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본기
1. 개요
《백제본기》는 백제 멸망 후 일본에서 편찬된 백제 관련 역사서로, 백제와 일본의 관계, 주변국과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초기에는 백제 본국에서 원사료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의 구다라노코니키시 씨 가문의 기록을 바탕으로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개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본기》는 왜왕을 '천황'으로 표기하고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기년 표기가 점차 구체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책은 게이타이 천황의 죽음과 관련된 '신해의 변', 고구려 안원왕 사후 왕위 계승 분쟁, 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 등, 백제뿐 아니라 주변국들의 주요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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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책 -
서기 (역사서)
서기는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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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기
《백제기》는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의 역사 기록으로, 백제와 왜의 교류 및 목씨 가문의 활동을 중심으로 백제의 역사를 서술하며, 가야 왕족의 백제 망명과 백제 내부 사정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
한국의 소실된 역사책 -
화랑세기
《화랑세기》는 남당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신라 화랑 제도 관련 한문 필사본으로, 풍월주 32명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진위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 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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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실록
고려실록은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들을 통칭하며, 고려 초기에 사관을 설치하여 사서 편찬을 담당했고, 현종 대에 칠대실록이 처음 편찬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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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역사, 신화, 설화, 불교 관련 기록 등을 담고 있으며,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단군 신화, 향가, 불교 설화 등이 기록되어 국어 국문학 및 불교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고려 후기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하려는 일연의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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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 김부식이 1145년에 완성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 삼국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 중심적인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2. 성립 시기와 주체
학자들은 《백제본기》를 편찬하는데 원사료가 된 동명의 백제 사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원사료는 일단 일본이 아닌 백제 본국에서 편찬되었다. 《니혼쇼키》 편찬 당시 유력 씨족 가문의 가전적인 기록이 제출되었는데 이것을 본기(本記)라 부른 것으로, 《백제본기》는 일본 조정 내에서 벼슬하던 구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 집안의 집안 전승 기록이다.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善光)을 시조로 하는 구다라노코니키시 일족은 본국 백제의 멸망이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른 뒤 구다라노코니키시라는 성씨와 함께 일본의 관료체제에 편입되었으며, 그들에 의해 《백제본기》의 개변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백제본기》의 내용이 위덕왕 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덕왕의 즉위 시기를 전후해 《백제본기》의 원사료가 성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3. 용어 사용
《백제본기》는 백제의 인명, 관직명, 일본 관련 용어, 기년(紀年) 표기 등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3.1. 인명 및 관직명
《삼국사기》 등의 사료에서 백제의 관위와 인명을 실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좌평, 달솔, 은솔, 한솔 등 고위 관료에 그치고 있으며, 나솔 이하 관료(특히 '덕(德)'이 들어가는 관위를 가진)의 인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백제본기》를 인용한 《니혼쇼키》에는 장덕 구귀(久貴), 고덕 마차문(馬次文), 시덕 작간나(灼干那), 계덕 기마차(己麻次), 대덕 진타(進陀) 등과 같이 '덕'이 들어가는 관위를 가진 인명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3.2. 일본과 관련된 용어
《백제본기》에서는 왜왕을 '천황'으로 적고 있으며, '왜(倭)'나 '대왜(大倭)'라는 용어 대신 '일본'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러한 용어는 《니혼쇼키》 편찬자나 백제삼서를 제출한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본기》는 왜인의 이름을 표기할 때 훈독과 음독 표기를 혼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처음 등장하는 인명은 음독으로, 그 이후에는 훈독으로 표기한다. 이는 일본식 인명 표기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편 일본 측에서도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한 인명도 《백제본기》에는 다수 포함되어 있다.
3.3. 기년 표기
《백제본기》의 기년 표기는 《백제기》나 《백제신찬》보다도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초반에는 간지년과 월명으로 기년을 표기하거나 월명으로 표기하다가 중반부에 월명 뒤에 일의 간지를 표기했으며, 그 뒤로 월명과 일뿐 아니라 그 일의 간지까지 밝히는 등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구체적으로 기년 표기가 세분화되고 자세해진다.
4. 역사적 사실의 반영에 대한 평가
《백제본기》는 백제를 중심으로 한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고구려나 왜국의 내정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는 백제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1. 왜국 왕의 죽음과 백제의 가야 진출
《일본서기》는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시기를 《백제본기》에 근거하여 53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백제본기》가 일본 역사의 기년 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게이타이 천황은 황태자 마가리노오에(勾大兄) 황자(훗날의 안칸 천황)에게 양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황태자가 즉위한 날과 게이타이 천황이 사망한 날이 맞아 떨어진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정변으로 게이타이 천황 일가가 몰살되었을 가능성('신해의 변')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4.2. 고구려의 왕위 쟁탈전
《백제본기》는 545년 고구려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큰 혼란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12월 20일(갑오), 고구려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궐 문에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은 패배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들을 잡아 죽였다. 12월 24일(무술)에는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이 사망하였다.
같은 해 고구려에서 벌어진 전투로 사망한 사람은 2천여 명에 달했다. 고구려 왕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실 부인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中夫人)이 세자를 낳았으며 그 외척은 추군이었다. 소부인(小夫人) 또한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척은 세군이었다. 왕이 병이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은 각기 자신들이 지지하는 부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세군 측 2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곡향강상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안원왕으로 추정된다. 안원왕의 사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와 중국의 《양서》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은 그의 죽음이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백제본기》의 기록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고구려에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은 고구려에 잠입한 백제 첩자들이 수집하여 보고한 정보로 추정된다.
4.3. 성왕의 죽음
성왕(聖王)이 신라를 기습하려다 신라의 복병을 만나 피살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왕이 거느린 병력이 '보기 50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의문을 자아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은 50기를 이끌고 신라를 기습하러 간 것이 아니라, 전선에 나가 있던 아들 부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餘昌謀伐新羅, 耆老諌曰 "天未與, 懼禍及." 餘昌曰 "老矣何怯也. 我事大國, 有何懼也?" 遂入新羅國, 築久陀牟羅塞. 其父明王憂慮, 餘昌長苦行陣久廢眠食, 父慈多闕, 子孝希成. 乃自■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斷道擊破. 是時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奴也. 明王名主也. 今使賤奴殺名主, 冀傅後世莫忘於口." 已而苦都乃獲明王, 再拜曰 "請斬王首." 明王對曰 "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 "我國法違背所盟, 雖曰國王當受奴手."【一本云 『明王乘踞胡床, 解授佩刀於谷知令斬.』】明王仰天大憩涕泣, 許諾曰 "寡人每念, 常痛入骨髓. 願計不可苟活." 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殺, 堀坎而埋.【一本云『新羅留理明王頭骨, 而以禮送餘骨於百濟. 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 名此廳曰都堂.』】일본어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정황상의 모순을 해결해준다. 일본 중심적인 윤색을 담고 있는 《니혼쇼키》의 기록이 모두 사실은 아니지만, 백제나 가야의 개별적인 역사나 단편적인 정보에 관한 한 《니혼쇼키》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