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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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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록주는 1905년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여성 국악인으로, 판소리 명창이다. 1916년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우며 예명 '녹주'를 얻었고, 송만갑, 정정렬, 김정문 등 당대 명창들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1926년 퇴기 선언 후 음반을 취입하고 방송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으며,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9년 은퇴 공연을 가졌으며, 1979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판소리는 동편제의 특징을 가지며, 흥보가에 특히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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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판소리 대명창 박녹주 선생
본명박명이(朴命伊) → 박녹주(朴綠珠)
출생일1905년 2월 28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선산군
사망일1979년 5월 26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국악인
장르한국 전통 음악
활동 시기1916년~1978년
웹사이트두피디아 박녹주
명창 박록주 기념사업회

2. 약력

1905년 2월 28일 경북 선산군에서 박중근(朴重根[1])과 권순이(權順伊)의 3녀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05년 2월 15일 박재보(朴在普)와 박순이(朴順伊)의 차녀로 출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916년 박기홍에게 춘향가와 심청가 일부를 배우며 소리에 입문하였고, 이때 예명 '녹주'를 얻었다. 1918년 김창환과 김봉이 등에게 단가와 토막소리를 배웠고, 대구 달성권번에서 기생 수업을 받았다. 1919년 달성권번에서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 등에게 〈육자배기〉와 〈화초사거리〉를 배웠다.

1921년 원산부에서 남백우와 만나 잠시 동거하였고, 가족들도 원산으로 이주했다. 1923년 남백우와 결별 후 상경하여, 송만갑에게 단가 〈전국명산〉과 《춘향가》·《적벽가》 등을, 정정렬에게 《춘향가》·《숙영낭자전》, 김정문에게 《흥보가》·《심청가》, 유성준에게 《수궁가》,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를 배웠다. 한남권번에 기적을 두고 명창으로 이름을 알렸다.

1926년 퇴기 선언 후 송만갑 등과 음반을 취입했고, 콜롬비아, 빅터 등 여러 음반사에서 판소리 음반을 발매했다. 같은 해 9월 16일 경성방송국 시험방송에 출연, 1945년까지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했다. 1928년 소설가 김유정을 만났다. 1930년 조선음률협회에 참여했다. 1931년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사사했다. 같은 해 5월 2일 첫 병고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참여, 창극 《춘향전》, 《흥보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편시춘》, 《옹고집전》, 《어촌야화》, 《장화홍련전》 등에 출연했다. 1937년 1월 19일 부친 박재보(朴在普[2])가 사망했다. 1948년 여성 국악인 30여 명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정남희 등이 월북을 강요했다. 1951년 명창 30여 명과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 1952년 초까지 군 위문 공연을 했다. 같은 해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고, 대구에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했다.

1960년 급성 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 퇴원 후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전수했다. 1962년 국악예술학교(현 전통예술고등학교)에 출강했다. 1964년 12월 24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2월 28일 공보부장관 공로상을 수상했다. 1968년 문화공보부 장관 문화재공로상을 수상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은퇴 공연을 가졌고, 대구, 대전, 부산에서도 은퇴 공연을 했다.

1971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973년 11월 5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재지정되었다. 1978년 5월 18일 제자발표회와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은퇴했다.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로 타계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박재보(朴在普, 1937년 1월 19일 사망. 개명 전 이름은 박중근(朴重根).)
  • 어머니: 권순이(權順伊)
  • 배다른 큰언니: 박씨
  • 동복 작은언니: 박씨
  • 본인: 박록주(본명 박명이(朴命伊))

4. 박록주 판소리의 특징

'''동편제'''

성량이 풍부하고, 남성적이고 깔끔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박기홍·송만갑·김정문 등 동편제의 거장에게 흥보가나 심청가등을 전수받았고, 특히 능했던 흥보가에 이러한 동편제의 특징이 그대로 스며들었다. 고향인 경상도 중서부내륙의 사투리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도 특징으로, 이러한 동편제 판소리에 독특함을 부여하고 있다.

정노식은 “성량이 거대하여 광대의 본색을 발휘하여 장래의 촉망을 붙이거니와 모즈락스럽게 맺고 끊는 점이 그 특색을 보인다.”라고 평했다.[3]

이옥천은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다기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라고 평했다.

한농선은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며 우람한 성음이 돋보이는 것이 특기라 할 수 있고 소리를 진행하는 속도가 요즘처럼 느리지 않고 거뜬거뜬하다.”라고 평했다.

정성숙은 “소릿길이 정대하며 엄한 데가 있다. 서슬 시퍼렇게 몰아치는 창법이 특기다. 진중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라고 평했다.[4]

'''흥보가'''

흥보가·심청가·춘향가·숙영낭자전 등의 여러 가지 판소리와 무용, 단가, 창극 등에 능하였지만 특히 흥보가에 능하였다. 1964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에 춘향가만 지정되었으므로 춘향가 기능보유자로 등록되었다가, 1973년에 흥보가 기능보유자로 다시 지정되었다. 박록주의 판소리 중에서는 흥보가만 계승되고 있으며, 계보는 다음과 같다.



'''변형'''

박록주의 소리는 여러 명창에게서 전수된 특징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흥보가 등에서 자신의 소리와 성격에 맞게 변형해 이끌었다. 그러한 결과 박타령·제비노정기 등 흥보가 전반에서 다른 계보로 전승된 동편제 판소리와 비교할 때, 추가된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자주 나타난다.

4. 1. 동편제

성량이 풍부하고, 남성적이고 깔끔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박기홍·송만갑·김정문 등 동편제의 거장에게 흥보가나 심청가등을 전수받았고, 특히 능했던 흥보가에 이러한 동편제의 특징이 그대로 스며들었다.[3][4] 고향인 경상도 중서부내륙의 사투리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도 특징으로, 이러한 동편제 판소리에 독특함을 부여하고 있다. 박록주의 소리는 여러 명창에게서 전수된 특징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흥보가 등에서 자신의 소리와 성격에 맞게 변형해 이끌었다. 그러한 결과 박타령·제비노정기 등 흥보가 전반에서 다른 계보로 전승된 동편제 판소리와 비교할 때, 추가된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자주 나타난다.

4. 2. 흥보가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3년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재지정되었다.[3]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 숙영낭자전 등 다양한 판소리와 무용, 단가, 창극에 능했으나 특히 흥보가에 뛰어났다.[3][4]

박록주의 흥보가는 성량이 풍부하고 남성적이며 깔끔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동편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박기홍, 송만갑, 김정문 등 동편제 명창들에게 흥보가와 심청가 등을 배웠으며, 고향인 경상도 중서부 내륙의 사투리를 그대로 활용하여 독특함을 더했다.[3]

정노식은 박록주의 소리에 대해 “성량이 거대하여 광대의 본색을 발휘하여 장래의 촉망을 붙이거니와 모즈락스럽게 맺고 끊는 점이 그 특색을 보인다.”라고 평했다.[3]

박록주의 소리는 여러 명창에게서 전수된 특징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흥보가 등에서 자신의 소리와 성격에 맞게 변형되었다. 박타령, 제비노정기 등 흥보가 전반에서 다른 계보로 전승된 동편제 판소리와 비교할 때, 추가되거나 빠진 부분이 자주 나타난다.

박록주의 흥보가 계보는 송흥록 - 송광록 - 송우룡 - 송만갑 - 김정문 - '''박록주''' - 이옥천, 한농선(한귀례), 박송희(박정자), 정유진으로 이어진다.

4. 3. 변형

박록주의 소리는 여러 명창에게서 전수된 특징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흥보가 등에서 자신의 소리와 성격에 맞게 변형해 이끌었다.[3][4] 그러한 결과 박타령·제비노정기 등 흥보가 전반에서 다른 계보로 전승된 동편제 판소리와 비교할 때, 추가된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자주 나타난다.

5. 평가

정노식은 "성량이 거대하여 광대의 본색을 발휘하여 장래의 촉망을 붙이거니와 모즈락스럽게 맺고 끊는 점이 그 특색을 보인다"라고 평가했다.[3] 이옥천은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다기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라고 평가했다. 한농선은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며 우람한 성음이 돋보이는 것이 특기라 할 수 있고 소리를 진행하는 속도가 요즘처럼 느리지 않고 거뜬거뜬하다"라고 평가했다. 정성숙은 "소릿길이 정대하며 엄한 데가 있다. 서슬 시퍼렇게 몰아치는 창법이 특기다. 진중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라고 평가했다.[4]

박록주는 성량이 풍부하고, 남성적이고 깔끔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박기홍, 송만갑, 김정문 등 동편제 거장에게 판소리를 전수받았다. 특히 흥보가에 능했는데, 고향인 경상도 중서부 내륙의 사투리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록주의 소리는 여러 명창에게서 전수된 특징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흥보가 등에서 자신의 소리와 성격에 맞게 변형되었다.

6. 에피소드

소설가 김유정이 박록주를 짝사랑했으며, 그의 소설 〈두꺼비〉와 〈생의 반려〉에 박록주와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5]

참조

[1] 문서 개명하여 박재보(朴在普)
[2] 문서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은 박중근(朴重根)
[3] 서적 조선창극사 조선일보사 1940-01-01 # 년도만 제공되므로 01-01로 설정
[4] 서적 판소리 음반 걸작선 삼호출판사 1997-01-01 # 년도만 제공되므로 01-01로 설정
[5] 문서 (이 또한 지금 같은 현대 같으면 스토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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