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르츠부르크 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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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뷔르츠부르크 공관은 1719년에 뷔르츠부르크 주교 요한 필리프 프란츠 폰 쇤보른의 명으로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과 쇤브룬 궁전과 같은 건축물을 목표로, 18세기 동안 여러 주교의 통치하에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발타자르 노이만,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등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으며, 1981년 정원과 광장을 포함하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궁전 내부는 400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단, 백색 홀, 황제 홀, 궁정 예배당 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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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츠부르크 공관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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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츠 |
원어 이름 | Würzburger Residenz |
원어 이름 (언어) | 독일어 |
유형 | 궁전 |
건축 양식 | 바로크 건축 |
주소 | 레지덴츠플라츠 2, 97070 뷔르츠부르크 |
국가 | 독일 |
소유주 | 바이에른 주 소유 궁전, 정원 및 호수 관리청 |
웹사이트 | schloesser.bayern.de/wu_res |
역사 | |
기공 | 1720년 |
완공 (주요 구조) | 1744년 |
완공 (내부) | 1780년 |
세계유산 정보 | |
공식 명칭 |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츠 (궁정 정원 및 레지던츠 광장 포함) |
포함 내역 | 레지던츠 로젠바흐 공원 |
기준 | (i), (iv) |
ID | 169bis |
등재 연도 | 1981년 |
확장 | 2010년 |
면적 | 14.77 헥타르 |
완충 구역 | 25.0685 헥타르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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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719년 뷔르츠부르크 주교로 선출된 요한 필리프 프란츠 폰 쇤보른은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자신의 공식적인 자리를 옮기기 위해 뷔르츠부르크 공관 건축을 시작했다.[11] 그는 절대 군주로서 자신의 지위에 비해 이전 거처가 작다고 생각하여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궁전과 같은 웅장한 건물을 원했다.[8]
마인츠 대주교이자 마인츠 선제후인 삼촌 로타르 프란츠 폰 쇤보른과 빈의 황실 부총리였던 형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의 지원을 받아,[8] 1720년 5월 22일 초석이 놓이고 북쪽 구획부터 건설이 시작되었다.[2] 그러나 크리스토프 프란츠 폰 후텐 주교(1724-1729 재위)는 궁전 건설에 관심이 없어 북쪽 구획만 완성된 채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다.[2]
1730년,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 주교(1729-1746 재위) 때 남쪽 구획 공사가 재개되었다. 1737년 발타자르 노이만이 설계한 주요 계단이 건설되었고, 1740년 정원 파사드, 1744년 12월에는 전체 외관이 완성되었다. 노이만은 도시 정면을, 힐데브란트는 정원 쪽을, 폰 벨슈는 측면 날개의 네 개 내부 안뜰을 담당했다.[2][8]
안젤름 프란츠 폰 잉겔하임 주교(1746-1749 재위) 때 건설이 다시 중단되었다가,[2] 그의 사후 카를 필리프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폴라트스 주교(1749-1754 재위)가 건설을 재개했고, 1753년 발타자르 노이만이 사망했다.[2]
아담 프리드리히 폰 자인스하임 주교(1755-1779 재위) 시기에는 여러 장식이 추가되었으며, 총 건설 비용은 150만 길더가 넘었는데, 이는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주당 임금(1길더)을 고려하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4]
1802년/1803년 세속화로 뷔르츠부르크 주교령은 폐지되었다. 이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트 3세의 8년간의 공백기(1806~1814 재위)를 거쳐,[2] 1814년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1년 레지던스는 일반에 공개되었다.[2]
1945년 3월 16일, 영국의 파괴적인 공습으로 레지덴츠는 거의 완전히 불탔으나, 1945년부터 1987년까지 재건되었다. 재건 비용은 약 2000만유로였다.[4]
2. 1. 18세기
요한 필립 프란츠 폰 쇤보른 주교(1719-1724 재위)는 18세기 초,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1701~1704년에 지어진 궁전(레지덴츠의 전신)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절대 군주로서 자신의 지위에 비해 궁전이 작다고 생각하여,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궁전과 같은 웅장한 건물을 원했다.[8] 즉위하던 해, 소송을 통해 60만 오스트리아-헝가리 굴덴을 얻었고, 이 자금을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과시할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다.그는 마인츠 대주교이자 마인츠 선제후인 삼촌 로타르 프란츠 폰 쇤보른과 빈의 황실 부총리였던 형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의 지원을 받았다.[8] 이들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예술가들을 섭외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카를은 벨베데레 궁전 건설 중에 힐데브란트를 만났다.[8] 1720년 5월 22일, 초석이 놓이고 북쪽 구획부터 건설이 시작되었다.[2]
하지만 요한 필립 프란츠의 후임인 크리스토프 프란츠 폰 후텐 주교(1724-1729 재위)는 궁전 건설에 관심이 없었고, 북쪽 구획만 완성하고 그의 사망과 함께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다.[2]

1730년,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 주교(1729-1746 재위) 때 남쪽 구획 공사가 재개되었다. 1732-1733년에 ''명예의 안뜰'' 정면이 완성되었고, 1735년부터 힐데브란트의 참여로 중앙 건물 작업이 진행되었다. 1737년에는 발타자르 노이만이 설계한 주요 계단이 건설되었다. 정원 파사드는 1740년에, 전체 외관은 1744년 12월에 완성되었다. 노이만은 도시 정면을, 힐데브란트는 정원 쪽을 주로 담당했고, 측면 날개의 네 개 내부 안뜰은 폰 벨슈의 아이디어였다.[2][8]
1742년에는 황제의 홀과 백색 홀 위에 아치형 천장이 완성되었고, 1743년에는 계단 위 아치가 완공되었다. 궁정 예배당 장식도 이때 이루어져 1743년에 축성되었다. 1740년부터 1745년까지 남쪽의 ''카이저짐머''(황실 아파트)와 거울 내각(''슈피겔카비네트'')은 페르디난트 훈트, 요한 볼프강 판 데어 아우베라, Antonio Giuseppe Bossi|안토니오 주세페 보시de, 요한 루돌프 비스에 의해 장식되었다. 보시는 1744-1745년에 백색 홀의 회반죽 작업도 했다.[2]
안젤름 프란츠 폰 잉겔하임 주교(1746-1749 재위) 때 건설이 다시 중단되었다.[2] 그의 사후 카를 필리프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폴라트스 주교(1749-1754 재위)가 건설을 재개했다. 같은 해 안토니오 보시는 정원 홀의 회반죽 작업을 완료하고, 이듬해 그림이 완성되었다. 1750년,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주교 관저로 와서 아들들과 함께 1750년대 초 황제의 홀과 계단 위 천장에 프레스코를 장식했다. 1753년, 발타자르 노이만이 사망했다.[2]
아담 프리드리히 폰 자인스하임 주교(1755-1779 재위) 때, Materno Bossi|마테르노 보시de와 루도비코 보시는 1769-1772년 사이 계단 위와 북쪽 ''카이저짐머''(황실 아파트)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객실에 회반죽 장식을 만들었다. 동시에 녹색 래커 룸과 신고전주의 ''퓌르스텐잘''(왕자 홀)이 완성되었다. 1776-1781년에는 ''잉겔하이머 룸''(잉겔하임 룸)이 마테르노 보시의 회반죽 작업을 포함하여 장식되었다.[2]
총 건설 비용은 150만 길더가 넘었는데,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주당 임금이 1길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4]
2. 2. 19세기와 20세기 초
1802년/1803년 세속화로 뷔르츠부르크 주교령은 폐지되었다. 그 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트 3세의 8년간의 공백기(1806~1814 재위)가 이어졌으며,[2] 이 기간 동안 그는 남쪽 건물, 소위 ''토스카나 룸''을 엠파이어 양식으로 장식했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6년과 1813년 사이에 세 번 뷔르츠부르크에 들렀을 때 레지던스에서 묵었다. 1806년 10월 2일 그는 이곳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선전 포고를 서명했다.[8] 1812년 그와 그의 아내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 루이즈를 위해 북쪽 황실 아파트의 침실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더블 침대와 침대 옆 탁자가 설치되었다.1814년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큰 레지던스 광장에서 내부 구역을 효과적으로 분리했던 ''명예의 뜰''을 가로지르는 단철 문은 1821년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오늘날에는 페르디난트 폰 밀러 (아들)가 제작한 ''프랑코니아 분수''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1894년 뷔르츠부르크 시와 프랑코니아 전체가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스 자체에서 1821년에 태어난 섭정 루이트폴트에게 바치는 헌사로 공개되었다.[2]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1845년 8월 코부르크 로젠아우 성으로 가는 길에 레지던스에 머물렀다. 1921년 레지던스는 일반에 공개되었다.[2]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재건
1814년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레지던스 광장에서 내부 구역을 분리했던 ''명예의 뜰''을 가로지르는 단철 문은 1821년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페르디난트 폰 밀러 (아들)가 제작한 ''프랑코니아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1894년 뷔르츠부르크 시와 프랑코니아 전체가 뷔르츠부르크 레지던스에서 1821년에 태어난 섭정 루이트폴트에게 바치는 헌사로 공개되었다.[2]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1845년 8월 코부르크 로젠아우 성으로 가는 길에 레지던스에 머물렀다. 1921년 레지던스는 일반에 공개되었다.[2]
1945년 3월 16일, 영국의 파괴적인 공습으로 레지덴츠는 거의 완전히 불탔으며, 현관, 정원 홀, 계단, 백색 홀, 황제의 방이 있는 중앙 건물만 화마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지붕은 파괴되었다. 다락방에서 시작된 불길은 나무 천장과 바닥을 뚫고 내려왔으며, 다른 곳에 보관되지 않은 모든 가구와 벽 패널이 불길에 휩싸였다.
시대적 방의 많은 가구와 벽 패널의 큰 부분은 제때 철거되어 파괴를 면했다. 노이만의 석조 아치형 천장은 타오르는 다락방의 붕괴를 견뎌냈다. 그러나 지붕이 사라지면서 습기로 인해 그 후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궁정 예배당에서는 온전한 아치형 천장에도 불구하고 뷔스의 천장 프레스코 대부분이 화재의 후유증으로 파괴되었으며, 힘들게 재건해야 했다.[4]

1945년부터 1987년까지 건물과 내부가 현재 상태로 재건되었다. 재건 비용은 약 2000만유로였다.[4]
위에 언급된 정원과 대표적인 방들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기념실은 1945년 3월 레지덴츠가 파괴된 것을 기리고 있다. 또한 1945년 6월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한 후 많은 예술 보물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미 육군의 "기념물 인물"인 존 데이비스 스킬턴 소령을 기리고 있다.[9]
3. 세계유산
1981년,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는 궁정 정원 및 레지덴츠 광장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자문 기구 평가에 따르면, "레지덴츠는 바로크 양식 궁전 중에서 가장 동질적이며 가장 특별하다... 야심찬 프로그램, 창의적인 정신의 독창성, 그리고 작업장의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독특한 예술적 실현을 나타낸다."라고 평가되었다.[5]
3. 1. 등록 기준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는 궁정 정원 및 레지덴츠 광장과 함께 1981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자문 기구 평가에 따르면, 목록 등재는 "매우 바람직한 조치...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제안은 긴 정당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레지덴츠는 바로크 양식 궁전 중에서 가장 동질적이며 가장 특별하다... 야심찬 프로그램, 창의적인 정신의 독창성, 그리고 작업장의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독특한 예술적 실현을 나타낸다."[5]1981년, 정원과 궁전 앞 광장을 포함한 형태로 '''뷔르츠부르크 주교 관저, 정원 및 광장'''으로 세계유산(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4. 건축
요한 필립 프란츠 폰 쇤보른 주교는 1719년 즉위 직후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궁전에 버금가는 웅장한 규모의 새로운 주교 궁전 건축을 시작했다.[8] 그는 마인츠 대주교이자 마인츠 선제후인 삼촌 로타르 프란츠 폰 쇤보른과 빈의 황실 부총리인 형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의 지원을 받았다.
1720년 5월 22일, 북쪽 구획부터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크리스토프 프란츠 폰 후텐 주교(1724–9)는 건설에 소극적이어서 그의 사망 시점에 북쪽 구획만 완성되었다.[2]
1730년,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 주교(1729–46) 치하에서 남쪽 구획 공사가 재개되었다. 1732–33년에 ''명예의 안뜰'' 정면이, 1735년부터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의 참여 하에 중앙 건물 공사가 진행되었다. 1737년에는 발타자르 노이만이 설계한 주요 계단이 건설되었으며, 1740년 정원 쪽 파사드가, 1744년 12월에는 전체 외관이 완성되었다.[2] 노이만은 도시 쪽 정면을, 힐데브란트는 정원 쪽 정면을 주로 담당했으며, 측면 날개의 네 개 내부 안뜰은 막시밀리안 폰 벨슈의 아이디어였다.[2][8]
1740년부터 1745년까지 페르디난트 훈트, 요한 볼프강 판 데어 아우베라, Antonio Giuseppe Bossi|안토니오 주세페 보시de, 요한 루돌프 비스가 남쪽 ''카이저짐머''(황실 아파트)와 거울 내각(''슈피겔카비네트'')을 장식했다. 보시는 1744–45년에 백색 홀의 회반죽 작업도 완성했다.[2]
안젤름 프란츠 폰 잉겔하임 주교(1746–49) 시절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카를 필리프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폴라트스 주교(1749–54)가 재개했다. 안토니오 보시는 정원 홀의 회반죽 작업을 완료하고, 이듬해 그림이 완성되었다. 1750년,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초빙되어 황제의 홀과 계단 위 천장에 프레스코를 그렸다. 1753년, 발타자르 노이만이 사망했다.[2]
아담 프리드리히 폰 자인스하임 주교(1755–79) 치하에서 Materno Bossi|마테르노 보시de와 루도비코 보시는 1769년에서 1772년 사이에 계단 위와 북쪽 ''카이저짐머''(황실 아파트)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객실에 회반죽 장식을 추가했다. 동시에 녹색 래커 룸과 신고전주의 ''퓌르스텐잘''(왕자 홀)이 완성되었다. 1776년부터 1781년까지는 ''잉겔하이머 룸''(잉겔하임 룸)이 마테르노 보시의 회반죽 작업을 포함하여 장식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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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건축 계획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는 92 × 167미터의 기저판 위에 건설되었다. 주요 건물은 두 개의 측면 날개, 북쪽과 남쪽 블록을 갖춘 중앙 날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날개에는 두 개의 내부 안뜰이 있다. 도시 쪽에서는 측면 날개가 주요 건물에서 55m 뻗어 나와 있으며, 부분적으로 ''명예의 안뜰''(Cour d'honneur)을 둘러싸고 있다. 망사르드 지붕 아래에는 꽃병과 트로피로 장식된 처마 장식이 있다. ''명예의 안뜰''의 주요 입구 주변 파사드는 특히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아래층 메자닌 층은 없지만 "Weisser Saal"(백색 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세 개의 입구 위에 큰 발코니가 있다. 입구 위에는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의 큰 문장이 있다. ''호프키르헤''(궁정 예배당)는 남쪽 날개의 서쪽 부분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으며 외부에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다.[8]원래 ''명예의 안뜰''은 철제 울타리로 제한되었다. 요한 게오르크 에그가 만든 이 철 세공의 걸작은 1821년에 철거되어 경매에 부쳐졌는데,[8] 바이에른 왕국 왕가의 한 구성원이 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레지덴츠 앞의 야외 광장은 약 200m × 100m 크기이며 주로 주차 공간으로 사용된다.[8] 1894년에 :de:Frankoniabrunnen 분수가 광장에 설치되었다.
1719년에 뷔르츠부르크 주교로 선출된 Johann Philipp Franz von Schönborn|요한 필리프 프란츠 폰 쇤보른영어이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자신의 공식적인 자리를 옮기기 위해 건축되었다.[11]



4. 2. 내부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는 4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과 2층은 층고가 높고 각각 메자닌 층이 있다. 이는 외관을 돋보이게 하고 하인들의 숙소, 주방, 행정 사무실을 위한 공간을 제공했다.[8] 레지덴스에는 거의 400개의 방이 있다.총 건설 비용은 150만 길더가 넘었는데, 당시 일용직 노동자는 주당 1길더를 벌었다.[4]
내부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시설들이 있다.
- 계단: 발타자르 노이만이 설계한 웅장한 계단으로,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세계 최대 프레스코화가 있다.
- 백색 홀: 로코코 양식의 알현실로, 안토니오 보시의 석고 장식이 돋보인다.
- 황제 홀: 뷔르츠부르크 교구의 역사를 담은 티에폴로의 프레스코화와 보시의 조각상으로 장식된 화려한 방이다.
- 남부 및 북부 황실 아파트: 화려함의 정도가 점차 강해지는 일련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부 아파트의 거울 캐비닛과 북부 아파트의 녹색 래커 룸이 대표적이다.
- 궁정 예배당: 독일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곡선 벽과 세 개의 겹쳐진 타원형 돔 천장이 특징이다.
이 홀들 사이의 모든 문을 열면 정원 쪽으로 총 150미터에 이르는 앙필라드가 만들어진다. 이 방들은 접견실이자 중요한 손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8]
4. 2. 1. 계단
바로크 건축 양식에서 계단은 공식적인 접견실의 일부로서 중요성을 얻었다. 뷔르츠부르크 궁전의 계단은 기둥 없이 18 x 32미터의 아치형 공간을 가로지른다. 지지대 없이 최대 높이 23미터의 트러프 볼트 아래에 있다.[8]계단의 가장 낮은 부분은 접견실에서 멀리 떨어져 텅 빈 벽을 향하고, 그 다음 두 개의 계단으로 나뉘어 다시 돌아온다. 따라서 윗층에 있는 주최자는 처음에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방문객들을 먼저 볼 수 있었다. 손님들이 돌아서서 다가오면서, 그들 위 거대한 천장 프레스코가 점점 더 드러났다.[8]

이 프레스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8]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1750년부터 1753년까지 제작했으며,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네 대륙의 그림을 보여준다. 각 대륙은 전형적인 풍경과 동물 (또는 화가가 상상한 동물)과 여성적인 우화로 표현된다.
- 유럽은 홀을 들고 황소를 상징하며 대포를 가지고 노는 소년이 있다.
- 아메리카는 깃털을 가진 원주민이 있고, 포로를 잡아먹고, 악어가 있다.
- 아시아에는 호랑이와 코끼리가 있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배경에 보인다.
- 아프리카에는 낙타와 터번을 쓴 마법사들의 캐러밴이 있다.
티에폴로는 아들 지안도메니코 티에폴로와 석고 조각가 안토니오 보시의 도움을 받았다.[6] 또한 메르쿠리우스가 올림푸스에서 다가오고, 아폴론이 태양마차를 몰고 별들의 화신에 둘러싸인 프린스-주교의 그림도 있다. 이 프레스코는 또한 티에폴로 자신 (남서쪽 구석)과 노이만 (남쪽 전면 중앙)이 대포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8]
티에폴로는 대형 프레스코를 그리기 위해 준비하면서 작품의 축소된 버전을 스케치했다. 이 스케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7]
궁정 건축가 발타자르 노이만은 이러한 거대한 볼트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와 싸워야 했다. 색상이 있는 볼트와 달리, 계단과 벽은 장식이 거의 없다. 볼트는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계단의 나머지는 이미 그 다음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노이만은 원래 백색 홀 반대편에 두 번째 계단을 추가하고 싶었지만, 이는 관련된 비용 때문에 프린스-주교의 고문들에 의해 거부되었다.[8]
계단은 독일 마르크 지폐의 마지막 버전인 50 독일 마르크 지폐 뒷면에 묘사되었으며, 앞면에는 노이만이 그려져 있었다.
4. 2. 2. 백색 홀
'''바이서 잘'''(Weisser Saal) 또는 백색 홀은 로코코 양식의 알현실로, 안토니오 보시의 석고 장식이 특징이다.[8] 밝은 회색 배경의 흰색 석고 작품은 다량의 로카유와 군사적 목적의 실제 이미지가 혼합되어 구성되어 있다.금색과 색상이 없어 계단의 화려함과 그 너머의 ''카이저잘''(Kaisersaal) 사이에서 눈을 쉬게 해준다. 다섯 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방을 밝히는 데 사용되었다.[8] 안토니오 보시는 1744–45년에 백색 홀의 회반죽 작업을 만들었다.[2]
4. 2. 3. 황제 홀

황제 홀은 백색 홀에서 동쪽으로 열리며, 정면 정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여정과 비엔나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황제 지망생들을 포함한 귀빈들을 접대하는 데 사용되었다. 1749~51년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들어졌다.[8]
벽은 붉은색, 흰색, 노란색 음영의 스투코 대리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돔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금색 스투코 장식과 티에폴로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뷔르츠부르크 교구의 이상화된 역사를 보여준다. "1156년 뷔르츠부르크 주교에 의한 황제 바르바롯사와 부르고뉴의 베아트릭스의 결혼"이라는 그림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부르고뉴의 베아트릭스 백작 부인의 결혼을 묘사하며, 게롤드가 축성했다. 반대편 그림은 프리드리히 2세가 뷔르츠부르크 주교를 프랑코니아 공작으로 임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돔 꼭대기에는 "신부의 여행"이라는 아폴로가 태양 전차를 타고 비너스, 케레스 및 바쿠스의 호위를 받으며 뷔르츠부르크 주교와 함께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향해 신부 베아트릭스를 이끄는 그림이 있다.[8]
조반니의 아들 도메니코는 수프라포르트를 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코르푸스 유리스 키빌리스|로마법 대전la을 발표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황제가 갈루스의 처형을 명령하고, 암브로시우스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교회 출입을 거부한다. 보시의 조각상들은 포세이돈과 유노뿐만 아니라 플로라와 아폴로를 보여준다.[8]
4. 2. 4. 남부 및 북부 황실 아파트
1730년에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 주교(1729–46) 치하에서 남쪽 구획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1740년부터 1745년까지 남쪽의 ''카이저짐머''(황실 아파트)와 거울 내각(''슈피겔카비네트'')은 장식 조각가 페르디난트 훈트, 요한 볼프강 판 데어 아우베라, Antonio Giuseppe Bossi 및 요한 루돌프 비스에 의해 장식되었다.[2] 아담 프리드리히 폰 자인스하임 주교(1755–79) 치하에서, Materno Bossi와 루도비코 보시는 1769년에서 1772년 사이에 북쪽 ''카이저짐머''(황실 아파트)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객실에 회반죽 장식을 만들었다.[2]두 아파트 모두 장식의 정도가 점차 강해지는 일련의 방들로 인해 강한 인상을 준다. 남부 아파트에서 가장 화려한 방은 ''Spiegelsaal'' 또는 거울 캐비닛이다. 그 벽은 그림이나 금박에 새겨진 그림으로 장식된 유리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어두운 광택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모든 그림과 드로잉은 특히 중국의 동양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남부 부분에는 ''Toskanasaal''도 포함되어 있다. 북부 아파트의 하이라이트는 녹색 래커 룸이다. 다층 벽 덮개는 그림과 황금 장식으로 장식된 금속 녹색으로 구성되어 있다.[8]
4. 2. 5. 궁정 예배당
궁정 예배당(''Hofkirche'')은 독일의 종교적인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내부 디자인은 곡선 벽과 세 개의 겹쳐진 타원형 돔 천장이 특징이다.[8]궁정 예배당은 레지덴츠의 두 주요 층을 통해 위로 뻗어 있다. 지지 기둥은 마노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두 개의 측면 제단과 여섯 개의 조각상은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제노바에서 조각되었다. 측면 제단은 힐데브란트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했으며, 1752년에 티에폴로가 그림을 그렸다(성모 승천 (남쪽), 천국의 전쟁 (북쪽)). 주 제단은 안토니오 보시가 대리석처럼 보이도록 만든 회반죽으로 만들어졌다. 제단 위에는 중앙에 원죄 없는 잉태 조각상이 있고 양쪽에 기도실이 있는 여성석이 있다. 보시는 또한 천장의 다채로운 회반죽 작업(1735)을 담당했으며, 화가 횔글러와 탈호퍼와 함께 돔의 프레스코(1735–6)를 제작했다. 내용은 세 명의 프랑켄 사도 킬리안, 토트난, 콜로낫의 순교(성가대 위), 성모 마리아의 대관 (중앙) 및 천국의 전쟁(오르간 위)이다.[8] --
4. 3. 궁정 정원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는 뷔르츠부르크가 요새화된 도시였을 때 건설되었기 때문에, 정원은 요새 내에 계획되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새화된 도시 성벽의 두 개의 보루를 포함하고,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특별한 풍경을 만들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지면이 높아져 성벽 수준에 도달한다. 레지덴츠 자체 근처의 ''호프가르텐''(궁정 정원)은 매우 정형화된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더 멀리 가면 작은 숲과 초원이 있는 영국식 정원으로 스타일이 바뀐다. 정원의 바로크 양식 디자인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발타자르 노이만, 프랑수아 드 퀴빌리에가 제작했으며, 주로 1759년부터 1770년 사이에 조성되었다.[8]
요한 페터 알렉산더 바그너는 putti, 꽃병, 항아리 및 두 개의 기념비적인 조각상 그룹인 유로파의 강탈과 프로세르피나의 납치를 추가했는데, 이 조각상들은 오랑제리와 레지덴츠의 남쪽 파빌리온 사이의 중앙 축에 위치해 있다. 아담 프리드리히 폰 자인스하임 대주교는 이 조각상들을 공원에 추가했으며, 바이트스호흐하임의 공원도 비슷한 방식으로 장식했다.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이 요한 게오르크 옉에게 의뢰한 세 개의 기념비적인 문이 궁정 정원으로 이어진다.[8]
5. 기타
정원과 대표적인 방들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기념실은 1945년 3월 레지덴츠가 파괴된 것을 기리고 있다. 또한 1945년 6월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한 후 많은 예술 보물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미 육군의 기념물 인물인 존 데이비스 스킬턴 소령을 기리고 있다.[9]
레지덴츠의 나머지 대부분은 마르틴 폰 바그너 박물관(1963년에 이곳으로 이전)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다.
2011년 영화 ''삼총사''의 일부 장면이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에서 촬영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Würzburg Residence with the Court Gardens and Residence Square
http://whc.unesco.or[...]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21-05-07
[2]
웹사이트
Residenz Würzburg Zeittafel (German)
http://www.residenz-[...]
Bavarian Administration of State-Owned Palaces, Gardens and Lakes
2016-07-08
[3]
웹사이트
Wie kam Tiepolo nach Würzburg ?
http://www.zum.de/Fa[...]
[4]
웹사이트
Residenz Würzburg Baugeschichte (German)
http://www.residenz-[...]
Bavarian Administration of State-Owned Palaces, Gardens and Lakes
2016-07-08
[5]
웹사이트
Würzburg Residence with the Court Gardens and Residence Square
https://whc.unesco.o[...]
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
2010-05-30
[6]
서적
Giambattista Tiepolo, 1696–1770
https://books.google[...]
[7]
웹사이트
www.metmuseum.org
https://www.metmuseu[...]
2018-10-09
[8]
서적
Franken – Kunst, Geschichte und Landschaft (German)
Dumont Verlag
[9]
웹사이트
Residenz Würzburg Gedenkraum (German)
http://www.residenz-[...]
Bavarian Administration of State-Owned Palaces, Gardens and Lakes
2016-07-08
[10]
서적
いつかは行きたいヨーロッパの世界でいちばん美しいお城
大和書房
[11]
간행물
Tiepolo's Empire
Bayerische Schlösserverwalt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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