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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미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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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미클라스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으로,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기독교 사회당 소속으로, 제국 의회 의원과 국민의회 의장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권위주의적 정부를 거치며,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될 때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정치에 복귀하지 않고 195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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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미클라스
기본 정보
빌헬름 미클라스
빌헬름 미클라스
이름빌헬름 미클라스
국적오스트리아
출생1872년 10월 15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크렘스안데어도나우
사망1956년 3월 20일
사망지오스트리아,
배우자레오폴디네 하이딩거 (1900년 결혼)
자녀12명
경력
직위오스트리아의 대통령
임기 시작1928년 12월 10일
임기 종료1938년 3월 13일
총리이그나츠 자이펠
에른스트 슈트레에루비츠
요한 쇼버
카를 바우고인
오토 엔더
카를 부레슈
엥겔베르트 돌푸스
쿠르트 슈슈니크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이전미하엘 하이니슈
이후카를 레너 (1945년)
직위 1국민의회 의장
임기 시작 11923년 11월 20일
임기 종료 11928년 12월 6일
이전 1리하르트 바이스키르히너
이후 1알프레트 귀르틀러
소속 정당
정당조국전선 (1934년–1938년)
기독교 사회당 (1907년–1934년)
학력
모교빈 대학교

2. 젊은 시절

빌헬름 미클라스는 1872년 니더외스터라이히주 크렘스안데어도나우에서 우체국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이텐슈테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빈 대학교에서 역사와 지리학을 공부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대학 재학 중 기독교사회당 활동에 참여했다.

1905년부터 1922년까지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 호른에 위치한 연방 중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1907년에는 기독교사회당 소속으로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3. 정치 경력

1907년 기독 사회당 소속으로 제국 의회('Reichsrat')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1년 재선되었다. 이후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임시 의회와 1919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헌법 제정 의회에서 의원직을 맡았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독일 민족주의에 반대하며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거부했고, 적백적 오스트리아 국기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9년 카를 레너 총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는 국민의회('Nationalrat') 의장을 역임했다. 1928년 12월 10일, 연방 의회는 그를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 직위는 1938년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될 때까지 유지되었다.[3]

미클라스 대통령(오른쪽)과 돌푸스 총리(가운데), 1932년


1933년 3월 4일, 오스트리아 연방 철도 직원 파업 문제로 국민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져 의장 카를 레너와 부의장 루돌프 라멕, 제프 슈트라프너가 사임했을 때, 미클라스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의회는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미클라스의 당 동료였던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에게 의회의 "자진 해산"을 선언할 빌미를 제공했다. 정부는 경찰력과 에밀 페이가 이끄는 준군사 조직 호국단(Heimwehr) 병력을 동원하여 의회 재개를 막았다. 이는 돌푸스가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헌법 제48조를 활용한 전례를 따라 "비상 칙령"으로 통치할 수 있게 한 자발적인 쿠데타였다.

미클라스는 이러한 상황 전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1933년 5월 20일 단일 정당 체제를 목표로 조국 전선을 창설하고, 오스트리아 공산당, 나치당 오스트리아 지부, 사회민주주의 계열 준군사 조직인 공화주의 보호 연맹을 불법화했다. 또한 아르바이터-차이퉁(Arbeiter-Zeitung, 노동자 신문)을 금지하고 노동 운동을 탄압했는데, 이는 1934년 2월 12일 오스트리아 내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내전 결과 오스트리아 사회 민주당마저 불법화되었고, 오스트로파시즘 이념에 기반한 오스트리아 연방 국가(''Ständestaat'')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조치 속에서도 대통령직은 유지되었으나, 미클라스는 개인 기록에서 돌푸스와 그의 후임자인 쿠르트 슈슈니크의 헌법 위반을 비판하면서도 공개적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1934년 7월 쿠데타 당시, 나치 쿠데타 세력은 카린티아의 펠덴으로 향하던 미클라스 대통령을 납치하려 시도했다. 그들은 잠시 미클라스의 차량을 추격했으나, 비엔나에서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스트리아 경찰에 의해 저지되고 체포되었다. 미클라스는 쿠데타 실패 후 돌푸스 총리 암살범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에 대한 감형을 거부하여 오스트리아 나치 세력의 반감을 샀다. 나치 독일의 압력이 거세지자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헝가리 왕국과 관계를 강화했다. 1936년 미클라스는 뵈르터제에서 헝가리 섭정 미클로시 호르티를 접대하기도 했다.

1938년 2월 12일,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베르크호프로 소환되어 독일의 요구 사항을 전달받자, 미클라스는 투옥된 나치 당원들에 대한 사면을 제안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가 경찰력을 나치 지도자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넘기는 것은 처음에 거부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국경 지대에 국방군 작전을 명령하며 압박하자, 미클라스는 결국 굴복하여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내무 장관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3월 9일, 슈슈니크 총리는 4일 안에 오스트리아 독립에 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헤르만 괴링은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슈슈니크를 대신하여 총리가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나치 지지자들이 총리 관저를 점거하자 슈슈니크는 "힘에 굴복한다"며 사임을 발표했다. 미클라스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로 임명하는 것을 다시 거부했지만, 비나치 인사를 후보로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불간섭 약속을 받은 후, 다음 날 새벽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침공(''오토 작전'')을 명령했다. 결국 미클라스는 3월 11일 자정 무렵 항복하고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베를린의 나치 당국과 급히 연락을 취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다음 날 새벽 독일군이 국경을 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시민들에게 환영받았다.

미클라스는 나치의 요구를 초기에 거부했기 때문에 안슐루스 기간 동안 가택 연금되었으나, 미래의 무장 친위대 대령이 되는 오토 스코르체니에 의해 신변을 보호받았다. 3월 13일,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오스트리아의 독일 제국과의 재통일을 위한 법률"을 공포하면서 오스트리아 총리직과 대통령직은 모두 소멸되었다. 슈슈니크 전 총리는 투옥되었지만, 미클라스는 연금을 보장받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4. 오스트리아 대통령

1923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1928년 12월 10일, 연방 의회 대표들은 그를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 직책은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될 때까지 유지되었다.[3] 1930년에는 오스트리아 우표 도안에 등장하기도 했다.

1933년 3월 4일, 연방 철도 직원들의 파업을 놓고 ''국가 평의회''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후, 의장 카를 레너와 부의장 루돌프 라멕, 제프 슈트라프너가 사임했을 때 미클라스는 개입하지 않았다. 의회는 더 이상 행동과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미클라스의 동료인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에게 의회의 "자진 해산"을 선언할 구실을 주었다. 정부는 경찰력과 에밀 페이가 이끄는 준군사 조직 ''자경단'' 병력의 대규모 주둔으로 회의 재개를 방해했다. 이는 돌푸스가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설정한 48조의 예를 따라 "비상 칙령"으로 통치할 수 있게 한 자발적인 쿠데타였다.

정부는 예비 단일 정당으로 조국 전선을 설립한 5월 20일, 공산당, 나치당의 오스트리아 지부, 사회 민주 ''공화주의 보호 연맹'' 준군사 조직을 금지했고, 대통령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르바이터-차이퉁''(노동자 신문)의 금지 및 오스트리아 노동 운동에 대한 조치는 1934년 2월 12일 오스트리아 내전의 발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사회 민주당 또한 금지되었고,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오스트리아 연방 국가(''슈텐데슈타트'')의 시행으로 마침내 실현되었다. 권위주의적 조치는 대통령의 직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클라스는 자신의 개인 기록에서 돌푸스와 그의 후임 쿠르트 슈슈니크의 헌법 위반을 분명히 비난했지만, 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1934년 7월 쿠데타 동안 나치 쿠데타군은 카린티아의 펠덴으로 가는 길에 연방 대통령을 체포하여 인질로 삼으려 했다. 나치들은 한동안 미클라스 대통령의 차량을 쫓았지만, 비엔나에서 쿠데타가 실패한 후 오스트리아 경찰에 의해 저지되고 체포되었다.

미클라스는 1934년 실패한 7월 쿠데타 이후 돌푸스의 암살자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감형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나치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압력이 고조되면서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국가는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헝가리 왕국에 접근했다. 1936년 미클라스는 뵈르터제에서 섭정 미클로시 호르티를 접대했다.

1938년 2월 12일 슈슈니크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베르크호프로 소환되어 독일의 요구를 받은 후, 미클라스는 투옥된 나치 당원들에게 사면을 제안했지만, 처음에 국가 경찰력을 그들의 지도자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국경을 따라 국방군 작전을 명령했을 때,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내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1938년 3월 9일, 슈슈니크는 4일 이내에 오스트리아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3월 11일 헤르만 괴링은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슈슈니크를 총리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군은 다음 날 오스트리아를 점령할 것이었다. 나치 폭도들이 총리실을 침공하는 동안 슈슈니크는 사임했다("힘에 굴복"). 미클라스는 다시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비나치 후보를 내세울 수는 없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솔리니의 확인을 받은 후, 다음 날 새벽에 독일군이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오토 작전''). 미클라스는 자정 무렵 항복하여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베를린의 나치 당국과 정신없이 전화 통화를 했지만, 너무 늦었다. 다음 날 새벽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올 때, 오스트리아군은 저항하지 않았고, 대부분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미클라스는 처음에 거부했기 때문에 가택 연금되었지만, ''안슐루스'' 기간 동안 미래의 무장 친위대 대령 오토 스코르체니에 의해 학대를 받지 않도록 보호받았다. 3월 13일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오스트리아의 독일 제국과의 재통일을 위한 법률"을 공포하면서 오스트리아 총리와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직무는 모두 종료되었다. 슈슈니크가 투옥되는 동안, 미클라스는 정치권을 떠나 은퇴하여, 방해받지 않고 연금을 받았다.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클라스는 카를 레너를 지지하며 대통령 재출마를 거부했다. 그는 1956년 3월 20일 에서 사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Wilhelm Miklas, Biografie https://www.parlamen[...]
[2] 웹사이트 Präsidentinnen und Präsidenten seit 1920 https://www.parlamen[...]
[3] 서적 The Struggle for a Democratic Austria: Bruno Kreisky on Peace and Social Justice Berghahn Book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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