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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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구수왕은 백제의 제14대 왕으로, 375년 11월에 즉위하여 384년 4월에 사망했다. 그는 즉위 전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 재위 기간에는 고구려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며 중국 및 왜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379년에는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흙비, 가뭄 등 기상 이변으로 백성을 구휼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침류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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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 | |
---|---|
기본 정보 | |
이름 | 근구수 (近仇首) |
칭호 | 어라하 |
로마자 표기 | Geungusu |
한글 표기 | 근구수왕 |
한자 표기 | 近仇首王 |
출생 이름 | 부여수 (扶餘須) |
다른 이름 | 부여구수 (仇首) 부여귀수 (貴須) 부여근귀수 (近貴首) 부여귀류 (貴流) 부여구소 (久素) |
재위 기간 | 375년 11월 ~ 384년 4월 |
즉위 | 375년 11월 |
사망 | 384년 4월 |
출생지 | 위례성 |
사망지 | 위례성 |
매장지 (추정) | 석촌동 3호분 |
배우자 | 아이부인 (阿尒夫人) |
자녀 | 부여침류 (扶餘枕流) 부여진사 (扶餘辰斯) |
아버지 | 근초고왕 (近肖古王) |
어머니 | 부여 화씨 (扶餘 華氏) |
왕가 | 부여 (扶餘) |
왕조 | 백제 |
직업 | 왕 |
정치 | |
계승 | 백제 국왕 |
선대 군주 | 근초고왕 |
후대 군주 | 침류왕 |
칭호 | 어라하 |
존호 | 근구수왕어라하 (近仇首王於羅瑕) |
군사 | |
참전 | 평양 전투 |
지휘 | 백제군 |
기타 | |
다른 칭호 | 건길지 |
로마자 표기 (국왕) | Geungusu-wang |
로마자 표기 (출생 이름) | Su |
백제 군주 목록 | 백제의 14대 어라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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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2. 즉위 전
369년, 태자 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틈을 이용해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 구 모로성) 부근을 약탈하자 부여수가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이때, 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로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 군사는 머릿수만 채운 허세이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 뿐'이라고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부여수에게 알려주었다. 백제는 사기의 말대로 고구려의 적기부대(赤旗部隊)를 먼저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그 기세를 몰아 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부여수는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군 막고해가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라고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또 다시 침입하자 부여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군사를 패수에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3]
375년 11월 근초고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376년 장인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진(眞)씨가 권력을 잡았고, 내정은 주로 진씨에게 맡겨졌다.[3]
근구수왕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371년 아버지 근초고왕의 명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372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375년 왕위에 오른 후에도 고구려와 전쟁을 계속하여, 376년 겨울 11월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고, 377년 겨울 10월에는 3만 명의 군사로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11월에 다시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다.
3. 재위 기간
376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백제를 공격하자, 377년 10월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해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으나, 이상 기후로 제1차 여제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3]
근구수왕은 아버지 근초고왕 때처럼 중국 및 야마토 시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학자 왕인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국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아신왕 재위 시기에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3]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 379년에는 흙비가 내렸고, 382년에는 심각한 가뭄이 발생하자 국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3]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조에는 379년 3월에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바다에서 악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다.[3]
384년 4월,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였다.[3]
4. 외교 관계
동진과의 관계에서는 근초고왕이 확립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고구려에 대항하는 외교 체제를 유지했다. 379년 3월 《삼국사기》에는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양서》에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 백제왕 수가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와의 관계에서는 아버지 근초고왕과 마찬가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근구수왕이 왕인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한국 기록에 따르면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이 아신왕 재위 시기에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
4. 1. 고구려와의 관계
371년 아버지 근초고왕의 명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372년에는 평양성[3]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3] 375년 왕위에 오른 후에도 고구려와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376년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해왔다.[3] 377년 겨울 10월, 왕은 장군과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3] 11월, 고구려가 다시 침입해 왔다.[3]
근초고왕이 확립한 동진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고구려에 대항하는 외교 체제를 유지했다.[3]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조에는 379년 3월에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바다에서 악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양서』 백제전의 “진의 태원 연간(376년 - 396년)에 왕의 사자가 …중략… 생구(노예)를 헌상해 왔다.”는 기사와 일치한다.[3]
4. 2. 동진과의 관계
379년 3월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양서》에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 백제왕 수가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3]
4. 3. 왜와의 관계
근구수왕은 아버지 근초고왕과 마찬가지로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근구수왕이 저명한 백제 학자 왕인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1] 그러나 한국 기록에 따르면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이 수십 년 후 아신왕 재위 시기에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1]
5. 사망
6. 가계
7. 대중 문화 속 근구수왕
8. 평가
肖古王중국어을 近肖古중국어로, 仇首王중국어을 近仇首중국어로 중복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지적이 『삼국사기』에 있다.[4] 즉, 『삼국사기』의 소구왕 즉위년은 근소구와 같은 병오(丙午)이며, 재위 기간은 166년부터 214년이고, 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214년부터 234년이다. 근소구와 근구수는 『고사기』의 조고왕(照古王일본어), 『일본서기』 및 『일본서기』 주(註) 백제계 사서의 소구(肖古일본어), 귀수(貴須일본어)와 연대적으로 일치한다. 166년부터 234년은 『후한서』, 『위지』의 시대이지만, 이러한 한적(漢籍)에는 그 시대의 백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4] 이 근소구와 근구수는 후세에 날조된 것으로, 소구와 구수를 각각 근소구와 근구수로 하고, 그 앞에 소구와 구수를 둠으로써 두 배로 늘린 것이며, 기원전 37년부터 시작되는 『삼국사기』의 백제 왕계 중 후세에 가상된 인물이 된다.[4]
9.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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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서는 소구왕(肖古王)을 근소구(近肖古)로, 구수왕(仇首王)을 근구수(近仇首)로 중복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4] 즉, 『삼국사기』의 소구왕 즉위년은 근소구와 같은 병오(丙午)이며, 재위 기간은 166년부터 214년이고, 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214년부터 234년이다. 근소구와 근구수는 『고사기』의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 및 『일본서기』 주(註) 백제계 사서의 소구(肖古), 귀수(貴須)와 연대적으로 일치한다. 166년부터 234년은 『후한서』, 『위지』의 시대이지만, 이러한 한적(漢籍)에는 그 시대의 백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4] 이 근소구와 근구수는 후세에 날조된 것으로, 소구와 구수를 각각 근소구와 근구수로 하고, 그 앞에 소구와 구수를 둠으로써 두 배로 늘린 것이며, 기원전 37년부터 시작되는 『삼국사기』의 백제 왕계 중 후세에 가상된 인물이 된다.[4]
참조
[1]
웹사이트
아이부인(阿尔夫人)
http://encykorea.aks[...]
[2]
텔레비전
The King of Legend
2010-2011 # 추정 날짜.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3]
웹사이트 # 또는 백과사전 항목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평양시와 집안시 관련 정보
[4]
논문
大化前代の紀年(三)
https://doi.org/10.3[...]
北海道教育大学
19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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