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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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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Bolesław II the Bold)는 1058년 부친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의 뒤를 이어 폴란드 공작이 되었고, 1076년에는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보헤미아 왕국과의 분쟁, 헝가리 및 키예프 공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란과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의 살해로 인해 폐위되어 1079년 폴란드를 떠났으며, 헝가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그의 사후, 폴란드 왕위는 동생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이어졌으나 공작으로 즉위했으며, 폴란드 왕국은 216년 뒤 프셰미스우 2세에 의해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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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볼레스와프의 초상이 있는 데나르 주화 (왼쪽)
볼레스와프의 초상이 있는 데나르 주화 (왼쪽)
이름볼레스와프 2세
별칭용감왕, 대담왕
폴란드어볼레스와프 2세 시미아위
로마자 표기Bolesław II Śmiały
통치
작위폴란드 공작
통치 기간1058년–1076년
이전 통치자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다음 통치자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작위폴란드 국왕
통치 기간1076년–1079년
대관식1076년 12월 26일 그니에즈노 대성당
이전 통치자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가족
배우자키예프의 비제스와바
자녀미에슈코 볼레스와보비치
왕조피아스트 가문
아버지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어머니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
출생과 사망
출생기원전 1042년경 폴란드 왕국
사망1081년/1082년 4월 2일 또는 3일
사망 장소헝가리 왕국
매장 장소오시아흐 수도원 (논쟁 중)

2. 생애

볼레스와프 2세는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의 장남으로 태어나 105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폴란드를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폴란드는 카지미에시 1세의 노력으로 안정을 되찾았으나, 영토는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시절보다 줄어든 상태였다. 볼레스와프 2세는 이를 회복하고자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실롱스크 지방 영유의 대가로 보헤미아에 바치던 공물을 거부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누이 스바타바를 시집보내는 것으로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동맹인 벨러 1세를 지원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다.

동방 정책에서는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069년 군사 개입을 통해 이자슬라프 1세를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시켜 러시아 지역에서 폴란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를 통해 보헤미아 등 다른 적들을 견제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서임권 분쟁 및 카노사의 굴욕 사건 등으로 인해 폴란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다. 볼레스와프 2세는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1076년 12월 26일 교황청으로부터 폴란드의 왕으로 공식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다.

국내 정책에서는 피아스트 왕조의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다. 전국에 교회를 세우고 1075년에는 그니에즈노 대주교좌를 다시 설치했으며, 브로츠와프, 루블린, 모길노 등지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립했다. 또한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1078년 이자슬라프 1세 사후 다시 키예프 문제에 개입했을 때 폴란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볼레스와프 2세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편을 들었던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를 1079년 살해했다. 이 사건은 폴란드 전역의 큰 공분을 일으켰고, 결국 볼레스와프 2세는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같은 해 폴란드를 떠나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1082년경 망명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퇴위 후 동생인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폴란드를 통치했지만 왕이 아닌 공작의 지위에 머물렀으며, 폴란드 왕위는 1295년 프셰미스우 2세가 즉위할 때까지 약 216년간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2. 1. 폴란드 공작 (1058년-1076년)

1058년 아버지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이 사망하자, 장남인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 공작으로 즉위하여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마조비아, 포메라니아, 실레지아 지역을 상속받았다. 그의 동생들인 블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미에슈코 카지미에조비츠는 나머지 지역의 총독이 되었으나, 미에슈코는 1065년 일찍 사망하여 그의 영토는 볼레스와프 2세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카지미에시 1세가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시킨 국가를 물려받은 볼레스와프 2세는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시절보다 줄어든 영토를 회복하고자 적극적인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쳤다. 특히 서쪽의 강력한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기 위해 주변 왕국들과의 동맹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폴란드가 동맹국들과만 국경을 맞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그의 빈번한 대외 개입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2세(오른쪽)가 기사들과 귀족들의 부인들이 저지른 간통 혐의에 대해 처벌하는 모습, 1504년, 크라쿠프 국립 박물관


볼레스와프 2세의 초기 주요 개입 대상은 헝가리였다. 1060년부터 1063년 사이, 그는 삼촌인 벨러 1세를 지원하여 독일의 하인리히 4세의 지원을 받는 조카 헝가리의 솔로몬과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 1061년 폴란드 군대의 도움으로 벨러 1세는 헝가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063년 벨러 1세가 사망하자, 볼레스와프 2세는 그의 아들 헝가리의 게저 1세를 하인리히 4세의 독일 군대로부터 지키지 못했고, 결국 솔로몬이 독일의 침공을 통해 왕위를 되찾았다.

보헤미아 왕국과는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폴란드는 실롱스크(실레지아) 지방을 차지하는 대가로 보헤미아에 공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볼레스와프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첫 번째 전쟁은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누이인 폴란드의 시비에토슬라바 공주를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와 결혼시키며 관계를 봉합하려 했다.[2] 또한, 프르제미슬 왕조의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반란을 부추기며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1063년에는 모라비아의 흐라데츠나트모라비치를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후퇴해야 했다. 1071년 볼레스와프 2세는 다시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하인리히 4세의 중재 시도를 거부했다. 양국 간 휴전이 맺어졌으나, 볼레스와프 2세는 1072년 조약을 무시하고 공격을 재개하며 실레지아에 대한 조공 지불을 신성 로마 제국에 거부했다. 하인리히 4세는 폴란드 원정을 준비했지만, 1073년 작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동방 정책에서는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069년, 그는 자신의 고모 폴란드의 게르트루다의 남편인 키예프의 이지야슬라프 1세가 폐위되자 군사 작전을 통해 그를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 지역에서 폴란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보헤미아 등 다른 적들을 견제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이처럼 볼레스와프 2세는 헝가리, 보헤미아, 키예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트해 연안의 포메라니아 지역에 대한 관리는 소홀해졌다. 결국 1060년 또는 1066년에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폴란드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3]

한편, 볼레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립 관계에 있었지만,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서임권 분쟁(카노사의 굴욕 사건 포함) 및 작센 반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규모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볼레스와프 2세는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에서 직접적인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국내에서는 피아스트 왕조의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전국에 교회를 세우고 1075년에는 그니에즈노 대주교좌를 재설치했으며,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브로츠와프, 루블린, 모길노 등지에 설립했다. 또한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활동을 통해 폴란드의 위상을 높인 볼레스와프 2세는 마침내 1076년 12월 26일, 교황청으로부터 폴란드의 왕으로 공식 인정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그의 폴란드 공작으로서의 통치는 마무리되었다.

2. 2. 폴란드 국왕 (1076년-1079년)

서임권 분쟁 시기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한 덕분에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의 왕관을 얻을 기회를 잡았다. 그는 독일 왕 하인리히 4세의 적대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힐데브란트 오브 소바나)가 1073년 즉위하자 그를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여겼다. 볼레스와프 2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관할 구역에서 교황의 개혁을 시작하고 왕관을 얻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또한, 작센 공국에서 진행 중이던 반란을 부추겨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076년 크리스마스에 볼레스와프 2세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교황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보구미우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수여받고 공식적으로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이후 약 반세기 만에 폴란드 군주가 다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 사건 당시 하인리히 4세가 참회하는 과정에서 볼레스와프 2세의 왕위 칭호를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롭게 얻은 왕의 권위는 볼레스와프 2세의 자만심을 키웠고, 이는 강력해지는 군주제를 두려워한 폴란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1078년 키예프 루스 공위 계승 문제에 다시 개입했을 때 폴란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볼레스와프 2세는 이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1079년,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귀족들의 편을 든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를 미사 집전 중에 체포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타니스와프 주교 살해 사건은 폴란드 전역의 큰 공분을 일으켰고, 결국 볼레스와프 2세는 1079년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처자를 데리고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1082년경 망명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퇴위 이후 동생인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폴란드를 통치했지만 왕이 아닌 공작의 지위에 머물렀으며, 폴란드 왕위는 1295년 프셰미스우 2세가 즉위할 때까지 약 216년간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2. 3. 몰락과 죽음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의 순교, 중세 시대 다색화로 제작되었으며, 폴란드 남부의 비엘스코-비아와에 소장되어 있다.


1077년 볼레스와프 2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두 명의 왕위 계승자를 지원했는데, 한 명은 헝가리벨러 1세의 아들인 헝가리의 라슬로 1세였고, 다른 한 명은 키예프이자슬라프 1세였다. 1078년, 키예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폴란드 군대는 적 루테니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귀족들과의 갈등이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갈등은 크라쿠프 주교인 스타니스와프와의 관계에서 불거졌다. 주교는 볼레스와프 2세의 불륜을 문제 삼아 그를 파문했다고 전해진다. 역사 기록[4]에 따르면, 스타니스와프 주교는 왕에게 반대하는 귀족들의 움직임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볼레스와프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블라디스와프 1세 헤르만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볼레스와프 2세는 스타니스와프에게 반역죄를 선고했는데, 당시 기록가인 갈루스 아노니무스는 주교를 지칭하며 배신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traditor|트라디토르l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079년 4월 11일, 볼레스와프 2세는 스타니스와프 주교의 처형을 명령했거나 직접 집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대의 기록가인 빈센티 카들루벡은 볼레스와프가 직접 주교를 살해했다고 기록했지만[5], 이는 사건 발생 후 약 150년이 지난 시점의 기록이다. 카들루벡과 이후의 예술적 전통에 따르면, 살해는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이루어졌다고 묘사된다.[6] 카들루벡은 스타니스와프가 왕에게 간음과 같은 악행을 뉘우치라고 충고했으나 왕이 이를 무시했다고 주장하며, 주교 살해를 야만적인 행위로 강하게 비난했다.[5] 반면, 갈루스 아노니무스는 주교의 반역 행위와 왕의 잔혹한 처벌 방식 모두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4]

스타니스와프 주교 살해 사건은 폴란드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079년 볼레스와프 2세는 폐위되어 국외로 추방당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던 헝가리의 라슬로 1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3] 그러나 갈루스 아노니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2세는 헝가리에서도 오만한 행동을 보였고, 이로 인해 1081년 또는 1082년에 암살자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4] 당시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오스트리아 오시아흐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있는 볼레스와프의 추정 무덤


볼레스와프 2세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명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갔고, 교황은 그에게 벙어리 참회자로서 익명으로 살아가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1082년 여름 케른텐의 오시아흐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도착하여 힘든 노동을 하며 속죄했고, 죽기 전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다. 오시아흐 수도원에는 실제로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크라쿠프의 성 스타니스와프 주교의 살인자"(Rex Boleslaus Polonie occisor sancti Stanislai Epi Cracoviensisla)라는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 있다. 1960년 카롤리나 란코론스카 백작 부인의 주도로 이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11세기 남성의 뼈와 폴란드 기사의 갑옷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설은 왕이 죽고 수 세기가 지난 후에야 등장한 이야기이며(1499년 연대기 작가 마치에이 미에호비타가 처음 언급), 그의 실제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의 유해가 1086년 크라쿠프 근처의 티니에츠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볼레스와프 2세가 추방된 후, 그의 동생인 블라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폴란드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왕이 아닌 공작의 지위에 머물렀다. 폴란드 왕위는 이후 200년 이상 공석 상태로 있다가 1295년 프셰미스우 2세가 즉위하면서 부활하게 된다.

3. 유산

후세에 피아스트 왕조 출신의 군주 중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전국에 교회를 세웠고, 1075년에는 그니에즈노 대주교좌를 재설치했다.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브로츠와프, 루블린, 모길노에 세웠으며, 폴란드 최초의 화폐 주조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1079년, 적대 관계에 있던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를 미사 집전 중에 체포하여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켜 결국 국외로 추방당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는 처자를 데리고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했다. 1082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매장 장소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볼레스와프 2세의 추방 이후 동생인 브와디스와프 1세가 즉위했지만, 왕이 아닌 공작의 지위에 머물렀다. 폴란드 왕위는 이후 216년 동안 공석 상태로 있다가 1295년 프셰미스우 2세가 즉위하면서 부활했다.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the Middle Ages Routledge 2000-01-01
[2] 간행물
[3] 서적 Poczet Krolow i Książąt Polskich Park 2005-01-01
[4] 서적 Cronicae et gesta ducum sive principum Polonorum
[5] 서적 Chronica seu originale regum et principum Poloniae 1190-1208
[6] 뉴스 The Bishop Hacked to Death by His own King http://www.catholich[...]
[7] 논문 Agnes regina. W poszukiwaniu żony Bolesława Szczodrego 2006-01-01
[8] 서적 Grzech sodomski Bolesława Szczodrego w świetle "Roczników" Jana Długosza Studia Historyczne
[9] 웹사이트 Tych królów podejrzewano, że wolą mężczyzn. Mogli się oddawać rozkoszom pod jednym warunkiem https://porady.sympa[...] onet.pl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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