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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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사부로는 일본 제국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1916년 사가현에서 태어나 해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전쟁 중에는 필리핀, 보르네오, 자바 등지에서 활약하며 다수의 적기를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으로 이름을 알렸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이후 이오지마 전투에도 참전했다. 종전 후에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자신의 경험을 담은 저서를 출판, '대공의 사무라이'는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며 평화를 옹호했으며, 2000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저서에는 과장 및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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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사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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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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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카이 사부로 |
원어 이름 | 坂井 三郎 |
로마자 표기 | Sakai Saburō |
별명 | 하늘의 사무라이 |
출생일 | 1916년 8월 25일 |
사망일 | 2000년 9월 22일 |
출생지 | 사가현 사가 군 니시요카 촌 |
사망 장소 | 아쓰기 해군 비행장 |
국적 | 일본 제국 |
군사 복무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
복무 기간 | 1933년–1945년 |
최종 계급 | 해군 중위 |
부대 | 다이난 해군 항공대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343 해군 항공대 |
주요 참전 전투 | 중일 전쟁 우한 전투 충칭-청두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필리핀 전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 뉴기니 전역 솔로몬 제도 전역 |
결혼 및 가족 | |
배우자 | 하쓰요 (1944년-1947년) 하루 (1952년-2000년) |
자녀 | 3명 |
기타 | |
전후 활동 | 인쇄 회사 경영 |
묘소 | 아이카와 정의 사가미 메모리얼 파크 |
저서 | |
주요 저서 | 사무라이! |
2. 생애
1938년 4월 9일, 오무라 항공대에 배속되었고, 5월 11일에는 3등 항공병조로 진급했다. 이후 타카오 항공대에 소속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제12항공대에 배속되어 중국 대륙 구강시에서 근무했다. 1938년 10월 5일, 한커우 공습에 처음 출격하여 중화민국 국군의 I-16 전투기 1기를 격추했다. 1939년 5월 1일, 이등 항공병조로 승진했고, 구강 기지에서 남창시 기지 공격에 참가했다. 6월에는 점령한 남창 기지로 이동했다. 10월 3일에는 SB(에스베) 폭격기 12기 편대의 한커우 기지 공습을 요격, 단독으로 이창시 상공 8,000m까지 추격하여 1기를 격추했다. 11월에는 상하이 기지로 이동했고, 1940년 5월에는 운성시 기지로 이동하여 기지 상공 초계 등에 참여했다.
1940년 6월, 오무라 항공대에 배속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8월, 요코스카 해군항공대에서 신형 영식 함상전투기(영전)를 처음 접했다. 10월 17일, 가오슝 해군항공대에 배속되면서 96식 함상전투기에서 영전으로 탑승 기종이 변경되었다. 사카이는 나고야 비행장에서 영전을 인수, 카고시마 항공기지를 거쳐 타이완 가오슝 공항까지 직접 조종하여 24일에 가오슝 기지에 부임했다. 그는 영전의 뛰어난 격투 성능과 긴 항속거리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날개폭을 줄여 속도를 높인 영전 32형에 대해서는 조종성과 격투전 성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46]
1941년 봄, 사카이는 가오슝 공군의 영전 18기 중 1기로서 하이난섬 싼야시 기지로 이동했다. 이후 12기는 육군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호응하여 하노이 비행장으로 진출했다.
1941년 4월 10일, 제12항공대에 배속되어 중국 대륙에 다시 진출, 한커우 기지에서 화중 작전에 참여했다. 5월 3일 중경시 공격, 6월 1일 일등 비행병조로 승진, 7월 9일 량산 공격, 27일 청두 공격에 참가했다. 8월 11일, 영전 16기와 일식 육상공격기 7기로 청두 새벽 공습에 참가하여 중화민국 국군의 I-15 전투기 1기를 격추하며 영전으로 첫 격추를 기록했다. 8월 21일, 청두 공격에서 I-16 전투기 1기를 추가 격추했다. 소련의 원조 장개석 루트(북방 루트) 차단을 위해 파견된 영전 18기 중 1기로서 운성시 기지로 이동, 8월 25일 영전 7기 중 1기로 란저우시 기지 공격에 참여하여 상공을 제압했다. 며칠 후 서녕시 공격에도 참여했다. 8월 31일에는 민산 산맥 계곡에 위치하여 공격이 어려운 송판 기지 공격에 지휘관 니이 고조 대위와 함께 영전 4기로 참가했으나, 악천후로 귀환했다. 사카이는 중일전쟁 당시 실전 경험이 많지 않았다고 회상했다.[47]
2. 1. 초기 생애
1916년 일본 사가현에서 사무라이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나, 1871년 폐번치현 이후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4] 사카이는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었고, 11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어머니와 자녀들의 어려운 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삼촌은 사카이를 도쿄도로 데려가 아오야마가쿠인 중등부에 진학시켰다. 하지만 성적이 부진하여 유급 및 제적되었고, 구립 6중 응시에도 실패했다.[40][41]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약 2년간 농업에 종사하며 장래를 고민했다. 속도에 대한 동경으로 기수를 꿈꿨으나 본가의 반대로 좌절했다. 사세보항공대의 히라야마 고로(平山五郎) 해군대위가 조종하는 비행정이 고향 상공을 저공 비행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비행기를 동경하게 되었으나, 「해군 소년 항공병」 모집에는 두 번이나 불합격했다.[42]
2. 2. 해군 입대와 훈련
1933년 사세보 해병대에 4등 수병으로 입대했다. 이후 전함 키리시마에서 15cm 부포수로 복무했다.[5] 1935년 요코스카 해군포술학교에 입학, 이듬해 200명 중 2등으로 졸업하고 5월 14일 전함 하루나의 36cm 주포 2등 사수로 발탁되었다.[8]해군 입대 당시부터 조종사를 꿈꿨던 사카이는 상관에게 이 사실을 밝혔고, 이로 인해 포수에서 탄약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럼에도 조종 연습생 시험에 합격했다.[8]
1937년 3월,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에 입대, 4월 1일 첫 비행을 했다. 조종 실력은 뛰어나지 않아 단독 비행은 졸업 직전에야 허가받았고,[43] 졸업 후 사격 실력도 좋지 않았다.[44] 그러나 노력 끝에 함상 전투기 조종사로 선발, 11월 30일 제38기 조종 연습생을 수석 졸업하고 쇼와 천황 대리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왕에게서 은사 은시계를 받았다.[45] 사에키 항공대에서 전투기 조종사 연장 교육을 받으며 하라다 요와 공중전 훈련으로 실력을 키웠다.[45]
3. 군 경력
사카이 사부로는 1933년 사세보 해병단에 입단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35년 해군포술학교에 입교, 이듬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전함 하루나에 배속되었다. 전함의 주포 포수를 맡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함재기 발진을 보고 탑승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상관의 도움으로 조종 연습생 시험에 합격한 사카이는 1937년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에 입대, 비행 훈련을 받았다. 훈련 성적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노력 끝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고, 쇼와 천황으로부터 은시계를 받으며 해군 전투기 탑승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사에키, 오무라, 타카오 항공대 등에서 근무하며 경험을 쌓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기념관
1942년 4월, 타이나마 공중전대가 제25항공전대에 편입되면서 라바울로 이동, 포트모레스비 공격과 요격 임무에 종사한다. 이때 적기를 뒤에서 몰래 접근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는 전법을 자주 사용하여 '줍기 전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4]
1942년 5월 27일, 동료들과 무단으로 포트모레스비 세븐마일 비행장 상공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여 적군에게 칭찬 편지를 받았지만, 상관에게는 꾸중을 들었다.[55]
1942년 6월 9일, 미국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이 탑승한 폭격기를 추격했다는 일화가 있지만, 공식 기록에는 존슨의 탑승기가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56]
3. 1. 중일 전쟁
1938년 10월 5일 사카이는 상관과 함께 3번기로 출격, 첫 출전에서 중화민국 국군의 I-16 1기를 격추시켰다.[40] 1939년 5월 1일 2등 항공병조로 승진, 난창 기지로 배속되었고, 11월에는 상하이 기지로 배속되었다. 1940년 6월 일본으로 돌아와 오무라 항공대에 배속되었다가 10월 다시 까오슝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하이난다오로 배속되었다가 육군의 인도차이나 진출로 베트남 하노이 기지로 배속되었다.1941년 4월 10일, 제12항공대의 요코야마 대위로부터 '사카이는 날 따라오라'라는 요청을 받고 중국으로 재진출, 중경 공격에 참가하였다.[41] 6월 1일, 1등 비행조병으로 승진하여 중국 대륙에서 활약하였다.
3. 2. 태평양 전쟁
1941년 일본이 서방 연합국을 공격했을 때, 사카이는 타이난 공중부대 소속으로 필리핀 공격에 참여했다. 이후 일본군이 남하하면서 라바울로 이동, 뉴기니아, 솔로몬 제도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2년 6월 9일에는 린든 존슨(당시 하원의원,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됨)이 탑승한 B-26 폭격기를 추격하기도 했다.[56]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사카이는 아군으로 오인해 미군기의 기총소사를 받고 한쪽 눈을 거의 실명하는 치명상을 입었으나, 4시간의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라바울 기지로 귀환했다.[15][16][17][18][19][20][21]
1944년 4월 13일, 요코스카 해군항공대(横須賀海軍航空隊)에 배속된 사카이는 전황이 악화되자 이오지마로 출격, 마리아나 해전에서 승리한 미군에 맞서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한쪽 눈으로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여 미군기들을 격추했으며, 미군기 15대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 조종사들은 사카이를 '대공(하늘)의 사무라이'라고 부르며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66]
사카이는 상부로부터 특공명령(자살공격)을 받았으나, 이에 회의를 느껴 부하들과 함께 귀환했다. 그는 생명을 경시하는 군부를 혐오했으며, 1940년 필리핀 공격 당시 도주하던 미군 수송기 안의 민간인들을 보고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온 일화도 있다.
3. 2. 1. 초기 활약
1941년, 일본이 서방 연합국을 공격했을 때, 사카이는 타이난 공중부대 소속으로 필리핀 공격에 참여했다. 1941년 12월 8일, 사카이는 타이난 공중부대(Tainan Kōkūtai) 소속 제로센 45대 중 한 대를 조종하여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Clark Air Base)를 공격했다. 미국과의 첫 전투에서 그는 커티스 P-40 워호크(Curtiss P-40 Warhawk) 1대를 격추하고 지상에 있는 B-17 플라잉 포트리스 2대를 기총소사로 파괴했다. 사카이는 다음 날 악천후 속에서도 임무를 수행했다.[10]전투 3일째, 사카이는 콜린 P. 켈리(Colin P. Kelly) 대위가 조종하는 B-17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승리를 거둔 것으로 자주 인정받는 사카이는 이 전투에서 폭격기와 교전했던 소대장이었지만, 그와 그의 두 명의 부대원은 공식적으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0]

1942년 초, 사카이는 보르네오(Borneo)의 타라칸섬(Tarakan Island)으로 전속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Dutch East Indies)에서 싸웠다. 일본 고위 지휘부는 전투기 순찰대에게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적기를 격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바 상공에서 제로센을 타고 순찰하던 중 적기를 격추한 직후, 사카이는 짙은 정글 위 저고도로 비행하는 민간 네덜란드 더글러스 DC-3(Douglas DC-3)을 발견했다. 사카이는 처음에 중요 인물을 수송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조종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조종사는 따르지 않았다. 사카이는 하강하여 DC-3에 접근했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금발 여성과 어린아이, 그리고 다른 승객들을 보았다. 그는 명령을 무시하고 조종사 앞으로 날아가 앞서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조종사와 승객들은 그에게 경례했다.[11] 사카이는 공중전 보고서에 이 만남을 언급하지 않았다.[12]
3. 2. 2. 과달카날 전투와 부상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사카이는 아군으로 오인하여 미군기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이때 관통한 탄환이 비행안경에 명중되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치명상을 입었고, 출혈로 왼쪽 팔이 마비되어 잠시 실신했다. 하지만 바다로 추락할 찰나 정신을 차려 다시 비행고도를 회복, 4시간의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라바울 기지로 귀환했다.[15][16][17][18][19][20][21]
같은 날,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 결과 사카이가 소속된 다이난 고쿠타이는 거의 매일 공중전을 치러야 했다.[15]
사카이는 제임스 "퍼그" 서덜랜드 중위가 조종하는 F4F 와일드캣을 격추했다. 이후, 더글러스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추에 성공했다.[16][17][18][19]
그러나 투라기 근처에서 8대의 항공기를 발견하고 와일드캣 부대로 오인, 공격을 시도하다가 함재기 폭격기임을 깨달았다. 이미 공격에 들어간 상황이라 물러설 수 없었고, 결국 공격을 감행했다.[21]
사카이는 그 항공기를 그루만 TBF 어벤저로 확인하고 2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지만, 미 해군 기록에 따르면 어벤저의 손실은 보고되지 않았다. 대신,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8대의 SBD 돈틀리스 폭격기 편대가 제로 전투기와 교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20][22]
어떤 경우든, 사카이는 폭격기의 반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0.30구경 총알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에 상처를 입었고, 왼쪽 몸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캐노피의 산산이 조각난 유리가 오른쪽 눈을 일시적으로 실명시켰고 왼쪽 눈의 시력을 심각하게 감소시켰다.[23]

고통스러운 부상에도 불구하고, 사카이는 560해리(약 1037km) 상공에서 4시간 47분 동안 손상된 제로 전투기를 몰고 라바울 기지로 귀환했다. 착륙 후, 상관에게 임무 보고를 하겠다고 고집한 후 쓰러졌다.[24]
사카이는 8월 12일에 일본으로 후송되었고, 마취 없이 장시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머리의 손상을 일부 복구했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3. 2. 3. 복귀와 이오지마 전투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큰 부상을 입고 오른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후, 1943년 1월 병원에서 퇴원한 사카이 사부로는 1년 동안 신입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다.[25] 그는 신세대 조종사들이 베테랑 교관보다 계급이 높아 거만하고 숙련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26] 1943년 11월, 사카이는 비행병조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4월 13일, 그는 이오지마에 배치된 요코스카 항공대(Yokosuka Air Wing)로 전속되었다.[27]1944년 6월 22일, 사카이는 나카지마 마사 소위의 지휘하에 27기의 제로전투기들과 함께 이오지마로 출격했다. 오랜만의 전투였지만 한쪽 눈으로도 마리아나 해전에서 승리하자 미군은 항공기 70기와 항모 호넷, 요크타운, 바탐을 급파했고, 이에 사카이는 다시 출격하여 미군기와 전투를 벌였다. 그는 한쪽 눈의 사각지대를 노린 미군기의 기습으로 어깨를 관통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미군기 2대를 격추시켰다.
1944년 6월 24일, 사카이는 15대의 미 해군 F6F 헬캣 전투기 편대를 아군으로 오인하여 접근했다. 윌리엄 A. 매코믹은 제로 전투기 뒤에 4대의 헬캣을 보았지만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카이는 우월한 적기와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술과 경험으로 공격을 피하고 무사히 비행장으로 돌아왔다.[27] 그는 미군기 15대의 포위에 빠졌지만, 놀라운 실력으로 360도 회전하여 미군기 1대를 격추시키고 다른 미군 전투기들을 당황하게 만든 후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당시 미군 전투기 조종사였던 크래시 리치 소위는 사카이 1기의 공격으로 나머지 전투기들이 혼란에 빠져 한동안 당황했다고 수필에 남겼다.
사카이는 전투에서 단 한 명의 부대원도 잃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오지마 상공에서 최소 두 명의 부대원을 잃었다.[28]
7월 5일, 사카이는 가미카제(神風, Kamikaze) 작전 지휘 명령을 받았지만, 미군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함대의 보고된 위치 근처에서 헬캣 전투기들과 교전했고, 그의 비행대에 있던 나카지마 B6N2 "질" 어뢰 폭격기 중 한 대만을 제외하고 모두 격추되었다. 사카이는 헬캣 한 대를 격추하고 구름 속으로 날아가 적기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그는 악화되는 날씨와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무의미한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소규모 비행대를 이끌고 이오지마로 돌아왔다.[29] 그러나 공중전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임무는 폭격기를 목표 지점까지 호위하는 것이었고, 6월 24일 오후에 사카이는 미군 함대 공격에 참가했다.[28]
3. 2. 4. 종전
1945년 8월, 사카이 사부로는 종전 직전까지 요코스카 해군항공대에서 복무하며 정찰 임무 등을 수행했다. B-32 폭격기 요격 작전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67]3. 3. 종전 후 활동
사카이 사부로는 전쟁 후 인쇄소를 차려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대표작 '대공의 사무라이'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 조종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파일럿 필독서가 되었다. 이라크 공군에서는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게 했다. 그는 미국 방문 중 세스나 기를 몰아 녹슬지 않은 비행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공의 사무라이'는 1976년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사카이는 자살 공격과 군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방송에서 "전투기는 후진할 수 없다"는 유머를 남겼고, '컴뱃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 개발에도 참여했다.2000년 9월 22일, 아쓰기 미군기지에서 열린 미국 해군 행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이제 눈 감아도 좋겠지..."라는 말을 남기고 84세로 사망했다.[30]
3. 3. 1. 민간 생활
전쟁이 끝난 후, 사카이 사부로는 해군에서 은퇴했다. 그는 인쇄소를 차려 운영하면서 자신의 해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대공의 사무라이》이다.[30] 이 책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당시 일본 조종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고 서구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 전 세계 파일럿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이라크 공군에서는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도록 하기도 했다.[30]사카이는 1976년에 《대공의 사무라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기암의 어머니》 제작과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30] 그는 자살 공격과 당시 군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자살 공격으로 사기를 올리려는 대본영의 발표는 미친 짓"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30]
방송에 출연한 사카이에게 "자동차와 전투기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그는 "자동차가 더 쉽다. 왜냐하면 전투기는 후진할 수가 없으니까."라고 답해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30] 그는 풍부한 비행 이론을 바탕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컴뱃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 개발에 일본 측 기술진 및 미군 전술 이론가로 참여하기도 했다.[30]
사카이는 불교 수행자가 되어 모기조차도 죽이지 않겠다고 서원했다.[23]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것에 대해 "만약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시애틀이나 로스앤젤레스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더라도, 나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폭격한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라며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사카이는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 "영어와 민주주의를 배우게" 했다.[32]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자신에게 부상을 입혔던 해롤드 "르" 존스 중위를 포함한 많은 전 적들을 만나기도 했다.[33]
2000년 9월 22일, 아쓰기 미군기지에서 열린 미 해군 서태평양함대사령부 5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했던 사카이는 식사 후 돌아가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미 해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이제 눈 감아도 좋겠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30] 그는 두 번째 부인 하루, 두 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34]
3. 3. 2. 평화 운동
전쟁이 끝난 후, 사카이 사부로는 전쟁의 참혹함과 당시 군국주의의 광기를 비판하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불교 수행자가 되어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기도 했다.[23]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서도, "만약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시애틀이나 로스앤젤레스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더라도, 나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폭격한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라며 침착하게 받아들였다.그는 자신을 공격했던 미군 조종사 해롤드 "르" 존스(Harold "Lew" Jones) 중위를 만나 화해하고,[33]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을 하는 등 국제 교류에도 힘썼다.
3. 3. 3. 사망
2000년 9월 22일, 아쓰기 미군기지에서 열린 미국 해군 서태평양함대사령부 50주년 기념 만찬에 손님으로 참가했다. 자신의 사명감을 이야기하고 식사 후 돌아가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미 해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에게 '이제 눈 감아도 좋겠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0]4. 논란과 비판
사카이 사부로의 저서에는 과장 및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일부 전우들은 그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98][118] 고스트 라이터 존재 의혹, 네즈미코 사건 연루 등으로 논란이 있었다.[85]
사카이의 저서 내용은 각 저서 간, 그리고 실제 기록과도 여러 모순점이 지적된다.[120] 예를 들어 1942년 5월 27일, 포트모레스비의 세븐마일 비행장 상공에서 무단으로 3회 연속 편대 급강하를 실시하여 상관에게 혼났다는 일화는[54], 전투 행동 조서와 대조했을 때 날짜와 편성에 차이가 있으며, 일본과 연합군 양측 모두 사카이 일행이 별도로 행동했다는 기록은 없다.[55]
1942년 6월 9일, 미국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이 B-26 마로더 폭격기에 탑승하여 전투에 참가했다는 주장은[56], 존슨의 탑승기가 엔진 문제로 귀환했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공식 기록과 다르다.
1944년(쇼와 19년) 6월 24일, 이오지마에서의 전투에서 사카이가 적기 15기에 포위되었다는 주장은[69], 상공 목격 증언에 따르면 4기의 루즈 베리 서클이었다고 한다.[70]
사카이는 료키(僚機, 부대원의 항공기)를 격추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100] 실제로는 1942년 5월 12일과 1944년 6월 24일에 그의 료기가 격추되어 사망했다.[67]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파괴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102], 실제로는 기체를 파괴한 적이 있다.
제343해군항공대 (일명 ‘검’ 부대) 시절, 사카이는 공전 강연을 했지만, 젊은 조종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옛날이야기에 불과했고, 폭력을 자주 행사한 것도 반감을 샀다.[78] 스기타 쇼이치는 사카이의 가달카날 상공에서 부상당한 이야기를 비판하며, “저런 사기꾼 같은 놈(사카이)은 때려눕혀 버리겠다”라고 공언했다.[79]
1945년(쇼와 20년) 8월 17일, 제2차 세계 대전 최후의 공중전에서 사카이가 영전으로 교전했다는 주장에 대해[83], 고마치 사다무는 “시덴조차 추격하는 데 애먹었는데, 영전으로는 무리”라고 말했다.
전후, 사카이는 네즈미코(ねずみ講, 쥐를 번식시켜 돈을 번다는 의미의 다단계 금융 사기) 조직인 텐카이치케노카이에 참가하여, 거의 모든 전 하사관 탑승원들을 끌어들여 피해를 입히는 등 광고탑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85]
1983년, 앨라배마 주 공군의 항공 200주년 기념식에서 사카이는 원폭 투하를 지휘한 폴 티베츠를 칭찬하고, 자신도 원폭 투하 명령을 받았다면 실행했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피폭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항공자위대 장교들은 사카이를 “자기 과시가 심하고”, “선전이 능숙하며”, “단순한 기능공”,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웠다”라고 평가했다.[88]
사카이는 일본군 상층부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는데, 지식의 오류나 허위가 발견된다.[124] 또한, 전사한 상관을 이니셜로 비판하여, 같은 이니셜을 가진 다른 사람까지 억측을 사는 등,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125]
사카이는 “어떤 실책이 있어도, 정치가나 대기업 경영자가 책임을 지지 않고 문제가 흐지부지되는 오늘날 일본의 상황은, 천황의 전쟁 책임이 엄격하게 추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126] 또한 일본인을 ‘일억 총 기생충’이라고 평가하며, 전후 일본의 물질적 번영은 미국에 기생해 온 덕분이라고 주장했다.[127]
5. 유산
사카이 사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에서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으며, 종전 후에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이자 평화 운동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저술과 강연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6. 저서
사카이 사부로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 Samurai!영어, Verlag Bantam Books, 1978 (대공의 사무라이)
- Winged samurai: Saburo Sakai and the Zero fighter pilots영어, Verlag Champlin Fighter Museum Press, 1985 (날개 달린 사무라이: 사카이 사부로와 제로 전투기 조종사들)
- 『대공의 사무라이』 전편・속편・결말편
- 『전화・대공의 사무라이』
- 『대공의 결전』
- 『영전 탑승원 공전기』 (공저)
- 『사카이 사부로 공전기록』
- 『영전의 진실』
- 『영전의 운명』
- 『영전의 마지막』
; 회상록
- 사카이 스마트 도우코, 『아버지, 사카이 사부로 「대공의 사무라이」가 딸에게 남긴 삶의 방식』
위 저서 중 자서전 ''사무라이!''에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책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마틴 케이딘이 살해 숫자를 늘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지 않았으며, 일본에서 출판된 그의 전기와 다르다.[35]
''날개 달린 사무라이: 사카이 사부로와 제로 전투기 조종사들''은 헨리 사카이다가 쓴 1985년 책으로 사카이 사부로의 전시 역사를 다룬다.
사카이 사부로가 전후 출판한 저서에는 고스트라이터의 존재가 지적되고 있다. 작가 가미타치 나오키의 취재에 따르면, 『사카이 사부로 공전기록』은 후쿠바야시 마사시가 사카이에 대한 취재와 독자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집필했고, 『SAMURAI!!』는 프레드 사이토에 의한 사카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마틴 케이딘이 각색하여 집필했으며, 『대공의 사무라이』는 코진샤 사장 다카기 하지메가 미국적인 공중전 활극인 『SAMURAI!!』를 사카이와 상담하여 일본용으로 개고한 것을 사카이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98][118] 한편, 도쿄 대학(동대) 교수 가토 간이치로의 취재에서는, "저서에는 고스트 라이터의 존재가 소문나는데, 진실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카이는 "당초에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비행에 관한 부분이 아무래도 참을 수 없어 결국 모두 스스로 고쳐 썼다", "한 마디 한 마디 스스로 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다만, 각 에피소드의 순서에 관해서는 출판사의 의견을 듣는 일도 있다고도 회답하고 있다.[119] 그렇지만, 사카이의 저서 내용은 각각의 저서 사이나 실제의 기록과 사이에서도 모순이 여러 가지 지적되고 있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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