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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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중손은 고려 무신정권 붕괴 후 몽골에 항거한 삼별초의 지도자이다. 1270년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몽골의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이어갔다. 육지부를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면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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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중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로마자 표기 | Bae Jungson |
| 영문 표기 | Pae Chung-son |
| 인물 정보 | |
| 국적 | 고려 |
| 출생일 | 미상 |
| 사망일 | 1271년 |
| 사망 장소 | 진도 용장산성 |
| 주군 | 원종 → 승화후 온 |
| 직업 | 고려의 장군 |
2. 생애
배중손은 몽골 (원나라)에 항복하는 것에 반대했다. 1270년 5월 23일, 고려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현재의 개성)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했다. 원종은 삼별초 해산을 명했지만, 배중손은 이 역시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270년 6월 3일, 삼별초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시켜 몽골에 대한 항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1271년 4월, 고려-몽골 연합군이 진도를 침공하여 점령하면서 사망했다.[25]
2. 1. 해도재천(海島再遷)과 삼별초의 봉기
1270년 몽골과의 항쟁을 주도하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지도자 임유무가 살해되고 무신정권이 몰락했다. 그러나 고려로 귀국한 원종은 몽골과 화의를 맺으면서 수락한 조건 가운데 하나였던 출륙환도를 다시금 추진하였다.[1] 개경 환도 일정을 공시하는 원종의 시책에 삼별초는 반발하였고, 원종은 정자여를 강화도로 보내 회유를 시도하고, 이어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고 해산을 공식 통보했다.[1]1270년 여름 6월 1일, 삼별초의 무장이었던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지휘관) 노영희 등과 함께 봉기하고[1]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몽골군이 떼로 몰려와 인민을 살륙하고 있으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구정으로 모이라"고 포고하였다.[1] 이러한 포고에 구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반대로 강화도를 빠져나가 육지로 달아나는 이탈자들도 적지 않았다.[1] 이들 가운데 배를 타고 강화도를 빠져나가려던 이들은 잘못해 물에 빠져 죽거나 삼별초의 추격군에 죽기도 하였다.
삼별초 봉기 당시 강화도에 남아 있던 고려 조정의 신료들 가운데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으나, 탈출 도중에 삼별초의 추격군에 따라잡혀 도로 끌려가거나, 삼별초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배를 타고 도망치던 와중에 삼별초의 추격을 당했고 끝내 붙잡혔다 아내는 자결하고 자신만 목숨을 건지기도 하는 등[2] 육지부로 달아나려다 실패하고 삼별초에 잡히거나 살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삼별초는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몽골에서 온 회회인(아랍인)과 함께 살해되었고[1] 스스로 자결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그대로 삼별초를 따라간 사람이나, 자의로 삼별초를 따라 나선 사람도 있었다.
강화를 지키던 병사들 중 대부분이 도망쳐 육지부로 가버린 상태에서 강화도를 더 지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삼별초는 6월 3일, 선박과 군함을 모으고 재물, 자녀들을 모조리 실어 강화도를 떠났다. 《고려사》에는 이때 삼별초 선단의 모습에 대해 고물과 뱃머리가 서로 이어졌으며, 무려 1,00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1] 또한 출항하면서 삼별초는 공사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는데, 신분 해방을 꿈꾼 노비들 가운데 삼별초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 남쪽으로 내려간 삼별초가 이끄는 배는 1천여 척이나 되었고,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다.[4]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 세력들은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는 동시에 내부에서의 관직 임명을 실시하면서[6] 남쪽으로 내려와 진도에 이르렀고, 8월 19일부터 진도에서 본격적인 행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7] 진도에 입성한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거점으로 육지부 연해 고을을 향해 황명을 빙자하며 전라도안찰사에게 백성들의 추수를 독촉하고 섬으로 이주하게 하는[8] 등 자신들이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였다. 이때 삼별초는 서남해 연안의 각 도서는 물론 육지부의 나주,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고려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주현에 격문을 보내고 민이 모두 진도에 호응할 것을 호령했다.[9] 11월에는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 군사들이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10]
2. 2. 진도에서의 항쟁
배중손은 원나라에 항복하는 것에 반대했다. 1270년 5월 23일, 고려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현재의 개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며 거부했다. 원종은 삼별초 해산을 명했지만, 배중손은 이 역시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270년 6월 3일, 삼별초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시켜 몽골에 대한 항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1271년 4월, 고려-몽골 연합군이 진도를 침공하여 점령하면서 사망했다.2. 3. 육지부 공략과 고려-몽골 연합군의 반격
1270년 9월, 고려 조정은 장군 양동무와 고여림을 보내 진도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삼별초는 오히려 장흥부를 공격해 경군 20여 명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을 사로잡는 등 세력을 과시했다. 당시 삼별초는 육지부 나주를 공략 중이었는데, 그 기세에 눌려 항복하거나 진도로 찾아가는 이들도 있었다.[11] 나주를 지키던 전라도토적사 신사전과 전주부사 이빈은 삼별초 상륙 소식에 성을 버리고 개경으로 도망쳤고,[12] 나주부사 박부는 눈치만 보며 곤란해했다. 심지어 나주에서는 전주와 함께 삼별초에 항복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때 상장군 정지려와 나주사록 김응덕이 항전을 주장하며 금성산에서 참전을 독려했다. 한편, 고려 조정이 파견한 김방경은 몽골군 원수 아카이와 함께 1천 병사를 이끌고 내려오던 중 이 소식을 듣고 전주에 "며칠 안에 1만 군사를 이끌고 갈 테니 군량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 첩문이 나주에 전해지자 삼별초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5]김방경은 해남 삼견원에 진을 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 울돌목 일대에서 삼별초 수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반남현 사람 홍찬과 홍기의 참소로 김방경은 개경으로 압송되어 몽골 다루가치 앞에서 심문을 받았다. 무고함이 밝혀져 진도에 복귀했을 때는 몽골군이 삼별초에 밀려 나주로 퇴각하려 하고 있었다. 《고려사》는 당시 삼별초 수군에 대해 "약탈한 함선에 괴수를 그렸는데, 바다를 덮고 물에 비치며 움직이는 것이 나는 것 같아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매번 싸울 때 적군은 먼저 북을 쳐 시끄럽게 하면서 돌진하곤 했다"고 묘사했다.[5]
1270년 12월 22일, 김방경은 단독으로 진도를 공격했다가 삼별초 수군의 역습을 받았다. 대부분의 군사가 퇴각하는 와중에 김방경은 "오늘이 결판의 날"이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적에게 포위되어 화살과 돌이 다 떨어지고 부상당한 채 진도 해안까지 쫓겼다. 삼별초 병사들이 김방경의 배에 뛰어들어 공격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김천록 등 창병들이 맞서 싸웠고,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삼별초 선단을 뚫고 김방경을 구원하여 삼별초 수군은 퇴각했다.[5]
1271년 1월 6일, 몽골 사신 두원외를 수행해 진도에 온 고려 원외랑 박천주가 삼별초를 회유했으나, 삼별초는 고려 군사 90명을 죽이고 배 한 척을 뺏었다. 22일에 박천주가 돌아갈 때 삼별초는 고려 원종의 국서에는 "명령을 따르겠다"면서도 쿠빌라이 칸의 조서에는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답하고, 두원외를 억류했다. 2월에는 장흥부 조양현을 공격해 전함을 불태우고 방어도령 진정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3월 9일에는 합포현 감무를 사로잡고, 21일에는 동래군을 공격했다.[13]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삼은 것은 진도가 서남부 연안과 중앙을 잇는 해상 요지이자 남해와 서해의 조운로가 만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남부 서남해 연안 지역의 세금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거점이었고, 최항이 집권 전 진도 사찰에서 활동했던 경력도 있는 등 무인정권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였다.[14] 당시 몽골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며 고려에 몽골 사신의 일본 안내, 원정군 양식 지급, 몽골 둔전 경영에 필요한 소와 곡식 종자 제공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는 삼별초 때문에 조운이 어렵다고 강조하며,[15] 몽골에 잡혀간 고려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며 원종이 직접 입조해 호소할 계획을 세웠다.
1271년 1월, 밀성군에서 진도 삼별초에 호응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고,[16] 개경에서도 관노 숭겸, 공덕 등이 몽골 다루가치와 고려 관리를 죽이고 진도로 투항하려다 발각되었다.[17] 2월 7일에는 대부도 주민들이 몽골군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수주부사 안열에게 진압되기도 했다.[18] 숭겸, 공덕의 모반은 몽골에 도착한 고려 상장군 정자여에 의해 쿠빌라이 칸에게 보고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고려의 모든 건의와 원종의 입조를 거절했다.[19]
《고려사》 및 《원사》에 따르면, 1271년 3월과 4월에 배중손이 원의 군사령관 훈둔과 교섭을 시도했다. 원 중서성을 통해 "모든 군대가 퇴각한 후에야 내부하겠다고 하였는데 훈둔이 들어주지 않으니, 이제 전라도를 얻어 거주하면서 원 조정에 직속되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으나, 쿠빌라이 칸은 배중손이 거짓말로 시간을 끄는 것이라며 일축했다.[20] 4월에도 힌두에게 "할 말이 없으니 원수께서 섬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훈둔은 "황명 없이 함부로 섬에 들를 수 없다"고 거절했다.[21] 이는 박천주와 함께 왔던 몽골 사신 두원외를 억류했던 강경한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난 것이었다.[22] 4월 8일, 삼별초는 금주 산성을 불태우고 노략질했고, 다음날 훈둔은 몽골 조정에 배중손이 복속하지 않으니 쿠룸시, 왕국창과 함께 길을 나눠 공격하겠다고 요청했다.[23]
1271년 4월 19일, 몽골에서 영녕공 준의 아들 광화후 희, 신안후 옹이 4백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를 치러 왔다. 21일에 몽골은 고려에 더위와 장마 전 몽골 병사 도착이 힘들 것 같다며, 고려가 먼저 6천 군사와 140척 전함을 징발해 삼별초 공격에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24]
2. 4. 진도 함락과 배중손의 최후
1271년 5월 1일, 몽골의 훈둔과 홍다구, 고려의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했다. 삼별초는 진도의 북쪽 절벽에 함선을 배치해 놓고 방어했지만,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밀려 결국 진도는 함락되었다.[25]공격은 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김통정 등 강화도에서 탈출한 일부 생존자들은 제주도로 이동했지만,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것이 삼별초의 종말이었다.
《고려사》 반역열전에 실린 배중손의 열전에 따르면 그는 원종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장군(將軍)에 이르렀다고 한다.[1] 배중손의 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절요》 충렬왕 2년(1276년) 8월조에 도병마사에서 상주(尙州) · 청주(淸州) · 해양(海陽)은 진도 적괴(珍島賊魁, 삼별초)들의 고향이므로 호(號)를 강등시키고 적을 따라 탐라로 들어갔던 자들에 대해서도 금고할 것을 요청하였던[31] 기록에서 진도 삼별초 정권의 지도부가 대략 이 지역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소설
삼별초는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집중했지만, 그 사이 홍다구가 이끄는 좌군이 삼별초 본진에 침투하여 불을 지르면서[27] 전세가 기울었다. 삼별초는 대열이 무너져 우군으로 공격 방향을 돌렸지만, 여몽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처자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날은 고려 원종 12년 5월 15일 정축(양력 1271년 6월 23일)이었다.
삼별초 지도자였던 승화후 온은 홍다구에게 살해되었고, 배중손도 이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중손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는 남도석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도석성은 조선 초기에 축성되었고 고려 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28]
여몽연합군은 남녀 1만 명과 전함 수십 척을 노획하고, 진도에서 쌀 4천 섬과 재물, 보물, 무기를 얻어 수도로 보냈다. 진도 주민들은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고려 조정은 이후 여러 차례 이들의 송환을 요청해야 했다.[30]
3. 진도 함락 이후
4. 배중손의 가계
윤용혁은 청주가 무신정권의 집정자였던 임연의 고향인 진천, 김준이 광주(해양)가 외향(外鄕)임에서 서로 연관성이 확인되는 점을 생각하면 배중손은 경상도 상주 지역과 연고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상주 인근 토성(土姓)으로 배씨가 포함되어 있음을 들어 배중손이 상주 방면 출신일 가능성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하였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 진도 임회 지역의 성씨로 배씨가 포함되어 있음을 들어 진도 출신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32]
5. 현대의 작품
; 만화(웹툰)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고려사
[3]
서적
삼별초-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도서출판 혜안
2014
[4]
기사
원고려기사
1270
[5]
서적
고려사
[6]
문헌
가정집
1270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1270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고려사
1270
[11]
서적
고려사
[12]
서적
고려사
1270
[13]
논문
삼별초의 남해 항쟁
2005
[14]
서적
같은 책
도서출판 혜안
2014
[15]
서적
고려사
1271
[16]
서적
고려사
1271
[17]
서적
고려사
1271
[18]
서적
고려사
1271
[19]
서적
고려사
1271
[20]
서적
원사
1271
[21]
서적
고려사
1271
[22]
논문
고려 삼별초의 반란과 몽고습래 전야의 일본
[23]
서적
원사
1271
[24]
서적
고려사
1271
[25]
서적
같은 책
도서출판 혜안
2014
[26]
서적
고려사
1271
[27]
서적
같은 책
도서출판 혜안
2014
[28]
서적
같은 책
도서출판 혜안
[29]
서적
고려사
[30]
서적
고려사
1271
[31]
서적
고려사절요
1276
[32]
서적
같은 책
도서출판 혜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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