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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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빈 전투는 121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왕 존,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 등이 연합한 군대를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승리하여 서유럽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부상했고, 잉글랜드의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해야 했다. 또한, 오토 4세는 황위에서 물러났으며, 부빈 전투는 중세 전투 양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군사적,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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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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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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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명칭 | 부빈 전투 |
날짜 | 1214년 7월 27일 |
장소 | 프랑스 왕국 플랑드르 백작령 부빈 |
결과 | 프랑스의 결정적인 승리 |
추가 결과 | 시농 조약 체결 앙주 제국 붕괴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
교전국 1 추가 세력 | 부르고뉴 공국 샹파뉴 백국 드뢰 백국 퐁티외 백국 생폴 백국 보몽 백국 소아송 백국 페르슈 백국 오세르 백국 느베르 백국 넴ู르 영주국 쿠시 영주국 묄륑 자작국 노르망디 공국 브르타뉴 공국 리에주 주교후국 |
교전국 2 | 신성 로마 제국 |
교전국 2 추가 세력 | 에노 백국 독일 왕국 브라반트 공국 뢰번 백국 로렌 공국 홀란드 백국 나뮈르 백국 림뷔르흐 공국 작센 공국 라인 궁중백국 테클렌부르크 백국 카체넬ン보겐 백국 자유 제국 도시 도르트문트 플랑드르 백국 잉글랜드 왕국 불로뉴 백국 보베 남작령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왕국 지휘관 | 필리프 2세 (중앙) 로베르 2세, 드뢰 백작 (좌익) 외드 3세, 부르고뉴 공작 (우익) |
프랑스 왕국 추가 지휘관 (중앙) | 바르톨로메오 드 루아 기욤 1세 드 가를란드 기욤 2세 데 바르 앙게랑 3세 드 쿠시 고티에 2세 드 넴ู르 지라르 스코페 |
프랑스 왕국 추가 지휘관 (좌익) | 필리프 드 드뢰 기욤 2세 드 퐁티외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 토마 드 생발레리 |
프랑스 왕국 추가 지휘관 (우익) | 마티외 2세 드 몽모랑시 기욤 1세 드 상세르 고티에 3세 드 샤티옹 피에르 드 레미 장, 보몽 백작 아담 2세 드 묄륑 |
프랑스 왕국 추가 지휘관 (별동대) | 토마 드 페르슈 스테판 롱샹 |
신성 로마 제국 지휘관 | 오토 4세 (중앙) 르노 드 불로뉴 (우익) 페랑 드 플랑드르 (좌익) |
신성 로마 제국 추가 지휘관 (중앙) | 티볼트 드 로렌 빌렘 드 홀란드 헨드리크 드 브라반트 필리프 드 나뮈르 헨드리크 3세 판 림뷔르흐 콘라트 드 도르트문트 |
신성 로마 제국 추가 지휘관 (우익) | 윌리엄 롱제스피 위그 드 보베 |
신성 로마 제국 추가 지휘관 (좌익) | 페랑 드 플랑드르 아르놀 4세 도데나르드 |
병력 규모 | |
프랑스 왕국 병력 | 6,000–7,000명 |
프랑스 왕국 병력 상세 | 기사: 1,200–1,360명 기마 종사: 300명 보병: 5,000–6,000명 |
신성 로마 제국 병력 | 8,800–9,000명 |
신성 로마 제국 병력 상세 | 기사: 1,300–1,500명 보병: 7,5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프랑스 왕국 피해 | 비교적 경미함 |
프랑스 왕국 추가 피해 | 기사 2명 전사 보병 손실 불명 |
신성 로마 제국 피해 | 기사 169명 전사 기사 131명 포로 보병 손실 심각 |
관련 전투 | |
관련 전투 목록 | 담메 전투 로슈오무안 공성전 부빈 전투 |
2. 배경
1214년,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는 퐁-아-방댕 조약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잃었던 에르쉬르라리와 생토메르의 반환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프와의 동맹을 깨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브라반트 공작 헨리 1세,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 로렌 공작 테오발트 1세, 림부르크 공작 헨리 3세를 포함한 광범위한 연합을 결성했다.
이 작전은 동맹의 중심이었던 존이 계획했다. 그의 계획은 프랑스군을 파리에서 남쪽으로 자신의 군대로 유인하여 그들을 묶어두고, 그 동안 오토 4세 황제가 이끄는 주력군은 북쪽에서 파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존의 계획은 초기에 따랐지만, 북쪽의 동맹군은 천천히 움직였다. 존은 프랑스군과의 두 번의 교전 후 7월 3일 아키텐으로 후퇴했다.
7월 23일, 봉신들을 소집한 필리프는 6,000명에서 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갖추었다. 황제는 마침내 발랑시엔에 자신의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여기에는 존이 포함되지 않았고, 그동안 필리프는 북쪽으로 반격하여 재편성했다. 필리프는 이제 스스로 공세를 취했고, 기병에게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기동한 후 7월 27일 부빈 동쪽 평원과 마르크 강에서 전투를 제안했다.
오토는 적의 속도에 놀랐고, 필리프에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잡힌 것으로 여겨졌다. 필리프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오토를 자신의 함정으로 유인했을 것이다. 오토는 당시 프랑스 후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은 부빈을 향해 남서쪽을 바라보며 전열을 갖추었다. 중기병은 양쪽에 배치되었고, 보병은 중앙에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었으며, 오토 자신이 이끄는 기병 부대가 이를 지원했다. 프랑스군은 반대편에서 유사한 대형을 형성했다. 기병은 양쪽 날개에, 보병은 중앙에 배치되었으며, 시(市) 민병대도 포함되었다. 필리프는 기병 예비대와 왕실 깃발인 오리플람므를 보병 뒤에 배치했다. 전투에서 필리프의 사제였던 브르타뉴의 윌리엄은 병사들이 15ha의 공간에 줄을 섰다고 말했는데, 이는 거의 여유 공간이 없어 백병전을 유발하기 쉽게 했다. 브르타뉴의 윌리엄은 또한 그의 연대기에서 "두 전투 대열은 작은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라고 말했다.
2. 1. 앙주 제국과 프랑스 왕권의 갈등
1213년, 존은 교황과의 분쟁을 해결한 후, 오토 4세 등과 모의하여 필리프 2세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존이 프랑스 남부로 진격하는 동시에 독일, 플랑드르 군이 플랑드르에서 프랑스로 침입하는 것이었다. 1214년, 존은 기옌에서 침공하여 푸아티에, 앙주를 회복했지만, 오토 4세는 독일 제후 동원에 시간이 걸려 진군이 늦어졌다. 그 사이에 필리프 2세는 왕태자 루이를 남부에 파견했기 때문에 존은 기옌으로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 북부의 연합군은 필리프 2세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상대하게 되었다. 필리프 2세는 연합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자군에게 유리한 장소를 선택했고, 전투 전날 투르네에서 작전 회의를 열고 서쪽으로 20km 떨어진 부빈에서 회전을 결의했다.플랜태저넷 가문의 잉글랜드 왕 존은 훗날 "앙주 제국"으로 불린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조카인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항쟁으로 잃었고, 그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편, 이전부터 플랜태저넷 가문과 동맹을 맺었던 벨프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는 프랑스 왕이나 교황과 결탁하여 황제위를 노리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플랑드르 백작 페랑은 프랑스 왕과 항쟁 중이었고, 자국 영토에 침공을 받고 있었다.
2. 2. 신성 로마 제국의 개입
플랜태저넷 가문의 잉글랜드 왕 존은 조카인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싸움에서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이를 되찾고자 했다. 한편, 이전부터 플랜태저넷 가문과 동맹을 맺었던 벨프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는 프랑스 왕이나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황제 자리를 노리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1213년, 존은 교황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오토 4세 등과 함께 필리프 2세를 남북에서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1214년, 존은 기옌에서 침공하여 푸아티에, 앙주를 되찾았지만, 오토 4세는 독일 제후들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려 진군이 늦어졌다.
2. 3. 플랑드르 백작의 참전
1214년,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는 퐁-아-방댕 조약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잃었던 에르쉬르라리와 생토메르의 반환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프와의 동맹을 깨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브라반트 공작 헨리 1세,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 로렌 공작 테오발트 1세, 림부르크 공작 헨리 3세를 포함한 광범위한 연합을 결성했다.한편,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왕 존은 "앙주 제국"으로 불린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조카인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항쟁으로 잃었고, 그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플랑드르 백작 페랑 또한 프랑스 왕과 항쟁 중이었고, 자국 영토에 침공을 받고 있었다.
2. 4. 연합군의 형성 (1214년)
1213년, 잉글랜드 왕 존은 교황과의 분쟁을 해결한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등과 모의하여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계획을 세웠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왕 존은 "앙주 제국"으로 불린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항쟁으로 잃었고, 그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편, 벨프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는 프랑스 왕이나 로마 교황과 결탁하여 황제위를 노리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플랑드르 백작 페랑은 프랑스 왕과 항쟁 중이었고, 자국 영토에 침공을 받고 있었다.1214년,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는 퐁-아-방댕 조약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잃었던 에르쉬르라리와 생토메르의 반환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프와의 동맹을 깨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브라반트 공작 헨리 1세,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 로렌 공작 테오발트 1세, 림부르크 공작 헨리 3세를 포함한 광범위한 연합을 결성했다. 존이 프랑스 남부로 진격하고, 동시에 독일, 플랑드르 군이 플랑드르에서 프랑스로 침입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작전은 동맹의 중심이었던 존이 계획했다. 그의 계획은 프랑스군을 파리에서 남쪽으로 자신의 군대로 유인하여 그들을 묶어두고, 그 동안 오토 4세 황제가 이끄는 주력군은 북쪽에서 파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1214년에 존은 기옌에서 침공하여 푸아티에, 앙주를 회복했지만, 오토 4세는 독일 제후 동원에 시간이 걸려 진군이 늦어졌다. 그 사이에 필리프 2세는 왕태자 루이를 남부에 파견했기 때문에 존은 기옌으로 철수했다. 남은 프랑스 북부의 연합군은 필리프 2세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상대하기로 했다.
3. 전투의 경과
1214년,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는 퐁-아-방댕 조약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잃었던 에르쉬르라리와 생토메르 반환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프와의 동맹을 깨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브라반트 공작 헨리 1세,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 로렌 공작 테오발트 1세, 림부르크 공작 헨리 3세를 포함한 광범위한 연합을 결성했다.
이 작전은 동맹의 중심이었던 존이 계획했다. 그의 계획은 프랑스군을 파리에서 남쪽으로 유인하여 묶어두고, 그동안 오토 4세가 이끄는 주력군이 북쪽에서 파리를 공격하는 협공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쪽의 연합군은 천천히 움직였고, 존은 프랑스군과의 두 번의 교전 후 7월 3일 아키텐으로 후퇴했다.
필리프 2세는 연합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프랑스군은 기사 1,200~1,360명(그중 765명은 왕실 소유지 출신)과 기병 중기병(mounted sergeants)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왕실 소유지 39개 자치 단체 중 16개가 소집에 응하여 보병 3,160명을 제공했다. 나머지 보병 2,000명은 용병이었다.
프랑스 왕실군은 세 부대, 즉 "대형"으로 나뉘었다.
- 오른쪽 날개는 샹파뉴와 부르고뉴 기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부르고뉴 공작 오드 등이 지휘했다. 오른쪽 날개 앞에는 수아송에서 온 중기병 150명이 이끄는 부르고뉴, 샹파뉴, 피카르디 출신의 중무장 기병과 민병대가 있었다.
- 중앙 대형은 필리프 2세와 그의 수석 기사들이 이끌었다. 국왕과 기사 175명 앞에는 일 드 프랑스와 노르망디의 도시에서 온 보병 2,150명이 있었다.
- 왼쪽 날개는 드뢰의 로베르가 이끌었고, 퐁티외 백작 기욤이 지원했다. 왼쪽 날개의 주력은 브르타뉴인과 드뢰, 페르슈, 퐁티외, 비메의 민병대로 구성되었다.
- 부빈 다리(늪을 건너 퇴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는 프랑스 예비대를 형성하는 중기병 150명이 지켰다.
황제군, 잉글랜드군, 제후들의 군대가 뒤섞인 연합군과 달리 프랑스군은 필리프 2세의 지휘 아래 통일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사에 의한 기마 돌격 전술이 전성기였으며, 얼마나 자군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느냐가 승패를 결정했다. 필리프 2세가 연합군과의 회전을 미루고 북쪽으로 군대를 진격시킨 것은 뒤쫓아오는 연합군에게 그것만으로도 큰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빈을 회전 장소로 선택한 필리프 2세는 군대를 3개의 큰 부대로 나누어 각각 보병과 기병을 배치했다. 먼저 도착하여 진형을 갖춘 프랑스군에 비해, 연합군은 통일된 행군을 할 수 없어 상당히 긴 거리에 걸쳐 늘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필리프 2세의 예상대로, 연합군은 전장에 도착한 군대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 수아송의 기병 150명이 연합군 좌익의 플랑드르 기사들을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플랑드르 기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은 이들을 쉽게 몰아냈다.
- 일부 플랑드르 기사들이 퇴각하는 경무장 기병들을 쫓았고, 샹파뉴 출신 프랑스 기사 180명이 이들을 공격하여 격퇴했다.
- 플랑드르 백작은 기사 600명으로 반격하여 프랑스군을 후퇴시켰다.
- 고셰 드 샤티용은 기사 30명을 플랑드르군에 돌격시켰고, 기사 25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끊임없이 돌격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막았다.
-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기사들보다 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빽빽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연합군의 대열은 얇아졌다. 샤티용과 멜룬은 기사들과 함께 플랑드르군 대열을 돌파한 후, 방향을 바꿔 후방에서 공격했다.
- 생폴 기사단과 부르고뉴군은 플랑드르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부르고뉴 공작의 말이 죽었지만, 기사들이 그를 구출하고 새로운 말을 찾아주었다.
- 플랑드르군은 3시간 동안 계속 싸웠으나, 결국 플랑드르 백작이 포로로 잡히면서 사기가 꺾였다.
- 프랑스 도시 민병대 보병 2,150명은 필립 왕의 기사들과 ''백합 문장'' 깃발, 오리플람 아래 집결했다. 이들은 오토 휘하의 연합군 기병과 보병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 오토와 그의 기사들은 프랑스 왕에게 거의 다다랐지만, 프랑스 기사들에게 저지당했다. 연합군 보병들은 필립을 말에서 떨어뜨렸으나, 프랑스 왕의 갑옷이 그를 보호했다.
- 갈롱 드 몽티니는 왕실 깃발을 사용하여 도움을 요청했고, 필립은 새 말을 제공받았다.
- 연합군 보병들은 단검으로 프랑스 기사들을 공격했고, 노르만 기사 스테판 롱샹이 살해되었다. 프랑스는 큰 손실을 입었다.
- 프랑스의 반복적인 반격과 장기간의 전투 끝에 연합군은 후퇴했다.
- 중앙에서의 전투는 왕과 황제가 직접 이끄는 양측 기병 예비대의 혼전이 되었다. 프랑스 기사 피에르 모브아쟁은 오토와 그의 말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고, 제라르 라 트뤼이는 황제를 단검으로 찔렀으나, 황제의 사슬 갑옷이 그를 보호했다.
- 오토는 독일 영주와 추종자들에 의해 구출되어 전장에서 도망쳤다. 독일 기사들은 황제를 구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웠다.
- 독수리와 용이 그려진 제국 깃발은 프랑스 기사들에게 포획되었다. 중앙에서 연합군의 저항은 멈추었다.
- 프랑스군 좌익에서는 로베르 드 드뢰의 부대가 윌리엄 롱스페가 이끄는 군대에게 밀렸다. 윌리엄 롱스페는 필리프 드 드뢰 보베 교구 주교에게 포로로 잡혔고, 영국군은 도주했다.
- 마티외 드 몽모렌시는 적의 황실 깃발 12개를 노획했다.
- 프랑스군 양익이 안으로 좁혀지면서 황제군 중앙의 퇴각로를 차단했고,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 레노 드 담마르탱은 400~700명의 브라반트 창병으로 방진을 형성하여 최후의 저항을 했다. 그들은 프랑스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냈고, 레노는 소수의 기사 부대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 결국, 황제 군대가 후퇴한 지 한참 후, 브라반트의 쉴트롬은 토마 드 생 발레리가 이끄는 부대의 돌격에 무너졌다. 레노는 백병전에서 포로로 잡혔다.
- 밤이 다가오고 포로들이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추격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부대는 나팔을 사용하여 소환되었다.



3. 1. 프랑스군의 전략

필리프 2세는 연합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프랑스군은 기사 1,200~1,360명(그중 765명은 왕실 소유지 출신)과 기병 중기병(mounted sergeants)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왕실 소유지 39개 자치 단체 중 16개가 소집에 응하여 보병 3,160명을 제공했다. 나머지 보병 2,000명은 용병이었다.
프랑스 왕실군은 세 부대, 즉 "대형"으로 나뉘었다.
- 오른쪽 날개는 샹파뉴와 부르고뉴 기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부르고뉴 공작 오드 등이 지휘했다. 오른쪽 날개 앞에는 수아송에서 온 중기병 150명이 이끄는 부르고뉴, 샹파뉴, 피카르디 출신의 중무장 기병과 민병대가 있었다.
- 중앙 대형은 필리프 2세와 그의 수석 기사들이 이끌었다. 국왕과 기사 175명 앞에는 일 드 프랑스와 노르망디의 도시에서 온 보병 2,150명이 있었다.
- 왼쪽 날개는 드뢰의 로베르가 이끌었고, 퐁티외 백작 기욤이 지원했다. 왼쪽 날개의 주력은 브르타뉴인과 드뢰, 페르슈, 퐁티외, 비메의 민병대로 구성되었다.
- 부빈 다리(늪을 건너 퇴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는 프랑스 예비대를 형성하는 중기병 150명이 지켰다.
황제군, 잉글랜드군, 제후들의 군대가 뒤섞인 연합군과 달리 프랑스군은 필리프 2세의 지휘 아래 통일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사에 의한 기마 돌격 전술이 전성기였으며, 얼마나 자군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느냐가 승패를 결정했다. 필리프 2세가 연합군과의 회전을 미루고 북쪽으로 군대를 진격시킨 것은 뒤쫓아오는 연합군에게 그것만으로도 큰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빈을 회전 장소로 선택한 필리프 2세는 군대를 3개의 큰 부대로 나누어 각각 보병과 기병을 배치했다. 먼저 도착하여 진형을 갖춘 프랑스군에 비해, 연합군은 통일된 행군을 할 수 없어 상당히 긴 거리에 걸쳐 늘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필리프 2세의 예상대로, 연합군은 전장에 도착한 군대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3. 2. 연합군의 전략
1214년,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는 퐁-아-방댕 조약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잃었던 에르쉬르라리와 생토메르 반환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프와의 동맹을 깨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브라반트 공작 헨리 1세,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 로렌 공작 테오발트 1세, 림부르크 공작 헨리 3세를 포함한 광범위한 연합을 결성했다.이 작전은 동맹의 중심이었던 존이 계획했다. 그의 계획은 프랑스군을 파리에서 남쪽으로 유인하여 묶어두고, 그동안 오토 4세가 이끄는 주력군이 북쪽에서 파리를 공격하는 협공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쪽의 연합군은 천천히 움직였고, 존은 프랑스군과의 두 번의 교전 후 7월 3일 아키텐으로 후퇴했다.
3. 3. 전투의 전개
연합군 중 가장 먼저 전장에 도착한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는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했다. 프랑스군 우익은 부르고뉴 공작과 샹파뉴 백작이 이끄는 중장 기병과 경장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병 부대 간의 격돌은 순식간에 결정되었고, 플랑드르군은 격퇴되었다. 프랑스군 우익의 보병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중앙 부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오토 4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뒤이어 전장에 도착하여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중앙 부대를 공격했다. 황제군의 맹렬한 공격에 필리프 2세가 낙마할 정도였지만, 프랑스군은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버텼다. 프랑스군 우익 보병의 증원으로 형세가 역전되었다. 중앙에서의 격전과 거의 동시에 잉글랜드와 불로뉴 군대도 전장에 도착하여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했다. 불로뉴 백작 레노는 보병 전술에 능숙하여 프랑스군 좌익과 호각으로 싸웠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승리한 프랑스군 우익과 중앙 부대가 지원에 나서자 저항이 무너졌다.
이처럼 회전은 각개 격파를 통해 프랑스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는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플랑드르 백작 페랑, 장검 백작 윌리엄, 불로뉴 백작 레노, 홀란트 백작 빌렘 외 25명의 귀족과 139명의 기사가 포로로 잡혔다.
3. 3. 1. 초반: 플랑드르 군의 공격과 격퇴
수아송 생메다르 수도원에서 온 기병 150명이 연합군 좌익에 있던 플랑드르 기사들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어,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 플랑드르 기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은 기병들을 쉽게 몰아냈다. 일부 플랑드르 기사들은 대형을 이탈하여 퇴각하는 경무장 기병들을 쫓았고, 샹파뉴 출신 프랑스 기사 180명이 공격하여 지나치게 공격적인 플랑드르 기사들을 죽이거나 포획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기사 600명으로 이루어진 전 병력으로 반격을 가해 프랑스군을 후퇴시켰다.고셰 드 샤티용은 기사 30명을 플랑드르군에 돌격시켰고, 그 뒤를 기사 250명이 따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돌격을 감행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막았다. 첫 교전에서 양측의 많은 기사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프랑스군은 느슨하게 대형을 이룬 플랑드르 기사들보다 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빽빽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연합군의 대열은 얇아졌다. 샤티용과 멜룬은 기사들과 함께 플랑드르군 대열을 돌파한 후, 방향을 바꿔 후방에서 공격하며 끊임없이 목표를 변경했다. 생폴 기사단과 부르고뉴군은 플랑드르군과 지칠 줄 모르는 싸움을 벌였고, 포로를 잡지 않았다. 부르고뉴 공작의 말이 죽고 공작은 땅에 떨어졌지만, 플랑드르군을 물리치고 그에게 새로운 말을 찾아준 기사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플랑드르군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사도에 의해 3시간 동안 계속 싸웠다. 마침내 부상당하고 말에서 떨어진 플랑드르 백작은 두 명의 프랑스 기사에게 포획되었고, 이는 그의 기사들의 사기를 붕괴시키는 방아쇠가 되었다.
3. 3. 2. 중반: 황제군과 프랑스 중앙군의 격돌
2,15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 도시 민병대 보병대는 필립 왕의 기사들과 ''백합 문장'' 깃발 앞에서, 중앙에 오리플람 아래 집결했다. 배치 직후, 이들은 오토 휘하의 연합군 기병과 보병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오토와 그의 기사들은 프랑스 왕에게 거의 다다랐지만, 프랑스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연합군 보병들은 필립과 그의 소수의 기사 동료들에게 돌파하여, 갈고리 창으로 그를 말에서 떨어뜨렸다. 프랑스 왕의 갑옷은 적의 창 공격을 막아 그의 생명을 구했다. 갈롱 드 몽티니(Galon or Gales de Montigny)는 왕실 깃발을 사용하여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기사가 필립에게 새 말을 제공했다.
연합군 보병들은 단검을 사용하여 말에서 떨어진 프랑스 기사들의 헬멧 구멍이나 갑옷의 약점을 찔렀다. 이 방법으로 노르만 기사 스테판 롱샹이 살해되었고, 프랑스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프랑스의 반복적인 반격과 장기간의 전투 끝에 연합군은 후퇴했다.
중앙에서의 전투는 이제 왕과 황제가 직접 이끄는 양측 기병 예비대의 혼전이 되었다. 프랑스 기사 피에르 모브아쟁은 오토와 그의 말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고, 제라르 라 트뤼이는 황제를 단검으로 찔렀으나, 그의 사슬 갑옷에 튕겨져 오토의 말 눈을 찔러 죽였다. 오토는 네 명의 독일 영주와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프랑스군이 그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더 많은 기사를 보냈고, 그는 전장에서 도망쳤다. 독일 기사들은 황제를 구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웠고,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 독수리와 용이 그려진 제국 깃발은 프랑스 기사들에게 포획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왕에게 가져갔다. 이 즈음, 중앙에서 연합군의 저항은 멈추었다.
오토 4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전장에 도착하여 필리프 2세가 이끄는 중앙 부대를 공격했다. 황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필리프 2세는 낙마하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은 대열을 유지하며 버텼고, 프랑스군 우익의 보병 증원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3. 3. 3. 후반: 잉글랜드-불로뉴 연합군의 공격과 프랑스군의 승리
프랑스군 좌익에서는 로베르 드 드뢰의 부대가 윌리엄 롱스페가 이끄는 군대에게 밀렸다. 윌리엄 롱스페는 말에서 떨어져 필리프 드 드뢰 보베 교구 주교에게 포로로 잡혔고, 영국군은 도주했다. 마티외 드 몽모렌시는 적의 황실 깃발 12개를 노획했는데, 이 공을 기리기 위해 몽모렌시 가문의 문장에 있던 4개의 독수리에 12개의 독수리가 더해졌다.프랑스군 양익이 안으로 좁혀지면서 황제군 중앙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이 전투는 레노 드 담마르탱이 400~700명의 브라반트 창병으로 방진을 형성하여 벌인 최후의 저항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프랑스 기병대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고, 레노는 소수의 기사 부대로 반복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황제 군대가 후퇴한 지 한참 후, 브라반트의 쉴트롬은 토마 드 생 발레리가 이끄는 50명의 기사와 1,000~2,000명의 보병의 돌격에 의해 무너졌다. 레노는 백병전에서 포로로 잡혔다. 밤이 다가오고 포로들이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추격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부대는 나팔을 사용하여 소환되었다.
연합군에서 가장 먼저 전장에 도착한 것은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였다. 플랑드르군은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했다. 프랑스군 우익은 중장 기병과 지원 경장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부르고뉴 공작과 샹파뉴 백작이 이끌었다. 기마 부대 간의 격돌은 짧은 시간 안에 결판이 났고, 플랑드르군은 격퇴당했다. 프랑스군 우익에 배치된 보병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 부대를 지원할 여유가 생겼다.
오토 4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전장에 도착하여 필리프 2세가 이끄는 중앙 부대를 공격했다. 황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필리프 2세도 낙마할 정도였지만, 프랑스군은 대열을 유지하며 버텼고, 프랑스군 우익의 보병 증원으로 형세가 역전되었다. 중앙에서의 격전과 거의 동시에 잉글랜드와 불로뉴 군대도 전장에 도착하여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했다. 불로뉴 백작 레노는 보병 전술에 능숙하여 프랑스군 좌익과 대등하게 싸웠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승리한 프랑스군 우익과 중앙 부대가 지원에 나서자 저항이 무너졌다.
이처럼 회전은 각개 격파를 통해 프랑스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는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플랑드르 백작 페랑, 장검 백작 윌리엄, 불로뉴 백작 레노, 홀란트 백작 빌렘 외 25명의 귀족과 139명의 기사가 포로로 잡혔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부빈 전투는 중세 유럽의 정치 지형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 파비에는 이 전투를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상징적인 전투 중 하나"라고 평가했고, 필리프 콩타민은 "중요한 결과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페르디낭 로트는 이 전투를 "중세의 아우스터리츠"라고 불렀다.
이 전투로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4세와 잉글랜드의 존 왕 두 사람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필리프는 개선하여 파리로 돌아왔고, 파리 시민들은 승리한 왕을 맞이하기 위해 거리에 늘어섰다. 포로들은 긴 행렬로 끌려왔다. 1214년 전쟁에서 패배한 페랑은 포로로 잡혀 투옥되었고, 솔즈베리 백작 3세 윌리엄 롱스페는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지만, 부론 백작은 작은 감옥에 갇혀 통나무에 묶인 채 1227년에 자살했다. 존 왕은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5년 휴전을 맺었다.
프랑스군은 기사 2명이 사망했고, 보병 사상자는 기록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기사 169명이 사망했고, 보병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지만, 브라반트 보병 400명에서 7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프랑스군은 페랑과 솔즈베리 백작 3세 윌리엄 롱스페를 포함한 두 백작과 25명의 남작, 100명이 넘는 기사를 포로로 잡았다.
4. 1. 프랑스의 부상
의 결과, 필리프 2세가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서유럽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이후 1세기 동안 유럽에서 프랑스의 우위가 이어졌다. 프랑스 왕권은 강화되었고, 중앙 집권화가 가속화되었다.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는 황위를 잃었다. 잉글랜드 왕 존은 대륙 영토 회복에 실패하고, 본국에서는 제후들의 반란에 굴복하여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게 된다.
4. 2. 잉글랜드의 타격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 군의 승리는 잉글랜드 정치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로 앙주 제국의 부활은 좌절되었고, 패배한 존은 국내 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하여 1215년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해야 했다. 이는 왕권을 제한하고 보통법의 기초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4. 3.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
이 전투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는 황제 자리를 잃었다.5. 전투의 의의 및 평가
부빈 전투는 중세 유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6. 기념
필리프 2세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생리스와 몽 레베크 사이에 노트르담 드 라 빅투아르 수도원을 세웠다. 1914년, 700주년을 기념하여 펠릭스 드오는 부빈 교구 교회를 부빈 전투의 역사를 묘사한 여러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개축했다. 2014년에는 부빈 2014라는 단체가 부빈에서 800주년을 기념했다. 공식 행사와 "부빈 전투"라는 쇼를 포함한 일련의 행사들은 부빈에서 6,000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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