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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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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소는 진시황의 장남으로, 분서갱유에 반대하며 학자들을 옹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변방으로 보내졌다. 진시황 사후 조고, 이사, 호해에 의해 자결을 명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부소의 아들 자영과의 관계, 진승·오광의 난에서 부소의 이름이 이용된 배경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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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
기본 정보
휘호皇帝 правитель
별칭人皇 (Rén Huáng)
祖龍 (Zǔ Lóng)
始皇帝 (Shǐ Huángdì)
존호始皇帝 (Shǐ Huángdì)
시호없음 (스스로 시호 폐지)
묘호없음 (스스로 묘호 폐지)
사후칭호始皇帝 (Shǐ Huángdì)
秦始皇 (Qín Shǐhuáng)
생애
출생기원전 259년
출생지한단
사망기원전 210년 (48–49세)
사망지사구
매장지여산
가족
아버지장양왕 또는 여불위
어머니조희
배우자불명
자녀부소

장려
이월
자영
통치
즉위기원전 246년 (진왕)
퇴위기원전 210년 (사망)
이전 군주장양왕
후계자진 이세 호해

2. 생애

扶蘇|부소중국어는 진시황의 장남이었지만, 황태자로 책봉되지는 않았다. 진시황이 연금술사들에게 속아 분서갱유를 일으켰을 때, 부소는 공자를 존경하는 학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은 백성들의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고 간언했다.[2] 그러나 시황제는 부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북쪽 변방으로 보내 몽염을 감독하게 했다.

시황 37년, 시황제가 다섯 번째 순행을 떠났을 때 막내 아들 호해와 좌승상 이사, 환관 조고가 동행했다. 시황제는 순행 중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부소에게 "함양에서 (시황제의) 상을 맞이하여 장례를 치르라"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쓰루마 가즈유키는 이를 부소를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1]

하지만 시황제가 붕어한 후, 이사는 변란을 우려해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로 했다. 호해는 조고의 꾐에 넘어가 조서를 위조하여 자신이 태자가 되도록 조작했고, 이사 역시 이에 가담했다.[6] 이들은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에게 자결을 명하는 문서를 보냈다.[3]

상군에서 조서를 받은 부소는 슬픔에 빠져 자결하려 했다. 몽염은 조서의 진위를 의심하며 만류했지만, 부소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다시 조서를 청해야 하겠는가!"라며 결국 자결했다.[6]

2. 1. 출생과 성장

부소는 시황제의 20여 명의 아들들 중 장자였으나, 황태자로 책봉되지는 않았다[6][7]

후지타 가쓰히사는 부소의 어머니가 초나라 출신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초의 왕족인 창평군 등이 왜 진왕 9년(기원전 238년) 시점에 진나라의 중심에 있었을까? 이것이 부소의 어머니와 관련이 있다고 상상한다. 진왕(후의 시황제)의 장자인 부소는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사기』에는 어째서인지 시황제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중략) 전국 시대 외교의 연장으로 혼인이나 인질에 객경과 같은 인물이 따라간다면, 9년에 초의 왕족이 체류한 것은 첫 번째 부인을 초나라에서 맞이했을 때의 수행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부소는 초나라 왕실과도 연관된 인물이다"라고 논했다[8]

2. 2. 시황제와의 갈등

시황 35년(기원전 212년), 시황제가 불로장생약을 구하게 했던 방사 노생과 후생이 시황제를 비난하고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시황제는 학자와 방사들을 조사하여 법령을 어긴 460여 명을 함양에서 생매장하고, 죄인들을 변방으로 유배했다. (분서갱유)[9]

부소는 시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천하가 이제 막 평정되었고, 멀리 떨어진 백성들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학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그들에게 엄한 형벌을 가하시면, 천하 백성이 불안해할까 두렵습니다. 부디 이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부소가 여러 번 간언했음에도[10] 시황제는 오히려 노하여 부소를 상군에 있던 몽염을 감독하게 하고 북쪽 지방으로 보냈다.[6]

2. 3. 변방으로의 좌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켜 공자를 존경하는 학자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가하자, 부소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 이를 반대했다.[2] 그러나 시황제는 부소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몽염이 주둔하고 있던 북방 변방으로 보냈다.[2] 이는 사실상 유배와 다름없는 조치였다.

부소가 변방으로 보내진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시황 35년(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노생과 후생 등이 자신을 비난하고 도망치자, 학자들을 조사하여 460여 명을 산 채로 매장했다. 부소는 "천하는 처음 평정되었고, 멀리 떨어진 백성들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지금 상(시황제)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형벌을 엄하게 가하고 계십니다. 저는 천하 백성이 불안을 느낄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했다. 부소가 여러 번 간했기 때문에[10], 시황제는 노하여 부소를 상군몽염 감 독으로 보냈다.


후지타 가쓰히사는 부소의 어머니가 초나라 출신이라고 추측하며, 부소가 초나라 왕실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8] 이러한 배경이 부소가 시황제의 정책에 반대하고 변방으로 좌천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 4. 죽음

진시황 사후, 호해는 조고, 이사와 함께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에게 자결을 명했다.[3] 부소는 몽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작된 조서의 내용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6]

쓰루마 가즈유키는 이 유서가 장자인 부소를 시황제의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며, 시황제가 마지막에 태자를 세운 것을 공표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장자 부소에게 보내는 마지막 옥새 (황제의 도장을 찍은 서신)가 태자 책봉 문서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1]

하지만 호해는 조고의 꾐에 넘어가 조서를 위조하여 자신이 태자가 되도록 조작했다. 조고는 이사에게도 부소가 즉위하면 몽염이 승상이 되어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부추겨 모략에 가담하게 만들었다.[6]

결국, 부소는 몽염이 조서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다시 조서를 청하자고 간청했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다시 조서를 청해야 하겠는가!"라며 몽염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결했다.[6]

2. 4. 1. 조작된 유서

시황제 사후, 호해는 고위 관료 조고이사와 함께 아버지의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부소에게 자결을 명했다.[3] 조고는 호해를 꼬드겨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를 폐하고 호해가 태자로 세워진다는 모략에 동의하게 만들었다.[6]

조고는 이사에게도 "강개하고 무용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고, 병사들을 분발시킬 수 있는 부소가 즉위하면, 부소와 친한 장군 몽염승상이 되어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입지도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부추겨 모략에 가담하도록 만들었다.[6]

세 사람은 부소에게 주려던 시황제의 봉인된 문서를 찢어버리고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가 태자가 되었다. 또한, 가짜 조서에 황제의 도장을 찍어 봉한 문서를 작성하여 호해의 식객을 부소와 몽염에게 사자로 보내 전달하게 했다. 상군에 있던 부소는 사자를 맞이하여 문서를 열어 보았다.

"짐(진시황)이 천하를 순행하며, 명산에 있는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수를 얻고자 했다. 부소와 몽염에게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변방에 주둔시킨 지 십수 년이 되었으나, 전진하지 못하고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다. 조그마한 땅을 얻는 공적도 없이, 오히려 여러 번 상소를 올려 나의 행위를 직언하며 비방했다. (부소가 북지에서 몽염을 감독하는 것)을 파면하고 함양으로 돌아가도 황태자가 될 수 없으니, 밤낮으로 원망하고 있다. 부소는 사람의 자식으로서 불효하다. 검을 주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장군 몽염은 부소와 함께 외지에 있으면서 부소의 행실을 교정하지 않은 것은 부소의 모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하로서 불충하다. 죽음을 내리니, 군대는 비장(부장) 왕리의 지휘 하에 배치하도록 하라"[6]

부소는 문서를 읽고 울면서 안방으로 들어가 자결하려 했다. 몽염은 이를 제지하며 진실을 의심하고 다시 조서를 청하자고 간언했지만, 부소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다시 조서를 청해야 하겠는가!"라며 자결했다.

2. 4. 2. 몽염의 만류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한 사자의 명을 받은 부소는 울면서 안방으로 들어가 자결하려 했다. 몽염은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6]

"폐하께서는 지금 순행 중이시고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30만 대군을 맡겨 변방을 지키게 하시고, 공자(부소)께는 저를 감독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중대한 임무입니다. 지금 사자가 한 번 왔다고 바로 자결하라는 것은, 거짓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조서를 청하고, 그 후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자는 여러 번 부소의 자결을 재촉했다. 부소는 어질고 관대한 성품이었기에 몽염에게 답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다시 조서를 청해야 하겠는가!"

결국 부소는 자결했다.[6]

2. 4. 3. 자결

扶蘇|부소중국어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분서갱유가 발생하자, 학자들을 옹호하며 황제에게 "천하는 처음 평정되었고, 멀리 떨어진 백성들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지금 상(시황제)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형벌을 엄하게 가하고 계십니다. 저는 천하 백성이 불안을 느낄까 두렵습니다. 상, 이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간언했다.[10] 그러나 시황제의 분노를 사 몽염이 주둔한 북방 상군으로 보내졌다.[2]

시황 37년(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순행 중 붕어하자, 호해는 조고, 이사와 함께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에게 자결을 명했다.[3]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시황제)이 천하를 순행하며, 명산에 있는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수를 얻고자 했다. 부소와 몽염에게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변방에 주둔시킨 지 십수 년이 되었으나, 전진하지 못하고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다. 조그마한 땅을 얻는 공적도 없이, 오히려 여러 번 상소를 올려 나의 행위를 직언하며 비방했다. (부소가 북지에서 몽염을 감독하는 것)을 파면하고 함양으로 돌아가도 태자가 될 수 없으니, 밤낮으로 원망하고 있다. 부소는 사람의 자식으로서 불효하다. 검을 주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장군 몽염은 부소와 함께 외지에 있으면서 부소의 행실을 교정하지 않은 것은 부소의 모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하로서 불충하다. 죽음을 내리니, 군대는 비장(부장) 왕리의 지휘 하에 배치하도록 하라"[6]

부소는 이 조서를 읽고 울면서 자결하려 했다. 몽염은 이를 만류하며 진위 여부를 다시 확인하자고 제안했으나, 부소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다시 조서를 청해야 하겠는가!"라며 자결했다.[6]

3. 유산

사기에 따르면, 부소는 아들 자영을 두었으며, 자영은 조고가 호해를 강제로 자살시킨 기원전 207년에 황위에 올랐다. 당시 이사는 이미 조고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자영은 곧 조고를 죽였다.[12]

그러나 자영이 진나라 황실과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하게 합의된 바가 없다. 일부 학자(예: 왕리췬)는 자영이 부소의 아들이라면 조고의 몰락을 계획하기에는 너무 어렸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자영의 두 아들도 음모에 연루되었고 충분히 나이가 들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 시황제는 49세에 사망했고, 부소는 30대까지밖에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부소는 때때로 중국 사원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나타나며, 보통 몽염과 함께 등장한다.

3. 1. 진승·오광의 난

기원전 209년(이세원년) 7월,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진 제국과 황제 호해에 반란을 계획할 때, 부소의 민중으로부터의 높은 인기를 이용하려 했다. 진승은 "이세 황제(호해)는 막내로 즉위할 자격이 없고, 진정으로 즉위해야 할 자는 공자 부소였을 것이다. 부소는 종종 시황제를 간언했기에, 상(시황제)은 그를 외지로 보내 병사를 이끌게 했다. 이번에 죄도 없이 이세 황제(호해)에게 살해당한 것 같다. 천하의 많은 백성은 부소가 훌륭한 인물임을 알고 있으며, 아직 그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 이미 부소는 죽었지만, 내가 여러 사람에게 거짓으로 공자 부소라고 칭하며 천하에 알리면, 많은 사람들이 반란에 호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10] 그 후 진승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정체는 부소라고 사칭했다.[10]

후지타 카츠히사는 진승이 부소의 이름을 사칭한 것에 대해 "여기에는 무언가 숨겨진 이유가 틀림없다. 이 의문을 풀 열쇠로 항연 (진나라와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싸운 초나라 장군)이 초왕으로 세워 함께 싸운 왕족인 창평군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 싶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초나라 출신인 시황제의 첫 번째 부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부소는 초나라 왕실과도 연결되는 인물이며, 창평군의 이미지와도 겹치는 인물이다. 그리고 생사가 불분명한 부소가 항연과 같은 초나라 장군과 함께 봉기한다고 하면, 과거 반진 전쟁의 재현과 같아진다. 이것이 진섭(진승) 등이 부소를 사칭하려 했던 사회적 배경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라고 논했다.[8]

3. 2. 자영과의 관계 논란

사기에 따르면, 부소는 아들 자영을 두었으며, 자영은 조고가 호해를 강제로 자살시킨 기원전 207년에 황위에 올랐다. 당시 이사는 이미 조고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자영은 곧 조고를 죽였다.[12]

그러나 자영이 진나라 황실과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하게 합의된 바가 없다. 자영이 부소의 아들인지, 진 시황제의 동생의 아들인지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하위 섹션에서 부소의 아들, 시황제 동생의 아들, 기타 주장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학설의 존재 여부만 간략히 언급한다.

3. 2. 1. 부소의 아들이라는 주장

사기에 따르면, 부소는 아들 자영을 두었다.[14] 그러나 자영이 진나라 황실과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영이 부소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부소의 아들이 조고의 몰락을 계획하기에는 너무 어렸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영의 두 아들도 음모에 연루되었고 충분히 나이가 들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 시황제는 49세에 사망했고, 부소는 30대까지밖에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부소와 자영이 부자 관계라면, 조고를 죽이는 데 가담한 자영의 두 아들은 부소의 손자이자 시황제의 증손이 된다.

3. 2. 2. 시황제 동생의 아들이라는 주장

사기 「이사 열전」 집해 서광의 설에는 "일본왈 '소시황제제자영,수지새'"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진 시황제의 동생의 아들 영(嬴)으로 보는 설이 있다.[12] 조지쓰 대학 인문과학부 전 교수 이카이겐은 이 설을 지지하며, 영을 부소가 아닌 시황제의 동생인 영성교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설을 발표하고 있다.[13] 또한, 이카이겐은 성교가 조나라를 공격할 때 진나라를 배반했을 때 조나라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영이라고 한다.

나카이 세키토쿠는 자영이 시황제의 손자라면 "공손"이라 칭하고, 공자라 칭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형의 아들"의 "자" 자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잘못 더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더 나아가, 자영의 아이들과 조고를 모살하는 것은 나이로 보아 무리가 있으므로, 자영을 "아마도(생각건대) 이세(호해)의 형"으로 보고, 부소와 호해 사이의 시황제의 공자 중 한 명, 부소의 동생, 호해의 형으로 간주하고 있다.[14]

3. 2. 3. 기타 주장

사기에 따르면, 부소는 아들 자영을 두었으며, 자영은 조고가 호해를 강제로 자살시킨 기원전 207년에 황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자영이 진나라 황실과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12]

일부 학자들은 자영이 부소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진 시황제는 49세에 사망했고, 부소는 30대까지밖에 살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영의 두 아들이 조고를 죽이는 음모에 가담했는데, 이들도 충분히 나이가 들었어야 한다.[12]

나카이 세키토쿠는 자영이 시황제의 손자라면 '공손'이라 칭해야 하는데, '공자'라 칭할 수 없는 점을 들어 '형의 아들'에서 '자(子)' 자가 잘못 추가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는 자영의 아이들이 조고를 죽이려는 모의를 하기에는 나이가 어려 보이므로, 자영을 부소의 동생이자 호해의 형으로 보았다.[12]

조지쓰 대학 인문과학부 전 교수 이카이겐은 서광의 설을 지지하며, 자영을 부소가 아닌 시황제의 동생인 영성교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교가 조나라를 공격할 때 진나라를 배반하고 (성교의 난), 조나라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영이라고 주장한다.[13]

신석한문대계 「사기1 (본기)」의 주석에서는 자영을 "이세 호해의 형 부소의 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4]

그는 때때로 중국 사원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나타나며, 보통 몽염과 함께 등장한다.

4. 대중문화 속 부소

부소는 중국 사원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나타나며, 보통 몽염과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hiji
[3] 서적 The First Emperor: Selections from the Historical Records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4] 서적 史記
[5] 서적 史記
[6] 서적 史記 李斯列伝
[7] 서적 史記 劉敬叔孫通列伝
[8] 서적 項羽と劉邦の時代
[9] 서적 史記集解
[10] 서적 史記 陳渉世家
[11] 서적 人間・始皇帝
[12] 서적 新釈漢文大系「史記一(本紀)」
[13] 웹사이트 秦王子嬰為始皇弟成蟜子説——補《史記》秦王嬰列伝 http://xiangyata.net[...] 象牙塔网络 2006-07-16
[14] 서적 新釈漢文大系「史記一(本紀)」
[15] 뉴스 한겨레:온 [대만이야기 30]: 진시황과 만리장성 http://www.hanion.co[...] 한겨레신문사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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