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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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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벤저민 스트롱은 1872년 뉴욕주에서 태어나 1928년 사망한 미국의 은행가로, 연방준비제도 설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07년 공황 이후 금융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1910년 비밀 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연방준비제도 설립 후에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초대 총재를 역임하며 공개 시장 조작을 통해 통화량을 관리하고 물가 안정을 추구했다. 그의 정책은 통화주의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스트롱은 1920년대 유럽의 금융 문제에 주목했으며, 경제 역사가들은 그가 대공황 시기에 국제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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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트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벤자민 스트롱 초상화
벤자민 스트롱(1922년)
직책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임기 시작1914년 10월 5일
임기 종료1928년 10월 16일
이전직책 신설
이후조지 L. 해리슨
출생일1872년 12월 22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피시킬
사망일1928년 10월 16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국적미국
직업은행가

2. 어린 시절과 교육

벤저민 스트롱 주니어는 1872년 뉴욕주 피쉬킬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저지주 몬트클레어에서 자랐다. 그의 부계 가족은 1630년 매사추세츠주에 도착한 영국 이민자의 후손이었으며, 주로 상인과 은행가 집안이었다.[2]

스트롱은 형이 다닌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하기를 희망했으나, 몬트클레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이 일시적인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그는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했고, 아버지의 직장과 관련된 월스트리트의 투자 및 금융 관리 회사에서 서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 금융 경력

1891년 18세의 나이로 투자금융회사 카일러, 모건 앤 컴퍼니(Cuyler, Morgan and Co.)에 취직하며 금융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애틀랜틱 신탁회사(Atlantic Trust Company)를 거쳐 1904년 뱅커스 트러스트(Bankers Trust)에 합류했다. 뱅커스 트러스트는 상업 은행 컨소시엄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다른 은행 및 신탁 회사의 준비금을 보유하고 필요시 자금을 대출해주는 '은행의 은행' 역할을 수행했다. 이 회사는 빠르게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신탁 회사이자 월스트리트의 주요 기관으로 성장했다. 기술적으로는 다수의 주주가 있었으나, 의결권은 J.P. 모건의 동료 세 명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건 계열 회사로 간주되었다. 1907년 공황 당시, 스트롱은 뱅커스 트러스트 소속으로 J.P. 모건과 긴밀히 협력하여 재정적으로 건전한 은행에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09년 뱅커스 트러스트의 부사장이 되었고, 1914년 1월에는 사장으로 승진했다.[12]

4. 연방준비제도 설립과 역할

1907년 공황 이후 주요 은행가들은 통화 발행 권한을 가진 민영 중앙 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일반 시민들의 반대도 강했다. 스트롱은 1909년부터 뉴욕 뱅커스 트러스트 회사의 부사장이었으며, 1907년 공황 당시 J.P. 모건과 협력하여 금융 위기를 수습했던 경험을 통해 체계적인 은행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910년 조지아주 지킬 섬에서 은행 개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극비 회의가 열렸을 때, 스트롱은 J.P. 모건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 쿤 뢰브 컴퍼니의 파트너인 폴 바르부르크, 에이브러햄 앤드루 재무 차관, 뉴욕 내셔널 시티 은행 총재 프랭크 A. 밴더립, J.P. 모건 앤 컴퍼니의 수석 파트너인 헨리 P. 데이비슨, 퍼스트 내셔널 은행 총재 찰스 D. 노턴 등 당시 금융계를 주도하던 인물들이 참여했다[15]. 이 회의에서 작성된 계획은 후에 '올드리치 계획(Aldrich Plan)'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중앙 은행 설립을 목표로 했으나 은행가 주도의 계획이라는 점과 중앙 통제에 대한 여론의 반감 때문에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올드리치 계획은 '국립 준비 협회(National Reserve Association)'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중앙 은행이라는 인상을 희석시키려 했으나, 결국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특히 1912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은행가 중심의 계획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1912년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은행 개혁을 주요 과제로 추진했다. 버지니아 출신의 카터 글래스 하원의원과 로버트 레이텀 오웬 상원의원 등이 주도하여 공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글래스-오웬 법안'을 마련했다. 이 법안은 올드리치 계획의 일부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준비이사회와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을 통해 중앙 권력을 분산시키고 공적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격렬한 논의 끝에 1913년 12월 23일, 연방준비제도법(Federal Reserve Act)이 제정되어 오늘날의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가 탄생했다.

스트롱은 연방준비제도법의 일부 조항, 특히 정치적 인사에 의한 이사회 구성 가능성과 지역 은행 중심의 분산된 권한 구조에 대해 "권한의 분산과 분열"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이것이 효과적인 중앙 통제를 방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연방준비제도가 공식 출범하자 스트롱은 시스템 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당시 명칭 Governor, 현재 President)로 임명되어 1928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16].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로서 스트롱은 미국의 통화 및 은행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실상 연방준비제도 전체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그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출범 초기 연방준비이사회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모호했고 감독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정부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자유 채권(Liberty bond) 발행 캠페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국가 재정에 기여했다.

스트롱은 점차 공개 시장 조작(정부 채권 매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화량 조절과 물가 안정을 위한 주요 정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대 미국으로 금이 대량 유입되면서 금본위제 하의 통화 팽창 압력이 커지자, 1922년부터는 금본위제에 얽매이지 않고 국내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공개 시장 조작을 적극 추진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현대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시초로 평가받으며, 당시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스트롱의 정책을 중앙은행이 금본위제 없이 경제를 관리할 수 있는 사례로 주목했다. 스트롱의 이러한 정책 기조와 공황 시 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하려는 입장은 통화주의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14],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로부터는 인위적인 신용 팽창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4].

1920년대 스트롱은 국제 금융 무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의 금본위제 복귀와 경제 안정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의 낮은 이자율 정책을 유지했다. 이 정책은 유럽 경제 회복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미국 내에서는 주식 시장 과열을 부추기고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스트롱의 역할과 정책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린다. 경제사학자 찰스 P. 킨들버거는 스트롱이 1928년에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의 경험과 영향력으로 대공황의 충격을 완화하거나 국제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17]. 반면,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를 비롯한 비판론자들은 스트롱의 통화 팽창 정책, 특히 1927년의 금리 인하 조치가 1920년대 후반의 자산 거품을 키웠고 결국 1929년 대공황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트롱은 1916년 결핵 진단을 받은 후 오랜 기간 투병했으며, 1928년 10월 게실염으로 인한 농양 수술 후 회복 중 사망했다[16].

5. 통화 정책과 경제 안정

1920년대, 스트롱은 공개 시장 조작, 즉 국채 매매를 통해 물가 수준을 안정시키고 경제 공황 시 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14]. 이러한 정책은 통화주의자들에게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14],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로부터는 비판을 받았다[1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으로 금이 대량 유입되면서 금본위제 하에서는 통화량이 팽창하여 물가 상승의 압력이 커졌다. 이에 스트롱은 1922년, 금본위제의 한계에서 벗어나 공개 시장 조작을 통해 국내 물가 수준을 안정시키고 경제 안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통화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겼다. 이는 정부 채권(security (finance)) 매매를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현대적 중앙은행 정책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스트롱의 이러한 접근을 중앙은행이 금본위제 없이도 국가 경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스트롱은 현대적인 의미의 중앙은행가 역할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20년대 유럽이 경제적 혼란을 겪자 스트롱의 영향력은 국제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의 금본위제 복귀와 경제 안정을 위한 노력을 적극 지원했다. 스트롱의 통화 정책은 미국의 물가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유럽의 통화 및 재정 안정에도 기여하여 미국과 세계 무역을 활성화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플레이션 우려가 적다는 이유로 금리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1920년대 후반 미국의 주식 시장 과열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스트롱 본인도 이러한 자산 시장의 과열을 우려했지만, 유럽의 금본위제 복귀를 돕기 위해 낮은 금리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정책 방향은 일부로부터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스트롱의 통화 정책과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경제사학자 찰스 P. 킨들버거는 스트롱이 1920년대 유럽의 복잡한 금융 문제에 깊은 이해를 가졌던 소수의 미국 정책 결정자 중 한 명이었으며, 만약 그가 대공황이 시작되기 직전인 1928년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국제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여 대공황의 충격을 완화하거나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17].

반면,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와 같은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스트롱의 인위적인 통화량 조절 정책이 오히려 신용 팽창을 부추겨 자산 거품을 형성했고, 이것이 결국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와 대공황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작가 빌 브라이슨은 1927년 스트롱이 주도한 연방준비제도의 할인율 인하 조치가 시장의 과열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진보적 성향의 일부 학자들 역시 스트롱의 정책이 단기적인 안정에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키워 대공황이라는 파국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6. 사생활

1895년 마가렛 레뷰틸러(Margaret LeBoutiller)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1905년 마가렛이 자살하면서 사별했다. 1906년에는 장녀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1907년에는 뱅커스 트러스트 사장 에드먼드 콘버스(Edmund C. Converse)의 딸 캐서린 커버스(Katherine Converse)와 재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아, 1916년 캐서린이 두 딸을 데리고 별거를 시작했고, 결국 1920년에 이혼했다.

건강 문제도 겪었다. 1916년 폐결핵 진단을 받아 1년간 휴직했으며, 이후에도 인두 결핵과 폐렴 등으로 요양을 위해 여러 차례 휴직을 반복해야 했다.[13]

참조

[1] 서적 Benjamin Strong, central banker
[2] 서적 The History of the Descendants of Elder John Strong, of Northampton Massachusetts https://archive.org/[...]
[3] 서적 Benjamin Strong: Central Banker
[4] 서적 Lords of Finance: The Bankers Who Broke the World
[5] 서적 America’s Great Depression
[6] 서적 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
[7] 서적 America’s Great Depression
[8] 간행물 Milton Friedman Unraveled http://archive.lewro[...] The Individualist
[9] 서적 One Summer: America, 1927 Doubleday
[10] 서적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1] 문서 小谷野 (2010)
[12] 문서 秋元 (2011)
[13] 문서 小谷野 (2010)
[14] 서적 America’s Great Depression
[15] 웹사이트 The Meeting at Jekyll Island https://www.federalr[...] FederalReserveHistory.org 2019-01-23
[16]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7] 서적 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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