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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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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기병은 무거운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돌격력을 중시하는 기병을 의미한다. 고대 사회에서 기병은 정찰이나 추격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등자의 발명 이후 중기병의 역할이 증가했다.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스, 마케도니아의 헤타이로이 등이 대표적이며, 중세 시대에는 몽골, 오스만 제국, 유럽의 기사들이 중기병으로 활약했다. 근세에는 흉갑기병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화기의 발달로 인해 쇠퇴하여 경기병에 흡수되었다. 현대에는 전차와 같은 장갑 전투 차량이 중기병의 역할을 계승하며, 일부 국가에서는 의장용으로 중기병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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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퀴테스는 고대 로마의 기병 계급으로, 왕정 시대에 창설되어 공화정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 활동에도 참여했으나, 제정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 이후 군인 기사 계급의 부상으로 쇠퇴하고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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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병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유형기병
역할전투
충격력
무기

철퇴
방어구갑옷
방패
군마
중종마
운용밀집대형
돌격
역사
발전 시기고대 ~ 근대
주요 사용 국가페르시아
로마
비잔티움
유럽
중국
한국
일본
쇠퇴 시기화약 무기 발전 이후
특징
장점강력한 충격력
높은 전투력
기동성
보호력
단점높은 유지비
느린 속도
험지 이동 어려움
전술
주요 전술돌격
추격
포위
밀집대형방패와 창으로 무장하여 적을 압박하는 대형
기타
관련 용어기사
카타프락토이
클리바나리

2. 역사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의 중장갑 기병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부조. 이란 케르만샤의 타크에 보스탄(7세기)


중장기병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마사게타이와 같은 이란 부족들은 카타프락토스로 알려진 중장갑 기병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기병은 엘리트 병과였으며, 키루스 2세의 근위대와 같은 많은 페르시아 기병들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무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 당시에는 사람과 말 모두가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한 카타프락토스 부대가 페르시아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고대 이란의 파르티아 제국은 전쟁에서 중장갑 기병을 사용한 초기 사례이며, 특히 매우 무장한 카타프락토스 창기병 전통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엘리트 돌격 부대로서 보병 대형을 제압하거나,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스의 이중 역할을 수행했다.

갈리아와 페르시아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로마 장군이자 역사가인 아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페르시아 카타프락토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유럽중앙유럽켈트족은 이 지역에서 중기병을 사용한 최초의 민족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켈트족은 갑옷의 기원으로 여겨지며, 가장 오래된 유물은 현대 루마니아 치우메슈티의 켈트족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카르라이 전투에서 갈리아 보조 기병대는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스 기병대를 만나 격렬한 전투 끝에 섬멸되었다. 켈트 중기병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충격 기병과는 달리 중무장 경기병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와 켈티베리아의 중기병은 고대 세계 최고의 기수 중 일부로 널리 여겨졌다. 카르타고인들이 널리 사용했던 켈티베리아의 중기병에는 갑옷을 입은 말을 탔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와 이탈리아 기병대를 돌격하여 격파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갑옷을 입힌 기병을 카타프락토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중기병은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예외는 광대한 평야가 있어 기병이 훨씬 실용적인 그리스 북부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무렵, 중기병 돌격은 고대 그리스 전쟁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테베 시는 특히 기병으로 유명했으며, 테베 지휘관 에파미논다스는 그의 중기병을 레우크트라 전투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필리포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헤타이로이 기병이 생겨났고, 이 부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마케도니아 제국의 몰락 이후, 디아도코이 계승 국가들은 자신의 군대에서 중기병을 계속 사용했다. 특히 셀레우코스 제국은 카타프락토스의 사용을 도입했다.

북위 중기병


현대 르네상스 축제에서 중장갑 기사들의 중세 조우스트 재현


초기 중세 시대에 기사의 계급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12세기 이후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기병귀족과 관련되었고, 초기 로마의 기병 계급 및 그리스의 히페이스 계급과도 관련되었다. 기사 작위는 세습 작위였으며, 보통 아버지에게서 장남에게 계승되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와 수나라를 비롯하여 요나라, 서하, 금나라와 같은 주변의 이민족 왕조에서는 중기병(철기)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말에도 갑옷을 착용한 카타프락토이가 군의 주력이 되었다. 몽골군이나 초기 이슬람 제국부터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아랍·페르시아 여러 국가는 경기병의 기마 사격과 중기병의 돌격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19세기 프랑스 기갑병(퀴라시에)


30년 전쟁 이후, 중기병은 몸 전체를 덮는 판금 갑옷 대신 투구와 흉갑만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8세기에는 무장하지 않은 경기병으로 변화했다. 프리드리히 2세와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서 퀴라시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세기 크로아티아 중기병(크로아티아 메짐우리에 주립 박물관 소장품)


근세 유럽 군대에서 장갑 기병, 특히 젠다르므는 전투원의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다. 중앙 유럽에서는 익룡 후사르가 등장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영토 확장과 여러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양측 기병이 흉갑을 착용하고 전투에 참가한 마지막 사례였다. 이후 흉갑은 의장용을 제외하고는 버려졌지만, 1914년 당시 존재했던 프랑스 중기병 12개 연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 실전에서 흉갑을 착용했다.[17]

오늘날에는 전차와 같은 장갑 전투 차량이 중기병의 역할을 대신한다.

2. 1. 고대

고대 사회에서 중장보병은 전장의 주역이었다. 기병도 중요한 존재였지만, 마구가 발달하지 않아 정찰이나 추격 등 기동력을 활용하는 전술에 주로 사용되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 위에서 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축민이 많았던 마케도니아 왕국헤타이로이나 유목민인 스키타이, 흉노는 중장기병을 운용하여 돌격력을 활용했다. 카르타고한니발, 로마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카이사르 등은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여 측면 포위 전술로 승리하기도 했다.

4세기 중국에서 등자가 발명되면서 중장기병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등자는 중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기승을 가능하게 하고, 말 위에서의 전투를 용이하게 만들어 돌격력을 중시하는 중장기병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2. 1. 1. 그리스

그리스 전쟁에서 기병의 역할은 척후, 소전투, 추격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크고 든든한 말과 말안장의 발전은 필리포스 2세 통치 시기 마케도니아의 정예 기병인 헤타이로이 기병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들은 알렉산더 대왕 시기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3] 헤타이로이 기병은 최초의 진정한 기병이자 마케도니아 군대의 정예 부대로, 고대 세계 최고의 기병으로 평가받았다.[3]

알렉산드로스 대왕


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향으로 디아도코이들은 이 기병을 자신들의 군대에서 계속 활용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갑옷을 입힌 기병을 카타프락토스(Kataphraktos)라고 불렀는데, 이는 "덮여 있고, 보호된" 또는 "갑옷을 입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기병은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호플리트 전투의 만연과 중부 그리스의 산악 지형, 그리고 좋은 기병용 말을 생산하기 위한 목초지와 곡물 공급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스 용병이자 작가인 크세노폰은 말 농장이 운영하기 가장 비싼 시설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예외는 광대한 평야가 있는 그리스 북부였다. 페르시아 기병과의 조우는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기병 부대인 히페이스(Hippeis)를 창설하게 했다. 히페이스는 주로 말을 유지할 수 있는 상류층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무렵, 중기병 돌격은 고대 그리스 전쟁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며, 델리온 전투는 그들의 개입이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테베 시는 특히 기병으로 유명했으며, 테베 지휘관 에파미논다스는 그의 중기병을 레우크트라 전투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필리포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헤타이로이 기병이 생겨났는데, 이는 테베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3]

2. 1. 2. 페르시아

고대 이란의 파르티아 제국은 전쟁에서 중장갑 기병을 사용한 초기 사례로, 특히 매우 무장한 카타프락토스 창기병 전통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일반적인 중장갑 기병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했는데, 주로 엘리트 돌격 부대로서 보병 대형을 제압하거나,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스의 이중 역할을 수행했다.

마사게타이와 같은 이란 부족들이 카타프락토스로 알려진 중장갑 기병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기병은 엘리트 병과였으며, 키루스 2세의 근위대와 같은 많은 페르시아 기병들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무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 당시에는 사람과 말 모두가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한 카타프락토스 부대가 페르시아에서 이미 사용되었다.[1]

갈리아와 페르시아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로마 장군이자 역사가인 아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줄리아누스 탈락과 그의 후계자인 요비아누스의 퇴각에 참여하여 페르시아군과 싸웠다. 그는 페르시아 카타프락토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2]

: "그들의 모든 부대는 철로 무장했고, 몸의 모든 부분은 두꺼운 판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관절이 사지의 관절과 일치하도록 만들어졌다. 얼굴 모양은 머리에 매우 능숙하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온몸이 금속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떨어지는 화살은 눈동자 맞은편의 작은 구멍이나 코끝을 통해 약간의 숨을 쉴 수 있는 곳에만 박힐 수 있었다."

: "페르시아인들은 우리에게 밀집한 사슬 갑옷을 입은 기병대를 맞섰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서로 밀착된 철판으로 덮여 있어 눈부셨고, 말 전체는 가죽으로 보호되었다."

2. 1. 3. 사르마티아

5세기까지 사르마티아 기병은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 기병의 한 부분으로서 민족 대이동 시기에 유럽에 로마 중장기병의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4][5][6]

2. 1. 4. 로마 제국

사슬갑옷을 입은 중장기병의 뿌리는 스텝 기후 지대 유목민들에게서 나왔으며, 이들의 갑옷 기병 전통은 고대 근동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서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 중장기병과 처음 맞닥뜨렸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에서 기병 전술을 이어받아 서유럽 기사들에게 만족하지 않고 중장기병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다.[3]

고대 그리스인들은 갑옷을 입힌 기병을 "덮여 있고, 보호된" 또는 "갑옷을 입힌"이라는 뜻의 카타프락토스(Kataphraktos, 복수형 Kataphraktoi)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나중에 로마인들이 차용하여(로마 제국에서는 라틴어 변형인 Cataphractarii) 중세 유럽까지 갑옷을 입힌 기병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기병과 마찬가지로 중기병은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호플리트 전투의 만연과 중부 그리스의 산악 지형, 그리고 좋은 기병용 말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목초지와 곡물 공급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스 용병이자 작가인 크세노폰은 말 농장이 운영하기 가장 비싼 시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3]

예외는 광대한 평야가 있어 기병이 훨씬 실용적인 그리스 북부였다. 페르시아 기병과의 조우는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기병 부대인 히페이스(Hippeis)를 창설하게 했다. 히페이스는 주로 말을 유지할 수 있는 상류층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기병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정찰, 스커미싱, 추격으로 제한되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무렵 중기병 돌격이 고대 그리스 전쟁에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 델리온 전투는 중기병의 개입이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테베 시는 특히 기병으로 유명했으며, 테베 지휘관 에파미논다스는 그의 중기병을 레우크트라 전투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스파르타 기병을 격파하고 스파르타의 파랑크스를 교란하여 자신의 호플리트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3]

안장 발달과 커지는 말 품종으로 인해 필리포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동료 기병이 생겨났는데, 이는 테베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필리포스 2세는 젊은 시절 에파미논다스의 집에서 인질로 지냈다. 이 부대는 나중에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동료 기병(헤타이로이)은 마케도니아 군대의 정예 부대였으며 고대 세계 최고의 기병으로 여겨졌다.[3]

마케도니아 제국 몰락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들이 세운 디아도코이(계승 국가)들은 자신의 군대에서 중기병을 계속 사용했다. 특히 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중에 만났던 이란 부족인 마사게타이로부터 사람과 말 모두를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하는 방법을 배운 후 서구 전쟁에 카타프락토스의 사용을 도입했다.[3]

2. 2. 중세

초기 중세 시대에 기사의 계급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10세기 후기 카롤링거 왕조 프랑스에서는 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라틴어 ''miles''(복수형 ''milites'')로 불렀다. 이 용어는 봉건 제도에서 전문적인 전투원을 지칭했다. 많은 이들이 농민 계급만큼 가난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전투원 계급은 부유해지기 시작했고 토지를 소유하고 상속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이후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기병귀족과 관련되었고, 초기 로마의 기병 계급 및 그리스의 히페이스 계급과도 관련되었다.

13세기 초 기사였던 디폴트 아체라의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책''에 나오는 당대 묘사.


기사의 장비를 갖추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원시적인 중세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봉건 제도는 기사들의 충성심을 국왕에게 확보하는 수단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기사 작위는 세습 작위였으며, 보통 아버지에게서 장남에게 계승되었다. 모든 예비 기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기사도와 전쟁의 기사 전통에 따라 훈련을 받았다. 여섯 살이 되면 시종이 되어 예절과 기본적인 전투 기술을 배웠고, 몇 년 후에는 무관이 되어 기사의 말과 장비를 관리하고 전투를 위해 무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무관은 상급 영주나 국왕에 의해 "작위 수여식"을 통해 기사가 되었고, 봉건 영주에 대한 충성, 자선, 다른 기독교인에 대한 보호, 그리고 법을 존중할 것을 맹세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와 수나라를 비롯하여 요나라, 서하, 금나라와 같은 주변의 이민족 왕조에서는 경기병보다 금속 갑옷을 입고 말에도 말 갑옷을 착용하여 돌격하는 중기병(철기)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말에도 갑옷을 착용한 카타프락토이가 군의 주력이 되었다. 몽골군이나 초기 이슬람 제국부터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아랍·페르시아 여러 국가는 경기병의 기마 사격과 중기병의 돌격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유라시아에서는 주로 유목민으로 구성된 돌궐, 몽골, 티무르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이 경기병의 기마 사격과 중장비를 갖춘 중기병의 돌격을 구사하여 동서로 뻗어나가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유럽에서도 레히펠트 전투에서 중장비를 갖춘 기사의 군대가 수적으로 배 이상 많은 경기병으로 구성된 마자르인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중기병이 큰 힘을 발휘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백년 전쟁 후기 프랑스 기사들은 매우 무거운 말 갑옷을 말에 착용시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그만큼 기동력이 저하되어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사정거리가 긴 롱보우의 연사에 의해 속속히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2. 2. 1. 비잔티움 제국

니케포루스 2세는 10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유능한 장군 출신 황제로서, 중장기병을 군대의 핵심으로 여겼다. 그는 말탄 궁수와 중장기병을 조합하여, 중장기병이 적이 무너질 때까지 말탄 궁수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공격하게 하는 ‘오래 견디게 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10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중기병은 주로 중산층 농민들로부터 나왔으며, 이후 제국의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카타프락토이는 전성기에 강력한 부대로 명성을 떨쳤다.

2. 2. 2. 서유럽

서유럽중앙유럽켈트족은 이 지역에서 중기병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민족 중 하나이다. 켈트족이 갑옷의 기원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유물은 현대 루마니아 치우메슈티의 켈트족 무덤에서 발견되었다.[1] 갑옷과 때때로 청동 갑옷은 켈트 사회의 귀족과 족장들에게만 제한되었으며, 전투의 소음과 혼란 속에서 훈련된 말을 유지하는 추가 비용은 갑옷 전투 장비와 양질의 전투마를 구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켈트 사회가 개인의 성공과 용기에 두었던 강조 때문에 매우 높은 동기를 부여받았음을 보장했다.[2] 카르라이 전투에서 갈리아 보조 기병대는 완전히 무장한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스 기병대를 만났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기병대는 장기간의 격전에서 섬멸되기 전까지 치열하고 용감하게 싸웠다.[3]

켈트 말의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북서유럽과 중앙유럽의 켈트 중기병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충격 기병과는 달리 중기병으로서가 아니라 중무장 경기병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와 켈티베리아의 중기병은 고대 세계 최고의 기수 중 일부로 널리 여겨졌다. 갈리아 기병은 후퇴하면서 창을 던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병 한 명이 신선한 말을 가진 다른 두 명의 지원을 받아 투창을 보급받는 시스템을 사용했다. 근접전에서는 주요 무기가 약 약 2.13m 길이의 잎 모양의 칼날을 가진 창과 철제 스핀들형 보스가 달린 무거운 나무 방패였다. 가장 명망 있는 무기는 약 0.61m 에서 약 0.91m 길이의 칼날을 가진 검이었다. 켈트 검은 일반적으로 양질이었으며, 일부는 고고학자들이 현대 고품질 강철 복제품과 동등한 것으로 분류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카르타고인들이 널리 사용했던 켈티베리아의 중기병에는 갑옷을 입은 말을 탔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Lanciarii"(동로마 제국의 창으로 무장한 보병과 혼동해서는 안 됨)로 알려진 그들은 그 시대의 여러 이베리아 조각상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창과 방패, 그리고 켈트식 장검이나 이베리아 팔카타 외에도 이베리아 고유의 전철창인 "소리페룸"을 휴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갈리아 귀족들과 함께,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와 이탈리아 기병대를 돌격하여 격파한 것은 바로 이 기수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중세 시대에 기사의 계급은 모호하게 정의되었다. 10세기 후기 카롤링거 왕조 프랑스에서는 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라틴어 용어인 ''miles''(복수형 ''milites'')로 불렀다. 이 용어는 등장하는 봉건 제도에서 전문적인 전투원을 지칭했다. 많은 사람들이 농민 계급만큼 가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전투원 계급이 카롤링거 왕조 이후 프랑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되면서 부유해지기 시작했고 토지를 소유하고 상속하기 시작했다. 결국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정예무사 계급과 동의어가 되었다.

12세기 이후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기병귀족과 관련되게 되었고, 따라서 초기 로마의 기병 계급( 무관 참조)과 그리스의 히페이스 계급과도 관련되었다. 기사의 장비를 갖추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원시적인 중세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봉건 제도는 기사들의 충성심을 국왕에게 확보하는 수단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기사 작위는 세습 작위였으며, 보통 아버지에서 장남에게 계승되었다. 모든 예비 기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기사도와 전쟁의 기사 전통에 따라 훈련을 받았다. 여섯 살이 되면 다른 기사나 영주의 집에서 시종이나 시종이 되어 예절과 기본적인 전투 기술을 배웠고, 몇 년 후에는 완전히 자격을 갖춘 기사의 견습생이자 개인 비서인 무관이 되어 기사의 말과 장비를 관리하고 전투를 위해 무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 시점에서 그는 무관으로 남거나 기사가 될 수 있었지만, 기사가 되는 데 따른 제약과 비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관으로 남았다. 무관은 상급 영주나 국왕에 의해 "작위 수여식"이라고 알려진 의식을 통해 기사가 되었고, 봉건 영주에 대한 충성, 자선, 다른 기독교인에 대한 보호, 그리고 법을 존중할 것을 맹세했다.

2. 2. 3. 아프리카와 아시아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 술탄국의 중장기병은 을 쏘며 달리는 몽골 제국경기병(케식)을 결정적으로 격파할 정도로 아시아와 동유럽에서 강력한 기병으로 알려졌다. 무슬림 군대는 사하라 등 아프리카 일대를 중장기병의 위력으로 진출하였으며, 중세 유럽의 기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도 중장기병은 , 한나라 시기에 군대의 한 부대로 편성되었다. 사람과 말이 모두 금속으로 된 갑옷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이미 기원 4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남북조시대에는 북쪽 왕조 대부분이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였던 만큼 왕조의 기본 부대로서 활동하였다. 당나라 시기에는 경기병과 보병의 역할이 높아지고 중기병은 드물게 이용되었지만, 금나라의 중기병이 당시 적국이었던 , , 서하,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 삼국시대에는 철갑기병의 일종인 개마무사라는 중장기병이 존재했다. 기병 운용으로 잘 알려진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생산된 철을 바탕으로 중장기병 부대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중장기병과 달리 가죽 갑옷 위에 철 조각을 덧씌운 찰갑을 사용했고, 말은 판갑 덮개를 씌워 화살이나 투석 공격을 막았다. 무기로는 긴 창과 환두대도를 사용했고, 보조 무장으로 단검투창을 소지했으며, 활도 사용했다. 이 기병들은 광개토대왕의 대외 팽창 정책에 주력으로 활약하여 거대한 제국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신라는 5세기 중반 고구려가 왜구를 물리친 것을 계기로 고구려 기병의 영향을 받아 갑옷을 제작하고 유사한 중장기병 부대를 운용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의 중장기병은 찰갑이 아닌 판갑을 써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떨어졌다.

2. 3. 근세



30년 전쟁 이후, 중기병은 몸 전체를 덮는 판금 갑옷 대신 투구와 흉갑만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7세기 후반에는 대부분의 유럽 창기병들이 투구와 흉갑마저도 착용하지 않게 되었고, 18세기에는 무장하지 않은 경기병으로 변화했다. 다만, 17세기 중기병 중 일부는 완전한 흉갑 대신 앞쪽만 가리는 흉갑인 포언서(pauncer)와 투구를 착용하기도 했다.

1705년, 오스트리아신성 로마 황제 직속 군대에는 20개의 퀴라시에 연대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1732년에 친위대 연대를 포함한 자체 퀴라시에 연대를 편성하여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에 참전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프로이센)와 나폴레옹 1세(프랑스)의 군대에서 퀴라시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은 통치 말기에 프랑스 퀴라시에 연대 수를 14개로 늘렸지만, 보병 소총과 머스켓의 화력 및 정확도 증가로 인해 그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은 여전히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나폴레옹은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 적의 진형을 압도적인 돌격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기병 예비군단을 유지했다.

19세기 화기의 발사 속도와 정확도가 향상되면서, 나폴레옹 시대에도 퀴라시에의 흉갑은 적의 총격보다는 백병전 공격(총검 돌격, 사브르 베기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19세기 퀴라시에는 이전 세기의 느린 발사체와 달리, 더 이상 갑옷이 화기 발사체를 막아낼 수 있다고 기대하기 어려웠다.

1650년경부터 1820년경까지 스페인 중기병들은 북아메리카에서 아파치족 전사들과 전투를 벌였다.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스페인 랜서(lancer)들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아파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충돌은 18세기 후반 뉴 스페인 시대의 스페인 아리조나(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 지역에서 절정에 달했다.

2. 3. 1. 유럽



근세 유럽 군대에서 장갑 기병, 특히 젠다르므는 전투원의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다. 스페인이탈리아 전쟁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도 중기병을 자주 사용했다.

중앙 유럽에서는 익룡 후사르가 등장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영토 확장과 스웨덴, 모스크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후반에 등장한 익룡 후사르는 헝가리 장갑 후사르에서 영감을 받았다. 창을 사용하는 장갑 기병인 헝가리 장갑 후사르는 무장하지 않은 경기병인 후사르(세르비아와 헝가리에서 유래하여 16세기 초 폴란드에도 등장)에서 파생되었다.

1484년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을 위해 100명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의 ''키리서'' 연대가 창설되면서 퀴라시에가 주요 중기병 형태가 되었다. 16세기 초 유럽 군대의 중기병은 베네치아 군대의 알바니아 스트라티오티, 헝가리 후사르, 독일 용병 기병대를 모델로 개편되었다.[15] 1551년 베네치아 문서에는 영국 기병의 일부가 "알바니아 방식"으로 무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16]

16세기와 17세기 전반기 유럽 중기병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반 또는 3/4 장갑을 착용하고, 직선형 양날 한손 검(중세 무장 검의 발전형)과 승마 권총(최초의 권총이 16세기에 발명됨)으로 무장한 초기 퀴라시에 형태인 ''라이터''
  • 3/4 장갑을 착용한 창 기병으로, 중세 후기에 확립된 기병 기사 창 기병의 전통을 계승한 데미-랜서(15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익룡 후사르와 헝가리 장갑 후사르-창 기병은 데미-랜서에 상응하는 중앙 유럽 형태로, 16세기와 17세기 전장에서 유사한 전술적 역할을 수행했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는 화기의 발달로 중장갑 창기병은 쇠퇴했지만, 스스로 화기를 활용하게 된 기병은 여전히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스페인과 폴란드를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는 16세기 말까지 기병이 피스톨과 세이버를 장비하게 되었다.[18] 16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은 기병에게 소총을 장비시켰다. 예외적으로 폴란드의 후사르는 처음에는 경기병이었지만, 16세기에는 랜스로 돌격하는 중기병으로 발전하여 18세기까지 활약했다.

근세 중기병의 주류는 흉갑(퀴라스)을 착용한 흉갑기병(cuirassier)이었다. 흉갑기병은 무너지려는 적진을 돌격으로 분쇄하는 역할을 맡았다. 돌격을 총으로 지원하는 화승총 기병이나 카빈(기병총) 기병도 존재했다. 이 무렵 구스타프 아돌프와 프리드리히 대왕 등에 의해 보병, 포병과 결합하는 근대적인 기병 운용 방식이 고안되었다.

2. 3. 2. 30년 전쟁

오라녜 가문과 사보이 공국 아래에서 흉갑기병(퀴라시에)은 30년 전쟁과 관련된 80년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전장에서 완전한 판금 갑옷을 입은 마지막 기병이었다. 흉갑기병은 매우 길고 넓은 타셋(tassets, 다리 보호대)이 특징인 독특한 판금 갑옷을 착용했는데, 흉갑에서 무릎까지 이어지는 관절식 다리 보호대였다. 머리는 일반적으로 완전히 덮인 버고넷(burgonet)으로 보호되었는데, "사보이아식(Savoyard)" 스타일이 주목할 만한 유형이었다. 종종 양식화되거나 그로테스크한 얼굴 가면이 있는 이 둥근 투구는 흉갑기병이 이러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음을 목격한 독일군에 의해 "토텐코프(Totenkopf)" 또는 "데스 헤드(Death's Head)"라고 불렸다.[18] 일부 중앙 및 동유럽 국가의 라이터(reiters)와 흉갑기병은 버고넷 대신 또는 추가적으로 지샤게(zischagge) 투구를 선호하기도 했다. 흉갑기병의 갑옷은 매우 무겁고 두꺼웠는데, 때로는 36kg에 달했으며 총알을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흉갑기병 연대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사살했다.[18] 프랑스는 1666년에 자체 흉갑기병을 편성했다.[18]

브런스비크의 젊은 크리스티안(Christian the Younger of Brunswick)의 흉갑기병 갑옷

2. 4. 근대에서 현대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양측 기병이 흉갑을 착용하고 전투에 참가한 마지막 사례였다. 이후 독일 제국과 러시아의 퀴라시에는 의장용을 제외하고는 흉갑을 버렸지만, 1914년 당시 존재했던 프랑스 중기병 12개 연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 실전에서 흉갑을 착용했다.[17] 21세기에도 일부 중기병 연대가 남아 있지만, 그들의 대형마는 오늘날 영국의 근위 기병대와 같이 의장용으로만 사용된다.

오늘날에는 전차와 같은 장갑 전투 차량이 중기병의 역할을 대신한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대륙군이 기병의 집단 돌격을 중시했기 때문에 중기병이 활약했다. 대륙군의 중기병에는 흉갑기병 외에도 카라비니에 기병(Carabiniers-à-Cheval) 등이 있었으며, 각각 기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근대 이후, 전장에서 화기의 발전으로 장갑이 무용지물이 됨에 따라 중기병은 경기병에 흡수되는 형태로 점차 소멸했다. 흉갑기병 등 각종 중기병이 마지막으로 활약한 것은 크림 전쟁이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 19세기 이후, 총기의 라이플링이 보급되면서 키가 큰 기병은 좋은 저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기동력을 이용한 정찰, 기습, 후방 교란 등의 운용이 중심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는 간신히 존재했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전장에서 사라졌다. 같은 시기부터 기계화, 특히 항공기전차의 도입이 진행됨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기병 자체가 소멸했다.

흉갑기병 등 중기병의 명칭은 과거 중기병이 담당했던 기동력 및 그 고속력을 이용한 적진 돌파를 임무로 하는 전차를 비롯한 기갑부대나 공중 기동 부대의 전통적인 명칭으로서, 현재도 일부 부대에서 사용되고 있다.

3. 현대의 응용

오늘날에는 전차와 같은 장갑 전투 차량이 중기병의 역할을 대신한다.[17] 과거 중기병이 담당했던 기동력 및 그 고속력을 이용한 적진 돌파 임무는 기갑부대나 공중 기동 부대의 전통적인 명칭으로서, 흉갑기병 등 중기병의 명칭은 현재도 일부 부대에서 사용되고 있다.

21세기에도 일부 중기병 연대가 남아 있지만, 현대의 대형마는 오늘날 영국의 근위 기병대와 같이 의장용으로만 사용된다.[17]

참조

[1] 서적 Lynn
[2] 서적 Carey, Allfree and Cairns
[3] 서적 Diodorus Siculus, Arrian
[4] 웹사이트 China, Buddhism and the Silk Road – Silk-Road.com http://www.silk-road[...] 2019-06-27
[5] 웹사이트 FindArticles.com {{!}} CBSi http://www.findartic[...] 2019-06-27
[6] 웹아카이브 The invention and influences of stirrup https://web.archive.[...] 2008-12-03
[7] 서적 Maurice's Strategikon
[8] 서적 The other Europe in the Middle Ages: Avars, Bulgars, Khazars and Cumans. Kononklijke Brill N.Y.
[9] 서적 Curta
[10] 웹사이트 Middle Ages: History of the Medieval Knight http://www.ducksters[...] Ducksters. Technological Solutions, Inc. (TSI) 2015
[11] 웹사이트 Knighthood As It Was, Not As We Wish It Were http://origins.osu.e[...] Origins 2011-09-06
[12] 웹사이트 How Knights Work http://history.howst[...] How Stuff Works 2008-01-22
[13] 서적 Smith
[14] Youtube 复活的军团 https://www.youtube.[...] 2022-02
[15] 서적 The military revolution and political change: origins of democracy and autocracy in early modern Europ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6] 서적 Henry VIII's Army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2010-10-28
[17] 서적 The First World War
[18] 서적 学研 歴史群像グラフィック戦史シリーズ 戦略戦術兵器事典3 ヨーロッパ近代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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