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고는 전국 시대 조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진나라 시황제의 총애를 받아 부새령까지 올랐다. 진 시황제 사후, 그는 유서를 조작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진 이세 황제를 옹립한 후 승상이 되어 정적들을 제거하며 권세를 누렸다. 조고는 '지록위마' 고사로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으며, 이후 이세 황제를 시해하고 자영을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자영에게 살해당했다. 조고는 진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평가받으며, 악신의 상징으로 비난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07년 사망 - 하스드루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하밀카르 바르카의 차남이자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군과 싸우다 이탈리아로 향해 한니발을 지원하려 했으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한 카르타고 장군이다. - 기원전 207년 사망 - 크리시포스
크리시포스는 헬레니즘 시대 스토아 철학자로 스토아 학파 발전에 기여, 클레안테스 후임 수장, 논리학을 비롯 인식론, 물리학, 윤리학 등 폭넓은 사상을 펼친 다작의 저술가로서 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진나라의 재상 - 상앙
상앙은 위나라 출신의 법가 사상가이자 진나라의 개혁가로, 효공의 신임을 얻어 법률 제도를 개혁하여 능력주의를 강조하고 중앙집권화 및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으나, 혜문왕에 의해 처형당했다. - 진나라의 재상 - 여불위
여불위는 전국 시대 말기 위나라 출신 상인이자 진나라의 정치가로서, 자초를 왕위에 옹립하고 승상이 되었으며 《여씨춘추》 편찬과 '일자천금' 고사로 명성을 얻었으나, 몰락하여 자살했고 진시황의 친부 논란 등 복잡한 면모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해석된다.
조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조고 |
원어 이름 | 趙高 |
로마자 표기 | Zhao Gao |
직업 | 환관, 정치가 |
관직 정보 | |
관직 | 승상 |
재임 시작 | 기원전 208년 |
재임 종료 | 기원전 207년 |
군주 | 진 이세 |
이전 | 이사 |
관직 (2) | 낭중령 |
재임 시작 (2) | 기원전 209년 |
재임 종료 (2) | 기원전 208년 |
군주 (2) | 진 이세 |
관직 (3) | 중거부령 |
재임 시작 (3) | ? |
재임 종료 (3) | 기원전 209년 |
군주 (3) | 진 시황제 / 진 이세 |
생몰 정보 | |
출생 시기 | 알 수 없음 |
사망 시기 | 기원전 207년 |
사망 원인 | 암살 |
2. 생애
조고는 전국 시대 조나라 왕족의 먼 친척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조고의 부모는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았다. 그의 형제들은 거세되었으며, 조고 자신이 환관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3] 그러나 진 시황은 형법에 정통한 조고를 높이 평가하여 중거부령으로 삼고 호해의 스승으로 삼았다.
조고는 하급 관리 시절 사형에 처해질 만한 범죄를 저질렀으나, 몽의의 판결 이후 진 시황에게 사면받고 관직에 복귀했다.[4]
진 시황 치세 말년, 조고는 몽염과 몽의 형제의 죽음에 연루되었다. 진시황이 사구에서 갑작스럽게 죽자, 조고는 승상 이사와 함께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고, 부소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또한 몽의에게 형벌을 받은 적이 있어 몽씨 가문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던 조고는 호해를 설득하여 몽염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몽의를 처형하는 칙령을 내리게 하여 몽씨 형제를 몰락시켰다.[4]
호해는 조고를 스승으로 여겼고, 호해는 조고의 도움으로 진나라 2세 황제가 되었다. 2년 후, 조고는 이사를 오형으로 처형하고[5] 이사의 온 가족을 몰살시켰다.
기원전 207년, 한곡관 동쪽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고는 호해가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쿠데타를 일으켜 호해를 암살하고 자영을 옹립했다. 그러나 자영은 조고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로 조고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조고의 일족은 자영의 명령에 따라 몰살당했다.
2. 1. 어린 시절과 진나라 출사
조고는 조나라 왕실의 먼 친속이었다. 조고의 형제들은 모두 은궁(隱宮)에서 자랐고, 그 어머니 또한 형육(刑戮, 사형)에 처해져서 그 집안이 대대로 비천하였다. 그러나 진 시황제는 조고가 힘이 세고 옥법(獄法, 형법)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기용하여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았다. 이후 조고는 진 시황제의 아들이었던 공자 호해의 스승이 되어 그에게 결옥(決獄, 재판)하는 법을 가르쳤고,[19] 이 일로 인하여 호해 또한 스승인 조고를 좋아하게 되었다.[20]그러던 어느 날, 조고가 죄를 짓게 되었다.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 시황제의 측근 몽의는 국법에 따라 조고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관리명단인 환적(宦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나 진 시황제는 조고가 일을 열심히 해왔다는 이유로 그 죄를 사면하고 관작을 복구시켜 주었다.[21] 이후로도 조고는 시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시황제 말년에 이르러서는 부새령(府璽令)이 되어서 부새(符璽, 옥새)를 담당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22]
조고는 전국 시대의 조나라 왕족과 먼 친척 관계였다. 사기에 따르면 조고의 부모는 범죄를 저질러 처벌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은 거세당했으며, 조고 자신이 환관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3] 그러나 진 시황은 형법에 정통한 조고를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진 시황이 항상 법과 형벌로 백성을 통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매우 유용했다.
하급 관리였을 때 조고는 사형에 처해질 만한 범죄를 저질렀다. 몽의는 선고를 담당하는 관리였으며, 진 시황의 지시에 따라 조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관료 명단에서 삭제했다.[4] 조고는 나중에 진 시황에게 사면받고 관료 신분을 회복했다.
조고는 조의 먼 친척 공족으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죄를 범했다. 이때 조고가 궁형에 처해졌고, 이후 진나라에서 환관으로 섬겼다는 설이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조고가 진 시황제를 언제부터 섬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정확히 언제부터 섬기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근면하고 법률에 밝았던 탓에 진 시황제의 막내 아들인 호해의 보육 역할을 맡았다. 이후에는 만년의 진 시황제에게 그 재능을 총애받게 되어, 진 시황제의 측근에서 잡무를 모두 처리했다.
2. 2. 진시황 사후 권력 장악
기원전 210년(진시황 37) 7월, 진 시황제가 순행 중 병을 얻어 장남 부소에게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라는 유서를 남기고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사망하였다.[23] 시황제의 죽음은 중거부령 조고, 승상 이사, 공자 호해, 그리고 시황제에게 총애받던 5~6명의 환관(宦者)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기밀에 부쳐졌다.[24]조고는 이 기회를 틈타 평소 사이가 좋았던 호해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과거의 원한 때문에 몽의를 죽이고 싶어했다.[25] 조고는 호해에게 시황제의 후계자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황제가 될 것을 부추겼다. 또한 몽씨 가문의 위세에 위기감을 느끼던 승상 이사를 설득하여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고 북쪽 변경 상군(上郡)에 있던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자살을 명했다.[26] 부소는 결국 자살했고, 몽염은 자살을 거부하다 양주(陽周)에 감금된 후 조고에게 처형당하거나 자살했다.[27]
함양에 돌아온 호해는 그해 9월 시황제를 장사지내고 진 이세황제로 즉위했다.[28] 조고는 몽염과 그의 동생 몽의의 죽음에 연루되었는데, 몽염은 명망 있는 장군이자 부소를 지지했으며, 2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지휘하며 북방 국경에서 흉노와 전쟁을 수행했다. 조고는 이전에 몽의에게 형벌을 받은 적이 있어 몽씨 가문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4]
호해는 조고를 스승으로 여겼다.[5] 조고는 스스로 낭중령(구경 중 하나로, 궁궐 문을 관리하는 직책)에 취임하여 호해를 구슬려 궁중에 가두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하고, 자신은 대신 정무를 처리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호해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였고, 승상 이사조차 조고의 중재 없이는 호해에게 주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고는 아방궁의 대규모 증축을 추진하고 백성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하는 등 시황제의 정책을 계승했지만, 황제의 권위, 즉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데에 골몰하였다. 또한, 몽염, 진의 공자 장려와 두 동생들, 공자고 등 유력자나 적대자를 억울한 죄로 처형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2. 3. 이사와의 갈등과 제거
기원전 209년(진이세 1), 이세황제는 조고를 낭중령(郎中令)으로 임명하고 국사(國事)를 맡겼다. 호해는 조고에게 대신과 공자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불안하다고 말했고, 조고는 권력 강화를 위해 시황제의 여러 공자들을 처형하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12명의 공자들이 함양에서 처형당했고, 10명의 공주들은 두현(杜縣)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연루되어 죽었다.[29] 그해 7월,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하였다.[30]기원전 208년(진이세 2), 조고는 이세황제가 미숙하여 대신들에게 단점을 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세황제는 대신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 궁중에만 거처하며 조고와 모든 일을 결정했다.[31]
조고는 승상 이사가 이세황제를 만나려 했으나 이세황제가 조정에 나오지 않아 전전긍긍함을 알았다. 조고는 이사에게 황제 접견 시기를 알려주겠다고 하고는, 이세황제가 연회를 즐길 때에만 접견을 허용하여 이간질했다. 이로 인해 이세황제는 이사에게 악감정을 품게 되었다.[32]
이후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 등이 이세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진승·오광의 난으로 인한 어려움을 말하며 아방궁 축조 중단과 수자리, 물자 수송을 줄일 것을 간언했다. 그러자 이세황제는 반란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대신들을 질책하고 옥리에게 넘겼다. 풍거질과 풍겁은 자살했으나, 이사는 옥에 갇혔다.[33]
이사는 감천궁(甘泉宮)에서 소일하던 이세황제에게 글을 올려 조고의 죄상을 거론하며 탄핵했다. 그러나 이세황제는 조고를 신임하여 이 사실을 조고에게 말했다. 조고는 이사가 황제 자리를 찬탈하려 할 것이라 주장했고, 이세황제는 조고에게 이사를 심문하게 했다.[34]
조고는 이사를 하옥하고, 그의 아들 이유가 모반을 꾀했다는 모함을 씌워 1천 번 매질하여 강제로 자백하게 했다. 이사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고가 막았다. 조고는 식객 10여 명을 보내 이사를 심문, 자백을 번복할 때마다 매질했다. 이세황제가 사자를 보내 심문하자, 이사는 매질이 두려워 이전과 같이 자백했다.[35] 결국 이사는 그해 7월,[36] 혹은 이듬해인 기원전 207년(진이세 3) 겨울[37]에 오형으로 처형되었는데,[5] 오형은 코를 베고, 손발을 자른 다음, 거세하고 허리 부분에서 반으로 자르는 형벌이다. 조고는 이사의 온 가족을 몰살시켰다.
이처럼 정적인 이사를 비롯한 대신들을 제거하고 이세황제를 궁중에 가둔 조고는 막대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2. 4. 지록위마(指鹿爲馬)
기원전 207년(진이세 3), 이사에게 모반죄를 씌워 제거한 조고는 중승상(中丞相)이 되었으며, 이세황제는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조고와 의논하게 되었다.[38]그해 8월 기해일, 조고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는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막중한지 시험하기 위해 사슴 한 마리를 이세황제에게 바치면서 이를 말이라고 주장했다.[39] 이세황제는 웃으면서 "승상이 잘 못 본 것이 아닌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니?"라 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조고의 말이 맞다고 말하였다.[40] 그 중 몇몇 사람들은 이세황제의 말이 맞다고 하였으나 이들은 훗날 모두 조고에게 모함을 당하고 말았다.[41]
이 일화에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이는 곧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는 뜻으로, 조고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주장하며 이세황제를 농락하였듯이, 아랫 사람이 권세와 거짓말을 동원해 윗 사람을 농락하며 권세를 휘두르는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속담이 되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르다"(指鹿爲馬|zhǐlù-wéimǎ중국어)는 조고와 관련된 일화에서 유래된 하나의 성어 (중국 관용 표현)로, 비유적으로 "의도적인 거짓말 유포"를 의미한다.[6]
조고는 궁중에 "진귀한 말이 있습니다"라며 사슴을 데리고 왔다. 이세황제는 "승상은 무슨 소린가, 이것은 사슴이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조고는 "이것은 말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며 침묵하는 군신들에게 물었다. 조고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자는 말이라고 했고, 굴하지 않는 자는 사슴이라고 했다. 조고는 그 자리에서는 잠깐의 여흥이라는 것으로 끝냈지만, 훗날 사슴이라고 대답한 관리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 에피소드가 "바보"의 유래 중 하나인 '지록위마'이다.
2. 5. 진나라 멸망과 조고의 최후
기원전 207년 8월,[52] 염락으로부터 이세황제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조고는 여러 대신과 공자들을 소집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조고는 과거에 멸망했던 6국이 다시 자립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더 이상 "제(帝)"라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다시 "왕(王)"을 칭하였다.그해 9월,[53] 조고는 인망이 있었던 공자 자영을 진나라 왕으로 옹립하였으며 이세황제를 평민의 예로 두현(杜縣) 남쪽의 의춘원(宜春苑)에 장사냈다. 조고는 자영으로 하여금 목욕재계하며 종묘에 제사를 드리고나서 신하들과 접견하여 옥새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영은 조고가 초나라와 밀약을 맺고 진나라 종실을 멸한 후에 스스로 관중의 왕이 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영은 두 아들 및 한담과 모의하고는 일부러 병을 칭하며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54]
조고는 몇 차례 사람을 보냈음에도 자영이 응하지 않자, 직접 자영을 찾아가 문병을 왔다가 재궁(齋宮)에서 자영의 자객에게 찔려 죽고 말았다. 조고를 죽인 자영은 그 삼족을 멸하였으며 시신을 함양의 저자에 조리돌렸다.[55] 이후 자영이 왕위에 오른 지 46일 만에 전한 고제가 함양에 입성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3. 조고에 대한 평가와 논란
조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진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보는 부정적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환관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비환관설이다.
- 부정적 평가: 조고는 진나라를 사유화하고 황제를 시해하여 천하 만민에게 원한을 샀으며,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나라 태종은 조고를 동탁과, 량치차오는 십상시, 이임보, 채경, 진회, 한탁주, 위충현과 함께 비난했다. 일본에서도 조고는 천하를 사사로이 여긴 예로 언급된다.
- 조고 비환관설: 조고가 환관이 아니라는 주장은 여러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리카이위안(李開元)은 조고가 승상을 지낸 점 등을 근거로, 신더용(辛德勇)은 『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반박한다. 타키가와 키타로(瀧川龜太郞)는 조고에게 사위가 있다는 점을 들어 환관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마페이바이(馬非百)는 출토된 죽간 자료를 통해 '은궁'이 '은관'의 오기라고 지적한다. 츠루마 카즈유키(鶴間和幸)는 당나라 시대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조고가 환관으로 이해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일부에서는 조고가 조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진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국을 멸망시켰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3. 1. 부정적 평가
조고는 진나라를 사유화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충성스럽고 현명한 신하들을 모함하여 죽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마저 시해하여 천하 만민에게 원한을 샀다. 또한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악신의 상징으로 후세에도 언급되고 있다.[7] 당나라 태종은 조고를 후한의 소제를 시해한 동탁과 나란히 비난했다. 량치차오는 조고를 십상시, 이임보, 채경, 진회, 한탁주, 위충현과 함께 비난했다.일본 평가 이야기에서는 전한 왕망, 남조 양 주이, 당나라 안록산과 함께 조고가 언급되며, 천하를 사사로운 것으로 삼은 결과 멸망한 예로 소개되고 있다.
조고가 조나라 왕족의 후손이며, 진나라에 의해 조나라가 멸망한 것에 대해 진나라에 복수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조고가 진나라 정부를 장악했기에 진 제국이 짧은 시간에 붕괴된 것은 당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고는 제2대 황제 호해를 포함한 진 시황제의 모든 아들과 딸들을 죽였다. 자영은 복수로 조고와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죽였다. 따라서 조고 또는 그의 형제들은 알려진 후손이 없다.
3. 2. 조고 비환관설
조고가 환관이 아니라는 설은 여러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리카이위안(李開元)은 조고가 승상을 지냈다는 점, 동한 이전의 역사가들이 조고를 명시적으로 환관이라고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 진나라 시대의 조각상에서 황실 마부들이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된 점 등을 근거로 조고 비환관설을 주장한다.[7]반면, 신더용(辛德勇)은 조고가 환관이 아니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8] 『사기』 몽념 열전에는 "조고의 형제 수인이 모두 '''은궁'''에서 태어났다."라는 기술이 있으며, 『사기집해』[11]・『사기색은』은 모두 "은궁"을 환관으로 해석한다.[12][13] "은궁"은 진시황본기에도 나타나며[14], 『사기정의』는 그것을 궁형으로 해석한다.[15] 이러한 『사기』 주석서(삼가주)를 통해 조고가 환관이었다는 이해가 널리 퍼졌다.[16]
타키가와 키타로(瀧川龜太郞)는 『사기회주고증』에서 나카이 세키토쿠(中井積德)의 말을 인용하여 조고에게 염락(閻樂)이라는 사위가 있다는 점[9]에서 조고가 태어나자마자 환관이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17] 조고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많은 형들을 부양하기 위해 스스로 환관을 지원하여 진나라에 봉사했다는 설도 있다.
마페이바이(馬非百)는 새로 출토된 죽간 사료를 근거로, 몽념 열전의 "은궁"은 "'''은관'''"의 오기라고 지적했다. "은관"은 형기가 만료된 사람이 일하는 곳, 또는 그 신분을 의미하며, 조고는 궁형이나 거세를 당한 것이 아니라 환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16][18] 츠루마 카즈유키(鶴間和幸)는 『사기색은』・『사기정의』가 만들어진 당나라 시대에는 환관의 정치적 폐해가 컸기 때문에 조고가 환관으로 이해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16]
일부에서는 조고가 조나라 왕족의 후손이며, 진나라에 의해 조나라가 멸망한 것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이들은 조고가 진나라 정부를 장악하여 진 제국을 단시간에 붕괴시켰고, 제2대 황제 호해를 포함한 진 시황제의 모든 아들과 딸들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자영은 복수를 위해 조고와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죽였다고 한다.
참조
[1]
기타
[2]
서적
Handbook of Chinese Popular Culture
Greenwood Press
2022-01-09
[3]
논문
On the Terms bao zi, yin gong, yin guan, huan, and shou: Was Zhao Gao a Eunuch?
[4]
웹사이트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Chapter 88
https://zh.wikisourc[...]
2023-08-11
[5]
웹사이트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Chapter 87
https://zh.wikisourc[...]
2023-08-11
[6]
뉴스
The Hong Kong government has been accused of 'calling a deer a horse' – but where did the expression originate?
https://www.scmp.com[...]
2020-12-11
[7]
논문
说赵高不是宦阉——补《史记·赵高列传》
2007
[8]
서적
生死秦始皇
2019
[9]
기타
[10]
기타
[11]
기타
[12]
기타
[13]
기타
[14]
기타
[15]
기타
[16]
기타
[17]
서적
史記会注考証
https://taiwanebook.[...]
東方文化学院東京研究所
[18]
기타
[19]
서적
《사기》 권88 몽염열전
[20]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21]
서적
《사기》 권88 몽염열전
[22]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23]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24]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25]
서적
《사기》 권88 몽염열전
[26]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 《사기》 권88 몽염열전
[27]
서적
《사기》 권88 몽염열전
[28]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29]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30]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31]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32]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33]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34]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35]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36]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37]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38]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39]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40]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41]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42]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43]
서적
《사기》 권7 항우본기
[44]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45]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46]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47]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48]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49]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50]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51]
서적
《사기》 권87 이사열전
[52]
서적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53]
서적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54]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55]
서적
《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87 이사열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