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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노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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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사노궤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목라근자와 함께 진구 황후 섭정 49년에 백제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사사노궤의 국적은 명확하지 않으며,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와 함께 등장한다는 점과 이름의 '궤'가 일본인의 어미를 음차한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백제인 또는 일본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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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노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사사노궤
원어 이름沙沙奴跪
작위백제의 장군
군주백제 근초고왕(추정)
국적백제(추정)
성별남성
생애 정보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매장지미상
능묘미상
가문 정보
왕조백제(추정)
가문사씨(추정)
군사 정보
주군백제 근초고왕(추정)
지휘왜군
참전신라 정벌

2. 사료

사사노궤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일본서기진구 황후 섭정 49년(서기 369년 추정[4]) 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기록에는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와 함께 신라가야 지역 정벌에 참여한 인물로 등장한다.[4][2]

2. 1. 일본서기

일본서기 진구 황후 섭정 49년(서기 369년 추정[4]) 기록에 따르면, 진구 황후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삼아 파견했다. 이들은 탁순국에 도착했으나 병력이 부족하다는 의견에 따라 증원을 요청했다.[4]

이에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와 함께 '''사사노궤'''(沙沙奴跪)가 정예 병력을 이끌고 사백개로(沙白蓋盧)와 함께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일본서기는 목라근자를 백제 장군으로 명시했지만, 사사노궤의 성(姓)은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4]

합류한 군대는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해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개 나라를 평정했다고 전한다.[4][2] 이후 군대를 서쪽으로 옮겨 고해진(古奚津)에서 남쪽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4]

이때 백제근초고왕(肖古)과 왕자 근구수왕(貴須)도 군대를 이끌고 와 합류했으며,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의 4개 읍(邑)이 스스로 항복했다.[4] 이후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 목라근자 등은 의류촌(意流村, 지금의 주류수기)에 모여 서로 예를 표했다.[4] 일본서기는 백제왕이 천웅장언(일본 사신)과 함께 산에 올라 영원히 일본의 서쪽 번국(西蕃)으로서 조공할 것을 맹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

3. 국적

사사노궤의 국적은 명확하지 않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장군 목라근자와 함께 등장하지만 가바네(姓)가 전하지 않아[2] 국적에 대한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주요 견해로는 목라근자와의 관계 및 백제의 유력 가문인 사씨(沙氏)와의 연관성을 들어 백제인으로 보는 설과,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궤'(跪)가 당시 백제 기록에서 일본인 이름 표기에 사용된 용례[5]를 근거로 일본인으로 보는 설이 있다. 각 주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3. 1. 백제인 설

사사노궤의 국적은 명확하지 않다. 일본서기에는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함께 등장하는데, 가바네(姓)가 전하지 않으나 목라근자백제의 장군이라 전한다. 이를 근거로 목라근자와 마찬가지로 사사노궤를 백제인으로 보기도 하며, 특히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씨(沙氏)로 해석하기도 한다.

진구 황후 49년의 기록에 따르면, 진구 황후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아라타와케 및 시카와케를 장군으로 삼아 바다를 건너 탁순국에 도착하여 신라를 습격하려 했다. 이때 현지에서 병력 증강을 권고받아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명하여 사백, 개로 등을 합류시켜 신라를 격파하였다. 이후 비자벌, 남가라, 탁순, 안라, 다라, 가라의 7개국을 평정한 후 서쪽으로 나아가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네 읍을 정복했다고 한다[2].

3. 2. 일본인 설

이름의 끝 글자인 '궤(跪)'가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 백제의 사서에서 일본인의 이름 끝 글자인 '코'(コ)를 음차하기 위해 사용된 글자라는 점을 근거로 사사노궤를 일본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5] 예를 들어, 백제기에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葛城襲津彦)를 '사지비궤'(沙至比跪), 치쿠마 나가히코(千熊長彦)를 '직마나나가비궤'(職麻那那加比跪)로 표기한 기록이 있다. 또한 백제신찬에는 아레나코(阿禮奴跪), 백제본기에는 츠모리노 무라지노 키마노코(津守連己麻奴跪) 등의 인명 표기에도 '궤'(跪)가 사용되었다.[5] 이는 백제에서 '궤' 자가 주로 일본 인명을 표기할 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5]

4. 평가 및 의의

백제의 장군으로, 일본서기진구 황후 49년 기록에 그 활동이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진구 황후신라를 공격할 때 목라근자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고 전한다.[2] 그는 목라근자, 사백, 개로 등과 협력하여 신라군을 격파하고, 비자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개국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다.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하여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네 읍을 정벌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2] 일본서기 기록에 기반하지만, 사사노궤의 구체적인 군사 활동과 당시 백제, , 가야, 신라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

참조

[1] 서적 日本古語大辞典 刀江書院 1929
[2] 서적 日本書紀通釋 飯田永夫 1902
[3] 서적 日本書紀通釋 飯田永夫 1902
[4] 웹인용 일본서기 -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서 7국을 평정함 http://contents.nahf[...]
[5] 서적 일본서기한국관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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