여했으며, 대구와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다.
박두원은 5차에 걸쳐 진행된 재일학도의용군 참전 과정 중 제5진으로 합류했다. 제5진은 규슈 지방 출신자 54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950년 9월 18일 오이타현 벳푸 캠프에 입소하여 다른 의용군과 달리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45일간의 기본 훈련을 마친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본부로부터 정식 카투사 고유 군번을 부여받았다.
대부분의 제5진 재일학도의용군은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11월 10일 고쿠라 항을 출발,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되었으나, 박두원은 공군에 추천되어 재일학도의용군 중 유일한 공군 조종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재일학도의용군에서는 전쟁 중 총 135명이 전사했으며, 박두원 대위도 그중 한 명이었다. 2014년 10월 3일, 도쿄 민단본부 앞에 새로 세워진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에는 전사자 명부가 새겨졌는데, 박두원 대위의 이름은 유일한 장교로서 명부 맨 위에 기록되었다.[5]
7. 이달의 호국 인물
2002년 7월 이달의 호국 인물에 선정되었다.
8. 기타
박두원 대위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자료로, 조종사로서 출격 후 가깝게 지내던 후배 조종사 이희근 중위(훗날 제15대 공군참모총장)에게 보낸 편지가 그의 사후 30년 만에 발견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나의 희근 군! 군이 보내준 글월은 나에게 끝없는 기쁨과 반가움을 가져다 주었네.'''''
'''''너무나도 그리우면서도 편지 한 장 쓰지 못한 나의 허물을 용서해주게.'''''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의연분투하고 있다니 무엇보다 다행일세.'''''
'''''나도 원기 왕성하게 적 공산군 격멸에 매진하고 있으니 안심하게.'''''
'''''다년간의 숙망이, 아니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밟아야 할 길을 걷게 된 자신을 돌아볼 때 이 감격을 누구에게 터놓고 나누어야 할지 모르겠네.'''''
'''''한 번 출격하면 두 번하고 싶고, 세 번 출격하면 네 번째의 출격이 안타깝도록 기다려지네.'''''
'''''폭탄이 없고 로켓이 떨어지면 눈 아래 보이는 적 고사포를 발길로라도 짓밟아 버리고 싶은 마음 어찌할 수 없네.'''''
'''''곧 출격하게 되네. 희근이 날 믿어주게. 굳은 결의로 조국을 지키세.'''''
'''''이것은 조국이 우리 젊은이들에게만 맡겨준 위대한 사명이며 영광이 아니겠는가.'''''
'''''전쟁을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싶네.'''''
'''''침략자 공산무리를 격멸하고 내 조국 아니 자유민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한국청년의 긍지를 다하세.'''''
'''''그럼 다음을 약속하면서 건투를 비네.'''''
'''''1952년 4월 1일 두원"'''''[6]
참조
[1]
웹인용
박두원(朴斗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1-05-25
[2]
웹인용
초상화 : 박두원 공군대위
https://terms.naver.[...]
2021-05-25
[3]
웹인용
'>Home>인천소식>고시/공고/시보>반상회보 > {7월의 호국인물} 박두원 공군 대위 {{!}} 인천광역시 대표'
https://www.incheon.[...]
2021-05-25
[4]
웹인용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 조선닷컴
https://newslibrary.[...]
2021-06-13
[5]
웹인용
인천상륙작전·장진호전투 등 맹활약…135명 전사
https://kookbang.dem[...]
국방일보
2021-06-13
[6]
웹인용
하늘에서 이룬 꿈 박두원 공군대위
https://www.youtube.[...]
국가보훈처
2021-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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