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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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범성대는 남송 시대의 문인으로, 관료, 시인, 지리학자, 원예가로 활동했다. 1154년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호조 감화제국, 예부 원외랑, 성도부 지부 등을 역임했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송나라의 위신을 지켰으며, 참지정사까지 올랐으나 은퇴 후 고향에서 사망했다. 그는 지리서 《계해어형지》를 저술하고, 《석호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매화에 대한 원예 관련 글을 기고했다. 또한 어메이 산 등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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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성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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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원어 이름 | 范成大 |
자(字) | 致能 (Zhìnéng) |
출생 | 1126년 |
사망 | 1193년 |
국적 | 중국 |
직업 | 정치가 시인 |
시대 | 남송 |
2. 생애와 관직
범성대는 엄격한 빈곤의 시기를 보낸 후, 1154년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오랫동안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며, 참지정사까지 역임하였다. 1186년 남송 조정의 고위 관직에서 은퇴한 후 60편의 연작시를 썼는데, 이 시들은 그의 은퇴 별장이었던 쑤저우 외곽의 석호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Stone Lake''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범성대는 쑤저우의 중류 가문에서 남송과 금나라 사이의 갈등기에 태어났다. 조숙한 아이였던 그는 고전 문학을 일찍부터 공부하여 관료가 될 준비를 했다. 1143년 부모님이 몇 달 간격으로 돌아가시면서 잠시 중단되었으나, 범성대는 혼자 가문을 돌보게 되었다. 이러한 학업과 십 대 시절의 농사 경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후기 시에 영감을 주었다.[3]2. 2. 관직 생활
소주(오현) 출신으로, 소흥 24년(115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 학위를 받았다. 호조 감화제국의 관직을 시작으로 저작좌랑을 거쳐 이부 낭관이 되었으나 잠시 퇴관하였다. 처주 지주로 복귀했을 때, 세법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의역의 법을 개정한 것이 인정되어 예부 원외랑에 숭정전 학사를 겸임했다. 중앙에서는 형법, 염법, 마정을 개량하고 기민을 구제했다. 성도부 지부로 부임했을 때는 서남쪽의 토번을 막기 위해 성책을 증축하고 병력 수천 명을 증가시키고, 적을 이간하는 등 군정상으로도 공적을 남겼다. 국신사로서 금에 갔을 때는, 금나라 조정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송나라의 위신을 지키며 신하로서의 절개를 다하고 귀국했다. 중서 사인, 광서경략안무사·정강부 지부를 거쳐 중앙으로 돌아와 부문각 대제가 되었으나, 곧 사천제치사로 임명되었다. 중앙으로 돌아와 권리부상서가 되었고, 참지정사가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은퇴를 했다. 명주 지주로 임명되었고, 단명전 학사를 거쳐, 한때 건강부에 주둔하여 자정전 학사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숭국공으로 추봉되었고, 문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범성대는 인물 감식에 명철함이 있어 유능한 자를 발탁하여 모두 막하에 두었고, 작은 결점에 얽매이지 않고 장점을 널리 활용했기에, 부하로부터 이부의 대신에 이른 자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재직 기간 동안 ''계해어형지''(Guì Hǎi Yú Héng Zhì)라고 알려진 중요한 지리 논문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주로 중국 남부 지역의 지형과 상업적 제품에 초점을 맞추었다.[3]
2. 3. 은퇴와 죽음
소흥 24년(1154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참지정사까지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은퇴를 했다. 명주 지주, 단명전 학사를 거쳐 건강부에 주둔하며 자정전 학사를 지냈으나, 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사망했다. 숭국공으로 추봉되었고, 문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3. 작품 세계
범성대는 시, 지리지, 원예서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했다. 그의 저서 《석호집(石湖集)》은 136권에 달하며, 그중 《석호시집(石湖詩集)》 34권, 기행문 《남비록(攬轡録)》·《참란록(驂鸞録)》·《오선록(呉船録)》, 지리지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오군지(呉郡志)》 50권, 원예서 《범촌국보(范村菊譜)》·《범촌매보(范村梅譜)》 등이 전해진다.[3]
소식·황정견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받으며, 《석호집》 서문에서는 양만리에 의해 '청신무려(清新嫵麗)'하다고 평가받았다.
일본에서는 범성대의 작품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오가와 칸주(小川環樹)가 번역하고 야마모토 카즈요시(山本和義), 니시오카 준(西岡淳)이 보역 해설한 《오선록, 남비록, 참란록》이 헤이본샤(平凡社) 도요분코에서 2001년에 출간되었고, 미노 토요히로(三野豊浩)가 번역 및 저술한 《범성대시선(范成大詩選)》이 겐토샤(幻冬舎)에서 2018년에 출간되었다.
3. 1. 시
판청다(范成大)의 작품은 농민 생활, 매화, 계절, 불교, 늙어감 등 당시 시대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3] 그는 쑤저우의 중류 가문 출신으로, 남송과 금나라 사이의 갈등기에 태어났다. 조숙한 아이였던 그는 고전 문학을 일찍부터 공부하여 관료가 될 준비를 했다. 1143년 부모님이 몇 달 간격으로 돌아가시면서 잠시 중단되었지만, 혼자 가문을 돌보게 되었다. 이러한 학업과 십 대 시절의 농사 경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후기 시에 영감을 주었다.[3]엄격한 빈곤의 시기를 보낸 후, 판청다는 과거에 합격하여 1154년에 진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재직 기간 동안 ''계해어형지''(Guì Hǎi Yú Héng Zhì)라고 알려진 중요한 지리 논문을 저술했다. 이 책은 주로 중국 남부 지역의 지형과 상업적 제품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186년 남송 조정의 고위 관직에서 은퇴한 후 쓴 60편의 연작시이다. 이 시들은 그의 은퇴 별장이었던 쑤저우 외곽의 석호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Stone Lake''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판청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동식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었으며, 그는 매화(梅花)에 관해 중국에서 최초로 쓰인 원예 관련 글을 기고했다.[3] 그는 매화를 여전히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사는 "은둔형 군자"와 연관시켰다. 그는 또한 매화가 야생에서 자라며 원래 사람들이 재배한 꽃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함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순수함을 자신과 "세속의 티끌"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의 꿈과 연관시켰으며, 이는 그의 깊은 불교 신념에 대한 언급이었다.[3] 매화에 대한 그의 관심 외에도, 판청다는 《국보》(Treatise on Chrysanthemums)를 저술했다.
범성대의 저서는 많으며, 《석호집(石湖集)》은 136권에 달했다. 그중 《석호시집(石湖詩集)》 34권, 기행문으로 《남비록(攬轡録)》・《참란록(驂鸞録)》・《오선록(呉船録)》・《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오군지(呉郡志)》 50권 등의 지지(地誌), 《범촌국보(范村菊譜)》・《범촌매보(范村梅譜)》 등이 전해지고 있다.
시인으로서, 《사고제요》에서 소식·황정견의 유법을 이었다고 지적되었으며, 《석호집》 서문에서는 양만리에 의해 '청신무려(清新嫵麗)'로 평해진다.
3. 2. 지리지
범성대는 재직 기간 동안 ''계해어형지''(桂海虞衡志)라고 알려진 중요한 지리 논문을 저술했다. 이 책은 주로 중국 남부 지역의 지형과 상업적 제품에 초점을 맞추었다.[3] 범성대는 기원전 5세기의 ''서경'', 기원전 2세기의 ''회남자''에서 시작하여 명나라 지리학자 서하객의 유명한 저술보다 앞선 긴 지리 문학 전통을 따랐다.범성대는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오군지(呉郡志)》 50권 등의 지지(地誌)를 저술했다.
3. 3. 원예서
판청다(范成大)는 동식물에 대한 글을 쓰는 데 큰 관심을 가졌으며, 중국에서 매화(梅花)에 관해 최초로 쓰인 원예 관련 글을 기고했다.[3] 그는 매화를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사는 "은둔형 군자"와 연관시켰다. 또한 매화가 야생에서 자라며 원래 사람들이 재배한 꽃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함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순수함을 자신과 "세속의 티끌"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의 꿈과 연관시켰으며, 이는 그의 깊은 불교 신념을 보여준다. 매화 외에도 판청다는 《국보》(Treatise on Chrysanthemums)를 저술했다.4. 어메이 산 등반
1177년 6월 27일, 범성대는 쓰촨성 청두에서 어메이 산으로 여행을 떠났다.[5] 어메이 산은 불교 성지로 유명하며, 범성대는 이곳의 불교 유적지를 방문하고 등반하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어메이 산의 험준한 지형과 아름다운 경관, 그리고 정상에서 목격한 신비로운 현상 등을 묘사했다.[5]
4. 1. 어메이 산 등반 기록의 주요 내용
1177년 6월 27일, 판청다는 쓰촨성 청두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100리 떨어진 자현(현재의 러산)으로 향했다.[5] 그의 주된 목적은 불교 성지로 유명한 어메이 산을 방문하는 것이었다.[5] 그는 민강을 따라 자현으로 이동하여 10일 동안 거대한 불상과 어메이 산의 불교 유적지를 둘러보았다.[5]판청다는 어메이 산 등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177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 "자현에 배를 대고 가족을 배에 남겨둔 채 혼자 어메이 산으로 향했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이곳은 보현보살이 나타나는 곳이다."
7월 22일, 그는 어메이 산 등반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어메이 마을을 출발하여 서문을 통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12리 후에 용령당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산의 급류가 휩쓸고 포효했고, 그늘진 숲은 웅장하고 깊게 서 있었다... 쌍류교에 도착했다. 이곳의 뒤섞인 산들은 서 있는 병풍처럼 함께 모여 있다... 이 장면은 스케치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류사원에 도착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길가에 '세계의 위대한 어메이 산'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백류사원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이곳까지 가는 길은 40리 이상 가파른 언덕길밖에 없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험준한 봉우리의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한다."
백류사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그는 보현보살의 청동상을 방문했는데, 이는 왕조 초기에 황제의 명으로 청두에서 주조된 것이었다.[5]
1177년 7월 24일, 맑은 날씨 속에 판청다는 윗 봉우리로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여기에서 정광사 및 봉우리 정상의 칠보절벽까지는 또 60리이다... 더 이상 돌계단 길은 없다. 통나무를 잘라 긴 사다리로 만들었고, 절벽에 고정했다. 그것을 기어 올라 산을 오른다. 나는 제국에서 오를 산 중에서 이것만큼 위험하고 높은 산은 없다고 본다."
1177년 7월 25일, 마침내 정상에 도달한 판청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이 모든 산 뒤에는 서역의 설산이 있다. 그 톱니 모양의 험준한 봉우리는 조각되고 다듬어진 듯하며, 백 개 이상이다... 옛날부터 이 눈은 결코 녹지 않았다. 산은 인도와 다른 이국으로 뻗어 있으며, 몇 천 리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웅장하고 뛰어난 광경은 내가 평생 본 모든 것의 최고다."
> "우리는 절벽 위의 전당을 다시 방문하여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네 방향에서 짙은 안개가 솟아올라 모든 것을 완전히 하얗게 만들었다... 잠시 후, 폭우가 쏟아지고 짙은 안개가 물러갔다... 툴라 구름이 다시 절벽 아래로 퍼져 나가... 구름 상단은 옥 바닥처럼 매끄러웠다... 나는 절벽의 배를 내려다봤고, 평평한 구름 위에 놓인 거대한 빛의 구체가 있었다. 외부 코로나에는 세 개의 고리가 있었고, 각 고리에는 남색, 노란색, 빨간색, 녹색 색조가 있었다."[5]
> "구체의 바로 중심에는 집중된 밝음의 구멍이 있었다. 우리 각 관람객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구멍과 밝은 곳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손을 들거나 발을 움직이면 반사도 똑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당신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반사는 볼 수 없다... 빛이 사라지자 앞산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흩날렸다. 바람과 구름 속에서 다시 거대하고 구형의 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여러 산에 걸쳐 있었고, 가능한 모든 색상을 소진하고 아름다운 배열로 혼합했다."[5]
참조
[1]
서적
Riding the River Home: A Complete and Annotated Translation of Fan Chengda's (1126–1193) Travel Diary Record of a Boat Trip to Wu (Wuchuan lu)
The Chinese University Press
[2]
문서
Hargett, 67-68.
[3]
문서
Needham, Volume 3, 510.
[4]
간행물
FAN CHENGDA'S (1126–1193) MEIPU : A TWELFTH CENTURY TREATISE ON MEI -FLOWERS
2010-12-01
[5]
서적
Jade mountains and cinnabar pools: the history of travel literature in imperial Chin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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