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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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의 가산 탕진으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1933년 '산골 나그네'로 등단했다. 그는 30여 편의 단편 소설을 남겼으며, '동백꽃', '봄봄', '소낙비' 등이 대표작이다. 김유정의 소설은 해학과 비애가 공존하는 특징을 보이며, 1930년대 한국 농촌의 현실과 민중의 삶을 유머를 곁들여 그렸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춘천에는 김유정문학촌이 건립되어 그의 문학 세계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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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소설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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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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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유정 |
출생일 | 1908년 1월 18일 |
출생지 | 강원도 춘천시 |
사망일 | 1937년 3월 29일 |
사망지 | 게이조, 게이키도, 일제강점기 조선 |
국적 | 대한제국 |
직업 | 소설가, 시인 |
활동 기간 | 1932년 ~ 1937년 |
웹사이트 | 김유정 문학촌 |
로마자 표기 | Gim Yujeong |
한글 | 김유정 |
한자 | 金裕貞 |
학력 | |
대학교 |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
작품 활동 | |
장르 | 소설, 시, 수필 |
가족 | |
본관 | 청풍 김씨 |
부 | 김춘식 |
모 | 청송 심씨 부인 |
친척 | 김익찬(할아버지), 김영수(친조카) |
형제 | 2남 6녀 중 차남(일곱째) (형 김유근, 둘째 누나 김유영, 셋째 누나 김유경) |
기타 정보 |
2. 생애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이 가산을 탕진하여 김유정은 청소년기와 성인기의 대부분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2]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3] 김유정은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현재의 연세대학교)에 다녔다.[4][5] 그는 1933년 "산골 나그네"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2년 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단편 소설 공모에서 입상했다. 1935년에는 정지용, 이상 등 저명한 시인 및 소설가를 포함하는 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약 30편의 단편 소설을 남겼으며, 그중 대부분은 1935년과 1936년에 발표되었다. 그는 1937년 3월 29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2]
서울의 제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의 전신)와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잇따라 입학했지만,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중퇴했다. 1932년 고향으로 돌아와 야학 금병의숙을 세워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33년에는 '산골 나그네', '총각과 멍텅구리'를 발표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가 당선되었고, 조선중외일보 신춘문예에 '대박'이 가작으로 입선했다. 같은 해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7년 폐결핵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까지 30여 편의 소설과 10여 편의 수필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별칭: '봄봄', '춘춘'), '햇볕' 등이 있다.
2. 1. 가계 및 출생
김유정의 본은 청풍(淸風)으로, 족보에는 조선 현종의 왕비 명성 왕후 김씨의 친정 아버지이자 왕의 장인이었던 김우명, 그리고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을 김유정의 직계 선조로 적고 있다.[10] 김유정의 할아버지 익찬(益贊, 1845년 ~ 1909년)은 자를 자영(士英)이라 했으며, 1891년에 증광 진사시에 급제하여[10] 통사랑 행의금부도사를 지냈다.[11] 익찬의 아들인 춘식(春植), 즉 김유정의 아버지는 자를 윤주(允周)라 하였는데, 1894년에 식년 진사시에 급제하여[12], 사마좌 임금 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 예식 부주사[13], 궁내 부의관을 역임하였다.[14] 김유정은 한성부에서 강원도 춘천으로 건너온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2남 6녀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다.[17][21]김유정의 고향은 실레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경춘선 김유정역(2004년 신남역에서 변경)이 있는 이곳은 김유정 작가의 선대 집안이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 김유정의 셋째 누나였던 김유경은 김유정의 출생지가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현재 실레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김유정 작가가 춘천에서 태어났음을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 전상국은 대대로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김유정의 선대가 춘천 의병이 잇따라 봉기하던 구한말 경술국치 때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식솔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김유정도 이 무렵에 태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한편 김유정 본인은 자신의 고향을 춘천으로 생각하여, 〈오월의 산골작이〉라는 수필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라고 언급했다.
2. 2. 유년기 및 청년기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이 가산을 탕진하여 김유정은 청소년기와 성인기의 대부분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2] 어머니는 김유정을 낳은 뒤 딸 하나를 더 낳고, 그가 만으로 일곱 살이 되던 1915년 3월 1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도 2년 뒤 1917년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된 형 김유근은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했고, 집안은 진골에서 관철동,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1916년부터 1919년 봄까지 김유정은 이웃 글방에 다니며 《천자문》, 《계몽편》, 《통감》 등을 배웠다. 만 12세에 강원도 춘천 에울입월초등학교 이듬해 3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4학년으로 졸업할 정도로 그의 성적은 우수하였으며, 1923년 4월 9일에는 경성휘문고등보통학교(5년제)에 검정으로 입학하였다. 서울의 제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였다.[2]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김유정은 이름을 잠시 나이(羅伊)로 바꾸었다가 3학년 때 다시 본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숭인동 80번지로 다시 이사하였는데, 휘문고보에서 안회남(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다.
김유정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형 김유근은 서울에서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해 버렸다. 형으로부터의 생활비와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된 김유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3] 김유정은 연희전문학교 (현재의 연세대학교)에 다녔으나,[4][5] 두 달 만인 6월 24일에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중퇴하고 만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김유정은 4살 연상의 기생 박록주를 보고 한눈에 반해 2년 가까이 짝사랑을 했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자 괴로워하던 김유정은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다.
2. 3. 짝사랑과 브나로드 운동
김유정은 휘문고보 졸업반 시절 4살 연상의 기생 박록주에게 한눈에 반해 2년 가까이 짝사랑했다. 밤낮으로 편지를 쓰고 혈서를 쓰거나 선물을 보내고, 직접 찾아가 구애하기도 했으며, 박록주가 나가는 요정 앞에서 밤새워 기다렸다가 인력거에 탄 그녀를 끌어내려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하지만 박록주를 향한 김유정의 병적인 짝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괴로워하던 김유정은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다. 춘천에서 김유정은 고향의 순박한 정취와 가난한 당시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1년 7개월을 고향에서 머무르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짓고 옛날 자신의 마름집 아들이었던 조명희나 조카 김영수(김유근의 아들) 등과 뜻을 함께 하여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여는 등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김유정이 조직한 농우회는 뒤에 '금병의숙'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간이학교로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지금은 그곳에 면에서 운영하는 마을회관이 서있고 그 옆에 김유정의 뜻을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2학기 문학답사 형식 수업인 《국문학연습》에 의하면, 김유정 작가가 농촌계몽운동을 한 살레마을에서는 살레 사회복지관을 운영함으로써 빈곤과 빈곤한 부모의 무지로 인해 배움에서 소외된 가난한 농민들의 자녀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김유정 작가의 뜻을 이어받고 있다. 춘천문화방송에서 김유정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김유정은 민중들을 사랑하여, 명문집안의 자손인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존댓말을 하였다고 한다.
2. 4. 문단 활동과 죽음
1935년 《조선일보》에 단편 소설 '소낙비'가 당선되기 2년 전, 김유정은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산골 나그네〉를 발표하였다.[2] 〈산골 나그네〉는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막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2] 1934년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2]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2]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文友)로는 휘문고보 때부터의 동창이었던 안회남 말고도, 사직동의 매형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도 있었고,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 된 이상(李箱)도 있었다. 1947년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현덕(玄德)도 김유정의 문우였다.
1934년에 김유정은 사직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사하였고, 누나의 집에서 식객살이를 시작했다. 김유정에게는 무수히 많은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어왔고, 김유정 자신도 약값을 벌기 위해 청탁이 오는 대로 글을 썼지만 그나마도 돈이 생기면 술값으로 써버리기 일쑤였다. 《여성》이라는 잡지에 자신이 기고했던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글과 나란히 실린 박봉자(시인 박용철의 여동생)의 글을 읽게 된 김유정은 다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라는 여인을 향해 무려 31통에 달하는 구애의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마 뒤 김유정 자신도 잘 알고 지낸 평론가 김환태와 박봉자가 약혼을 했으며 곧바로 결혼했다는 비극적인 소식만 듣게 되었다.
193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김유정은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어 고생하였다.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다섯째 매형 유세준(다섯째 누나인 김유흥의 남편)의 집으로 내려가면서도 자신의 조카 김진수를 데리고 갈 정도로 조카에 대한 애정을 쏟았던 김유정은 1937년 3월 18일에 방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는데, 친구 안회남 앞으로 남긴 〈필승전〉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유정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있다.
1937년 3월 29일 아침 6시 30분에 김유정은 만 29세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2] 김유정의 유해는 가족에 의해 광주에서 서울 서대문 밖의 홍제동 화장터(현재의 서울고은초등학교 부지, 현재 화장장은 벽제로 이전)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3. 작품 세계
김유정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훈훈한 사랑을 예술적으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15] 많은 사람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사랑을 우리의 전통적인 민중예술의 솜씨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15][7] 하지만 민중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둔 민중적 성격의 문학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한갓 통속적 흥미나 저급한 희극성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15] 그의 작품들은 흔히 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한편,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실제 삶과 이어져 진한 슬픔을 배어나게 하는, 말하자면 해학과 비애를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15][7]
그의 작품은 "풍부하고 토속적"이라고 묘사되었다.[6] 그는 약 30편의 단편 소설을 썼으며, 대부분은 그가 사망하기 전 3년 동안 출판되었다.[5] 그의 1936년 소설 《동백꽃》은 한국 농촌 마을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1935년 작품 《소낙비》에서 암시된 성적 묘사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6] 그의 1937년 소설 《따라지》는 우울한 작품으로 여겨졌다.[6]
전형적인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은, 교활한 장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둔한 바보인 "봄봄"(1935)의 화자, 혹은 아내의 병이 사실은 뱃속의 과도하게 자란 아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만큼 무지한 "땡볕"의 남편과 같을 수 있다. 저속한 대화와 구어체 은어는 이러한 상황의 희극적 잠재력을 높이지만, 슬픔의 저류는 가난에 시달리는 삶의 비참함을 암시한다.[2] 김유정의 서정적인 자연 접근 방식과 농민의 건전성에 대한 묘사에는 계급 문제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담겨 있다. 소작인과 중간 상인의 갈등, 그리고 일본의 농업 정책으로 인해 급증한 지주 부재 문제는 1930년대 한국 농촌의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암시한다.[2]
김유정은 "소낙비"와 "만무방"에서 한국 농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더욱 명시적으로 다룬다. "소낙비"의 남편과 "만무방"의 형은 모두 소작권을 잃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이탈된 농부들이다. 뼈 빠지는 노동만이 농민들을 더욱 깊은 빚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압도적인 절망과 비참함 속에서, 두 인물 모두 일확천금을 위해 도박에 의존한다. "소낙비"의 남편은 돈을 위해 아내의 성관계를 부유한 노인과 맺도록 부추기고, "만무방"의 형은 생존 수단을 찾기 위해 아내와 아이와 완전히 헤어진다. 극심한 가난이 농민들 사이에서 조장하는 투기적 정신은 "노다지"(1935)와 "금 따는 콩밭"에서 금광 열병으로도 나타난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쇠퇴하는 농촌 공동체의 스케치이지만, 김유정은 또한 《따라지》와 같은 소설에서 도시 빈민의 고통에 주목했다.[2]
단편 소설이 주를 이루며, 풍부한 한국어 고유 어휘와 소박하고 정확한 문장을 특징으로 하며, 지주제와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1930년대 조선반도 농촌의 실태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머를 곁들여 그린다.
3. 1. 주요 특징
김유정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훈훈한 사랑을 예술적으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15] 많은 사람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사랑을 우리의 전통적인 민중예술의 솜씨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15][7] 하지만 민중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둔 민중적 성격의 문학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한갓 통속적 흥미나 저급한 희극성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15] 그의 작품들은 흔히 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한편,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실제 삶과 이어져 진한 슬픔을 배어나게 하는, 말하자면 해학과 비애를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15][7]그의 작품은 "풍부하고 토속적"이라고 묘사되었다.[6] 그는 약 30편의 단편 소설을 썼으며, 대부분은 그가 사망하기 전 3년 동안 출판되었다.[5] 그의 1936년 소설 《동백꽃》은 한국 농촌 마을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1935년 작품 《소낙비》에서 암시된 성적 묘사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6] 그의 1937년 소설 《따라지》는 우울한 작품으로 여겨졌다.[6]
전형적인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은, 교활한 장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둔한 바보인 "봄봄"(1935)의 화자, 혹은 아내의 병이 사실은 뱃속의 과도하게 자란 아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만큼 무지한 "땡볕"의 남편과 같을 수 있다. 저속한 대화와 구어체 은어는 이러한 상황의 희극적 잠재력을 높이지만, 슬픔의 저류는 가난에 시달리는 삶의 비참함을 암시한다.[2] 김유정의 서정적인 자연 접근 방식과 농민의 건전성에 대한 묘사에는 계급 문제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담겨 있다. 소작인과 중간 상인의 갈등, 그리고 일본의 농업 정책으로 인해 급증한 지주 부재 문제는 1930년대 한국 농촌의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암시한다.[2]
김유정은 "소낙비"와 "만무방"에서 한국 농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더욱 명시적으로 다룬다. "소낙비"의 남편과 "만무방"의 형은 모두 소작권을 잃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이탈된 농부들이다. 뼈 빠지는 노동만이 농민들을 더욱 깊은 빚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압도적인 절망과 비참함 속에서, 두 인물 모두 일확천금을 위해 도박에 의존한다. "소낙비"의 남편은 돈을 위해 아내의 성관계를 부유한 노인과 맺도록 부추기고, "만무방"의 형은 생존 수단을 찾기 위해 아내와 아이와 완전히 헤어진다. 극심한 가난이 농민들 사이에서 조장하는 투기적 정신은 "노다지"(1935)와 "금 따는 콩밭"에서 금광 열병으로도 나타난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쇠퇴하는 농촌 공동체의 스케치이지만, 김유정은 또한 《따라지》와 같은 소설에서 도시 빈민의 고통에 주목했다.[2]
단편 소설이 주를 이루며, 풍부한 한국어 고유 어휘와 소박하고 정확한 문장을 특징으로 하며, 지주제와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1930년대 조선반도 농촌의 실태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머를 곁들여 그린다.
3. 2. 주제 의식
김유정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예술적이면서도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는 묘미가 있다. 많은 사람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사랑을 우리의 전통적인 민중예술의 솜씨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15][7] 하지만 민중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둔 민중적 성격의 문학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한갓 통속적 흥미나 저급한 희극성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김유정의 소설들은 흔히 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일면에서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실제 삶과 이어져 진한 슬픔을 배어나게 하는, 말하자면 해학과 비애를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15]그의 작품은 "풍부하고 토속적"이라고 묘사되었다.[6] 그는 약 30편의 단편 소설을 썼으며, 대부분은 그가 사망하기 전 3년 동안 출판되었다.[5] 그의 1936년 소설 《동백꽃》은 한국 농촌 마을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1935년 작품 《소낙비》에서 암시된 성적 묘사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6]
전형적인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은, 교활한 장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둔한 바보인 "봄봄"(1935)의 화자, 혹은 아내의 병이 사실은 뱃속의 과도하게 자란 아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만큼 무지한 "땡볕"의 남편과 같을 수 있다. 저속한 대화와 구어체 은어는 이러한 상황의 희극적 잠재력을 높이지만, 슬픔의 저류는 가난에 시달리는 삶의 비참함을 암시한다. 김유정의 서정적인 자연 접근 방식과 농민의 건전성에 대한 묘사에는 계급 문제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담겨 있다. 소작인과 중간 상인의 갈등, 그리고 일본의 농업 정책으로 인해 급증한 지주 부재 문제는 1930년대 한국 농촌의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암시한다.[2]
김유정은 "소낙비"와 "만무방"에서 한국 농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더욱 명시적으로 다룬다. "소낙비"의 남편과 "만무방"의 형은 모두 소작권을 잃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이탈된 농부들이다. 뼈 빠지는 노동만이 농민들을 더욱 깊은 빚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압도적인 절망과 비참함 속에서, 두 인물 모두 일확천금을 위해 도박에 의존한다. "소낙비"의 남편은 돈을 위해 아내의 성관계를 부유한 노인과 맺도록 부추기고, "만무방"의 형은 생존 수단을 찾기 위해 아내와 아이와 완전히 헤어진다. 극심한 가난이 농민들 사이에서 조장하는 투기적 정신은 "노다지"(1935)와 "금 따는 콩밭"에서 금광 열병으로도 나타난다.[2]
단편 소설이 주를 이루며, 풍부한 한국어 고유 어휘와 소박하고 정확한 문장을 특징으로 하며, 지주제와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1930년대 조선반도의 농촌의 실태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머를 곁들여 그린다.
3. 3. 영향
소년 시절 김유정은 바이런 시집을 늘 갖고 다녔다. 자신의 조카에게는 《죄와 벌》, 〈가난한 사람들〉, 〈귀여운 여인/The Darling (short story)영어〉, 〈외투〉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들과 《마리아와 광대》, 《홍당무》, 《아Q정전》같은 작품을 권했다.[16]작가가 된 후에는 감명깊게 읽은 작품으로 《홍길동전》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들었다. 《홍길동전》은 인류 사회에 큰 역할을 하기에 예술적 가치를 가진 작품이지만, 에밀 졸라의 《나나》는 독자를 졸게 하고 《율리시스》는 하품을 하게 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구인회 회원인 조용만에 의하면 이광수와 이효석 뿐만 아니라 로렌스, 맨스필드의 작품을 좋아했다. 또한 같은 구인회 회원인 이태준에 대해서는 어떤 경쟁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16] 그 외에도 니체의 초인설, 맬서스의 《인구론》,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같은 사회과학 서적들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독서는 광범위한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작품 창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16]
김유정 소설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예술적이고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연결하는 사랑이 우리의 전통 민속 예술 기법으로 흥미롭게 묘사된다.[7] 김유정 소설은 유머와 슬픔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가 종종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는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로 이어져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7]
단편 소설이 주를 이루며, 풍부한 한국어 고유 어휘와 소박하고 정확한 문장을 특징으로 하며, 지주제와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1930년대 조선반도 농촌의 실태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머를 곁들여 그린다.
4. 작품 목록
5. 김유정 문학촌
김유정문학촌은 소설가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춘천시가 2002년 8월 6일에 설립한 문학관이다.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소개하고 있다.[8] 김유정 기념사업회는 김유정 추모제, 학술대회, 청소년 문학 축제 등의 행사를 개최했다.[8] 운영 시간은 동절기에는 9:30~17:00, 하절기에는 9:00~18:00이며, 해설을 원할 경우 최소 일주일 전에 신청해야 한다.[8]
김유정의 고향인 실레마을에 2002년 8월 6일 개관한 김유정문학촌에는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마을 풍경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수리된 생가에는 김유정 관련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8] 2004년 12월에는 가장 가까운 신남역이 그의 이름을 따 김유정역으로 개명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로 인명에서 기인한 철도역 이름이다. 2003년부터는 매년 기일인 3월 29일에 열리는 추모제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한 김유정문학제가 개최되고 있다.[8] 그의 작품은 대한민국의 중학교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6. 평가
김유정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예술적이고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7]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사랑, 그들의 마음을 잇는 사랑이 전통 민속 예술 기법으로 흥미롭게 묘사된다.[7] 그의 작품은 유머와 비애로 특징지어지는데,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가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는 그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로 이어져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7] 민속적 성격을 띤 문학이 민중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대중적 흥미나 저급한 코미디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7]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그의 고향인 실레마을에 김유정문학촌이 개관했다.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마을 풍경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복원된 생가에는 김유정 관련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2004년 12월에는 가장 가까운 신남역이 그의 이름을 따 김유정역으로 개명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로 사람의 이름을 딴 철도역이다. 매년 기일인 3월 29일에 열려온 추모제 외에, 다양한 행사를 준비한 김유정문학제가 2003년부터 개최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김유정 biographical PDF
http://klti.or.kr/ke[...]
2013-09-21
[2]
웹사이트
Kim Yujeong LTI Korea Datasheet
http://klti.or.kr/ke[...]
2013-09-21
[3]
웹사이트
Late Novelists Timeless Literary Values Endure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08-04-03
[4]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5]
서적
Boat Song, and Other Stories from Korea
[6]
서적
Modern Korean Fiction: An Anthology
[7]
논문
운당 구인환 교수 정년퇴임 기념 특집 : 소설문학 / 김유정 소설의 민중적 성격
http://www.papersear[...]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1995
[8]
웹사이트
Home
http://www.kimyoujeo[...]
[9]
문서
음력 1월 11일
[10]
웹사이트
김익찬의 진사방목
http://people.aks.ac[...]
2014-02-24
[11]
웹사이트
김춘식의 진사시방목 중 가족사항 서술
http://people.aks.ac[...]
2014-02-24
[12]
웹사이트
김춘식의 진사방목
http://people.aks.ac[...]
2014-02-24
[13]
웹사이트
일성록 광무 4년
http://e-kyujanggak.[...]
[14]
웹사이트
일성록 광무 6년
http://e-kyujanggak.[...]
[15]
문서
김유정 소설의 민중적 성격
[16]
서적
김유정을 찾아가는 길
솔과학
[17]
웹사이트
김춘식의 진사방목
http://people.aks.ac[...]
2014-02-24
[18]
웹사이트
김춘식의 진사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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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19]
웹사이트
일성록 광무 4년
http://e-kyujanggak.[...]
[20]
웹사이트
일성록 광무 6년
http://e-kyujanggak.[...]
[21]
웹인용
김유정 탄생 100주년 - <4> 김유정과 어머니 청송 심씨
https://web.archive.[...]
2008-07-10
[22]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ko.kliteratur[...]
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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